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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앤]강북구,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 개최
강북구가 7월말까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늦봄 문익환 30주기 특별전 ‘다시 오는 늦봄’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늦봄 문익환 목사의 30주기를 맞아, 재야 민주 인사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매진했던 그의 일생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늦봄 문익환 목사는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촌 출생으로 1947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구약학자로 구약 성서 번역에 공헌했고,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계기로 재야 민주 인사로 변모해 ‘3·1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하면서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으며, 통일 운동에도 매진해 재야 통일 관련 단체의 구심점이 됐다. 이런 활동들로 10여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2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3회 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특별전은 문익환 목사의 일생을 시기별로 4부로 구성해 전시한다. △1부 ‘북간도의 아들(1918~1945)’은 북간도 명동촌의 수막새 기와와 민족시인 윤동주와 함께 찍었던 사진 등이 전시된다. △2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신학자(1945~1976)’는 기독교 신앙인 신학자로서 구약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썼던 구약 성서 원고지 초고, 인쇄 교정본 등이 전시된다. △3부 ‘시대의 어둠을 밝힌 민중의 지도자(1976~1989)’는 수감 당시 입었던 수의와 국가지정기록물 제15호로 지정된 옥중편지, 이한열 장례식 영상 등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 유물들이 전시된다. △4부 ‘분단을 뛰어넘는 통일의 선구자(1989~1994)’는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시 북한과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된 4.2공동선언문, 방북 영상, 문익환 목사의 별세 전날 사진 등이 전시된다. 이외에도 문익환 목사가 발간한 다섯 권의
[노컷뉴스] 日 강제징용 최종 승소…피해자 “14살에 가서 90살 됐다”
[기사원문] 노컷뉴스(2024-01-25)☞ https://www.nocutnews.co.kr/news/6084934 변호사 “일본제철, 미쓰비시, 후지코시 판결금 지급해야” 피해자 “90살 넘도록 죽지 않고 이 세월을 기다려” “일본에서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보상해주길” 대법원은 고(故) 김옥순 할머니 등 여자정신근로대 5명이 일제강점기 때 군수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각 1억 원의 손해배상과 지연 이자를 청구한 소송 상고심에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억 원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상세는 기사원문>—————————————- ※관련기사 ☞한겨레: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들 최종 승소…11년 동안 15명 세상 떠나 ☞MBC뉴스: 강제징용 판결에 일본 “유감”‥정부 “한일 간 긴밀 소통 중 ☞오마이뉴스: 일본 시민단체 “전범기업 ‘후지코시’ 한국 사법부 판결 따르라”
민족사랑 202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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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소설가 현기영에게 제주 4‧3항쟁을 묻다 | 현기영 소설가와의 대담
이 대담은 현기영 작가의 최근작 『제주도우다』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대담의 전문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술지 『역사와 책임』 13호에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현기영 작가와의 대담> ☞ 영상 : 소설가 현기영에게 제주 4‧3항쟁을 묻다 | 현기영 소설가와의 대담 ☞ 새책소개 : 『역사와 책임』 13호
[오마이뉴스] 황족 여성이 받는 훈장, 첩이 받게 만든 친일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의병 보관장(寶冠章)이라는 훈장이 있다. 금관 문화훈장 및 은관 문화훈장에 이은 3등급 문화훈장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1916~1998)가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1980년에 이 훈장을 받은 일이 있다. 보관장은 지금의 한국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이 받는 훈장이지만,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과 일제강점기 시절의 한국에서는 달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1888년에 처음 제정된 이 일본 훈장에 관해 “여성에게 수여되는 훈장으로 황족 여성이나 황실의 며느리에게 수여됐던 매우 특수한 훈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훈장이기 때문에 보관장을 받은 한국 여성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고종의 형인 이재면의 부인, 순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 영친왕의 부인인 일본인 이방자, 이준용(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의 부인, 의친왕 이강의 부인, 을사오적 이지용(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의 손자)의 부인인 이옥경(이홍경)이 이것을 받았다. 이 6명은 대한제국 황실인 이씨 집안의 며느리들이지만, 나머지 1명은 성이 다르다.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데도 일본 보관장을 받은 이 여성은 친일파 박의병의 부인인 유주경이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13개월 뒤에 발행된 1906년 12월 15일 자 <황성신문>에 실린 ‘두 부인 훈장 하사(兩夫人賜勳)’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특파대사 이지용씨의 일행이 본월 11일에 일황께 폐견(陛見) 후에 친서를 봉정하고 동경시장이 해(該) 일행을 청요(請邀)하야 연회를 설(設)하얏난대, 이지용씨의 부인 이홍경씨에난 훈2등 보관장, 박의병씨의 부인 유주경씨에난 훈4등 보관장을 하사하고 기타 제씨(諸氏)에게도 서훈되얏더라.” ‘황제 폐하’의 폐(陛)는 계단이나 섬돌을 지칭한다. 이 단어가 들어간 ‘폐견’은 감히 실내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기보다는 ‘건물
[노컷뉴스] 강제동원 ‘해법’ 1년도 안 돼 재원 위기…예고된 한계 ‘제3자 변제’
[기사원문] 노컷뉴스(2024-01-14)☞ 강제동원 ‘해법’ 1년도 안 돼 재원 위기…예고된 한계 ‘제3자 변제’ 핵심요약 잇따라 나오는 강제동원 피해자 승소 판결…지난해까지 41억 모여 11명 변제에 25억 썼는데 판결 계속돼, 재원 마련 방법 마땅찮아 강제 현금화 조치 진행된다면 한일관계 새로운 뇌관으로 작용 ‘문희상안’과 비슷한 정부 ‘해법’…당시엔 화해치유재단 60억 있어 무산 이유는 피해자와 여론 반발, 이번엔 더 잘 추진했어야 지난해 3월 우리 정부가 시작한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 제3자 변제 ‘해법’이 시간이 지날수록 위기에 처하는 모양새다. “컵에 물이 반은 찼다(박진 외교부 장관)”는 말과 달리 일본 정부나 기업이 참여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중략> ——————– 대법원은 지난 11일과 지난해 12월 28일, 12월 21일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히타치조센 등을 상대로 낸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잇따라 확정했다. 이는 2018년 10월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 등 15명의 원고가 최종 승소했던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과 같은 맥락이다. 제3자 변제 ‘해법’, 모든 승소 원고들에게 적용하지만…추가 재원 마련 어려워 외교부는 지난해 3월 ‘해법’ 발표 이후로 모든 승소 원고들에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민법 469조에 따라 말 그대로 ‘제3자’인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변제를 하겠다는 뜻이다. —————– <중략> ——————– 문제는 ‘재원’이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실이 재단으로부터 확인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재단에 접수된 기부 건수는 12건으로 공개된 금액은 41억
[주간경향] [기고]12·12 반란군 총 맞은 운보 그림 ‘적영’의 파란만장 스토리
[기사원문] 주간경향(2024-01-22 )☞ [기고]12·12 반란군 총 맞은 운보 그림 ‘적영’의 파란만장 스토리 —————– <중략> ——————–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의 작품 ‘적영(敵影)’과 박항섭 화백(1923~1979)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란민’ 등이 대표적이다. —————– <중략> ——————– 12·12 현장을 지켜보다 총을 맞았던 운보의 작품 ‘적영’은 ‘적의 그림자’란 뜻이다. 이 작품은 크기가 가로 2m, 세로 3m일 정도로 대형이다. 한국군 부대의 베트남 파병 이후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베트남 638고지 전투, 일명 ‘안케 고개’ 전투를 묘사했다. 과거 기록을 조사해보니 운보는 1972년 6월 14일부터 7월 4일까지 베트남을 방문한 후 <월남전쟁기록화전>에 이 그림을 출품했다. 당시 국무위원들이 이 그림을 구입해 국방부에 기증하는 바람에 국방부 청사 현관에 걸리게 됐다고 한다. —————– <중략> ——————– 문제는 이 그림이 운보 자신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인 ‘적진육박’을 자가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적진육박’은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우고 적진의 미군들을 향해 포복한 채 전진하는 일본군 모습을 묘사해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림이다. —————– <중략>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국방부가 청사에서 ‘적영’ 그림을 철거하고 친일 연구를 위해 연구소에 기증해주도록 다리를 놔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민족연구소 측의 인수 의사 역시 국방부 고위층에게 수차례 전달했으나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결국 운보의 ‘적영’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철거됐다. 나는 타사 기자 몇몇과 함께 참석한 서주석 당시 국방차관과의 국방컨벤션 만찬 자리에서 운보의
[오마이뉴스] 일본의 충견, 한국인을 쏘아 죽인 한국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헌병보조원 조성엽 일제강점기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이다. 악랄한 일제 주구의 이미지를 띠는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 키즈’라 할 만했다.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의 치안 정책이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34일 뒤인 1905년 12월 21일 초대 통감에 임명된 이토는 처음에는 일반 경찰력을 통해 치안을 유지하려 했었다. 하지만 문관 경찰로는 의병투쟁에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일본군 헌병대를 한국 치안에 활용하는 한편 이들을 자신의 지휘하에 두는 방안이었다. 1906년 2월 9일 공포된 일본 칙령인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관한 건’은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군사경찰 외에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을 관장한다”라고 하는 한편, “단,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대해서는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한국주차군사령관과 더불어 한국통감이 헌병을 지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헌병을 증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08년 2월 1일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비 지출 문제로 훗날의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신이 추궁을 받았다. 그래서 식민 당국은 일본 재정이 아닌 대한제국 재정으로, 그것도 한국 인력을 충원해 헌병대를 확충하는 방안을 안출했다. 이것이 한국인 헌병보조원 제도다.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제압, 헌병보조원 그런 재정적 필요 외에,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앞세워 한국인 의병을 진압한다는 이이제이 전략도 이 제도의 창설에 영향을 줬다. 1908년 6월 11일 공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아시아경제] 조선인도 731부대 ‘껍질 벗긴 통나무’였다(上)[알고보면]
[기사원문] 아시아경제(2024.1.14) ☞ 조선인도 731부대 ‘껍질 벗긴 통나무’였다(上)[알고보면] 넷플릭스 ‘경성 크리처’ 모티브는 731부대 인체실험 만행, 의학자들 조직범죄 면면 부각 731부대 최소 3000명 잡아두고 실험 강행 일본은 중국 하얼빈 근교에서 731부대를 운영했다. 국제법에 반하는 세균전과 독가스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루타’로 불린 3000여 명을 인체실험과 생체해부로 죽였다. 범죄를 주도한 이들은 당시 대학 의학부 등에 소속된 의학자와 의사들. 대다수가 전후 미국의 실험 결과 은폐와 면책 거래로 아무런 처벌 없이 의학계와 의료계 요직에 복귀했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각종 매체에서는 전쟁의 공포를 강조할 목적으로 특별한 집단의 광기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왜 그런 기미에 이르게 됐는진 가리키지 않는다. 전쟁이 그들을 바꾼 게 아니라 그들이 전쟁을 이용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경성 크리처’는 그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 <중략> ——————– *731부대에 부임한 가사하라 시로는 1944년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를 확정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유행성 출혈열은 중국 동북부와 소련 국경 부근에서 유행한 역병으로, ‘슨우열’이라 불렸다. 전후 가사하라는 마루타로 생체실험했음을 인정했다. *1998년 난징 사카에 1644부대의 세균 공장이 있던 지역에선 두개골이 많이 들어있는 상자가 발견됐다. 법의학자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연구한 결과 두개골 수는 마흔한 개였다. 이 보고서는 발굴된 뼈, 현물 등과 함께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보존되고 있다. *731부대가 설립될 무렵 신징(창춘)에는 관동군 군마 방역창(100부대)이 설치됐다. 가축과 인간에 대한 실험이 자행됐던 곳이다. *페스트탄을
[한겨레] 해방 뒤에도 “일제시대가 좋았다”…확신형 친일파
[나는 역사다] 박중양 (1872~1959) 처음에는 개화파였다. 김옥균 암살(1894)과 독립협회 해산(1898) 때문에 조선에 환멸을 느꼈다. 유학 시절 일본에서 고생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잘해주자 그 측근이 된다. 귀국 뒤 관료로 일했다. 조선이 망했을 때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일본 문물을 좋아했다. “일본 맥주는 마셔도 안 취한다”며 예순병을 마셨다. 머리를 잘라야 개화가 된다며 가위 든 관리를 길목에 숨겨 사람들 상투를 자르게 했다. 새 길을 내면 잘살게 된다며 대구 성곽을 밀어버리고 동성로 등 사거리를 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맞불을 놓을 자제단을 결성했다. 3·1운동을 한국 민중 대 일본 관헌의 싸움이 아니라 조선 내부 갈등으로 모는 물타기 전략이었다. 사람을 가볍게 봤다. 일본 관리를 만나러 간다며 기사에게 과속운전을 강요해 행인을 쳤다. 속리산 여승을 강간했다. 여승이 숨진 채 발견되어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여론이 잠잠해지자 다시 복귀해 잘 먹고 잘살았다. 평소 개화 문물이라며 지팡이를 짚고 다녀 “박작대기”라고 불렸는데, 일본인 순사도 마음에 안 들면 지팡이로 때렸다고 한다. 이른바 ‘친일부역자’라 불리는 사람들을, 나는 민족주의를 배제한 채 바라보고 싶다. 평범한 한국 사람을 낮추보고, 낮은 직급 공무원에게 갑질하고, 개발을 구실 삼아 토목공사를 밀어붙이고,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을 위선자로 모는 본새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박중양의 일화에서 한국 사회 극우의 보편적 정서 같은 것이 엿보인다. 해방 뒤 반민특위에 체포돼 1949년 1월12일 법정에 섰지만, 박중양은 자신이 옳다고 소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