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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단독]美 4·19 앞서 ‘이승만 퇴진’ 종용 비밀특사 파견

2015년 7월 23일 1781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미국이 4·19혁명에 근 1년 앞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종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9년 여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하원의원 월터 저드 특사를 비밀리에 한국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할 것을 권유했다. 뉴시스가 20일 입수한 미외교연구협회 ‘오랄 히스토리’에 따르면 4·19 혁명 당시 미대사관 부대사를 지낸 마샬 그린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밀특사로 월터 저드 의원을 한국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하고 후계자에게 정권을 넘겨줄 것을 종용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미 대사관 정무과 윌리엄 와츠 서기관도 증언 회고록을 통해 저드 특사를 비밀리에 경무대로 안내해 이 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 배석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마샬 그린의 증언 회고록. 2015.07.22. robin@newsis.com 2015-07-23 아이젠하워 대통령 1959년 여름 저드 특사 극비리 보내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미국이 4·19혁명보다 근 1년 앞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종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9년 여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하원의원 월터 저드 특사를 비밀리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권유한 것이다. 뉴시스가 21일 입수한 미외교연구협회 ‘오랄 히스토리(구두 역사)’에 따르면 4·19 혁명 당시 미 대사관 부대사였던 마샬 그린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밀특사로 월터 저드 의원을 한국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하고 후계자에게 정권을 넘겨줄 것을 종용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미 대사관 정무과 윌리엄 와츠 서기관도 별도의 증언회고록을 통해 “저드 특사를 비밀리에 경무대로 안내해 이 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 배석했다”고 밝혔다. 당시 미연방 하원의원인 월터

이승만이 국부라는 사람들, 이 영화를

2015년 7월 23일 418

[바심마당] 역사가 증명하는 학살의 현장,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기묘한 색깔론 우리나라 교과서는 한국전쟁 전후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가르친다. 적어도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랬다. 기자가 된 후 우리나라에도 그런 세계적인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에 버금가는 국가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취재하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사건이 반세기가 넘는 동안 철저히 은폐되고 유족 또한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는 사실, 지금도 우리가 흔히 쓰는 ‘골로 간다’(골짜기에서 총살 암매장) ‘물 먹인다’(바다에서 수장)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배신감이란…. 1999~2000년 같은 마음을 가진 학자와 언론인, 사회단체,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에 나섰고, 마침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됐다. 그때 우리의 역할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짧은 피해자 신고기간, 턱없이 부족한 홍보와 지방자치단체의 비협조 등으로 실제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고 건수는 극히 일부에 그쳤고, 그나마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위원회도 해체되고 말았다. 추가 신고와 조사기간 연장, 연구재단 설립, 배·보상특별법 제정, 유해안치시설 건립, 위령사업 전개 등 후속과제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언론의 관심도 사라졌다. ▲ 영화 ‘레드 툼’ 포스터 이런 상황에서 영화 <레드 툼>이 나왔다. 구자환 감독이 2006년부터 10년에 걸쳐 만든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영화다. 어디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혼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찍었다. 막판에 고군분투하는

[단독]”이승만 집권 말기 통치력 상실 30대 비서 대행” CIA 비밀문서 충격

2015년 7월 22일 3491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대말부터 노령에 따른 심신쇠약으로 통치력을 사실상 상실했으며 30대 비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정을 관리했다는 CIA 일급 기밀문서(Top Secret)가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뉴시스가 20일 입수한 CIA 문서(CIB)는 1959년 8월1일자로 ‘이 대통령의 정책과 국정운영이 약화되고 있음’이라는 제목아래 이 대통령이 정신건강 문제로 통치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내용과 그로 인한 비정상적인 행태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또한 월터 다울링 주한미국대사는 1959년 8월15일 국무부 전문보고에서 “요즘 이 대통령은 서류도 거의 안읽고 사람도 안만난다. 모든 것은 박찬일 비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결정하고 있다”며 “3년전과 비교해 정신적 문제가 두드러지게 악화됐다”고 보고했다. 사진은 CIA 문서 일부. 2015.07.21. <사진=김태환 한국사료연구가 제공> robin@newsis.com 2015-07-22 美대사도 “비서와 영부인이 국사 처리” 국무부 전문 보고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대 말부터 노령에 따른 심신 쇠약으로 통치력을 사실상 상실했으며 30대 비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정을 관리했다는 미 중앙정보국(CIA) 비밀문서가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뉴시스가 20일 입수한 CIA 문서(CIB)는 1959년 8월1일자로 ‘이 대통령의 정책과 국정 운영이 약화되고 있음’이라는 제목 아래 이 대통령이 정신건강 문제로 통치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내용과 그로 인한 비정상적인 행태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이 문서는 CIA의 1급 기밀문서로 분류됐으며 2002년 10월21일부로 비밀이 해제됐다. 당시 CIA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매일 정보 동향을 수집, 워싱턴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장기 독재로 한국의 정국

신흥무관학교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

2015년 7월 22일 426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서중석교수 강연 – 신흥무관학교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왜 지금 신훙무관학교를 기억해야 하나

<암살> 사실 아닌데, 이 묘한 울림은 뭐지

2015년 7월 22일 3634

<암살> 사실 아닌데, 이 묘한 울림은 뭐지 이준식(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암살’은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 이야기. ⓒ 케이퍼필름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허구인 영화도 없다. 하물며 다큐멘터리조차 완벽하게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실도 카메라를 거치는 순간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는 데 영화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사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줄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에 따라 사실이 더 중시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허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한다. <암살>은 분명히 실재했던 역사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일제의 식민통치, 데라우치(寺內正毅)초대 총독, 이완용,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 상하이(上海)의 조계지, 김구·김원봉의 의열투쟁, 한국독립군(지청천)의 무장투쟁, 서울의 미쓰꼬시백화점, 반민특위의 친일청산 실패 등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암살>은 결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다. ‘암살’의 대상이 된 두 인물 곧 뼛속까지 친일파인 강인국(이경영 분), 조선군사령관 가와구치는 가공의 인물이다. ‘암살’을 실행하는 주체로 그려진 한국독립군 출신의 여전사 안옥윤(전지현 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열혈투사 속사포(조진웅 분),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 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요원으로 그려진 아네모네 마담(김해숙 분) 등도 마찬가지이다. 독립운동을 배신하고 일제의 밀정이 된 염석진(이정재 분)이나 ‘암살단’을 암살하려다가 급기야는 ‘암살단’을 도와주게 되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7.20]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와 함께 보는 친일파이야기 Part 1

2015년 7월 21일 381

7월 20일 보이는 라디오 ‘박한용의 백년전쟁’ 다시보기 <2015-07-20> 국민TV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와 함께 보는 친일파이야기 Part 1

지금, 너무도 소중한 영화,

2015년 7월 21일 528

지금, 너무도 소중한 영화, <암살>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이상한 일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는 분명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는 거의 제작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은 한반도의 숨 막히는 근대사, 현대사를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화해 역사적 해석을 새롭게 하고 영화적 흥행도 갱신했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로, 첩보 영화로, 멜로드라마로, 심지어 코미디로 재해석된 한국의 근현대사들. 그런데 이 리스트에 유독 독립운동을 다룬 이야기는 빠져 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등 천만 이상을 동원한 영화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이나 한국전쟁이 불러온 대립에 주목하고 있다. 액션과 멜로의 결합, 또는 신파적 멜로의 노골적인 전시, 그리고 이것이 불러온 엄청난 흥행. 이뿐 아니다.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웰컴 투 동막골> <고지전>처럼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한 영화들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심지어 양민학살을 다룬 <작은 연못>처럼 독립영화 진영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단언컨대 한국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영화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는 어떤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아나키스트> <모던 보이>. 더 이상 기억하기 어렵다. <도마 안중근>을 이 리스트에 더 올려놓으면 정말 더 이상 채울 영화가 생각나지 않는다(<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독립운동을 다루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안 다루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 애매한 위치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4편의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했고

[논쟁으로 읽는 70년](16)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2015년 7월 21일 1045

ㆍ박정희 “불균형발전”, 김대중 “균형발전”… 71년 대선 공약 맞대결 ▲ ‘국가 주도’ ‘자립경제’ 등 같은 뿌리서 출발했지만 산업화·민주화세력 나뉘어 정치사회 경쟁 시작 ▲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론’ 절대빈곤 벗어나는 성과 정경유착·농업 희생 등 한계 1960~1970년대의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이 일대 격돌한 선거는 1971년 4월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선거가 선거다우려면 인물과 비전의 구도가 제대로 잡혀야 한다. 1971년 대선은 광복 70년 동안 가장 선거다운 선거로 기록될 만하다. 대선에서 경쟁한 두 인물은 박정희와 김대중이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1963년과 196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3선개헌을 통해 세 번째 집권을 노린 후보였다. 그에겐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경제발전이라는 성취가 있었다. 김대중은 대선후보 선출에서 김영삼·이철승을 꺾은 ‘40대 기수’의 대표 주자이자 야당의 새 정치를 상징하는 후보였다. 그에겐 4월혁명, 6·3항쟁, 3선개헌 반대투쟁으로 이어진 1960년대 민주화운동이라는 자산이 있었다. ▲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1971년 4월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1971년 4월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 과거나 현재나 선거를 이끄는 결정적 프레임은 경제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산업화의 경제 프레임으로 ‘조국근대화’와 ‘대중경제’를 각각 내세웠다.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에 대한 비교 연구로는 김일영(전 성균관대 교수·정치학)의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2006)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 모두

[재판으로 본 현대사](41)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中)

2015년 7월 21일 1101

ㆍ“통치행위”라던 검찰, 비자금 터지자 “전두환 사형·노태우 무기징역” ■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점화된 재수사 앞서 보았듯이 검찰이 ‘집권에 성공한 내란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군사반란도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12·12와 5·18 관련자들에 대하여 연달아 불기소처분을 하자 국민 각계에서 강력한 비판과 반발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김영삼 대통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했다. 그런 시점에서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는 정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발언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높아보인 데다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원’이 차명으로 분산 예치되어 있는 은행의 예금계좌 조회표까지 제시했다(<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0). 소문으로 나돌던 ‘설’이 의정 단상에서 구체적 증거로 확인되자 세론은 들끓었고, 대검 중수부(부장 안강민 부장검사)는 바로 다음날 수사에 착수했다. 한편 전두환 비자금에 대해서도 서울지검에 특별수사반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불기소처분을 결정했던 12·12와 5·18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서울지검 3차장 이종찬)를 가동하여(11·30) 본격적인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 전에 불기소처분을 한 수사팀(공안부 검사들)은 배제된 새로운 인적 구성이었다. l 일러스트 | 박건웅 ■ 내란·반란으로 구속된 5·6공 두 대통령 검찰은 비자금(뇌물) 혐의로 노태우를 구속한(1995·11·16) 데 이어 합천에 내려간 전두환을 뒤쫓아가듯 밤중에 수사관을 보내 3일 새벽 6시 반경 구속영장을 집행, 안양교도소에 수감하였다. 그는 장시간에 걸친 검사의 조사에서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한 것은 10·26 사건 수사를 위해서였지, 내란을 기도하거나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고

[논평] 실종된 사법정의-RTV 2심판결에 부쳐

2015년 7월 20일 2071

[논평]  실종된 사법정의-RTV 2심판결에 부쳐  시민방송(RTV)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 취소를 다툰 재판에서 법원은 또다시 방송통신위원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지난 7월 15일 서울고등법원 제6행정부(판사 김광태, 손철우, 윤정근)는 RTV가 방통위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명령의 취소 소송에서 항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역사 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RTV에 대한 방통위의 중징계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한 것이다. RTV는 즉각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에 있었던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은 재판부의 정권 눈치 보기와 시대착오적 역사인식을 드러낸 한편의 촌극이었다. 그들에게 전직 대통령, 독재자는 비판이 금기시되는 성역이었고, 5·16은 혁명이었다. 재판부의 저급한 역사인식과 법리에 대한 오인은 사법부의 양심과 합리적 이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2심 재판부 역시 심리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편향성을 드러냈다. RTV는 ‘백년전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 측을 증인으로 채택하려 마지막까지 애썼으나 재판부는 끝내 이를 외면하였다. 법학계와 역사학계 수백명의 학자들이 연서명으로 제출한 간곡한 의견서도 완고한 이들에게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듯 보인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심 판결을 전문 인용한다고 밝히면서 몇 줄 되지 않는 추가 판단에서, ‘백년전쟁’을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을 다룬 것으로 전제한 후,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편집·재구성하여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결론지었다. 헌법상의 기본권인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둘러싼 첨예한 해석 차이에 대한 사법부의 고민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판결이었다.  많은 이들은 최근 사법부의 급속한 보수화를 경계하며 깊이 우려하고 있다. 국민들도 과연 사법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