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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임기상의 역사산책 120] 아베 총리가 왜곡한 ‘러일전쟁’을 재조명한다 ▲ 청일간 시모노세키 회담 모습을 담은 니시키에(판화그림)과 시모노세키 조약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담화에서 미화한 러일전쟁의 출발은 바로 ‘시모노세키’ 회담이다. 한반도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힘을 겨룬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모노세키 회담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했다. 한반도에 대한 오래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 회담에서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열도를 전리품으로 챙기고, 2억 냥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한반도 전체는 물론,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든 것이다. 이 회담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는 희희낙낙하며 “국운이 뻗고 나라의 위광을 드러내는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사건”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환희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먼저 청나라 곳곳에서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 항쟁은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수립, 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서구열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만주와 한반도 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등에 업고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라고 협박했다. 세 나라에 대항할 힘이 없던 일본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토해냈다. 이른바 ‘1895년의 3국 간섭’이다. ▲ 러시아가 만주벌판에 깔아놓은 동청철도를 달리고 있는 열차. 철도는 만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모습을 지켜본 두 나라가 쾌재를 불렀다. 바로 청나라와 조선이었다. 두
[해방70년 특별기획] ‘꽃바위 하나오카의 눈물’
[해방 70년 특별기획] ‘꽃바위 하나오카의 눈물’<2015.8.17>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5월 29일. 일본 동 광산 하나오카 광산 갱내에 갑자기 물이 차기 시작했다. 곧 붕괴 사고로 이어졌고, 23명이 갱도에 갇혔다.? 사고 이틀 만에 기적적으로 조선인 한 명이 탈출했지만, 여전히 22명은 갱도에 갇혔다. 그러나 광산 측은 나머지 22명에 대한 구조 작업을 벌이지 않은 채 갱도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모두 숨졌다. 남아있는 주 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명을 버린 반인륜적 조처였다. 희생자 가운데는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도 있었다. 모두 11명.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애초 일본이 약속한 유골 발굴 및 송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해방 70년 특집으로 준비한 목격자들 <돌아오지 못한 유골들> 편에서는 일본 강점기 강제동원돼 끌려간 나나쓰다테 사건의 희생자를 포함해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로 논란을 빚었던 군함도 ?하시마 탄광 등지에서 강제노동하다가 목숨을 잃고서도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유골조차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태를 취재했다. ※출처: [목격자들][해방70년 특별기획] ‘꽃바위 하나오카의 눈물’
‘노무현 시민학교’ 첫 강좌…분단된 나라의 대통령은?
20일,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 강연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가 20일부터 12월3일까지 ‘제5기 노무현시민학교’를 운영하는 가운데, 20일 예정된 첫 강좌에서 분단된 나라의 대통령과 그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이 마련된다. 제주위원회는 20일 오후 7시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시민학교 첫 강좌로 ‘분단된 나라의 대통령과 통일에 대한 참여정부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의 강연을 마련했다고 18일 전했다. 김 원장은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평화연구소 연구원,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통일맞이 정책실장, 민화협 정책실장,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NSC정책조정실 행정관(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 <협상의 달인, 노무현과 김정일의 긴 하루>가 있다. 이번 강의에서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한 핵폐기와 이에 상응하는 주변국의 조치내용을 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동결조치로 힘을 잃었던 전반에 대한 이야기, 그럼에도 많은 노력으로 2007년 2.13 합의로 북한 영변 핵시설 폐쇄를 60일 안에 실시하고 북한의 핵 불능화 조치가 진행되는 동안 북한에 증유 에너지를 제공하기로 했었던 이야기 등을 풀어낸다. 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구축된 신뢰를 바탕으로 2007년 10월 정상회담 일정이 확정됐던 이야기, 결국 2007년 10월 2일에서 4일까지의 정상회담과 10.4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각종 교류협력 사업을 확장하게 됐던 내용을 전할 예정이다. 이번 시민학교에서는 전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과 연설문을 통해 역사, 시대적 인식, 철학을 살펴보고, 왜곡된 교과서를 가지고 역사의 왜곡은 왜 일어나는지, 과거사 청산을 노무현대통령은 어떻게 이뤘는지
일제에 작위 받은 ‘조선 친일 귀족’ 이완용 등 총 150여명
일제에 작위 받은 ‘조선 친일 귀족’ 이완용 등 총 150여명 유길준·한규설 등은 거부…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박탈 한일병합조약 제5조 따라 신설… 후·백·자·남작 등 華族制 준용 강제병합 공로자·왕족 등 포함… 식민통치 선전하는 전위대 역할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최근 자신의 조부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작위를 받았다고 사죄를 하면서 ‘일제의 작위’, 이른바 ‘조선 귀족’이 또다시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선 귀족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중국 고대 하왕조와 주왕조의 선례를 참고해 만든 공·후·백·자·남작 다섯 등급의 화족(華族) 제도를 준용해 만든 특수 계급이다. 조선 귀족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 직후 작위를 받은 수작자 76명을 포함해 선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까지 포함해 140∼15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작위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고 독립 운동으로 작위가 강제 박탈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나락으로 추락하던 그때, 일본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해방 후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된 조선 귀족,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친일 반민족행위로 규정된 수작·습작을 한 조선 귀족은 누구이고, 또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리했다. ◇조선귀족은 누구 = 조선 귀족은 1910년 8월 29일 공표된 한일병합조약 제5조와 일본 황실령 ‘조선 귀족령’에 따라 신설됐다가 1947년 5월 2일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으로 폐지됐다. 그 당시에도 선정 이유나 경력이 비밀에
새 고교 한국사 현 ‘집필기준안’으로 확정 땐 ‘암살’ 김원봉, 교과서 빠진다
▲ 교육 당국, 학습 부담 이유로 김구 한국독립당 중심 서술케 민족혁명당 등은 배제·축소 ▲ “집필자에게 상당한 구속력 특정한 관점의 강제는 문제” 정부가 추진 중인 ‘2015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질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영화 <암살>의 중심인물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사진)과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민족혁명당 활동이 빠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교육당국이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내세워 독립운동 정당을 되도록 생략하고 김구 주석이 이끈 한국독립당 중심으로 서술하라고 집필기준안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이 17일 입수한 ‘2015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 한국 근대사 영역’을 보면 ‘1930~1940년대 국내외 민족운동의 흐름과 건국 준비 활동을 이해한다’는 성취기준 부분에 이 같은 내용이 적시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집필기준(안)에 담은 집필 유의점으로 ‘1930년대에 중국에서 활동한 다양한 독립운동 정당을 자세히 다룰 경우 학습 부담이 대폭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에 유의하여 되도록 생략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한국독립당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고 적시했다. 사실상 한국독립당 외에 다른 단체들의 활동은 배제·축소하라는 얘기다. 현재 교과서에 사용되고 있는 2009 집필기준에는 이와는 반대로 ‘태평양전쟁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정치세력이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음을 유의한다’고 돼 있다. 해방을 앞두고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합작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점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한 ‘2015 교육과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 중 집필 유의점의 독립운동 부분. 1930년대 독립운동의 한 축은 집필기준안이 제시한 대로 김구
[재판으로 본 현대사](45)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下)
ㆍ정치적 헌재 ‘노, 위법 인정되지만 탄핵 불가’… 국회의 무리수 입증 ■ 헌법재판의 정치성, 재판관의 보수성에 우려도 대통령 대리인단의 선임과 활동에는 문재인 변호사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그해 2월 말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네팔로 날아갔는데, 카트만두의 한 호텔에서 서울의 탄핵소추 뉴스를 접하고 급거 귀국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구해야겠다는 ‘의리의 사나이’다운 그의 일념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한 노 대통령의 말은 역시 그다운 명언이었다. 야당 측의 이런 저의와는 별개로, 노 대통령의 탄핵사태 대응에 아쉬움을 보이는 의견도 있었다. 즉 그의 실언이나 과오가 과연 탄핵을 받을 정도의 사안이었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탄핵 시비가 벌어졌을 때 노 대통령이 이를 진화하려는 노력을 왜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홍서여, <미추의 말과 글로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 팝샷, 2015). 국민 여론의 역풍에 놀란 야당에서는 탄핵안을 둘러싸고 사과, 철회 등 후퇴론이 나와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두 번 죽는다’는 의견이 강세여서 기존의 밀어붙이기를 유지하기로 했다. 탄핵사건의 심리(공개변론)가 열리는 날엔 헌법재판소 건물 앞에 탄핵을 주장하는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이 제각기 피켓을 들거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더러는 양편이 말다툼을 벌이는 등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헌재의 심리를 방청한 시민들의 반응 역시 편이 갈렸다. 탄핵을 추진했던 세 야당의 대표들은 총선정국에서 역풍에 몰리자 국민의 뜻에 반하여 탄핵소추를 강행한
영화 의 ‘반역자’로 알려진 염동진은 누구인가?
[임기상의 역사산책 119] 해방정국에서 정치인 테러의 문을 연 극우파 ▲ 해방 직후 대중집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그의 죽음과 함께 남북한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은 물거품이 되었다 “탕~탕~탕!”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경, 서울시내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몽양 여운형이 탄 승용차가 트럭에 막혀 멈춘 순간, 괴한 1명이 자동차 범퍼에 뛰어올라 몽양을 향해 권총 3발을 쏘았다. 한 발은 등에서 복부로, 다른 한 발은 어깨 뒤쪽에서 심장을 관통했다. 총탄을 맞은 여운형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멈췄다. 그의 나이 62세일 때이다. 이렇게 해서 남북한의 좌우를 아울러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경찰은 3일 후 범인이 평북 영변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라고 발표했다. 과연 그럴까? 먼 훗날 진짜 범인 4명이 자수하고, 유명한 정치깡패 김두한이 방송에서 폭로하면서 ‘백의사'(白衣社)라는 단체가 암살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 일제 관헌이 남긴 염동진의 사진과 기록. 그의 얼굴이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김두한은 1969년 12월 지금은 사라진 동아방송의 ‘노변야화(爐邊夜話)’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해방 직후의 상황을 자세하게 토로했다. “백의사의 총사령인 염동진이 참모였던 나를 오라고 해서 갔죠. 그랬더니 암만해도 여운형을 패야 된다고 해요. 그러니 ‘김 동지가 정보와 돈과 무기만 우리한테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좋습니다. 여기서 못하면 제가 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저보고 총을 구해달라는 거에요. ‘총이요? 제가 드린
“부끄러운 광복 70주년…의미 없다”
“부끄러운 광복 70주년…의미 없다” [변상욱-김갑수의 스타까토] 46회 ① 암살당한 광복70년 ■ 팟캐스트 방송 : CBS <변상욱-김갑수의 스타까토> ■ 공개 일시 : 2015.08.14 (팟캐스트/팟빵) ■ 진행 : 변상욱 대기자, 김갑수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 ■ 게스트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 실장) 지난 14일에 공개된 이번 46회 파트1은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박사님과 함께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 우리가 잊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 그리고 광복 그 이전과 그 이후에 대해서 짚어봤습니다. 또한 영화 ‘암살’로 이슈가 된 인물 의열단 ‘약산 김원봉’에 대한 스토리와 이인호 KBS 이사장이 내세우고 있는 ‘건국론’, 친일파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짚어봤습니다. ◆ 김갑수>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박한용> 저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부끄럽기 때문에…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전 이사장님이 살아계실 때 여쭤봤어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데 대답이 “살아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3가지 죄를 짓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더니 “첫 번째로 독립이 되었다고 하지만 버젓이 친일파와 그 후계 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잡고 있는데 그것을 독립으로 보는가? 그것이 첫 번째 죄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독립운동을 했더니 남과 북이 분단되어서 싸우고 있는데 이것을 멀쩡한 국가로 말하는 것이 두 번째 죄이다.” “세 번째 죄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내가 독립운동가라고 연금을 받고 있으니 무슨 낯으로 선배들을 뵙겠느냐…”라고
“주민 숨결 담은 지역연구로 현대사 왜곡 바로잡을 터”
여수 일대 일제 군사기지 현장조사 연구서 낸 여순연구센터장 주철희씨 “여수는 일제가 호남의 양곡을 수탈하고, 징병·징용 등으로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는 전진기지였어요.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내 참호 구축에 내몰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의 주철희(50) 여순연구센터장이 17일 광복 70돌을 맞아 <일제 강점기, 여수를 말한다>라는 지역사 연구서를 펴냈다. 주씨는 전남 여수에 남아 있는 일제 군사기지 40여 곳을 답사해 침략과 동원의 진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288쪽 분량에 당시 군사적 요충지인 신월동 일대를 비롯해 돌산도와 거문도에 흩어져 있는 요새·공항·진지·동굴 등을 정리했다. “일제는 여수를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시모노세키 연락선을 부산에 이어 두번째로 운항했어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요새사령부와 항공기지, 지하참호를 구축하는 등 전략 요충으로 삼았죠.” 그는 일제가 당시 순천중이나 광주고보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근거도 제시한다. 그는 2013년부터 3년 동안 여수 일대의 군사기지 흔적을 찾아다녔다. 기지 40여곳을 답사해 한 곳에 2~3명씩 모두 100여명의 진술을 들었고, 각종 문헌을 뒤져 사진·그림 등 자료 500여점을 모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여수 신월동 해안선을 따라 길이 200m, 너비 900m 규모의 해군 활주로가 만들어졌고, 남쪽으로 4㎞ 떨어진 주삼동에 해군 지하요새가 구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수의 관문인 돌산도에는 계동(두릉개)과 임포(향일암) 2곳에 고사포를 설치했고, 평사리 대미산에는 관측소를 운영했다는 흔적도 발견했다. 여수의 전초인 거문도에는 서도 덕촌마을에 통신기지, 동도 죽촌마을에 해안동굴 9곳을 만들었다는 보고도 담았다. 후속 연구를 위해 사진·그림 등의 출처를
임시정부 장준하와 만주군 박정희의 ‘70년 전쟁’
[김종철 칼럼] 광복 70년-장준하 타살 40년, 친일파가 독립군을 이길 수는 없다 2015년 8월 15일은 광복 70돌이 되는 날이었고, 17일은 민주·민족·통일운동가 장준하가 타살당한 지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박근혜 정권은 나라 안을 태극기로 뒤덮고 광복절 연휴에 하루를 더하는 ‘선심공세’를 펼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하는 대대적 ‘애국 캠페인’을 벌였다. 친미사대주의자이자 포악한 독재자였던 이승만,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 장교로 참여했고 18년 동안 파쇼통치와 ‘사법살인’으로 주권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박정희가 각기 ‘국부’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른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투쟁을 주도한 백범 김구와 박정희의 반민족적 행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준하를 기리는 ‘광복 70돌 잔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8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군의 ‘장준하공원’에서 그의 40주기를 추모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릴 뿐이다. 전말이 뒤바뀐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쇼’를 보면서 ‘장준하와 박정희의 70년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현대사를 조명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절감한다.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군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숭실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8년에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 봄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입학한 장준하는 그해 10월 일제가 실질적 강제징집제도인 ‘학도지원병제’를 공포하자 11월 하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자원 입대 후 탈영’을 결심한 그는 1944년 1월 결혼한 뒤 일본군에 입대했다. 중국 강소성 서주의 부대에 배치된 장준하는 그해 7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