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모욕적인 아베 담화와 짝을 이룬 박근혜 정부의 대응
<칼럼>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종전’ 70년을 맞아 지난 8월 14일 담화를 발표했다. 앞서 최근 가속화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우경화 행태와 관련해, 담화가 1945년 패전 이전으로 회귀하는 기조를 띨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제를 요구하는 일본 내외의 압력이 적지 않았고 각의결정이라는 형식으로 발표되는 담화인 만큼 최소한의 성의 표시나 절충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베는 그와 같은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자신이 과거 군국주의를 계승한 극우 정치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담화가 아니라 망언의 집성이요, 반성은커녕 선전포고라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다. 담화의 내용은 일반적인 평가보다 훨씬 교활하며 악의에 차있다. 전문에 흐르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역사인식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기의 세계적인 추세에 따랐을 뿐이며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호도한다. 특히 “러일전쟁이 식민지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다”는 억지는 일본이 황인종들의 보호자로서 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 아시아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른바 ‘대동아사관(大東亞史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일제가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군국주의 이론이자, 현재 극우파가 자학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확산시키고 있는 역사수정주의의 대표적 논리를 담화에 담은 것이다. 한편으로 그간 포함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침략전쟁 식민지배 사죄 반성 등 핵심 용어들을 군데군데 나열하여 얼핏 보기에 여론을 수렴한 듯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유체이탈 화법과 모호한 표현으로 가해의 주체를 은폐하고
독립운동가 고 지복영 여사 회고록 펴낸 아들 이준식 박사 “아버지 그리던 딸의 고단한 삶 담아”
어머니는 아들이 군인이 되길 바랐다. “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말 타고 일본군과 싸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다. 손주들 중 한 사람은 할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아들은 군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가 됐다. 어머니는 역사학자가 된 아들에게 한 번 더 부탁했다. “네 할아버지의 평전을 남기고 싶은데 공부 많이 한 네가 쓰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번에도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평전을 쓰면 객관성이 흔들린다”고 했다. 결국 할아버지의 평전은 1995년 당시 나이 일흔이 훨씬 넘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로 태어나 본인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고 지복영 여사와 아들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박사(59·사진)의 이야기다. 지 여사의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민족문제연구소)이 출간됐다. 지 여사가 남긴 대학노트 3권 분량의 글을 이 박사가 정리해 펴냈다. 16일 경기 안산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 박사는 “어머니의 생전 부탁을 두 차례나 저버려 늘 죄송했는데 이제야 마음의 짐을 하나 던 것 같다”고 했다. 회고록에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했던 지 여사의 유년 시절의 고단한 삶이 녹아 있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에 대한 솔직한 마음도 담겼다. 10대 시절 지 여사는 어렵게 이어가던 학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에게 “내가 글자나마 깨우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덕일 뿐, 연필 하나, 공책 하나, 아버지께 신세진 것 없습니다”라고 편지를
반지하서 궁핍한 삶… 내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다
광복 70주년… 봉오동 전투 승리 이끈 최진동 장군 손녀 최정선 씨 기초수급자로 생활 ▲ 독립투사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정선 할머니(가운데)와 윤관석 의원(오른쪽),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과 함께 웃어보이고 있다. <사진=윤관석 의원실 제공>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진동(1887~1941)장군의 손녀 최정선 할머니가 인천시 남동구의 반지하 방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할머니는 특별한 수입 없이 국민기초생활 급여만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 할머니의 오빠 역시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노령연금만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처우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독립투사의 손녀인 최 할머니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나고 자라 지난 2010년 귀국했다. 최진동 장군의 손자, 손녀인 최 씨 남매가 독립유공자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수급권자가 1인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현재 최 장군의 유공자 연금은 최 장군의 셋째 동생이 받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선순위자 1인에게만 독립유공자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여전히 법률 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최 할머니의 사연은 윤관석(새정치·인천 남동을)국회의원이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장과 함께 전수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윤 의원은 16일 “독립 유공자 후손이 이렇게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한 탓이 크다”며 “관련법 개정이 이뤄져 독립투사의 후손이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책소개] 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 저자: 조한성ㅣ출판사:생각정원ㅣ신국판ㅣ16,000원ㅣ 360쪽ㅣISBN 979-11-85035-27-7 03910 <저자소개> ■ 조한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료 읽는 법과 연구사 정리하는법 등을 훈련하며 역사학의 정수를 배웠다. 2006년부터 3년 반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는데, 이때 일제강점기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반대편에 섰던 지식인들의 활동과 고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4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과 새 조국 건설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던진 7개 비밀결사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대서사, 《한국의 레지스탕스》가 있다. <책소개> ■ 해방 후 3년은 어떤 시대였는가? – 1945년 8월 15일~1948년 8월 15일,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1945년 8월 15일, 민족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다. 해방은 급작스럽게,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과 함께 찾아왔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국내외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던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은 세계대전에 기여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두 개의 핵폭탄으로 일제의 패망이 앞당겨진 탓이었다. 이로 인해 민족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곧바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분할 점령된 한반도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완성하고, 일본 제국주의 및 봉건제도의 잔재를 뿌리 뽑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해방 후 3년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꿈꿀
공군에만 닿은 광복군 뿌리…육·해군史는 해방 뒤 시작
[미완의 해방, 끊긴 광복군脈] ①광복군 법통 외면하는 국군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던 한국광복군 창설 75주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은 구한말 의병과 만주 독립군의 역사를 이어받은 대일 무장항쟁의 주역이었다. CBS는 3회에 걸쳐, 자랑찬 광복군의 명맥이 국군에 제대로 계승됐는지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한다.[편집자 주] 육군과 해군이 ‘기원’을 해방 뒤 미군정 시기로 잡으면서, 대일항쟁기 무장투쟁의 역사를 외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인 한국광복군과의 단절로 이어져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헌법 정신마저 도외시하는 셈이 된다. 다만 공군이 자신의 역사를 1919년부터로 잡고 광복군과의 연계를 강조하고 있지만, 광복군의 명맥이 국군 전체가 아닌 일부에만 계승됐다는 현실을 확인시킬 뿐이다. 대국민 홍보 창구인 각 군의 홈페이지에서 이같은 현실이 확인된다. ◇ 공군만 기록한 임시정부와의 연계 16일 육군 홈페이지에 따르면 육군의 연원은 “1945년 11월 13일 국방사령부 창설”부터다. 또 “해방 후 미군정 주도로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됐다”고 적시돼 있다. 육군이 자신의 모체로 삼은 국방사령부, 국방경비대는 모두 미군의 군정청이 만든 기구였다. 해군의 경우 육군만큼 ‘미군 의존도’가 크지는 않지만, 이들 역시 해방 이후로 기원을 잡는 점은 똑같다. 해군 홈페이지에는 “1945년 8월 21일 해사대 조직, 11월 11일 해방병단 결성”부터 적혀 있다. 해사대와 해방병단은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반면 공군은 1919년부터 역사를 기록하면서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강조하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제 경성을 뒤흔든 총성… ‘암살’ 김원봉의 길을 되짚다
▲ 햇볕 가득한 밀양의 약산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작은 표지석만 흔적으로… 영화 ‘암살’로 그가 돌아왔다 14일 경부선 밀양역에 내렸다. 밀양시 한복판 내이동으로 향하는 동안 사방에 둘러쳐진 산이 보였다. 능선은 유려하지 않고 단단했지만 높고 험준하지 않아 도시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산 아래로 밀양강이 곡선을 그리며 흘렀다. 반짝이는 강을 보면서 도시 이름이 왜 햇볕 가득한(密陽) 고장인지 실감했다. 남천강 북쪽 큰길의 이름이 ‘약산로’다. ‘산과 같다’는 뜻의 약산(若山)을 활동명으로 사용한 이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딴 길이다. ▲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오른쪽)과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 약산로 한복판 내이동우체국 오른쪽 골목길로 150m가량 걸어가면 창포와 꽃으로 단장된 생태하천가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눈에 띈다.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생가 터. 1898·3·14~1958(행불)’ ‘의열단’ ‘임시정부 군무부장’이라고 간략하게만 적혀 있었다. 약산로 다음으로 밀양에서 두번째 만난 김원봉의 흔적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그가 1948년 ‘자진 월북’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그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밀양시가 시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김원봉의 이름은 없다. 약산 김원봉은 백범 김구와 함께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는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그는 남한에서 좌익으로 몰려 지명수배당한 뒤 월북했다. 이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서울시의회 김문수 위원장 광복 70돌 맞아 영화 ‘암살’ 과 ‘친일인명사전’ 추천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 김문수 교육위원장(성북 2)과 김생환 의원(노원 4)최영수 의원(동작 1)은 8.15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친일파 청산과 역사의식에 또 한 번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관을 확고히 정립할 수 있는 영화와 도서를 추천했다. ▲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 김문수 교육위원장(사진 가운데)과 김생환 의원(오른쪽)최영수 의원(왼쪽)은 8.15 70주년을 앞두고 추천한 영화 ‘암살’포스터 앞어서 역시 추천도서인 ‘친일인명사전’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의회 제공 김문수 위원장은 10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둔 영화 ‘암살’을 추천한 이유로 “영화 암살은 우리나라가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으로 인하여 1910년 일본에 나라는 빼앗기고 20여년이 흐른 1933년의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했던 선조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서 “영화 암살이 가상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여주인공 안옥균이 겪은 간도참변이나 속사포가 졸업한 신흥무관학교는 실존 했던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의 시대상을 재조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아직도 시대적 과제로 남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문제의식과 확고한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2001년부터 8년간의 노력을 들여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광복 70주년에 걸 맞는 우수도서로 추천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난제가 바로 친일파 청산”이라면서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우리나라의 발전과 미래세대를 위한 확고한 역사관의 정립을
日 잔재 그대로 방치..갈 길 먼 ‘친일재산 환수’
<앵커> 친일 행위자들의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진 지 10년이 됐습니다. 정부 조사위원회 활동을 거쳐서 800억 원 상당의 친일 재산이 국가에 귀속됐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김아영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기자> 서울 은평 뉴타운이 들어서기 전 도로였던 땅 11곳. 조선 왕실 종친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해승이 일제 강점기 때 갖게 된 토지입니다. 이해승의 후손이 2006년 이곳과 포천시 임야 등을 200억 원대에 처분하자, 정부는 친일 재산을 처분해 얻은 부당 이득이라며 환수 소송을 냈습니다. [SH 공사 직원 : 어차피 보상법에 따라서 이뤄지는 거니까요. 그 당시에는 그런 상황을 모르고….] 이 소송을 포함해 이해승 관련 소송 두 건이 마무리되면, 친일 재산 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한 재산 환수는 사실상 종료됩니다. 조사위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린 토지는 1천만㎡ 가량, 하지만 친일 후손들이 제기한 소송에 져 19%가량은 결국 환수에 실패했습니다. [장완익 변호사/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사무처장 : 아쉬움이 있죠. 저희들 입장에서는 조금 더 역사적인 사실 관계라든지, 고려할 필요가 있고….] 그럼 국가로 귀속된 땅은 어떨까요? 민영은 일가가 소유하던 이 일대 토지는 지난 2009년 친일 재산으로 확인돼 국고로 귀속됐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것처럼 민영은의 묘지가 남아있는 등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국유지가 됐지만 그냥 방치돼 있는 겁니다. [청주시청 직원 : 국가보훈처 땅으로 (돼 있어요.) 그러면 땅 주인 이 처리를 해야 해요. 어떤 식으로든.] [보훈처 직원 :
여성 독립운동가 260여명 인명사전 11월 출간
나혜석·이은숙·홍매영 여사 등 포함 광복 7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 260여명의 생애와 업적을 집대성한 인명사전이 발간된다.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여성 248명 외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지사 등이 포함된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오는 11월 ‘여성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출간한다고 9일 밝혔다. 이 사전에는 정부에서 공인한 독립유공 서훈자 248명을 포함해 총 260여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수록될 예정이다. 기존에 136명이 다뤄진 ‘여성독립유공자’(김승일, 1998년)가 발간된 적은 있지만, 이번 인명사전은 표제 인물의 수나 방대한 내용 등 측면에서 완전히 새롭게 쓰여진다. 기존 서훈자 외의 인물 중에서는 현재까지 7명의 등재가 확정됐다. 항일 무장투쟁의 본산인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우당 선생의 부인으로,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의 할머니인 이은숙(1888~1979) 여사, 재봉틀로 직접 태극기를 만들어 3·1운동을 지원했던 김예진 목사의 부인 한도신(1895~1986) 여사, 상하이 임시정부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부인 홍매영(1913~1979) 여사 등이다. 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임진실(당시 20세) 지사, 충남 천안에서 유관순 열사보다 열흘 먼저 만세운동을 이끈 황금순(당시 18세) 지사 등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여성들도 포함됐다. 화가 나혜석(1896~1948) 지사나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했던 이화림(1906~1996) 지사처럼 이름은 알려져 있었지만 서훈을 받지 못한 여성들도 이름을 올린다. 사업회 측은 “나 지사의 경우 부친과 남편의 친일 행적 때문에 ‘친일’ 딱지가 붙었지만 실제로는 만주에서 일제에 쫓기는 우국지사들을 숨겨 주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고 설명했다. 이슬기
“친일파 미화, 후손들에 의한 역사 쿠데타”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 259]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오는 15일이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주년을 맞는다. 이에 정부는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떠들썩하게 70주년 행사를 치르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친일 청산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 후손이 여전히 정치·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 독립 운동가 후손들 대부분은 가난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광복 70주년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그 답을 듣고자 그동안 친일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온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12일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박 교육홍보실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15일이면 광복 70주년을 맞습니다. 지난 70년 어떻게 평가하세요? “(정부는) 올해가 광복 70년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우리가 정말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었느냐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민망해요. 왜냐면 첫째, 일본 잔재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핵심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죠. 잘 알다시피 일제 잔재란 건 다양한 방면에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다 장악했어요. 한 역사학자가 ‘해방 이후 친일파가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 이후에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에 의해 역청산 당했다’라고 할 정도로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를 중용했어요. 일제에 충성을 다 바쳤던 반민족 행위자들이 대한민국 모든 권력과 기득권을 이어왔는데, 이걸 진정한 독립이고 광복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겠죠. 둘째, 한일 과거사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잖아요. 아베 정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