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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다

2025년 1월 27일 342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을 지낸 유학자 출신 박제봉 2021년 부천을 뜨겁게 달궜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역곡동 고택에 대한 부천시 향토문화재 심사였다. 2019년 12월 역곡동과 춘의동 일대가 ‘부천역곡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택에 대한 보존 유무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역곡동 고택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은 2020년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도에 경기도 지정문화재 지정을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2020년 11월 26일에 열린 제7차 유형문화재분과 회의에서 변형으로 인해 문화재 지정가치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지정에 탈락한 것이다. 이어 부천시 향토문화재에 신청하였다. 하지만 부천 지역 내에서는 이 집이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이라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다수의 언론에서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 고택을 보존해야한다는 기사를 보낼 뿐이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이하 부천지부)는 2021년 3월 23일 부천시에 친일파 박제봉의 집 앞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시민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부천시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시청과 중앙공원 그리고 부천시청역에서 1인 시위를 하였다. 1인 시위는 5월 17일 시작하여 7월 3일까지 총 33회 진행하였으며, 특히 이 기간에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였는데도 많은 회원이 참여하였다. 부천지부는 왜 성명을 발표하고 1인 시위를 했을까 부천지부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부천에서는 친일파 박제봉에 대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민족사랑 2025년 1월호

2025년 1월 23일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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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리아]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

2025년 1월 22일 189

[이코리아] 최근 우리나라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는 “신사에 있는 아버지의 이름을 빼달라”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기각했다.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다른 소송을 통해 야스쿠니 합사 취소 결정을 끌어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 <중략> ———— 2001년부터 유족들과 함께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야스쿠니 신사의 강제합사를 즉각 철폐할 것을 촉구하며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과 일본·오키나와의 양심 세력과 연대하여 싸우고 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유족들이 선조들의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일본 정부에 동의해 준 적이 없다”라며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합사 명부를 넘긴 게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초 여서 유족들은 그 이전에 합사 사실 자체를 알 수가 없었는데 1959년을 기준으로 제척기간 20년을 적용하는 것 말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다른 소송을 통해 야스쿠니 합사 취소 결정을 끌어내겠다는 입장이다. 후원을 원하는 이는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를 후원하기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 후원회원은 다달이 펴내는 ‘민족사랑’ 회보를 받아 볼 수 있으며 연구소가 마련하는 토론회, 워크숍, 전시회 등 여러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연구소에서 출간하는 책, 교육 강좌의 할인 혜택도 받는다. 유호경 기자 <2025-01-20> 이코리아 ☞기사원문: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

[오마이뉴스] 52년 백골단의 원조… 전주 친일 부호가 한 일

2025년 1월 20일 255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백남신 백골단은 이승만 대통령의 퇴임이 임박한 시점에 등장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4년제 대통령에 당선되고 24일 취임식을 가진 이승만의 임기 만료 시점이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상반기에 논란이 됐다. ‘7월 19일이다’, ‘7월 23일이다’와 더불어 ‘정부수립일인 8월 15일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런 시기에 공포심을 조장하며 이승만을 도운 것이 백골단과 땃벌떼·의혈단·민족자결단 등의 극우단체다. 여소야대 때문에 국회 간선제로는 재선이 힘들었던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헌법 절차를 무시한 채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다(발췌개헌·부산정치파동). 전쟁 때문에 선거 실시가 힘들면 현 대통령이 계속 재임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결국 그의 뜻대로 6월 23일 국회에서 ‘현 대통령 임기는 8월 15일까지’, ‘선거 실시가 힘들면 계속 재임’이 결의되고, 7월 4일 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됐다. 백골단 등은 국민들과 이승만 반대파를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5.14)한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5.25)하기 직전인 23일이었다. 다음날 나온 <동아일보> 2면 우상단에 따르면, 천여 명의 극우 시위대가 임시 국회의사당인 경남도청을 포위했다. 마이크가 장착된 택시 4대에서는 선전 방송이 나오고, 청년들을 태운 트럭에서는 삐라가 살포됐다. 그런 가운데 백두건을 두른 청년 약 300명이 ‘반민족 국회의원들'(이승만 반대파)의 이름을 적은 십자가와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이들은 꽹과리도 치고 고함도 질렀다.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며 의사당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사태는 백골단 명의의 사전 예고가 있은 뒤에 일어났다. “데모대가 일대 소동을 일으키기에 앞서

[오마이뉴스] 내란 모의 ‘아지트’로 전락한 삼청동 안가, 해체할 때가 왔다

2025년 1월 20일 463

[제안] 삼청장과 그 터, 독립운동가 김규식 기념공간으로 만들어 역사교육에 활용해야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3월 “과거 권위주의 시대 밀실정치의 산실이었던 안가를 철거하고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라고 발표하면서 궁정동, 청운동, 삼청동 등에 있는 안가 12채 모두 철거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결과 박정희가 ‘대행사’를 즐기다 암살된 궁정동 안가가 7월 1일 무궁화 동산으로 탈바꿈하여 공원이 되면서 궁정동, 청운동 안가는 사라졌다. 삼청동 안가의 경우 서울시와 협의해 처리하되 기념품 가게까지 만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밝혔다. 하지만 삼청동 안가는 헌법재판소장 공관,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윤석열 일당의 불법 계엄과 내란 모의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다. 서울중앙지검이 작성한 전 국방부장관 김용현의 공소장에는 ‘삼청동 안가’가 네 차례 등장한다. 또한 윤건영 의원은 윤석열 정권 초기 삼청동 안가를 술집 바(bar) 형태로 개조하려 했다는 제보도 공개했다(필자는 현장 답사와 소유관계 등을 미뤄볼 때 술집 바 형태로 개조하려던 공간은 현재 고급 한옥과 마당이 있는 삼청동 145-20번지의 안가로 추측한다). “대통령 윤석열은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둔 2024. 3. 말 ~ 4. 초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 안가에서 당시 국방부장관 신원식, 국가정보원장 조태용, 국군방첩사령관 여인형 및 피고인(당시 경호처장)과 함께 식사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시국상황이 걱정된다고 하면서 ‘비상대권을 통해 헤쳐 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였다.” “대통령 윤석열은 2024. 5. ~ 6.경 위 삼청동 안가에서 김용현 및 여인형과

[한겨레] ‘야스쿠니 조선인 합사 취소’ 또 패소…“피해자에 가혹” 소수의견도

2025년 1월 20일 98

판결문에 최고 재판관 소수의견도 포함 태평양전쟁 에이(A)급 전범이 합사된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된 조선인 군인·군속의 이름을 빼달라고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가 다시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재판관 한명은 “피해자에게 현저하게 가혹하고 불합리하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7일 야스쿠니 무단 합사 조선인 피해자들의 유족 일부가 제기한 ‘2차 대전 전몰자의 합사 폐지’ 등에 관한 소송에 대해 “사건 발생 이후 20년으로 정해진 제척기간이 경과한 것이 명백하다”며 “상고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앞서, 1∼2심은 일본 정부의 야스쿠니 합사 결정이 유족들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날 최고재판소는 법률이 정한 소송 유효 기간이 이미 지나 판결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애초 이번 소송은 지난 2013년 10월22일 유족인 박남순씨 등 27명이 무단 합사 취소를 포함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번 소송에 포함된 한반도 출신 군인·군속의 야스쿠니 합사가 1959년 이뤄졌는데, 민법에 제척기간으로 정해진 20년을 훌쩍 넘어 소송이 제기돼 재판부의 판단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봤다. 재판부는 “앞선 1∼2심이 적법하게 확정한 사실과 원고들의 주장을 살펴봐도, 제척 기간을 주장하는게 신의칙에 어긋나거나 권리남용을 했다고 볼 수 없다”며 제척 기간을 이유로 아예 야스쿠니 무단 합사와 그로 인한 유족들의 손해 배상 등을 판단을 피한 것이다. 최고재판소 판결 뒤 원고 가운데 한 명인 박남순씨는 기자들과

[역발상 S3] 드라마로 보는 대중가요사 2부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2)”

2025년 1월 17일 141

진행: MC노(노기환) 출연: 이영미, 이준희 PD: 김세호 1954년 12월 15일 HLKY 기독교방송 개국. 첫 번째 민간 방송 1956년 10월 1일 HLCA KBS 제2방송 개시. 외국어 강좌 등 교양 강화 채널 1959년 4월 15일 HLKU 부산문화방송 개국. 첫 번째 민간 상업방송 1961년 11월 9일 HLKV 서울문화방송 개국 1963년 4월 25일 HLKJ 동아방송 개국 1964년 5월 9일 HLKC 라디오서울(RSB) 개국. 1965년 8월 15일 중앙라디오(JBS)로, 1966년 8월 15일 동양라디오(TBC)로 개칭 1.빨간 마후라(강릉 아가씨)(김수연): 1962년 10월 15일부터 11월 24일까지 매일(일요일 제외) 저녁 7시 5분 MBC 라디오에서 방송된(25분) 한운사 작, 심야성 연출 ‘빨간 마후라’ 주제가.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1964년 3월 27일에 영화로도 개봉했고, 영화 주제가는 전혀 다른 곡조 2.강화 도령(박재란): 1963년 1월 3일부터 2월 7일까지 매일(일요일 제외) 밤 9시 10분 KBS 라디오에서 방송된(20분→25분) 이서구 작 ‘강화 도련님’ 주제가. 이서구 작사, 전수린 작곡. 1963년 6월 1일에 영화로도 개봉. 3.열두 냥짜리 인생(블루벨즈): 1963년 4월 15일부터 5월 18일까지 매일(일요일 제외) 밤 9시 10분 KBS 라디오에서 방송된(35분) 김희창 작, 이상만 연출 ‘열두 냥짜리 인생’ 주제가. 김희창 작사·작곡. 1963년 10월 11일에 영화로도 개봉 4.동백 아가씨 (음악대학 학생(엄정행?) 알바 합창단): 1963년 6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 매일 밤 9시 40분 DBS 라디오에서 방송된(20분) 추식 작, 이보라 연출, 동광약품 제공 ‘동백 아가씨’

[오마이뉴스] 부천에는 친일파 송병준이 소유한 ‘계농원’이 있었다

2025년 1월 31일 39

매국행위뿐만아니라 친일 통해 부 쌓은 송병준 송병준(1858-1925)은 이완용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매국노(賣國奴)다. 일제가 표면상으로는 대한제국을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조선의 국권을 일제에 헌납하기 위해 노력한 고위관료들이 많이 존재했었다. 1905년의 을사5적, 1907년의 정미7적, 1910년의 경술9적이 대표적인데, 이 중 송병준은 정미7적에 해당한다. 고종 황제는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 동시에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이 된다. 일제는 이 일을 빌미로 고종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하였으며, 동시에 굴욕적인 정미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미조약의 핵심은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내정을 맡겠다는 것으로 여기에 이완용과 함께 송병준은 대한제국 관료로서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매국의 대가로 돈 요구 송병준은 1910년 8월 강제병합 되기도 전부터 일제에 돈을 요구하였다. 1909년 2월에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에게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1억 엔을 요구한 것이다. 정상적인 대한제국 관료라면 할 수 없는 말인데, 송병준은 이미 정신적으로는 일본인이 다 된 것이었다. 송병준의 돈에 대한 바람은 1910년에 이루어진다. 강제병합이 된 후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1년 8월까지 연수당 1600원을 받았으며,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子爵)의 작위도 받게되었다. 송병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바로 2000년대 초 후손들이 인천 부평구 에 위치한 미군부대 일대 땅 13만 평을 돌려달라며

[오마이뉴스] 경찰이 체포하러 가니… 어느 친일파가 보여준 의외의 반응

2025년 1월 13일 510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연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 과정은 험난했다. 친일파들이 집권세력을 형성했고 대통령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훼방했기 때문이다.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盧德述, 1899~1968)은 주로 중등학교 학생들을 검거했다. 그는 독립운동권 학생들을 잔혹하게 고문해 순국하게 만들었다. 1949년 2월 19일 자 <서울신문>은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붙들린 스무 살 전후의 유진흥이 “고문 끝에 피를 토하며 ‘노(盧)놈, 노놈’하고 부르짖으며 절명”했다고 전한다. 노덕술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는 애를 먹었다. 서울 효창동의 동화백화점 지배인 집에 은거하는 그의 옆에는 무기와 지프차를 보유한 병력이 있었다. 체포 다음 날 보도된 1949년 1월 26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은 “체포 당시 정복을 입은 경관이 6명이나 권총을 소지하고 그를 보호하고 있는 한편, 찝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민특위 경찰들은 그들의 총부터 압수해야 했다. 반민특위 체포 대상 제2호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이종형(이종영, 1895~1954)은 일제 밀정으로 활약하며 독립투사 250명이 붙들리게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대동신문사 창업주인 그는 1948년에는 서울운동장 반공대회 등을 통해 ‘친일청산은 김일성 앞잡이’ 등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유포하며 친일청산을 훼방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10일 이종형 체포 작전에 나섰다. 그날 저녁 8시 30분쯤 신형식 조사관과 형사들이 지금의 청와대 동남쪽인 그의 소격동 자택을 방문했다. 1977년 6월 20일 자 <경향신문> 5면 특집에 따르면, 한복 차림에 불쾌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온 54세의 이종형은 “무슨 죄가 있길래 잡으러 왔느냐?”며 험상궂게

[오마이뉴스] ‘한국인 30만 학살’ 지령받은 의혹… 그럼에도 살아남은 친일파

2025년 1월 6일 155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사연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문에서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 등의 말을 했다. 개념 자체가 모호한 반국가세력을 대거 잡아들이겠다고 천명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도 국가비상사태를 명분으로 무고한 국민들을 잡아들였다. 범죄 예방이나 사회안전 명목의 예비검속은 그들의 주무기였다. 이승만은 반대파 국민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킨 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비상 상황을 빌미로 이들을 예비검속하고 최대 20만 명을 살상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직후에 용공분자 소탕을 구실로 대규모 예비검속을 벌여 국민들을 잡아들였다. 전두환 역시 제2차 쿠데타인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당시 민주화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비상사태를 앞세워 그런 식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방법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은 일본제국주의다. 1977년 2월 11일 자 <경향신문> ‘비화(祕話) 한 세대’ 제71회는 “총독부 경무국은 패전을 눈앞에 둔 45년 4월 초 한반도가 전선화될 때에 대비한 요시찰인에 대한 조치를 마련했다”라고 한 뒤 이런 비밀 지시를 들려준다. “각 서장들에게 극비 친전으로 부쳐진 지시는 (1)공산군(소련)이 한반도에 침입하면 공산계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라, (2)미·영군이 상륙하면 민족주의자를 예비검속하라, (3)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와질 때는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겨라, (4)만일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길 여유가 없을 경우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하라는 내용이었다.” 4번과 관련해 “왜경이 조선인 애국자들을 몰살하려 했다고 해방 후 한때 우국지사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 것”이었다고 윗글은 말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때의 예비검속과 대규모 인권탄압의 상호 연관성은 이처럼 일제의 한국 지배에서 잘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2004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