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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교과서 심사 강화한다…한국사 교과서 파동 영향?
교육부 ‘교과용 도서 개발 체제 개선 방안’ 발표 합격 판정 전에 ‘내용 정확성 검증’해 수정 요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수정명령 파동을 겪었던 교육부가 검증 교과서 심사를 강화하기로 했다. 검정심사를 통과한 교과서 중에서도 내용 오류가 발견되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교육부는 30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교과용 도서 개발 체제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교과용 도서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말한다. 이번 개선 방안은 오는 9월 교육부가 확정·고시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하는 교과서부터 적용한다. 개선 방안에 따르면 검정 교과서 심사 체제가 크게 강화된다. 검정 기준을 통과했는지 심사하는 본심사를 1·2차로 세분화했다. 합격 판정 전에 수정·보완 요구를 이행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둔다. 1차 심사에서 검정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수정·보완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불합격 처리된다. 지금은 검정 기준을 통과하면 일단 합격 판정을 내린 후 수정·보완 권고를 이행했는지 확인해 최종 합격 결정을 내린다. 교육부는 “검정심사를 통과한 교과서에서도 내용 오류가 발견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며 “검정 교과서 내용의 정확성을 검증해 오류를 최소화하고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교과서를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더욱 면밀한 내용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교과서는 전문기관에서 감수를 받도록 할 예정이다. 전문기관에 감수를 위임하거나 위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기로 했다. 2013년 교육부는 ‘친일·독재 미화’ 논란과 무더기 내용 오류가 발견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에 수정명령을 내리면서 국사편찬위원회
표지 하나없이 철거위기…베이징 ‘이육사 순국지’
‘이육사 순국지’ 도심 속 흉물로 방치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 등 대부분 재개발·소실로 사라져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청사가 들어섰던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 치열한 무장투쟁이 전개됐던 동북 3성(헤이룽장(黑龍江)·지린(吉林)·랴오닝(遼寧))…. 중국 내 주요 항일운동 활동무대로 화려한 조명을 받아온 지역들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정치중심지였던 수도 베이징(北京)이 항일독립운동 초기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장소 중 하나였다는 점은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식민지배에 항거하며 옥사했던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와 이육사(1904∼1944)를 비롯해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김산이라는 가명으로 더욱 유명한 장지락(1905∼1938) 등 많은 투사가 이곳을 활동거점으로 삼았다. 정부와 독립기념관·한국근현대사학회가 공동 발행한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베이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전쟁 전략을 연구하고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노선과 이념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 흔적은 광복 70년이 흐른 오늘날 찾아보기 쉽지 않게 됐다. 보존과 관리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탓이다. ▲ 지난 5월21일과 7월13일 두 차례 둘러본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이곳에 있는 감옥에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이준삼 특파원)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베이징의 명소 왕푸징(王府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기자가 찾은 이곳은 오랫동안 방치돼 그야말로 흉가 같았다. 건물 밖이나 안이나 아무런 표지도 없어 이 건물의 정체를 일반인이 알 길은 없어 보였다. 1925년 21살의
‘임진왜란’ 권율 옆에, ‘귀족 세습’ 친일파 비석이
광주공원 윤웅렬·이근호 선정비 문제… “비석 철거와 단죄비 추진 논의” ▲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의병장 심남일(1871~1910) 순절비. ⓒ 소중한 관련사진보기 최근 광주공원이 시끄럽다. 20일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광주공원 내 친일인사 윤웅렬, 이근호 ‘선정비’의 존재를 문제삼으며 여론이 들끓고 있는 것. 특히 광주공원은 광주 근대사의 살아있는 현장(광주 1호 공원)이자, 호국·민주화 영령 추모 시설이 있는 곳이라 광주광역시에선 비석 철거 및 ‘단죄비’ 건립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28일 오후, 광주 남구에 있는 광주공원을 찾았다. 입구를 지나 숲길에 들어서니 고요하던 공원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숲을 우산 삼아 오르막을 넘자 높이 7m의 성거사지 5층석탑(고려시대)이 눈에 띄었다. 광주공원이 생기기 전, 본래 성거산이었던 이곳엔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5층석탑만 남아있다. 보물 109호 지정된 5층석탑은 기단 1단 위에 탑신 5층을 세운 탑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띄고 있다. 탑을 뒤로한 채 공원 쪽을 바라보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의병장 심남일(1871~1910) 순절비가 눈에 들어왔다. 비석엔 ‘의병장 남일심공 순절비’ 열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전남 함평의 훈장이었던 심남일은 1907년 말 의병을 일으켜 1909년 10월 체포되기까지,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는 본래 이름인 ‘수택’을 버리고 ‘전남 제일의 의병’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아 ‘남일’로 이름을 바꿀 만큼 의병 활동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심남일을 체포한 일본군 2연대 3중대의 당시 공로패엔 “전남 남부에 있어서 수일이라 칭하는 거괴 심남일을 포획”이란 내용이
논쟁으로 읽는 70년(17) 유신체제 논쟁
ㆍ“경제 개발” “독재 정치”… ‘일제 개발론’과 맞물려 상반된 평가 ▲ “약소국이 강대국 희생 제물” 박정희, 선포 전날 미국 통보“독재 가능성” 미국 항의에유신 선포문 곳곳 수정 발표 ▲ 1980년대 한국 경제성장률10월 유신 때보다 더 높아“유신과 한국 경제는 무관”비판적 견해 사회 공감대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철 지난 논쟁이 있었다. ‘유신 체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2012년 8월 홍사덕 전 의원은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 없이는 불가능했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달러를 넘기기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피요트르 황제는 사람도 많이 죽인 폭군이고, 전쟁하려고 교회 종을 녹여 철을 만들고 그랬던 인물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진보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홍 전 의원 발언에 강력 반발했다. 유신체제는 비정상적인 체제이며, 정권 연장을 위한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나온 것이지,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의 기득권 세력들이 공모한 결과가 유신체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72년 12월27일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해 11월2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미국,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 유신에 대한 첫 논쟁은
민족문제연구소 포천지회 출범
민족문제연구소 포천지회(지회장 임만철)가 지난 7월 25일 포천시근로자종합복지회관 대회의실에서 출범하였다. 이어 “탄저균과 미국의 세균전”이라는 내용으로 초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91년 설립된 단체이며 경기북부지역(의정부, 양주, 동두천, 연천, 포천)에는 200여명의 회원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지부 김재광 지부장은 축사에서 “임만철 지회장과 회원들의 노력으로 포천지회 출범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히며 “포천지회가 지역사회 민주개혁의 중심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 포천지회 임만철 지회장은 “포천에는 이규채 애국지사, 이범영 애국지사등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공적비와 추모비가 산재해있다”고 주장하며, 향후 이에 대한 연구와 교육, 체계적이 관리사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2015-07-29> 경기북부포커스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포천지회 출범
화성 매송초,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 70주년 행사 가져
부민관 폭파 의거 주역 조문기 선생의 얼 기려 학생이 중심이 되는 민주적인 자치회 운영 화성매송초등학교(교장 조정래)는 지난 24일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인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 70주년 행사를 가졌다. 학교 현수막을 게첨하고 선생의 생전 영상을 시청하고 독립 정신의 높은 뜻을 기렸다. 이날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캠페인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70주년 행사와 함께 학생들 하나하나의 손길을 모아 자주 독립의 얼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조문기 선생은 해방되기 한 달 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 집회가 열리던 서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폭탄을 터뜨린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나 당시 매송보통학교를 다녔으나 일본어 학습을 강요한 당시 교육 상황에 큰 불만을 품었다. 유일하게 흥미를 붙인 과목은 조선어였으며 이때부터 민족혼을 키워 독립운동을 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광복회 경기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친일 청산에 평생을 전념하였다. 조정래 교장은 “조문기 선생의 독립에 대한 높은 뜻과 정신을 후배들이 이어받아 나라사랑으로 이어갈 것”이라며, 광복 70주년 현수막을 광복절인 다음달 15일까지 게시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화성 매송초는 지난 해 7월 24일 선생의 독립 의지를 되새기고자 위안부 소녀상 제작으로 유명한 김운성 작가가 동상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2015-07-28> 경기eTV뉴스 ☞기사원문: 화성 매송초,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 70주년 행사 가져
[재판으로 본 현대사](42)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下)
ㆍ“성공한 쿠데타” 무거운 죄, 가벼운 벌… 그리고 ‘사면’의 역설 ■ 1심,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6월 12·12 및 5·18 사건과 비자금 사건의 1심 선고 공판은 1996년 8월26일 오전 10시 열렸다. 재판부는 개정 벽두에 잠시 보도진을 위한 TV 촬영을 허용한 뒤 바로 판결 선고에 들어갔다. 원체 사건의 규모가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재판부가 판결문을 요약해서 따로 작성한 설명문을 낭독하는 데만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다. 설명문에는 쟁점별 주장과 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요약되어 있었다. 설명문의 낭독이 끝난 다음 재판장은 판결 주문을 읽기 시작했다. 선고받는 피고인 수만도 12·12 및 5·18 사건 16명, 전씨 비자금 사건 4명, 노씨 비자금 사건 14명 등 34명이나 되었다. 관심의 핵은 단연 전·노씨 두 사람에 대한 형벌의 수위였다. 전두환 피고인에 대해서는 반란,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 혐의 등을 적용해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노태우 피고인에게는 반란,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 혐의 등을 인정,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그 밖의 피고인들은 각자 죄책의 경중에 따라 12·12 및 5·18 사건에서는 징역 10년(황영시·정호용·허화평·이학봉), 징역 8년(이희성·허삼수·유학성·최세창), 징역 7년(주영복·차규헌·장세동), 징역 4년(이윤희·박종규)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리고 비자금 사건에서는 이현우 징역 7년, 안현태 징역 4년, 금진호·이원조·성용욱·안무혁 각 징역 3년이 선고되었고, 그 밖의 피고인 12명에 대해서는 징역 2년6월에서 형의 집행유예까지 비교적 가벼운 형이 선고되었다. l 일러스트 | 박건웅 ■12·12는
박정희도, 김정일도 ‘상록수’를 읽고 감동했다는데…
일제 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삼은 심훈 소설 <상록수>는 1960년대 남한과 북한에서 개발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영웅서사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신상옥이 감독하고 최은희·신영균·신성일·허장강 등이 출연했던 1961년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⑦ 개발독재·민족주의 시대 박정희‘를’ 만든 책과 박정희‘가’ 만든 책은 무엇이었나? 나폴레옹 전기는 박정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알려졌다. 소년 박정희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권력, 군대, 정복, 지배, 남자다움을 동경하게 된다. 대구사범 동창들은 나폴레옹 전기 외에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을 읽던 그를 기억한다. 냉혹한 그의 정치술과 입만 열면 외치던 ‘민족중흥’은 성장기에 읽은 책들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에서 5·16이 쿠데타가 아니라 ‘동학-3·1-4·19’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소명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는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이등 객차에서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네 손이 밉더라”라고 개발의 찬가를 읊었다. 애꿎은 소녀에게 시비를 걸며 박정희는 자신을 소외된 민중을 위한 개발의 사도로 자처했다. ■ 개발주의 영웅서사의 탄생 그렇다면 박정희 개발주의의 이론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교수 월트 로스토는 종속적 개발을 통한 저개발국가의 경제 도약이 공산화를 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사상계>에 소개되었고, <반공산당선언: 경제성장의 제단계>(1960)로 출간되어 많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식인들의 기대와 달리 로스토는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도력의 원천으로 군부를 지목한다.
[단독] 고위 당정청 ‘한국사 국정교과서화’ 추진 논의
與 “동력 상실” 내부 논란…野 “친일·반민주 등 단일한 역사 해석 강요” (자료사진) 새누리당과 정부가 여러 차례 논란을 빚은 한국사 국정 교과서화를 다시 추진 중인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인 일제 강점기와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70~80년대 유신·군사정권 등에 대해 ‘유일한 해석’만 허락하겠다는 의도여서 논란이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여권은 지난 22일 열린 당·정·청(黨政靑) 회동에서 ‘한국사 역사교과서’ 문제를 의제로 다뤘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미리 배포된 자료집에는 포함시키지 않고, 현장에서 자료를 배포한 뒤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의제에선 제외했다”고 밝혔다. 실제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회동 직후 국회에서 한 브리핑에서 해당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사 국정교과서화는 청와대와 김무성 대표의 교감 속에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김 대표의 평소 소신이 ‘역사에 대한 해석은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계기가 된 ‘5·16’을 ‘쿠데타’라고 규정한 대목이 눈엣가시일 수 있다. 교육부도 유사한 방침을 이미 드러낸 바 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는 지난 1월 기자간담회에서 “교실에서 역사는 한 가지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김 대표의 소신과 황 부총리의 발언은 당시 큰 파장을 낳았고, 야당과 교육계의 거센 반발이 제기됐었다. 김무성 대표는 재선거 당선으로 정계에 복귀한 뒤 당내 지지세(勢)를 결집하던 2013년 9월 ‘근현대사 연구교실’이란
광주공원 내 친일파 이근호 선정비 추가 발견
을사오적 이근택 형, 윤웅렬 선정비 나란히 위치 광주역사정의행동연대 “친일행각 알리는 단죄비 설치해야” 광주시 제1호 공원인 광주공원 내에 친일파 윤웅렬 선정비가 100년 넘게 보존되고 있는 사실이 밝혀진 가운데, 이 선정비 바로 옆에 또 다른 친일파 이근호 선정비가 있는 사실이 추가 확인됐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와 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홍길 교수팀은 23일 “최근 광주공원 사적비 군을 전수 조사한 결과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인 이근호(李根澔, 친일인명사전 매국수작/남작)의 선정비를 추가로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근호의 선정비는 친일파 윤웅렬 선정비 옆에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선정비는 이근호가 전남 5대 관찰사(1902년 2월28일~1903년 9월23일) 재직 시절에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세워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근호(李根澔, 1860년~1923년)는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출신이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전라남도 등의 관찰사를 거쳐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한일병합(한일병탄) 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예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23년 3월1일 사망하면서 작위는 서장자(庶長子) 이동훈(李東薰)이 이어 받았다. 이근호는 대통령 직속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5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동생들 2명과 함께 수록돼 있다.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는 이근호의 작위를 습작한 아들 이동훈도 포함되어 있다. 광주역사정의행동연대(가칭)는 “이근호의 집안은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사람들은 이근호 5형제를 ‘5귀(五鬼)’라고 불렀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