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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반민특위터 표석’의 수난… 우여곡절 끝 제자리 찾았다

2024년 2월 27일 813

[기사원문] <2024-02-27> 오마이뉴스 ☞ ‘반민특위터 표석’의 수난… 우여곡절 끝 제자리 찾았다 [나의 표석 설치 분투기] 이승만의 씻을 수 없는 과오 ‘반민특위 해산’을 곱씹다 이승만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 논란이 뜨겁다. —<중략>—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비판받아야 할 첫 번째 문제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해 친일파가 활개 치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1948년 5.10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그해 9월 7일 찬성 103, 반대 6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헌국회가 세 번째로 제정한 법이기도 했다. 당시 시대가 부여한 중차대한 과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파를 등에 업고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반대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에 의해 잘못 뀌어진 친일청산의 역사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문화부장 출신의 제헌의회 의원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았다. 반민특위 산하에는 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해 반민특위는 일본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의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7000여 명의 친일부역자를 파악, 일람표를 작성하고 검거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체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관동군의 끄나풀이었던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이었던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오마이뉴스] 좌파가 된 공안검사… 과거를 지울 수 있을까

2024년 3월 5일 110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중인 박정희는 친일파에서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전향했다. 박정희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그런 전향을 한 사람이 덕전중인(德田仲仁)이란 창씨명을 가진 강중인(姜仲仁)이다. 박정희는 일제 패망으로 인해 만주국 군대와 분리됐다. 그런 상태로 1946년 5월 6일 톈진항을 출발해 이틀 뒤 부산에 도착했다. 고향 마을에 출현한 것은 그달 중순이다. 기존 조직과 절연된 뒤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그가 남로당에 가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중인은 37세 때인 1945년 8·15 당시에 일제 검사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강중인 편은 “1943년 3월 대전지방법원 검사로 자리를 옮겨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검사로 있었다”라고 말한다. 경찰이나 검찰 같은 일제 공권력 기구는 8·15 뒤에도 미군정의 보호를 받았다. 일본인 상급자들이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한국인 직원들에게는 고속 승진의 기회가 있었다. 기존의 공권력 기구가 이처럼 미군정과 한국인 직원들을 중심으로 강화됐기 때문에, 이런 곳에 있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좌파 진영에 넘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중인은 대놓고 좌파 활동을 했다. 위 사전은 “해방 후 좌익 활동에 가담하여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토지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라고 말한다. 민전으로 약칭되는 이 조직이 토지문제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회담 때 나타났다. 민전은 그해 7월 25일의 제1차 좌우합작회담 정식회담(본회담) 때 좌파 진영을 대표해 ‘5원칙’을 제시했다. 대표적 우파 매체 중 하나인 그해 7월 28일 자 <한성일보> 1면 우상단에 따르면, 친일청산과 더불어 토지개혁이 민전이 표방한

민족사랑 2024년 2월호

2024년 2월 23일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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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만세’ 아닌 ‘반자이’…” 친일파의 황당한 변명

2024년 2월 19일 44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재극 한국에서는 남한 대통령 생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 반면, 북한 지도자 생일은 잘 알려져 있다. 현직(1월 8일)뿐만 아니라 전직(2월 16일)과 전전직(4월 15일)의 생일까지 언론에 수시로 보도된다. 이런 날을 전후해 뭔가 발사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일본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북한 3대의 생일보다 한국 운명에 훨씬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일왕(천황)의 생일이다. 이 생일 파티가 ‘한국에서 어떻게 치러지는가’는 한국의 자주성을 측량하는 바로미터 중 하나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이 행사를 조용히 치른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거행된 지난해 2월 16일의 생일연은 사정이 달랐다. 한국 정부가 외교부 제2차관을 파견하고 남산 위에서 기미가요가 울려 퍼진 이날의 풍경은 한국의 대일 자주성 측면에서 적색 신호다. 1980년대의 인기 언론인인 조선일보사 이규태(1933~2006) 논설위원실장은 1986년 4월 20일자 일요칼럼에서 “일본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예년마다 서울 중학동에 있는 일본대사관에서 열려왔고, 또 올해도 열릴 것”이라며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이 국내에서 성대하게 기념되는 현상을 언급했다. 이런 풍경은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됐다가 20년 만인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되살아났다. 1965년을 계기로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대일 종속성이 심화된 20세기 후반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다. 1894년에 청나라를 격파한 일본은 10년 뒤에는 러시아를 제압했다.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종결됐다. 이 조약 38일 전인

[자료집] 이승만 진실 찾기 《이승만 우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2024년 2월 19일 812

※ 자료집 : 이승만 진실 찾기 《이승만 우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관련기사 ☞더 칼럼니스트: 그들이 이승만을 숭배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본의 아니게 이승만의 죄상을 더욱 드러낸 ‘건국전쟁’ ☞민족문제연구소: [논평] 독립운동을 모독하는 윤석열 정부의 역사변조를 규탄한다

[오마이뉴스] 친일 위성정당의 실체… ’30만 학살 음모’를 아십니까

2024년 2월 14일 39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성근 대의당(大義黨)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집권세력의 위성정당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창간한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의 1945년 6월 23일 자 2면 중간에 이렇게 보도된 정당이다. “국가에 대하여 일개 병졸이 되고 동포에 대하여 일개 충복이 되기를 기약하고 대의를 따라 죽을 굳은 단결을 하고 황국의 위기를 돌려 신기(神機)로 만드는 수사분투(殊死奮鬪)를 서약해 대의당을 결성하며, 이것이 발회식을 24일 오후 1시부터 부민관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해방이 두 달도 남지 않은 6월 24일 결성된 이 당은 이처럼 일본 국가와 지배세력의 “일개 병졸”을 자처했다. 한중 항일군과 미영 연합군의 압박으로 ‘황국’이 처한 위기를 신의 기회로 바꾸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분투하는 병졸의 정당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동포들에 대해서도 충복이 되겠다고 서약했지만, 이들의 행동과 모순된다. 이들은 한국인들을 강제징병·위안부·강제징용으로 동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동포들의 충복이 되겠다는 것은 사탕발림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고 그로부터 금전적 이익도 얻고 있었으니, “국가에 대하여 일개 병졸”이 되겠다는 서약은 빈말이 아니었다. 의병 탄압, 독립운동가 검거… 승승장구한 친일파 이성근 대의당은 조직폭력배 출신인 친일파 박춘금이 친일 문인 이광수 및 매일신보사 사장 이성근 등과 함께 조직한 친일 정당이다. 이 당이 그저 그런 당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시선도 있었다. 1945년 6월 24일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인 부민관에서 진행된 대의당 결성식 현장,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3권 대의당 편은 이날 행사에서

[새책소개] 『이 사람을 기른 어머니』

2024년 2월 8일 402

바로가기 >>>☞ [도서구매]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이 땅에 소환하다! 세계 구석구석을 누빈 각 분야의 일인자를 거뜬히 길러낸 어머니들의 지긋한 인내와 강인한 사랑 최불암, 조우제, 이병주, 박완서, 곽동순, 나영균ㆍ나희균 자매, 조경희, 김남윤, 조오련, 박찬숙……. 대한민국 문화예술계, 스포츠계, 언론계, 학계 등 저마다의 분야에서 거장 반열에 올랐던 일인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천재성과 태생부터 남달랐던 큰 그릇을 인정하지만, 성공한 명사들이라고 해서 어린 시절 모습까지 꼭 빼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은 일하러 나갈 때마다 말썽 심한 어린 아들을 작은 방에 가둬야만 했고, 수영선수 조오련은 옆집 아주머니가 소중히 길러온 꽃들을 꺾어대곤 했다. 아직은 부족하고 여렸던 이들을 대한민국 최정상의 자리로 인도한 건 다름 아닌 어머니의 깊은 인내와 강인한 사랑이었다. 이 명사들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후반, 어린 자녀를 두었던 소설가 고경숙은 당대를 휩쓴 19인의 각계 명사와 그 어머니들을 탐방 취재했다. 남다른 자녀교육의 철학과 비결을 전하는 이 인터뷰 시리즈는 「이 사람을 기른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1977년부터 1978년까지, 2년간 《여성동아》에 연재되며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자녀를 대하는 과거와 현재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음에도 아이를 훌륭하게 성장시키려는 어머니들의 다짐만은 세월과 무관하게 한결같다. 더군다나 근 몇 년 사이 팬데믹과 교권침해 이슈가 급부상하며 가정학습의 중요성이 대두되자, 저자는 옛 어머니들의 정통적인 가르침을 다시 한번 이 땅에 소환하기로 했다. 지난

[오마이뉴스] 김수환 추기경 뺨 때린 친일 교사… 결국 총리가 되다

2024년 2월 7일 412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면 1963년 대통령선거 때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남조선노동당 경력과 더불어 친일 이력이 크게 회자됐다.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가 남로당원이었음을 부각시켰고, 국민의당 안호상 최고위원은 그해 9월 25일 교동국민학교 시국강연회에서 박정희의 일본군 경력을 부각시켰다. 9월 27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 등에서 확인되듯이, 국민의당 허정 후보는 박정희가 한일회담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비슷한 일이 3년 전인 1960년 4·19혁명 직전의 3·15 대선 때도 ‘잠깐’ 있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병옥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복부 수술을 받고 열흘 뒤인 그해 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대선에서 민주당의 실질적 대표주자는 부통령 후보인 장면 부통령이었다. 제1공화국 때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각기 다른 정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장면은 1956년 대선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자유당의 이기붕을 꺾고 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선거에서는 자유당 이승만이 1위, 무소속 조봉암이 2위를 기록했다. 이때 부통령이 된 장면이 4년 뒤에도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것이다. 대선 후보 조병옥이 급사한 지 보름 뒤인 1960년 3·1절 새벽, 서울 시내 전봇대와 건물 곳곳에 거의 1m 간격으로 대자보가 부착됐다.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3월 2일자 <동아일보> ‘전국에 괴상한 벽보’는 “거의 사태가 날 정도로 나붙인 이 벽보”라고 보도했다. 너무나 많이 붙었기에 ‘무슨 사태가 났나’ 하는 느낌을 줬던 모양이다. 구국철혈동지회라는 단체가

[오마이뉴스] 학교가 준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충격받은 손자가 커서 한 일

2024년 2월 5일 474

[기사원문] 오마이뉴스(2024-02-05) ☞ 학교가 준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충격받은 손자가 커서 한 일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705호 조문기 지사의 묘비에 쓰인 묘비명입니다.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이었던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인공 조문기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가로 살았습니다. 조문기 지사는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선생은 어머님을 따라 외갓집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는데요. 외조부 이조영은 고종 31년(1884)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이 강제로 병탄된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살고 있었는데요.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분노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어린 조문기는 학교에서 우민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략)·········어린 조문기 선생은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기차에 일장기를 흔들었고, 어느 날 하루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가게 됐습니다. ·········(중략)·········격노한 외할아버지는 일장기를 박박 찢어 버리고, 어린 조문기 선생에게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중략)·········그날 밤 조문기 선생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역사의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중략)·········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의 체결,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승하 등 조문기 선생의 가슴 속에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청년의 파업 1944년 5월에 회사에서 배포한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자로 인한 사건이 터집니다. 그 책에는 “훈련공들은 모두 농땡이를 잘

[중남미지부 성명] 이승만 동상 건립을 반대한다!

2024년 2월 5일 1214

[성명] [다운로드] 이승만 동상 건립을 반대한다! 윤석열 정권은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투쟁했던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교정에서 쫓아내고 주미 한국대사관 앞에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부어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하나 3·1운동 뒤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신탁통치를 청원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직을 탄핵 당했다. 그의 대미외교활동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격렬한 분열과 비판만 불러일으켰다. 단재 신채호는 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라고 일갈했다. 이승만의 일관된 주장인 외교독립론은 구체적인 방략이라기보다 강대국의 자비에 기대는 구걸외교에 다름 아니다. 한 나라의 독립이 어떻게 남의 나라에 호소하는 것만으로 가능할 것인가? 해방 후에 저지른 그의 죄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도하여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을 저지하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집권하자 친일 경찰·군인·관료 등을 재등용하여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나아가 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키는 한편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혼자만 몰래 도망간 뒤 “서울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거짓방송으로 국민을 기만하였으며, 한강다리를 폭파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서도 수복 후에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잔류 서울 시민들을 향해서 “북괴에 부역하였다”고 죄를 묻는 적반하장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또 6·25전쟁을 전후해 제주4·3양민학살, 거창양민학살, 보도연맹양민학살 등 셀 수도 없이 제 민족을 학살하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으로 발췌개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