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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Daum 뉴스펀딩 -『나는 싸우고 있다』

2015년 6월 16일 905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 Daum 뉴스펀딩 – 『나는 싸우고 있다』 시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모금 목표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한 다음 뉴스펀딩 – 『나는 싸우고 있다』가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연재 기간 내내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리면서 모금현황과 향후계획을 간략히 보고 드립니다. 이번 뉴스펀딩은 2015년 2월 말 부터 4월까지 2개월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었으며, 연재기사 8건과 함께 구술편집 영상 5건과 구성편집 영상 7건을 추가하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를 비롯한 한일과거사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달하였습니다. 기사를 후원해 주신 분은 820명, 후원액은 11,218,000원입니다. 모금은 4월 30일에 마감되었지만 6월 2일에 마지막으로 ‘8화 한일협정이 왜 문제지?’를 올렸습니다. 이후에도 ‘나는 싸우고 있다’로 검색하면 전체 기사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1화: 살아 돌아오면 다행이었던 강제징용 2화: “일본 가서 공부 더 하고 돈도 벌어올께” 3화: 아버지는 왜 일본에 끌려가 죽어야만 했을까 4화: 유골은 말하고 있다 5화: 누가 이청년을 전범으로 만들었는가 6화: 야스쿠니신사는 죽음과 공포의 상징 7화: 일본사람은 다 나빠? 함께 싸우는 일본인 8화: 한일협정이 왜 문제지? (마지막화) 연재 기사를 올릴 때마다 댓글과 조회 수를 확인하면서 한국사회와 시민들이 ‘과거사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잘못 이해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만 원이 넘는 후원금은 숫자로 읽히지만, 그 안에 담긴 여러분들의 바른 역사에

[뉴스펀딩]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2015년 6월 13일 2030

8화. 한일협정이 왜 문제지? 이번 8화에서는 한일협정을 다룹니다. 지금까지 연재한 한일과거사문제를 마무리짓는 부분이라 내용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법률적인 설명에다 통계까지 있어 조금 어렵고 지루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모 신문사에서 ‘친절한 기자 씨’를 동원(?)하여 사건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한 사례에서 힌트를 얻어 나름대로 쉽게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물론 잘 된다는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1. 한일협정 문서공개의 뒷이야기 2005년 1월 17일, 오후 1시, 참여연대가 운영하던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기자회견을 주관하거나 참여했지만, 그날처럼 많은 언론사의 플래쉬를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날 외교통상부는 캐비넷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했습니다. 아침 10시에 외교통상부가 공식적으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고 발표했고, 오후 1시에는 시민단체가 모여 공개된 문서에 대해 분석과 평가를 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몇 천 쪽이 넘는 문서를 분석할 여유가 없었겠죠. 실은 이틀 전에 외교통상부로부터 문서를 스캔한 파일을 입수하여 내용을 분석한 상태였습니다.(아, 이건 공식적으로 받은 겁니다) 회의록 5건이었지만 한일협정 관련문서 전체 가운데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문서를 분석하느라 장완익 변호사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김은식 당시 사무국장과 저는 꼬박 이틀 밤을 샜습니다. 기자회견장은 저희들과 강제동원 피해자들, 그리고 기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찼습니다. 부산대에서 국제법을 가르치던 김창록 교수를 비롯하여 영산대의 최영호 교수와 일본의 한일협정 연구자 오타

폐허가 남긴 역설적 기회속에 반쪽 세계시민으로

2015년 6월 12일 415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13일 전국 보육시설에 수용돼 있는 고아들의 운동회가 열렸다.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가난해진, 역설적인 평준화가 이뤄지자 신분 상승의 욕망이 교육열을 통해 터져나왔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② 한국전쟁기의 책과 지식풍경 한국전쟁은 지식과 사상의 다채로움과 중간지대를 제거했다. 좌·우의 심문을 통한 구별짓기는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 노인이 막대기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함께 달고 진주한 군인들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민중들의 생존의 고달픔을 보여준다. 종북몰이의 과정에서 국민의례로 충성 증명을 요구하는 작금의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의 망탈리테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걸까? 한국전쟁은 삶의 터전은 물론 사회구조와 계층질서를 파괴하였다. 파괴로 인한 인민 대다수의 빈민화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지위의 평준화를 초래했다. 폐허의 공터 속에서 계층상승과 이동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파괴가 남긴 역설적 기회 속에서 꿈틀거렸던 생존과 상승의 욕망은 우선 교육열을 통해 터져나왔다. ■ 교육열과 전시 대학 많은 외신들이 한국전쟁 중의 3·4부제 수업, 한 학급에 100명 이상을 수용한 교실의 광경을 놀라움과 함께 타전했다. 전시의 와중에 초등학교 학령 아동 대부분이 정규수업을 받고 있다고 전하는 보도도 있다. 과장되었지만, 당대 교육열의 열도만은 짐작할 수 있다. 전시 대학은 교육열의 정점이었다. 서울의 대학들은 남쪽으로 피난 내려와 1951년 4월 부산·광주·전주·대전 등 4개 도시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한다. 1951년 9월부터 각 대학은 단독으로 임시대학을 개설하였다. 서울대와 연희대(연세대)는 부산에, 고려대는 대구에 임시학교를 열었다. 1951년

[책소개] 박정희와 한일협정

2015년 6월 11일 597

한상범 지음|21세기사 출판|ISBN 9788984685789|초판|부가기호 03340|신국판|페이지 200쪽|2015년 05월 10일 펴냄 |정치/사회일반 |13,000원  <IMG style="LINE-HEIGHT: 175%; BORDER-RIGHT-WIDTH: 0px; BORDER-TOP-WIDTH: 0px; BORDER-BOTTOM-WIDTH: 0px; COLOR: rgb(0,0,0); FONT-SIZE: 11pt; BORDER-LEFT-WIDTH: 0px" alt="책소개” src=”data:image/png;base64,R0lGODlhSQAQAMQAAPH2+gyQ8KzH4VmPwwuQ8OPs9dXj8D18uYKr0gyR8XSizUuGvpC01x2Z8cPk+z+o87rg+7rQ5iOa8R6Z8Q2S8R2Y8SOb8QyR8GaYyMja656+3C9ztP///wAAAAAAAAAAACH5BAAAAAAALAAAAABJABAAAAX/oPM8DmeeaKZmZpEBnCagdG2fLldo7G03l0vDx9kYNybNhrXB2DIbDZGm5EClU1TiEiBkUUqmsyaI2gyYdJoRQ16/J0owcFMejZpwcUxDbAZnahhNbVZmcBxbXTcZeXg8SgODfCcARz03BhtsVW+IinQ+UBszbZKEfaQHAzB1pIWecHNePoMHCzB6qCYAfggcZQMFNwobuXdYsly0NRmDMhsHjmK8GgeHwAfSwyiWCklNA9hfiszdCwelBgPTexwA4gssABnDaH+t4D2d41lBF+ZQGOCWQsMwGbwwxXohcMM3cIaSfZlFRICgixhK0YhFI8KqfPwk+ltGpFGekyf7QJngeIIBPjBuVBKhiAiFmTs4c3IwIBKWTB9zQtU0YQal0aM+QtacEKTC0BM/h1qMWBOCBQkQnibBpLXGDq5ZQgAAOw==” width=73 height=16 v:shapes=”그림_x0020_4″> 한일관계는 일본의 아베(安倍晋三)정권이 들어선 이후 더욱더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는 안개속이다. 미래지향적으로 한일 두 나라의 갈등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은 한일협정 체결의 과정과 그 체결 내용 등을 다시 제대로 보는 것이다. 한일협정의 졸속 협상과 그로 인한 문제가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보다 더 좋은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출발은 50년 전에 한일간에 체결되어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은 친일청산 작업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노학자(老學者)가 한일협정을 분석하고 개정방향을 제시하며 발표한 논문·논설을 모은 것으로 ‘한일협정 체결 50주년’을 맞이하여 한일협정의 실체적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저자소개> 한상범 선생님은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와 명예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소장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법학교수회 회장과 명예회장, 참여연대 고문·한국기독교인권센터 실행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1964년 한일협정반대교수단으로 서명했고,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했다. 1991년 『역사비평』에 한국 법학 계를 지배한 일본 법학의 유산을 발표해 일제 잔재 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했다. 한상범 선생님은 많은 법학자들의 압력에도 일제 잔재 청산 작업과 실천 및 계몽운동과 시민운동을 해 왔다. 또한 일제 법제가 남긴 권위주의·관료주의·군국주의·파시즘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시간 차이만 있을뿐”

2015년 6월 11일 793

서산인터넷뉴스 초청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선생 간담회 가져 지난 6월 5일 서산인터넷뉴스 접객실에 아주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1959년 간첩으로 남파되었다 검거돼 34년 6개월을 복역후 1993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선생을 비롯한 민족문제연구소 이달호박사, 통일불교전국연합 김경운공동의장, 통일뉴스 류경환특파원이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서산인터넷뉴스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박종린선생의 건강은 크게 나빠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랜 옥중생활이 말하듯 백발이 성성한 83세 노인의 모습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독도 영유권 문제, 남북대치와 이산가족문제는 우리사회 밑바탕에 깔린 암울한 역사의 자화상이자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남북 최초의 역사적 합의였던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지 43년이 지났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산가족의 아픔은 해를 달리할수록 더해가고만 있다. 한분 두분 고령으로 ‘만남’ 이라는 평생의 한을 못풀고 세상을 떠나고 있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산가족이야말로 분단사회가 얼마나 비인도적이며, 혈육을 갈라놓은 잔혹한 천형[天刑]의 산물임을 말하고 있다. 전후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세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박종린 선생은 얼마 안남은 이산1세대의 산증인이자, 남북 분단의 아픔을 함께한 역사적 서술자이기도 하다. 이산가족마다 숱한 사연이 있겠지만, 1953년 휴전으로 인한 이산가족말고도 박종린선생처럼 전후 이산가족도 존재한다. 전쟁이 끝난지 6년후 선생은 북에 100일도 안된 딸을 남겨둔채 남파되었다가 남한당국에 체포되었다. 유신독재 시절에도 사상전향을 거부하며 34년간 복역하다 1993년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무엇이 그토록 선생을 잡고 있었기에 그 오랜 세월을 견디어 냈을까? 선생은 자신이 남한에 온 것은

친일 ‘죄의 표식’ 통렬하게 속죄한 지식인

2015년 6월 11일 335

<2015-06-04>한국일보 ☞기사원문: 친일 ‘죄의 표식’ 통렬하게 속죄한 지식인

‘친일행적’ 독립운동가 허영호 서훈 취소 ‘적법’

2015년 6월 9일 459

친일행적이 밝혀져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된 독립운동가 허영호 선생의 유족이 소송을 냈지만, 파기환송심까지 간 끝에 서훈 취소는 적법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서울고법 행정3부(정형식 부장판사)는 허 선생의 유족이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결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낸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9일 밝혔다. 1952년 사망한 허영호 선생은 1919년 3월18일 동래군(현재 부산지역) 범어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선언문 등을 준비해 1919년 3월18일 동래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때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공적이 인정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하지만 그는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5명의 친일행위자 명단과 같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4389명 안에 포함됐다. 1937년 이후 불교잡지인 ‘불교신’, ‘금강저널’에 일제의 이른바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하고 지지하는 내용의 논설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나중에 동국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가보훈처는 2010년 11월 허 선생의 서훈 취소를 결정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듬해 4월 유족에게 문서로 통보했다. 유족은 허 선생의 행적이 서훈취소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며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행위자 명단을 발표할 때 결정 내용을 유족들에게 통지하지 않은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1·2심은 서훈 취소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전제하면서 국가보훈처장의 통보를 권한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보고 서훈 취소 처분을 무효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대통령의 최종 결재가 대외적으로 표시돼 서훈 취소 처분의 효력이 발생했고, 국가보훈처장은 이를 유족에게

[KBS] 일본 강제징용 유적 현장을 가다

2015년 6월 8일 1493

☞영상: 일본 강제징용 유적 현장을 가다 <녹취>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00m)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 <녹취> 김민철 :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그런 부분들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채 단지 동양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시설이라는 그 명분만 가지고…” <녹취> 호사카 유지 : “메이지 시대 침략의 중심지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것, 그것은 대단히 우려해야 하는 내용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남서쪽으로 약 290킬로미터. 제주도 10분의 1 정도 면적의 작은섬 미야코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마에하마 등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2차대전 말기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녹취> “발이 미끄러지니까 조심하세요” 열대림을 지나자, 큰 동굴이 나타납니다. <녹취> 시미즈 하야코(미야코 주민) : “포대를 만들기 위해서 일본군이 진지로 삼았던 장소입니다. 기계는 쓰지 않고 곡괭이로만 팠어요.” 감시초소에 부엌까지 갖춘 이 섬에서 가장 큰 진지입니다. 그런데, 이 진지를 만든 사람들은 바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었습니다. <녹취> 요나하 히로토시 : “조선인의 일은 굉장히 많았어요. 항구 화물선의 짐을 올리고 내리는 작업, 그리고 주로 진지 구축 작업입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위험한 노역에 내몰렸습니다. <인터뷰> 나가하마 유키오(미야코 주민) : “1945년에는 일본군 2,300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부분 굶어죽었거나 말라리아입니다. 총에 맞아 죽은 건 적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조선인들은 그 이하의 생활을 했을 겁니다.” 이곳에

박주선, 국립국악원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 추가기재키로

2015년 6월 8일 588

– 친일행적 기재해 후손에게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전남인터넷신문] 국악인 동상공원 내 ‘친일파 동상’ 비문에 친일행적이 추가로 기재되어 역사적 교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박주선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5일 국립국악원에서 받은 ‘친일파 동상 후속조치 계획’ 자료에 따르면, 국악원은 “1994년과 1998년 김기수 동상과 함화진 동상 건립 당시에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김기수와 함화진의 친일 사실이 적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면서, “6월 중 국악인 동상 심의위원회를 거쳐 친일사실에 대한 기록을 비문에 적시하여 국악인 동상공원을 찾은 학생 및 관람객들에게 친일사실을 알리고, 역사적 교훈 자료로 지속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동상공원 내 건립된 6명의 동상 중 2명(김기수, 함화진)이 친일행적이 있었다고 답변했다. 국립국악원은 ‘김기수의 친일행적’으로 “1939년 12월 이왕직아악부에서 구체적으로 일본 천황가의 업적을 찬양하고, ‘아시아맹주’, ‘대동아공명’의 주체로서 일본을 그리고 있는 ‘황화만년지곡’을 작곡하였다.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시명을 썼고, 아악부원들 모두 창씨명을 썼다.”고 했다. ‘함화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1937년 5월 창립된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에 홍난파, 최남선 등의 음악인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조선문예회는 조선의 가요를 정화해 일본의 국체와 전시체제의 선전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외곽단체로 조직한 단체이다. 1941년에는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 이사 및 조선음악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삼천리사의 인터뷰 <음악예술로 국민정신 작흥 – 완전한 음악학교가 없는 것은 조선의 수치>에서는 ‘금반 조선음악협회가 결성됨에 당하여 깊이 감명되는 바는 이것이야 말로 우리 음악계로

찜찜한 현충일… 17년째 국립묘지 차지한 친일파

2015년 6월 8일 401

백범 김구 암살 배후로 지목된 대표적 반민족행위자 김창룡 파묘 시위 ▲ 현충일인 6일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수십 명이 국립대전현충 입구에 서 김창룡 파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심규상 ▲ 현충일인 6일 오전 9시.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수십 명이 국립대전현충 입구에서 김창룡 파묘을 요구하고 있다. ⓒ 심규상 “아직도 독립군을 학살ㆍ고문한 김창룡이 애국지사 옆에 누워 있습니다” 현충일인 6일 오전 9시. 어김없이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수십 명이 국립대전현충사 입구에 섰다. 이들은 십수 년째 3.1절과 현충일, 광복절 때마다 김창룡 파묘시위를 벌이고 있다. 겨레의 성역인 국립묘지에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여전히 안장돼 있기 때문이다. 김창룡 전 특무부대장은 대표적 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남도 영흥 태생으로 ▲일제강점기 관동군 헌병대 정보원으로 일하며 항일조직을 무너뜨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이 일로 해방 후 친일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두 번이나 탈출했다. 오히려 육사 3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육군특무대를 만들어 각종 사건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이승만 정적을 제거, 독재정권의 초석을 다졌다. 한국전쟁때는 대전 산내골령골 민간인 학살 등 전국의 민간인 학살을 지시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지난 1992년에는 안두희가 김구 선생 암살 당시 ‘실질적 지령’을 내린 인물로 ‘김창룡’을 지목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사망 42년만인 1998년 대전 국립묘지 장군묘역 제2열 69호에 안장됐다. 방첩 분야에서 혁혁한 공로가 인정됐다는 게 그 이유다. 김창룡이 있는 인근에는 지난 1997년 뇌물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