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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영화 의 배후인물 ‘약산 김원봉’은 누구인가?

2015년 8월 14일 1782

[임기상의 역사산책 118] 친일경찰이 난입해 무법천지가 된 반민특위 ▲ 영화 <암살>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사진=영화 ‘암살’ 스틸컷) 이 사진은 영화 <암살>의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이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자 암살작전을 뒤에서 지휘했던 ‘약산 김원봉’이 빈잔에 고량주를 부으면서 백범 김구에게 말한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 그리고는 그들의 이름을 한명씩 거론하면서 슬퍼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백범 김구는 잘 알고 있지만 약산에 대해서는 생소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북에서는 지도자 김일성 수상에게 반기를 든 ‘반동’이었으니. 이렇게 해서 약산은 해방 후 70년 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의열단’을 결성한 김원봉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라” ▲ 군복 차림의 약산 김원봉. 해방될 때까지 총과 폭탄을 놓지 않았다. (KBS 다큐영상 캡처)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9일 일단의 조선청년들이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민 반씨 집에 모였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청년 13명은 밤이 새도록 토론을 벌였다. 이들 모두 3.1운동 당시 조선민족이 맨손으로 일제에 맞서다 총칼로 진압당하는 모습을 보고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한다는 입장에 공감했다. 단체 이름은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자를 따서 ‘의열단’으로 명명했다. 창립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맏형격인 ‘의백'(醫伯)으로 김원봉을 선출했다. 이들 13명 가운데 해방이 될 때까지 변절하거나 투쟁에서 탈락한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의열단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또 다른 위안부 ‘포로감시원’…그들은 왜 전범이 되었나

2015년 8월 13일 1859

부산 백산기념관에서 광복70주년 특별전…한국인 전범 148명 중 129명 차지 ▲1943년 7월, 부산에서 촬영한 노구치부대의 교육생들. 뉴스1 윤소희 기자 News1 광복7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인 전범자 문제를 전시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전범이 된 조선청년들’ 특별전이 부산시 중구 백산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포로감시원으로 생활한 것에 대해 아직도 ‘전범’이라는 멍에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 일본은 시종일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관계자는 “강제동원 피해 중 대표적인 미해결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억류자, 시베리아 억류자 등과 함께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를 부산시민에게 처음으로 알리는 이번 전시회가 피해자들의 해원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문화통치에 이어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일본은 유례없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했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로부터 4년 후, 구미열강으로부터의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매일신보에는 포로수용소 감시원 모집 광고가 실렸다. ‘모집! 포로감시원. 거듭되는 반도청년의 영광, 군속으로 수천명 채용’ 대상은 20~25세 민간인으로 표면상은 지원이었으나 행정관리와 순사를 동원해 강제로 모집했다. 지원이란 이름표를 단 징용이었다. ▲ 동남아시아 지역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전범은 1950년 이후 차례로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됐다. 사진은 1951년, 이송 직전 아우트램 형무소에서 촬영된 전범들의 모습이다. 뉴스1

안중근 의사 작사·작곡한 ‘옥중가’ 국내 첫 공개

2015년 8월 13일 822

ㆍ노동은 명예교수, 항일 노래 100여곡 새롭게 발굴 ㆍ연말 ‘항일 음악 350곡’ 노래집에 담아 발간하기로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 해외에 널려있는 백두산하에 나의 일가 동포 형제 저곳 있건만/ 나는 소식 몰라서 답답하구나.”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가 직접 작사·작곡한 ‘옥중가’의 일부다. 안 의사는 이 노래를 이듬해 3월 형장에서 순국할 때까지 옥중에서 부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이 노래는 안 의사의 여동생 익근씨, 그를 통해 노래를 배운 6촌 동생 곽희종씨를 통해 비밀리에 전수되다 해방 이후 중국에서 널리 불렸다. 하지만 한국에선 100년이 지나도록 소개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 감옥에 갇혔을 때 울분을 달래기 위해 손수 작사·작곡해 부른 ‘옥중가’ 악보. | 연합뉴스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69)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옥중가’를 포함해 독립가와 항일가, 혁명가 등 일제 식민지에 저항한 내용의 ‘항일 노래’ 100여곡을 새롭게 발굴해 발표했다. 노 교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노래들을 ‘항일 음악 350곡’ 노래집에 담아 올해 말 발간할 예정이다. 한국근대음악사를 전공한 노 교수가 1980년대부터 중국 옌볜·선양 등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가 어린 곳들을 오가며 수많은 자료들을 뒤져 얻어낸 결과물이다. 안 의사의 ‘옥중가’도 연구차 중국 선양을 방문한 노 교수가 현지 신문에 실린 것을 발견해 채록한 것이다. ‘항일음악 350곡’은 동학혁명 시기부터 해방기까지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

2015년 8월 13일 651

<2015-08-13> 한국일보 ☞기사원문: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

[보도자료] 여성 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출간

2015년 8월 13일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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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2015년 8월 13일 3216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2015.8.12> 뉴스타파는 해방 이후 최초로 친일후손들의 거주지를 추적했다. 사는 지역과 주택 형태를 파악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신분의 상태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8개월 동안의 거주지 추적 결과를 공개한다. 1. 친일 후손 거주지 475곳 확인 뉴스타파는 지난 8개월 동안, 친일파 후손 20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자료와 판결문,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귀속한 친일 재산의 지번을 하나하나 확인해 친일 후손들의 소유 거주지 475곳을 확인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300곳, 100곳으로 전체 84%가 수도권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2. 강남 3구 거주 비율 절반 가까운 43% 서울의 거주지 300곳으로 한정해 살펴보면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3구의 비율이 130건으로 43.3%에 이른다. 절반 가까이가 강남 3구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비율이다. 주거형태로 보면 단독주택의 경우 한남동, 이촌동, 성북동, 평창동 등 전통적인 부촌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 3구와 경기도 분당지역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144명으로 집계됐다. 친일파 후손들의 주거형태도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사대문 안 전통의 ‘강북’에서 신흥 부의 상징인 ‘강남’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밖에 뉴스타파의 확인결과 23명의 친일파 후손들이 상가와 임대주택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상가 건물의 경우 선대로부터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부의 대물림이 이뤄지고 있었다. 3.

영화 에 나오는 ‘반민특위’는 왜 와해되었나?

2015년 8월 12일 1932

[임기상의 역사산책 118] 친일경찰이 난입해 무법천지가 된 반민특위 ▲ ‘친일파’로 불리는 민족반역자의 대명사인 염석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법망을 피한다. (사진=영화 ‘암살’ 스틸컷)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법정에서 친일파 염석진이 교묘하게 처벌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판장이 실형 대신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화가 치밀어 재판봉을 내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재판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국회가 구성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운영하는 특별재판소이다. 반민특위는 아쉽게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의 줄기찬 방해공작과 폭력에 의해 1년도 안돼 수명이 끊어진다. 반민특위가 간판을 내리면서 일제하 35년간 일본제국주의에 붙어 같은 민족을 체포하고 죽이고 재산을 갈취한 민족반역자들은 법망에서 빠져나와 백주대로를 활개치고 다니게 된다. 이들이 이승만 정권의 주축을 구성하면서 이 민족의 정의는 증발해버린다. 더러운 역사의 청산을 놓치는 순간이다. 어떻게 해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나. 지난해 노컷뉴스의 <임기상의 역사산책 39>에 올린 글을 보완해 다시 그 당시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자. ◇ “여기 있는 놈들 다 빨갱이다”…아수라장이 된 반민특위 사무실 ▲ 4.19 혁명 당시 이승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 최루탄과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출동하는 경찰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M37 트럭)에 실었다.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잊지말자더니…” 관광호텔 공사장된 ‘황실 영빈관’

2015년 8월 12일 825

[광복 70년-쇠락한 항일운동 유적②] 을사늑약 역사적 현장 ‘대관정’ ▲ 1890년대 대관정 사진(위)와 현재 대관정 터(아래) / 사진=민족문화연구소 제공, 이원광 기자 # 일제가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던 19세기말. 고종황제는 대한제국 반포 이듬해인 1898년 “외교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 덕수궁 인근의 한 서양식 주택을 매입했다. 당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지은 주택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 112-9번지 일대다. 주택은 해외 유력 인사들에게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피력하기 위한 ‘황실의 영빈관’으로 꾸며졌다. 황실 외교활동의 거점이자 을사늑약의 현장인 ‘대관정’의 시작이었다. 당시 대관정은 국내에 드물었던 벽돌식 서양 건축물로 해외 영빈들을 맞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899년 독일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황태자가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대한제국 반포 이후 대관정을 방문한 가장 유력한 해외 인사였다. 그러나 황실 영빈관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04년 일본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러일전쟁을 구실로 대관정을 무단 점령해 군 사령부로 사용한 것.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 당시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가 이곳에 머물며 을사늑약을 지휘·조종하기도 했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거처였던 덕수궁 별채인 수옥헌과 지근거리에서 대한제국을 압박했다. 실제로 이토와 하세가와는 이날 이곳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수옥헌으로 찾아가 고종황제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대관정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인 셈이다. 대관정의 ‘영욕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7년 일제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이 대관정 건물로 옮기면서 황실 영빈관은

‘광복 70년’ 선언 “민주억압 권력 거부해야”

2015년 8월 11일 616

▲ 11일 오전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자회견장에서 함세웅 신부 등의 대표단이 각계 인사 860명이 서명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함세웅 신부(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각계 인사 860명이 “민주주의와 평화를 억압하는 권력과 체제를 거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1일 오전 ‘광복 70년, 역사와 헌법을 다시 생각한다’는 제목의 선언에서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진행된 이날 선언식에는 함 신부를 비롯하여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 박옥주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이화 역사가,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자유, 평등, 민주 그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언’ 명의로 발표된 선언문에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이 일관되게 추구한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전통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면서 “최근 극우세력이 득세하면서 친일청산이 민주주의의 진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어 선언문은 “정부, 여당, 사법부, 보수언론이 한 덩어리가 되어 헌법의 기본 정신인 자유와 평등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있다”면서 “해방 70년을 맞는 우리에게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평화를 억압하는 권력과 체제를 거부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언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래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정부, 여당, 사법부, 보수언론이 헌법 정신 훼손” 교육 분야와 관련 선언문은 “강화된 시장주의 교육정책과 함께 최근에는 권위주의적 경향까지 확대되고 있다”면서 “심지어는 한국사 교육마저 국가가

홍영표 “민족앞에 당당할수 없는 친일후손”…공개사과

2015년 8월 11일 1634

조부의 친일행각 사과…”후손은 어떤 길 걷는지 지켜봐달라” ▲ 새정치민주연합 홍영표 의원의 공개 편지 (서울=연합뉴스) 김동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홍영표 의원은 11일 “민족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저는 친일후손”이라며 조부의 친일행각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홍 의원은 광복절을 나흘 앞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행적들은 잊지 마시되, 그 후손은 어떤 길을 걷는지 지켜봐 달라. 저는 조부의 행적을 원망하지만, 조국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겠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홍 의원의 조부 홍종철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4명의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피해를 입고 상처받은 모든 분께 거듭 용서를 구한다”면서 “저 역시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제가 조부님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라고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밝혔다. 그러면서 “친일파의 후손인 제가 민족 앞에 사죄하는 길은 민족정기사업에 더욱 매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내고 독립유공자 어른들과 후손들도 자주 뵙는다”고 설명했다. 홍 의원은 2013년 한국독립유공자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사진을 언급하면서 “촬영하던 분은 제 속내를 모르고 웃으라 했지만 저는 웃을 수 없었다. 제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사람 중 한 명의 손자이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또 “‘조부의 죄지, 태어나지도 않았던 네가 무슨 죄냐’라고 위로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제가 민족정기사업으로 칭찬을 받을 때는 거리 한복판에 벌거벗고 서 있는 것 같은 부끄러움에 자리를 피하고만 싶다”고 고백했다. 이어 “사법적 연좌제는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