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독립운동 성지에 ‘조선총독부 표석이…’ 씁쓸
【안동=뉴시스】이임태 기자 =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이 전국적으로 줄을 잇는 가운데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경북 안동향교에 지금까지 조선총독부 명의의 표석이 서 있는 사실이 드러나 씁쓸함을 주고 있다. 특히 안동향교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에 분노해 일어난 갑오의병의 현장으로, 구한말 항일의병(抗日義兵)의 효시이자 항일유림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이는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문제의 표석은 안동시 송천동 안동향교 명륜당 서쪽 뜰에 서 있다. 조선총독부 명의가 표석 뒷면에 새겨져 있고 앞면에는 ‘안동문묘’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문묘란 공자 등의 위패를 봉안한 향교의 사당을 말하는 것으로 표석에 새겨진 안동문묘는 사실상 안동향교와 동의어로 해석하면 된다. 안동향교는 서울 성균관에 버금가는 규모로 당시에는 영남유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항일의병의 성지로 여겨진 탓에 일제강점기에는 온갖 탄압을 받아 겨우 명맥만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6.25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향교가 전소되는 등 영광과 상처의 부침이 심했다. 문제는 안동시 명륜동에 자리했던 향교가 전쟁으로 불탄 뒤 지난 1986년 현재의 송천동에 중건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명의 표석이 그대로 옮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표석은 공립교육기관이었던 향교를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면서 핍박했음을 한 눈에 보여준다. 표석은 비유하자면 각 기관 정문의 명패 격인데, 자존심 강한 안동유림이 이 표석을 아직 남겨둔 것은 ‘무관심의 소치’라는 지적이다. 실제 안동향교의 역사와 내력에 정통한 향교 관계자는 “향교 경내에 그런 것(표석)이 남아 있는지는 몰랐다”며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재판으로 본 현대사](43)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上)
ㆍ초유의 대통령 탄핵안, 3분 만에 국회 심의 끝… “경범죄에 사형” ■ 보수세력의 ‘비주류 대통령’ 흔들기 ‘시대는 단 한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 역정을 회고하는 글에 이런 제목을 붙인 적이 있다(<참여정부 5년의 기록>, 국정홍보처). 그의 험난했던 일생을 잘 압축했구나 싶은 제목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그를 괴롭힌 ‘사상 초유’의 두 가지를 잠시 짚어본다. 그는 형법 제158조의 ‘장례식 방해죄’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1987년 8월 거제도에서 대우조선의 한 노동자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노무현 변호사는 현지에 가서 노조와 가족 측에 장례 문제 등을 조언하고 온 뒤에 구속되었는데, 그 죄명이 ‘장례식 방해죄’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조문, 그런 죄명으로 처벌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혹시 형법이 생긴 이래 그 조문으로 기소된 첫 피고인이 바로 노무현 변호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또 헌법 제65조의 탄핵 심판을 받은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헌정 이후 한번도 발동된 적이 없는 대통령 탄핵조항이 그를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의 삶은 그만큼 남다르게 험난하고 또 처절했던 것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하면, 달리 불복할 길도 없이 바로 파면된다. 그러니까 탄핵은 참 무서운 제도다. 법적인 요건은 어찌 되었건, 정치적으로 악용되거나 오판을 하면 대통령직뿐 아니라 국민주권마저 날려 보내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2002년
영화 의 실제 모델은 누구일까?
[임기상의 역사산책 114] 조국해방을 둘러싸고 서로 총을 겨눈 청년들 ▲ 암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경성역에 도착한 암살단 3인조. 영화에서나 가능한 장면이다. 일제하에 경성역의 검문검색은 철저했다. (영화 <암살> 스틸컷) 7월 31일 금요일 오후 극장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암살>을 관람했다. 벌써 관객 5백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국제시장>을 볼 때만큼 울었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일제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암살>에 나온 것처럼 처절하게 싸웠다면, 아버지 세대는 <국제시장>처럼 죽을 고생을 하면서 중노동을 했으니. 영화 <암살>의 줄거리는 이렇다. “조국이 사라진 후 23년이 지난 1933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열단과 합동으로 일제에 노출되지 않은 청년 3명을 암살작전에 투입한다. 독립군 저격수인 육군상병 안옥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 폭탄 전문가인 황덕삼이 그들이다. 김구 주석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경무국장 염석진이 이들을 찾아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염석진은 변절해 일본영사관에 정보를 넘기고 있는 밀정이었다. 암살단의 타깃은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대표적인 친일파 강인국이다. 한편, 거액의 의뢰를 받은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암살단 3인조의 뒤를 쫒는다. 이렇게 해서 요인 암살을 둘러싸고 경성에서는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일제하 35년간 조국해방을 위해 총을 든 다양한 인물과 악질 친일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 <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 실제 어떤 인물을 모델로 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행정·국가·헌법소송 123건 진행… 친일재산 比 실제 환수 규모 미미
‘비뚤어진 근대사’ 아직도 진행중… 친일파 재산 소송 올해로 10년째 2006년 친일재산조사위원회(조사위)의 공식 출범 이후 시작된 친일파 재산소송은 올해로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행정소송 92건, 국가소송 22건, 헌법소송 9건 등 총 123건이 진행됐다. 광복과 동시에 이뤄졌어야 했던 친일재산 환수사업은 1949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돼 무산됐다. 56년 만인 2005년 노무현정부에서 친일재산환수특별법이 제정돼 물꼬를 텄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조사위는 2010년 7월 활동을 마감하기까지 4년간 친일인사 168명의 재산 2359필지(1000억원 상당), 제3자에게 처분한 116필지(267억원 상당) 등 약 1300만㎡를 환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소송을 통해 국가로 귀속된 재산 규모는 한강 둔치가 포함된 여의도 면적의 1.5배나 된다. 귀속 재산은 순국지사·애국선열을 위한 사업기금으로 조성돼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고 있다. 2010년 7월부터 친일파 재산소송은 법무부가 이어받았다. 96건을 진행해 현재 94건을 마무리했다. 법무부는 국가소송 15건과 헌법소송 9건, 행정소송 70건 중 국가·헌법 소송 전체와 행정소송 67건에서 승소했다. 행정소송 3건은 재산과 친일행위의 관련성, 친일행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또 행정소송과 국가소송 각 1건은 1·2심에서 정부가 승소한 뒤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모두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1890∼?)의 후손을 상대로 한다. 그러나 사회적 비용과 노력을 들이고 갖은 논란을 겪으며 이어져온 친일파 재산소송은 미완(未完)으로 끝나게 될지 모른다. 친일인사가 보유했던 재산에 비해 실제 환수 규모는 미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부는 지금껏 민병석 송병준 서회보 박희양 조성근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 지난 26일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월턴 워커 장군의 묘비에 절하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운데)와 동행 의원들. 사진 연합뉴스 [토요판]커버스토리 / 김무성과 아버지 김용주 더 상세히 드러난 아버지 친일행적아들은 왜 미국에서 큰절을 했을까 미국 방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여느 정치인이 아니라 집권여당의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이기에 더욱 그렇다. 커다란 몸집과 당당하던 태도는 태평양을 건너자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넙죽넙죽 올리는 ‘큰절’은 환영은커녕 비웃음만 사고 있다. 아프리카 추장 같다거나 아예 부채춤을 추라는 조롱마저 날아간다. 그런데도 그는 내년에 또 큰절을 하겠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김무성 대표 아버지의 친일 행적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료를 뒤적여보기 시작했다. 아뿔싸. 선친 김용주의 과거 친일 의혹은 빠르게 지워져가고 있었다. 대신 절세의 애국자로 변모하고 있다. 친일이 애국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막아보고자 김 대표 부친의 과거 친일 발언을 공개한다. 천황폐하를 위해 자식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고약한 내용이며 A4 용지 3장 분량이다. 그런 부친의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나 미국에서 하는 큰절이나 모두 한뿌리에서 나온 콤플렉스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천황폐하 찬양…아들은 미국 장군묘에 “감사합니다” ▶ 김무성 대표의 선친 김용주의 일제 때 발언을 보면 그가 상당한 인텔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고대사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역사를 넘나들며 일본과 조선이 한민족 한뿌리임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발언의
동아시아의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가 일본의 과거사 인정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발기위원회는 2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가 역행하는 상황을 우려하며 ‘2015년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을 발표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해방 70돌 종전 70년을 맞아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를 비판하고 과거사 청산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촉구하는 ‘2015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발기위원회’는 7월 29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우경화와 이에 따른 동아시아의 긴장 고조를 우려하면서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평화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강조했다. 이날 성명은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선언한 2010년의 한일 양국 지식인 공동성명 이후 5년간의 변화에 대한 진단의 성격을 지니며,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의 역류’ 현상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고를 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성명에는 강만길·고은·백낙청·이만열(한국), 와다 하루키·오다가와 고(일본), 알렉시스 더든·노엄 촘스키(미국), 볼프강 자이테르트(독일) 등 모두 524명이 서명하였으며 계속 참여가 확산되고 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이다. <2015년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 동아시아의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세계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기념의 해인 2015년에 동아시아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의 우려와 공통의 희망을 표명한다. 2010년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1000여 명은 ‘한국병합’ 과정이 불의부당하고 ‘병합조약’ 또한 불의부당하다고 선언하고 이
한국병탄의 서곡…일본 교과서에서 사라진 ‘조선해협’
독립운동사연구 논문 “대한해협 명칭 변화가 역사인식 보여줘”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우리나라 동남부와 일본 규슈(九洲) 사이에 있는 해협인 ‘대한해협’. 일본 지도에서 대한해협이라는 명칭은 조선해협에서 대마해협, 현해탄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어왔다. 그동안 대한해협은 동해나 독도에 비해 명칭 변화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매우 적었지만, 일본 교과서에서 대한해협의 명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분석해 일본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논문이 최근 나왔다. 31일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독립기념관이 간행하는 ‘한국독립운동연구’에 투고한 논문 ‘메이지시기 일본 지리교과서의 대한(조선)해협 명칭 변화와 그 의미’에 따르면 일본의 지리교과서에서 대한해협에 관한 언급은 한국병탄을 즈음해 온도 차를 보인다. 지리교육의 목적이 계몽 혹은 실용 위주에서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해협이 처음 등장한 지리교과서는 1870년 우치다 마사오(內田正雄)의 ‘여지지략'(輿地誌略)이다. ‘메이지 시대의 삼서(三書)’라고 불리며 소학교나 사범학교 교과서로 쓰인 이 책은 일본의 위치를 설명하고자 삽입한 ‘대일본전도’에서 거제도 남쪽 부분에 ‘조선협’을 표기했다. 그러나 당시 우치다를 제외한 다른 교과서에서는 아예 조선해협이 다뤄지지 않았다. 대마도에서 바라본 대한해협(자료사진) 조선해협에 대한 언급이 본격화된 것은 1890년대 들어서다. 생활실용주의 지리교육 방침에 따라 일본인들 사이에서 지리적 인식이 점차 확대되면서 대부분 교과서가 조선해협을 언급했다. 이때 일부 교과서는 조선해협과 대마해협을 병기·혼용했으나 이때도 대체로 대마해협은 협의, 조선해협은 광의의 의미로 쓰였다. ‘심상소학지리역사교과서'(尋常小學地理歷史敎科書)는 학생용은 대마해협만 표기하고 교사용은 대마해협과 조선해협을 병기하는 특이한 방식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 들어 지리 교과의
“빨갱이 비슷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역했다면 다 죽여!”
[임기상의 역사산책 112] 캄보디아보다 25년 앞선 킬링필드 ‘대한민국’ ▲ 트럭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보도연맹원들 “1950년 여름,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어린 눈에는 그저 멀리 풍경화처럼 스쳐 지나갔던, ‘트럭에 실려 가던 흰옷 아저씨들’은 누구였고, 어디로 실려갔으며, 어떻게 되었을까? 1953년 정전협상이 체결되어 한반도에 총성이 멎자, 그 트럭에 실려갔던 ‘흰옷 어른들’이 인근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가 운영하다 폐광된 그 굴에서, 내가 보았던 그 어른들이 모두 집단학살당했던 것이다.” 경북 경산이 고향인 언론인 고 성유보 선생의 회고담이다. ▲ 코발트광산 지하갱도에 유골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1950년 7월 중순, 38도선을 넘어 남침한 인민군이 경상도로 접근하자, 군과 경찰은 경산시·청도군·대구시·영동군에서 예비검속해 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 구금한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을 트럭에 태웠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과거 좌익에 몸담았던 주민들을 전향시킨다는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경찰에 연행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갑·을로 낙인찍힌 주민들은 모두 트럭에 실렸다. 대략 3,5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경산의 폐광으로 남아 있는 코발트 광산에 끌려와 모두 처형당했다. 학살은 7월 20일경부터 9월 20일경까지 두 달에 걸쳐 저질러졌다. 한 주민의 얘기를 들어보자. “빨갱이 사건에 관련된 분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트럭으로 싣고 왔어요. 올 때는 주민들이 못보게 했습니다. 아예 방송을 하고, 공포탄을 쏘면서 차로 싣고 오는데, 굴비 엮듯이 여덟 명씩 묶었답니다. 그렇게 싣고 와서 그
“일제강점기 군수 이상은 죄다 친일파였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110] 친일 전력을 반성한 이항녕과 도주한 박춘금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사실을 공개적으로 반성한 이항녕 박사 1991년 7월 10일 경남 하동초등학교 강당.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의 초청을 받아 단상에 오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침통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부터 50년 전인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1년간 재직한 적이 있습니다. 사과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 당시 공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죽창을 들고 다니면서 군민들을 괴롭혔던 사실을 사과드립니다. 저는 하동군수로 1년, 창녕군수로 3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징용·징병·학병을 보내기 위한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집을 떠나야 했던 분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의 앞잡이로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나쁜 죄인이었습니다.” 이 참회는 한국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몰고 왔다. 수천 수만의 친일파 가운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반성한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친일파들은 전력을 숨기거나 심지어는 “내가 무슨 나쁜 일을 저질렀나?” 하며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제 앞잡이’ 눈물로 반성하다 이항녕 박사는 이후 틈만 나면 두고두고 친일 전력을 참회했다. 이 강연이 보도된 직후 친일파 전문가인 정운현 선생이 정릉에 있는 이항녕 박사의 자택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처음에 주최 측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가 들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 없을 수야 없지요. 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 해방 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만 ‘죄의식’
“이승만 우상화, 자유민주주의 수호 아냐”
▲ 29일 서울 종로구 4.19혁명기념도서관에서 4.19혁명세대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 우상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독재자다. 국민 주권을 깡그리 강탈했던거 아니냐?”(이기택 4.19혁명공로자회 회장) 4.19혁명공로자회는 29일 서울 종로구 4.19혁명기념도서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우상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이승만 우상화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기택 4.19혁명공로자회 회장은 입장을 여는 말에서 “황당무계하게 50년 전 돌아가신 이승만 전 대통령의 환상이 마치 대한민국을 뒤덮는 듯 하다”며 “때가 어느땐데 대한민국을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떠받들고 있다”고 한숨 지었다. 이들은 성명에서 3.15 부정선거와 독재를 일삼았던 이승만 정권을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비판했다. 또한 최근 불어닥친 광화문 이승만 동상 건립 주장들과 관련해 “광화문 거리에 동상을 세우면 대한민국이 바로 설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2015-07-29> 경향신문 ☞기사원문: [동영상 뉴스] “이승만 우상화, 자유민주주의 수호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