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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일본 장교 이응준을 ‘민족운동가와 협력’ 서술

2015년 9월 1일 512

ㆍ배재정 의원실 분석 ‘엉터리’ 민족문화사전 ㆍ43명 친일 행적 누락·미화 “오류 잡아야 진정한 광복”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재학하면서 조선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여 신입생환영회·망년회·웅변대회 등의 회합을 통하여 유학생의 단결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로 옮겨 편집국장·주필 등을 역임하여 민족언론을 위해 활동하였으나 1940년 일제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한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사에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족문화사전)(사진)에 실린 일제시대 언론인 서춘의 항목 내용이다. 민족문화사전은 서춘을 ‘독립운동가’로 분류하고 매일신보사 입사로 설명을 끝맺었다. 1930년대 들어 시작돼 1940년 매일신보 입사 후 활발하게 이어진 서춘의 친일 행적에 대한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속의 서춘에 대한 설명이다. “(…)1940년 9월부터 1942년까지 매일신보사 주필을 지내면서 시국강연 강사로 활동했다. (…)1941년 매일신보사 주최 신춘 경제 대강연회에서 대동아건설과 국민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1년 7월 중일전쟁 4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성전 4주년’ 기념강연회에서 대동아건설과 총후 국민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대표적 친일부역자를 설명하면서 친일 행적은 쓰지 않고 독립운동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민족문화사전은 친일 행적을 두고 독립운동을 위한 포석이었다는 식으로 미화한 사례도 보인다. 일본군 대좌 출신 이응준에 대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제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군사력 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뜻의 결실이었다” “일본군에 배속되어 1941년 대좌로 진급하였으며 8·15 광복 직전 민족운동가들과 협력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응준을 “일본군 장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한편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 군인이 되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선동했다”며 “조선

친일이 ‘항일’ 둔갑…‘엉터리’ 민족문화사전

2015년 9월 1일 627

ㆍ한국학중앙연구원 ‘부실’ 제작 국가 예산 220억원을 들여 만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족문화사전)에 기술된 친일부역자 정보가 왜곡되거나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배재정 의원실(새정치민주연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친일부역자들의 친일 기록이 아예 없거나, 독립운동가로 둔갑되는 등 상당수가 부적절하게 기술됐음을 확인했다”고 31일 밝혔다. 한민족의 모든 문화유산을 집대성한다는 취지로 제작된 민족문화사전에 이름과 정보 등이 실린 친일부역자는 모두 366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의 친일부역자 4389명의 10%도 되지 않는 것이다. 친일부역자들의 정보 내용도 부실하다. 일본군 대좌 출신인 이응준의 경우 친일부역 내용이 없이 오히려 ‘국군 창설의 원로’로 정의하고 ‘민족운동가들과 협력하기도 하였다’는 등 미화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내선일체’를 사시로 한 ‘매일신보’ 주필 출신의 서춘은 인물 성격을 ‘독립운동가’로 분류했다. 이완용과 함께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근택은 인물 성격을 ‘관료/행정관료’로 규정하고 있다. 배재정 의원은 “친일부역자만큼은 한 치 오차도, 양보도 없이 기록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 사전은 1980년 편찬 작업을 시작해 1991년 27권으로 발간된 이후 2차 개정 증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5-09-01> 경향신문 ☞기사원문: 친일이 ‘항일’ 둔갑…‘엉터리’ 민족문화사전

『이이화ㆍ한국사 이야기』

2015년 8월 31일 632

광복 70주년 기념기획‘이이화ㆍ한국사 이야기’ 10년 만에 개정판 “역사는 미래를 여는 우리의 희망이다” ▲ 이이화 지음 | 전 22권| 신국판 | 반양장 | 총 6,664쪽 | 각권 14,500원 l ISBN 978-89-356-7005-5 한국의 민족ㆍ민중ㆍ생활사를 담은 『이이화ㆍ한국사 이야기』 미래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래전부터 역사는 ‘제왕의 학문’으로 불려왔다. 그래서인지 역사는 주로 지배층의 시각에서 아주 딱딱한 어조로 씌어졌고,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비해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이화ㆍ한국사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이 좀더 쉽게 우리 역사에 접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1994년 기획과 집필이 시작된 후 10년 만에 완간된 『이이화ㆍ한국사 이야기』는 출간 당시 수많은 언론과 지식인의 찬사를 받았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학계의 축적된 연구 성과를 최대한 반영함은 물론, 우리 역사 전체를 일목요연하고 체계 있게 서술하여 그 당시 이렇다 할 한국통사가 없었던 점을 극복하는 데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정치사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각 시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를 아우르고 생활사와 문화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점은 다른 역사서들과 크게 구별되는 점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한 점은 특히 높이 평가되었다. 이 책에서는 화전민 김돌쇠, 농사꾼 칠성이, 뼈빠지게 일하고도 배필을 찾지 못하는 마흔 살 총각머슴 같은 ‘별 볼일 없는’ 민중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금은 일반화되다시피 한 ‘이야기체’ 역사서술도 『이이화ㆍ한국사 이야기』가 선두주자였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현장조사와 문헌고증을 바탕으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쓴

국정교과서 되면 부담 줄어든다?…‘태정태세문단세~’ 다시 외워야

2015년 8월 31일 533

[심층기획]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미신’을 깨자 ‘하나의 역사’ 가르쳐야 혼란 없다? 정권 바뀔 때마다 ‘입맛대로 개정’…혼란 더 키운다 “역사는 하나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한국사 수능을 치를 수 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일관되게 내놓은 답변이다. 언론이 이를 국정화로 해석하면 교육부에선 “국정화를 한다고 밝힌 적이 없다”고 펄쩍 뛴다. 하지만 ‘하나의 역사’와 ‘수능 부담 경감’은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국정화를 정당화하려는 데 동원하는 핵심 논리다. 교육부는 9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과 각론 고시 일정에 맞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결정한다. 지난 2년간 여론의 동향을 살피며 ‘국정화 군불 때기’에 주력해온 교육부가 공식적인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임박했다. 역사학계와 교육계는 중대 고비를 앞두고 국정화를 떠받치는 ‘미신’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국정화 저지에 힘을 쏟고 있다. 5·16 쿠데타 6번째 ‘민정 이양’ 공약 1979년판 내용 변조해 왜곡 수록 2013년 교학사 초판엔 아예 뺐다가 학계 비판 일자 뒤늦게 추가 교육부, 내달 국정화 결정 땐 파문 ■ ‘하나의 역사’를 가르쳐야 혼란이 없다? 전문가들은 ‘하나의 역사’를 가르치는 국정 교과서가 도입되면 학교 현장에 ‘최악의 혼란’이 현실화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국가가 정리한 승자 중심의 단일 역사관’만을 가르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5년 단임제인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국사 교과서 내용이 바뀌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친일파·뉴라이트 음모”

2015년 8월 31일 526

[짬] 한국사 이야기 11년만에 개정판 이이화 역사학자 한국사 서술에 한 획을 그었다는 22권짜리 방대한 한국통사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펴냄)가 완간된 지 10여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선을 보였다. “1994년에 기획하고, 1995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해 10년 만인 2004년에 완간했고, 완간 10여년 만에 다시 개정판을 냈다. 애초 집필 과정에서는 대처할 수 없었던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를 새로 다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의 인력수탈·인권유린 국가범죄 참상 등을 더 자세하게 다뤘다.” 책 제목에 저자의 이름을 박아넣어 단독 집필자임을 부각시킨 이 책은 힘 가진 지배세력의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일반민중의 생활사 중심으로 쓴 ‘이야기체’ 한국사 서술의 선두주자로, 초판 출간 당시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58살에 쓰기 시작해 78살인 지금 다시 개정판을 낸” 역사학자 이이화(사진)의 20년 노작이자 그의 대표작이며, 앞으로도 계속 붙들고 갈 필생의 작업(라이프 워크)이 된 이 책은 지금까지 총 300쇄를 거듭하며 낱권으로 50만권 이상 팔렸다. 이승만·박정희 치세 합리화하고 민주화운동을 불만세력으로 폄하 절대로 안될 일…강행땐 ‘큰 난리’ 회사취직 미끼 위안부로 데려가다 나중엔 면단위 할당 납치하다시피 일본당국 무관하다는 건 거짓말 28일 찾아간 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헤이리) 자택 서재 들머리엔 ‘교유명야당’(蛟猶明也堂)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교는 교산(蛟山) 허균의 호에서, 유는 다산 정약용의 호인 여유당(與猶堂)에서, 명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자 명숙(明淑)에서 따왔다.” 그리고 야는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也山) 이달에서 땄다. 이이화는 이달의 넷째

“국치일 추념행사에 축하용 태극기 웬말”

2015년 8월 31일 542

민족문제연구소, 광복회 행사 지적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30일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의 경술국치일 추념행사를 고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9일 오전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제105주년 경술국치 및 일본아베정권규탄대회’에서 구호와는 맞지 않게 축하용 태극기를 손에 들고 행사를 진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현충일, 국가장기간 등 조의를 표하는 날에는 조기(弔旗)를 게양토록 법으로 정하고 이를 따르고 있다. 행사용 국기도 이를 따라야함은 당연한 일임에도 국치일인 오늘 광복회가 주최 및 주관한 대전지역의 위 행사에서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곽진성 기자 pen@ggilbo.com <2015-08-28> 금강일보 ☞기사원문: “국치일 추념행사에 축하용 태극기 웬말”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친일파·뉴라이트 음모”

2015년 8월 31일 717

[짬] 한국사 이야기 11년만에 개정판 이이화 역사학자 한국사 서술에 한 획을 그었다는 22권짜리 방대한 한국통사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펴냄)가 완간된 지 10여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선을 보였다. “1994년에 기획하고, 1995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해 10년 만인 2004년에 완간했고, 완간 10여년 만에 다시 개정판을 냈다. 애초 집필 과정에서는 대처할 수 없었던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를 새로 다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의 인력수탈·인권유린 국가범죄 참상 등을 더 자세하게 다뤘다.” 책 제목에 저자의 이름을 박아넣어 단독 집필자임을 부각시킨 이 책은 힘 가진 지배세력의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일반민중의 생활사 중심으로 쓴 ‘이야기체’ 한국사 서술의 선두주자로, 초판 출간 당시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58살에 쓰기 시작해 78살인 지금 다시 개정판을 낸” 역사학자 이이화(사진)의 20년 노작이자 그의 대표작이며, 앞으로도 계속 붙들고 갈 필생의 작업(라이프 워크)이 된 이 책은 지금까지 총 300쇄를 거듭하며 낱권으로 50만권 이상 팔렸다. 이승만·박정희 치세 합리화하고 민주화운동을 불만세력으로 폄하 절대로 안될 일…강행땐 ‘큰 난리’ 회사취직 미끼 위안부로 데려가다 나중엔 면단위 할당 납치하다시피 일본당국 무관하다는 건 거짓말 28일 찾아간 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헤이리) 자택 서재 들머리엔 ‘교유명야당’(蛟猶明也堂)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교는 교산(蛟山) 허균의 호에서, 유는 다산 정약용의 호인 여유당(與猶堂)에서, 명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자 명숙(明淑)에서 따왔다.” 그리고 야는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也山) 이달에서 땄다. 이이화는 이달의 넷째

군포시 이무영작품비 건립, 철거도 일방통행

2015년 8월 31일 828

‘군포장 깎뚜기’ 등 작품활동 기념, 99년 유가족도 모르게 능내공원에 건립 군포시가 1939년부터 1950년까지 군포에 거주하면서 농민소설을 집필해온 이무영 작가(충북 음성 출생, 1900~1900)를 기념하기 위해 1999년 건립했던 ‘이무영작품비’를 16년만인 7월 22일 전격 철거했다. 이는 1999년 건립 당시만 해도 친일 논란이 없었던 이무영에 대해 10년 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물사전에 친일성향 작품활동 내역의 수록 사실이 최근 알려지고 ‘친일작가 이무영단죄비 설치 시민추진위원회(대표 정인환)’가 7월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기존 작품비 옆에 친일활동비 설치를 요구한 것에 대해 군포시가 6일 만에 단행한 조치이다. 군포시는 이날 새벽 이무영작품비를 철거한 후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최근 전후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시가 친일작가를 위한 문학비를 세웠다’, ‘이무영 작가가 친일인사임을 알고도 작품비를 건립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아 철거를 단행했다”고 밝혔다. 또 군포시는 “일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여 철거에 나섰다. 이무영 작가의 친일행적 논란 이후 ‘관리되지 않은 작품비로 인해 공원 미관이 저해된다’고 제기됐던 민원까지 함께 해결하게 됐다”고 덧붙였다.그러나 이러한 군포시의 조치는 16년 전 건립 당시에도 유가족이나 제자 등 이무영 작가 관계자들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졸속으로 건립한데 이어 철거 또한 일방적으로 이뤄져 논란의 소지를 없애는 데에만 급급한 것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무영작품비는 당초 군포신문(구.군포문화신문)이 1997년 3월 27일 ‘군포장깎뚜기’를 비롯해 ‘농민’, ‘제1과제1장’ 등 농민소설의 대가인 이무영 소설가가 1939년부터 1950년까지 군포에

조선청년들은 왜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나?

2015년 8월 29일 1637

[임기상의 역사산책 121] 일본군에 징용됐다 소련군 포로가 된 청년들 ▲ 해방과 함께 남북을 쪼개버린 38도선. 사실상 국경선으로 변했다. 1949년 1월 말, 6.25전쟁을 앞두고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38도선에 소련군복을 입은 청년 50여 명이 무리지어 나타났다. 놀란 경비병들이 총을 들이대고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야?” “소련에서 포로 생활을 끝내고 북한을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괴청년들은 고향별로 나누어 38선을 넘어왔다. 대략 1월 말부터 2월 중순 사이에 500여 명이 남한으로 넘어왔다. 이들 월남자들은 전원 연행되어 인천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청년들, 일본군에 끼여 시베리아로 끌려가다 ▲ 소련 육군 53사단에 항복한 중국 푸신(Fuxin)의 일본 제57보병여단 병사들 1945년 8월 9일 소련 극동군은 170만 명의 병력을 세 개 방면으로 나눠 만주와 북조선, 남사할린으로 진격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의 관동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6일이 지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소련군에 항복한 일본군은 67만 9,776명에 달했다. 8월 23일 소련 국가방위위원회 의장 스탈린은 부하들에게 극비 지령을 보냈다. “일본군 포로 50만 명을 소련 내 포로수용소로 보내 전후 복구를 위한 강제 노역을 시켜라.” 이렇게 해서 일본군 57만 명과 강제로 징병된 조선 청년들 1만여 명이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에 끼여 화물차에 실리거나 걸어서 시베리아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은 자신들이 조선인이라고 항변했으나 묵살당했다. 시베리아의 각처에 흩어져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포로의

해방 70주년에 되새겨야 할 우사 김규식의 ‘광이불요’

2015년 8월 29일 1006

독립운동사와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이번엔 김규식의 삶을 이야기하는 <우사 김규식 평전>을 펴냈다. 우사 김규식은 일제강점기 해외 각지에서 큰 활약을 펼친 뛰어난 외교가였고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또, 분단은 있을 수 없다며 끝까지 남북협상과 좌우합작을 외쳤던 게 바로 그였다. 몽양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했는데, 이것이 성공했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만약’이라는 말에 정말 힘이 있었다면, 김규식이 오래토록 민족의 중심축이 되어 주었더라면, 그래서 그가 그렇게도 소리 높였던 남북협상과 좌우합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더라면 우리의 답답한 현실이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없고 그가 추구했던 신념과 정신을 우리는 되새기지 못하고 있다. 왜 김규식인가?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에 대해서는 역사에 관심이 없다면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그만큼 김규식은 그리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지 않거나 주역이 아닌 조역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생애를 민족의 운명과 일체화시키면서 고난의 삶을 살다가 납북되어 분단과 동족상잔의 낯선 이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저자는 타협노선보다 극단주의를 선호하는 국민의 시각, 그리고 그의 생애가 ‘극적 사건’이기보다는 꾸준하고 일관되는, ‘투쟁과 협상’의 지도노선이어서 일반에게 덜 알려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연구가 소수 연구자들 수준에서만 맴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김규식을 그저 조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규식은 겸양과 지성, 높은 학식과 정직한 처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