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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환 전북교육감, 교육부 교부금법 시행령 비판
【전주=뉴시스】신동석 기자 =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이 교육부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교부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다. 더욱이 이번 개정안에 대해 법적 검토도 하겠다고 밝혀 교육부와의 마찰도 우려된다. 10일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김승환 전북교육감은 “시·도교육청 예산에 대한 ‘정산’ 규정을 신설한 교육부의 교부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청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 교육감은 “교육부가 입법예고한 교부금법 시행령 개정안은 그동안 시·도교육청에서 행사해왔던 예산편성에 관한 권한들을 많이 건들고 있다”면서 “교육부가 ‘정산’ 규정을 신설했는데, 이는 총액예산주의를 위반하는 것이고, 시도교육감이 가지고 있는 예산편성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문제가 있는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청구를 하기 전,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이날 김 교육감은 최근 또다시 제기되고 있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가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그럼에도 국정화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면 전북교육청 차원의 교과서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고 밝혔다. sds4968@newsis.com <2015-08-10>뉴시스 ☞기사원문: 김승환 전북교육감, 교육부 교부금법 시행령 비판 ※ 관련기사 ☞뉴시스: 김승환 전북교육감 “국사 국정교과서 현실화 대비 자체 대책 마련” ☞경향신문: [사설]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북한 흉내내기다 ☞한겨레: 교사 10명 중 7명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대전 김태원’ 후손, 독립운동가 유족 아니었다
보훈처 심사위원회 결론, 최근 5년 보훈연금 1억 원 환수하기로 ▲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공동대표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이하 공동조사단)가 지난 6월 24일 오후 2시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모습.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상영 중인 영화 ‘암살’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암살하던 인물이 광복 후 독립운동가로 행세한다.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대전에서는 남의 독립운동 행적을 이용해 수십 년 동안 보훈혜택을 받아온 인물이 유족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는 지난 5일 오후 열린 회의에서 독립운동가 김태원(金泰源, 1902~1926)의 후손이라며 약 50년 가까이 보훈연금 등을 받아온 김아무개씨 등에 대해 “유족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10일 밝혔다. 광복 이후 수십 년 동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 후손에 의해 남의 공적을 가로채 만든 가짜 독립운동가로 공식 확인된 것이다. (관련 기사 : ‘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 행적이 의심스럽다) 보훈심사위원회는 독립유공자 등의 유족 여부 등을 심의하는 보훈처 소속의 합의제 의결기관으로 모두 11명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된 김태원 선생 – “천우신조로 탈옥해 독립운동” 조작 보훈심사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은 시민 공동조사단이 내린 결론과 같다. 앞서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대전 김태원'(金泰源, 1900~1951)이 ‘평북 김태원'(金泰源, 1902~1926)의 독립운동 행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평북 출신인 김태원 선생(金泰源, 1902~1926)은 1919년(대정 8년) 중국 관전현에 건너가 그곳에 근거를
과거청산과 화해를 열망하는 한국학자들의 선언
‘올바른 과거 청산과 참다운 화해를 열망하는 한국 학자들 753명’이 광복 70주년 한일 관계를 위한 선언문을 냈다. 이들은 10일 오전10시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식민 지배 체제 아래서 인권을 유린당한 희생자들은 과거의 어두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일본은 여전히 과거의 침략과 식민지배책임을 왜곡하고 부인하고 정상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어 “2015년은 한일 관계에서도 중요한 해다. 50년 전인 1965년 6월에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간의 새로운 관계가 수립됐다”며 “2005년 한일협상의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식민지수탈과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협상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가해자로서 일본의 책임뿐만 아니라 제대로 협상을 이끌지 못한 한국정부의 책임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식민지배책임을 추궁하는 국제법정은 역사적으로 설치된 적이 없고, 그 가능성도 요원하기 때문에 한일양국간의 외교적 협상이 과거사들을 해결하는 수단이라고 본다”면서도 “지금 한국정부는 특별한 협상력을 보이지 못하고 일본의 외교적 페이스와 힘에게 끌려가는 인상을 준다. 심지어 1965년식 협상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같은 우려 때문에 중견학자들이 원칙적 선언을 채택하기로 했고 7월부터 서명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선언 참가자는 역사학자, 법학자, 여성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정치학자가 주축이 되었고 특정 전공이나 학회에 한정하여 서명자를 모으지 않았다고 밝혔다. 아래 전문. ▲ 10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한일관계에서 올바른 과거청산과 참다운 화해를 열망하는 한국학자’들 753명이 선언문을 냈다. 연합뉴스. <한일관계에서 올바른 과거청산과
온몸으로 맞섰지만..잊혀지는 독립운동가들
<앵커> 이봉창, 김상옥, 강우규. 일제 식민 지배에 폭탄으로 항거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안창호, 윤봉길 의사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의거였는데, 이분들의 소중한 희생,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까요? 민경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영화 ‘암살’의 제작 영상입니다. 감독은 영화 속 독립군에 대한 영감을 이봉창 의사에게 얻었다고 합니다.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던 이 의사는 주로 일본과 중국에서 지내 국내에선 생가터 말고는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생가터를 찾아봤습니다. 주소대로 찾아왔지만, 생가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실제 표지석을 한번 찾아가 보겠습니다. 표지석은 주소에서 150여m쯤 떨어진 이곳에 있습니다. [보훈 당국 관계자 : 2005년이나 2006년 정도에 서울시가 세웠다는데, 조언을 받기는 했는데, 정확한 조언을 받지 않고 (세운 겁니다).] 일제 강제 지배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 이곳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의 순국지엔 그나마 표석조차 없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 (이곳에서) 세 시간 정도 혈전을 벌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 (하셨습니다). 일제 군경 1천 명과 싸웠던 장소인데, 정작 아무런 표석이 없는 거죠.]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동상은 2011년 성대한 제막식과 함께 서울역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동상을 거의 매일 지켜보는 사람들도 누구의 상인지는 모릅니다. [(저 동상 누구 동상인지 아세요?) 저거요? 나도 잘 몰라요.] [일본 사람이랑 싸웠다고 적혀있는 (것 같은데) 몰라, 나도. 모르겠어.] [박찬승/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 사회 전반 무관심 때문이죠. 근현대사
역사학자로 자란 독립군 후손이 본 ‘암살’과 친일청산
[노컷 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 “역사, 비판적으로 보길” ▲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이 최근 서울 청량리동 연구소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그린 영화 ‘암살’에서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자신을 “한국독립군 이청천 부대 제3지대 저격수”라고 소개한다. 실존인물인 이청천 장군의 본명은 지청천(1888~1957). 그의 외손자가 현재 역사학자로 활동 중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59) 연구위원이다. 최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난 이준식 위원은 외조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당시 정부 파견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가 졸업하셨죠. 그 뒤 일본군 중위로 국외에서 복무하시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접하고는 그해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십니다. 그곳에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셨어요. 1930년대에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셨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셨죠. 제 어머니 역시 임시정부에서 여성광복군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 위원은 영화 암살을 두 차례 봤다고 했다. “반가웠고 고마웠다”는 것이 그의 감상평이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많지 않았잖아요.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 임시정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정권을 홍보하는 국책영화였다는 점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관객들이 부담 없이 재밌게 볼 수 있는 만듦새를 지녔다는 것이 암살의 강점으로 다가오더군요. 뛰어난 재미와 분명한 메시지가 절묘하게 어루러진 덕이죠.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입장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영화 암살이 반갑고 고마웠던 이유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다룬 영화가 앞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으니까요.” ▶ 영화
[광복70년] 교육현장 ‘애국주의’ 탈 쓴 ‘일제 잔재’ 여전
‘국민의례, 애국조회, 훈화’ 등 대표적 일제 잔재 군사정권 민족주의·반공주의 등 애국 의식 함양 도구로 쓰여 뉴스1 News1 손형주 기자 올해로 우리 민족이 해방 70년을 맞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위한 각종 문화나 제도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히 뿌리내린 상태다. 특히 이런 모습이 교육제도 안에 오랫 동안 무비판적으로 남아있어 문제라는 지적이다. 아직 일부 학교에서는 매주 애국조회를 열고 학생들에게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도록 한다. 복장과 소지품, 두발검사를 하는 등 정해진 규율 안에서 학생들을 엄격하게 지도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등 주요 행사에서 빠짐없이 하는 ‘국민의례’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 궁성요배와 기미가요 제창, 신사참배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다. 학교에서 구령에 맞춰 단체로 인사하는 문화도 일제 잔재의 영향으로 꼽힌다. 이러한 모습 자체가 결국 조선인을 일왕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택한 ‘황국신민화 정책’과 비교해 추구하는 목적만 다를 뿐 그대로 답습한 결과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를 위해 강제한 각종 문화나 제도가 특히 교육 현장에 많이 남아있다”며 “애국조회나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가 제창 등 국가주의적 시스템이 애국주의의 함양이라는 미명 아래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화가 비판 없이 부활할 수 있었던 데는 군사 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민족주의적 의식을 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 영향이 컸던
[재판으로 본 현대사](44)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中)
ㆍ“노 대통령은 볼셰비키” 색깔론, “국회 표결 절차상 하자” 맞서 ■ 노 대통령 탄핵의 정치심리학 분명히 이긴다고 자신했던 대통령 선거에서 뜻밖에 역전패한 한나라당의 낭패감, 당이 공천한 대선 후보(노무현 대통령)가 당선 후 새로운 여당(열린우리당)을 만든 데 대한 새천년민주당의 배신감, 이런 요소들이 복합되어 야당은 새로 등장한 노무현 정권을 그 출범 초부터 백안시했다. 노 대통령 취임 열흘쯤 되었을 때부터 ‘탄핵’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는가 하면, 취임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제1야당 대표가 “이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나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그야말로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들의 탄핵 의도는 노 대통령의 ‘실정(失政)’ 이전부터 점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야당 측의 이런 저의와는 별개로, 노 대통령의 탄핵사태 대응에 아쉬움을 보이는 의견도 있었다. 즉 그의 실언이나 과오가 과연 탄핵을 받을 정도의 사안이었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탄핵 시비가 벌어졌을 때 노 대통령이 이를 진화하려는 노력을 왜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홍서여, <미추의 말과 글로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 팝샷, 2015). 국민 여론의 역풍에 놀란 야당에서는 탄핵안을 둘러싸고 사과, 철회 등 후퇴론이 나와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두 번 죽는다’는 의견이 강세여서 기존의 밀어붙이기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런 양측의 불퇴전의 한판 대결 속에서 4·15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차지함으로써 원내 제1당으로 약진했다.
영화 배우 조진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위촉
[보도자료] [다운로드] 영화 <암살> 배우 조진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위촉 ▲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추상옥(일명: 속사포)으로 열연하는 조진웅 ⓒ 케이퍼필름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 동원을 앞둔 가운데 영화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추상옥 역을 맡은 배우 조진웅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 위촉된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무장투쟁 기지로서 3,500여 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김대락 등 항일애국지사들이 경술국치를 당한지 1년도 안된 1911년 6월 10일 중국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로 시작했다. 일제와 중국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습소’란 이름을 달았지만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갖은 역경을 뚫고 1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전사들을 길러냄으로써 항일운동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겼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은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독립전쟁에서 기간요원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무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조선혁명군·의열단·한국독립군·고려혁명군·한국광복군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해방 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유지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45. 9. 17 중경 연화지청사 앞에서) ⓒ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 관련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독립운동 전공 연구자들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높은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2011년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www.sh100th.org)는 최근 조진웅 씨가 영화 <암살>에서 혼신의 연기를 통해
‘암살’이 상기시켜준 친일영화 이야기
“해방될 줄 몰랐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들은 대사였다. 어떻게 변절할 수 있냐는 질문에 해방될 줄 몰랐으니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어르신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들어본 적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다고. 패전 소식은 충격이었다고. 물론 이러한 상황 판단이 반드시 영화 속 인물처럼 친일적 행보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필자가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어르신들은 1920년대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인데, 대부분 해방 직전 시기에 학생이었다. 그분들의 기억에 따르면 학교에서 늘 틀어주는 뉴스영화, 문화영화 등을 통해 전쟁 소식을 접했고, 뉴스 내용대로 당연히 이기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해외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통제 하에 제작되는 신문과 라디오 뉴스, 뉴스영화 등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일본의 승전을 예상하고, 동시에 해방은 점점 가망 없는 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 중인 영화들 중에는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들도 있다. VOD 서비스로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들을 보면, 일본군은 전쟁에서 점령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고, 온 국민들은 기꺼이 참전하거나 허리띠를 졸라 매며 동참하고 있다. 쌀과 금비녀 등을 기꺼이 내놓으면서. 오늘은 당시 영화, 영화인들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며 ‘친일 영화인’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41년 일본이 제2차
영화 “암살” 설민석의 스페셜 인강
☞2015. 8. 4. 영화 [암살] 설민석의 스페셜 인강 ☞2015. 8. 1 접속! 무비월드_기획: 〈암살〉 그 역사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