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서울의 봄’, 윤석열 정부 떠오르는 몇 장면에 소름
[이게 이슈] ‘검찰 공화국’이 된 현실을 떠올리게 한 영화 <서울의 봄> “저런 때려죽일 놈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옆에 앉아있던 한 관객이 내뱉은 말이다. 쿠데타 성공을 자축하는 반란군들의 파티 모습과 그들에 맞서 싸운 이들이 붙잡혀 고문당하는 모습이 교차하는 장면에서다. 군가 ‘전선을 간다’에 맞춰 12.12 군사 반란 이후 부와 권력을 독식한 신군부의 행적이 자막으로 흐르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영화 <서울의 봄>은 여러모로 ‘불편한’ 영화다. 오래되지 않은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인 탓도 있지만, 불의가 정의를 무참히 짓밟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게 고통스럽다. 오죽하면 관객들끼리 심장박동으로 스트레스 지수를 재는 챌린지까지 벌이겠는가. 개인적으로도 최근 가장 견디기 힘든 2시간 20분이었다. 내로라하는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배우들의 아우라가 느껴지진 않는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여서 그들의 연기보다 대사에 더 주목하게 된다. 더욱이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비가 극명해 보는 내내 숨 돌릴 겨를조차 없다. 근래 제작된 영화 중 이처럼 내용부터 인물에 이르기까지 선악의 이분법으로 확연하게 갈리는 작품은 드물다. 이태신 수경사령관(정우성 분)을 정의로운 군인의 표상으로 설정한 까닭에 반란군의 수괴인 전두광(황정민 분)의 악행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영화의 결말을 뻔히 아는데도, 관객들은 숨죽이며 이태신 사령관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다. 아마도 사건 이후 이태신 사령관의 실제 모델이었던 장태완 장군의 아픈 가족사가 영화적 상상력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주인공은 전두광이지만, 관객들의 뇌리에는 단연 이태신이 우뚝하다. 국방을 책임지는 장관조차 반란군의
[오마이뉴스] 유일하게 사형선고 받은 악질 친일파, 그의 ‘죄목’은…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덕기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 청산이 무산됐다지만, 단 한 명도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에 근거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정리하는 대목에서 “1951년 2월 2대 국회의 의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공포에 의하여 반민법과 관련된 모든 판결을 무효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그 효력이 없어졌다”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친일 청산이 그렇게 무효가 되기 전까지 잠깐이나마 ‘옥고’를 치른 친일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사형선고까지 받은 경우도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단 하나, 친일 경찰 김덕기다. 혼자서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유일한 최악질 친일파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김덕기가 사형을 선고받은 날은 1949년 7월 1일이다. 이 시점은 친일파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시위하고(6.2) 반민특위를 공격하고(6.3)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6.6)하는 등의 흐름이 이어지던 때였다.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뒤였기 때문에 최악질 친일파들을 추가로 체포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가 힘든 시점이었다. 최악질 친일파들이 법의 심판대에 제대로 올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김덕기가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죄질이 가장 나빴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 상태에서도 혼자서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최악질’이라고는 말하기는 힘들어도 사형을 받을 만한 악질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1000명 이상 검거한 친일 경찰 김덕기는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기 4년 전인 1890년에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조선총독부 설치 이듬해인 1911년에 관립
[오마이뉴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유가족을 찾습니다
[사수만보] 항일운동가 이관술의 손녀딸 손옥희의 호소 ② 손옥희는 할아버지의 동경고등사범 사진에서 눈을 거두고 호소문을 이어서 써갔다. 쓰면서도 멈칫멈칫한다. 과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구속자의 유족은 모일 수 있을까? 골령골 유족은 수천 명에 이르고 불법학살임이 분명하지만 정판사 피고인은 열명에 불과하고 경제사범, 파렴치범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70여년 가까이 꼭꼭 숨어 지냈을 터인데 과연 모일 수 있을까? 모인다고 제대로 힘을 낼 수 있을까? 손옥희는 그래도 모이면 힘이 날거야 자신을 달래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현장에 나오셔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란 마지막 구절을 눌러썼다. 안재성 작가의 <1902~1905 이관술>이 나온 이후 손옥희의 발걸음은 더 바빠졌다. 그는 할아버지의 조그만 행적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갔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며느리이면서 이관술이 동덕여고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준 손응교를 성주 대가면 사도실마을을 찾아가 만났다. 거기서 수배중인 이관술이 “대구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려) 구두닦이를 했다”라는 회고를 들었다. 또 손응교는 이관술이 대전 골령골에서 7월 초순에 학살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그전에는 돌아가신 날을 몰라 생신날인 4월 26일을 기일로 해서 제사를 모셔오던 터였다. 또 박헌영의 아들로 평택의 만기사 주지였던 원경 스님을 만났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관술, 그의 누이 이순금과 경성콤그룹사람 손에 컸다고 회고를 한 바 있다. 나아가 1기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요청했고 손해배상소송까지 진행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건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란 누명, ‘위조지폐’ 사건이 날조되었음을 밝히는 문제였다. 사실 이는
[굿모닝충청] [특별기획] “일제 잔재 청산은 시대 정신”…6년 성과 보니
[굿모닝충청-충남교육청 공동캠페인] ⑩-1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 최종보고회 [기사 발체] 충남교육청이 2018년부터 추진한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 사업 활동이 뚜렷한 성과를 내고 마무리됐다. …중략… 교육청은 30일 오후 천안시 소재 독립기념관 겨레누리관(컨벤션홀)에서 김지철 교육감과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박종덕 천안교육장, 학교장과 업무담당자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 사업 최종보고회를 개최했다. 보고회는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 유공 기관과 유공자 표창, 일제 잔재 청산 위원 감사패 증정, 교육감 인사말, 축사,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의 특강, 최충식 민주시민교육과 시민교육팀장의 경과보고 순으로 진행됐다. …중략… …중략… 교육청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1기, 2021년부터 2023년까지 2기로 나눠 사업을 추진했다. …중략… 일제 잔재 정리 범위를 송덕비, 동상 등 학교 시설물로 넓혀 조사를 실시했으며, 7월에는 일본 향나무(가이즈카)를 제거하기도 했다. 학교 희망을 받아 나무를 교체한 곳은 56개교에 달하며, 4개교는 머릿돌 철거 또는 안내문 설치 후 교육자료로 활용 중이다. …중략… *이 기사는 충남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굿모닝충청 이종현 기자, 사진=채원상 기자 <2023-11-30> 굿모닝충청 ☞기사원문: [특별기획] “일제 잔재 청산은 시대 정신”…6년 성과 보니
[연합뉴스] 파주 시민단체 “장산리에 학살자 전두환 묻힐 자리 없다”
[기사 발췌] (파주=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겨레 하나 파주지회 등 경기 파주지역 11개 시민단체는 30일 오후 파주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파주 문산읍 장산리 매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중략… “장산리는 임진강과 북녘땅 개성이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조망을 갖춘 장소이자, 각종 평화통일 행사를 열어왔던 남북 화해의 상징적인 장소로 그 의미가 파주시민들에게 남다른 곳”이라며 “그런 장산리에 쿠데타, 광주학살, 군부독재, 민중 탄압의 상징인 전두환이 묻힐 자리는 없다. 나아가 파주 그 어디에도 학살자 전두환을 편히 잠들게 할 곳은 없다”고 주장했다. …중략… “파주시장은 한반도 평화 수도 파주시라는 이름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전두환의 매장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지금 당장 반대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승혁 기자 nsh@yna.co.kr <2023-11-30> 연합뉴스 ☞기사원문: 파주 시민단체 “장산리에 학살자 전두환 묻힐 자리 없다” ※관련기사 ☞뉴시스: ‘전두환 유해 안장 반대’ 파주 시민단체들 “파주의 봄 지키자” ☞YTN: 파주 시민단체 “장산리에 전두환 묻힐 자리 없다” ☞민중의소리: “학살범 여기 오지 마라” 전두환 유해 파주시 안장 추진에 지역주민 ‘반발’ ☞노컷뉴스: 시민단체들 “학살자 전두환, 파주 어디에도 편히 잠들 곳 없다” ☞경인일보: 파주 시민단체 “12·12 쿠데타 전두환 안장 막을 것” ☞경기일보: 파주 시민·사회단체들, “故전두환 유해 장산리 매장 막겠다”
민족사랑 2023년 11월호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전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승소에 기여한 일본 야마모토 변호사의 증언 전문
[다운로드] [수정전문] 지난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33부(재판장 구회근)는 2016년 12월 고 김복동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 법원의 각하 판단을 취소하고 원고에게 청구금액 1인당 2억 원 전부와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 승소로 결론이 날 때까지 소송 대리인단과 관련 시민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그 외 결정적인 증언을 한 숨은 공로자가 있어 널리 알리고자 한다. 주인공은 일본변호사연합회 인권옹호위원회 산하 일한전후처리문제특별부회 위원으로 있는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이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1992년 변호사 등록을 한 이래 우키시마호 사건, 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 등 10여 건의 전후보상재판에 원고측 대리인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 지원의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관련 세칭 관부(關釜)소송을 대리해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승소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2023년 5월 11일 한국 고등법원 재판정에서 이루어진 증인 심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판의 역사와 한일정부의 대응, 쟁점에 대한 법적 해석 등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치밀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재판부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정보 등을 삭제한 증언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한겨레: 한국 법정에 선 일본인 ‘위안부 증인’…“일본 정부가 장애물” ☞오마이뉴스: 법정에 선 일본인 변호사, 위안부 피해자 곁에서 한 호소
[오마이뉴스] 친일세력 지킴이… 이런 육군참모총장을 보았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채병덕 피살 1년 전에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 가서 김일성·김두봉과 4자 협상을 한 백범 김구는 분단세력뿐 아니라 친일세력의 미움도 받았다. 분단세력이 곧 친일세력이고 이것이 당시의 보수세력이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에게 최종 지시를 내린 쪽이 이승만이든 미국이든, 김구가 분단과 친일이 특징인 당시 보수세력의 미움을 산 것은 사실이다. 친일파들은 김구 암살에도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안두희가 소속된 미군방첩대(CIC)나 극우단체 백의사뿐 아니라, 거물급 친일파들이 포진한 ’88그룹’ 혹은 ’88구락부’도 백범 암살의 배후로 거론됐다. 일본 헌병대 출신인 김창룡과 더불어 이 그룹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 친일파는 김구 암살 당시의 육군총참모장인 채병덕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채병덕 편은 중일전쟁 초기인 1937년 12월에 일본 육사를 49기로 졸업한 그의 친일 이력을 이렇게 소개한다. “견습사관을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해 사세보의 군항을 지키는 중포(中砲) 장교로 복무했다. 1940년 육군포병학교를 수료했다. 일본 육군병기학교 교관, 오사카 육군 조병창 공장장 겸 병기행정부 부원을 거쳐 일제 패망 당시 육군 포병 소좌로서 경기도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부산 남쪽인 규슈현 서북부 군항인 사세보에서 야포를 다루며 항구를 지키는 장교였다. 침략전쟁기의 일본군에서 소령 계급까지 달았다. 무기 공장인 조병창의 공장장을 오사카에서도 지내고 경기도 부평에서도 지냈다. 항구든 무기든 일본을 위해 무언가를 지켜주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백범 김구 암살에 연루된 친일파 군인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22세 때인 1933년부터 제국주의의
[오마이뉴스] 두 아들의 아버지 ’46번 유골’… 그는 죽음을 강요받았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옥쇄 피해자 최병연 오는 28일 유해로 봉환되는 고 최병연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이중·삼중의 피해자다. 군무원인 일본 해군 군속으로 강제징용된 그는 징용 피해뿐 아니라 직접적인 전쟁 참화까지 입었다. 지금의 키리바시공화국에서 벌어진 타라와전투 때 도망가거나 투항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죽음을 맞았다. 호주와 하와이의 중간쯤인 이곳 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희생됐던 것이다. 동아시아 곳곳의 일제 식민지 주민들 상당수는 무기 같은 방어 수단도 갖추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내몰렸다. 병사가 아닌 최병연 같은 이들은 연합군 코앞에서 항복하거나 도주할 기회마저 차단당했다. ‘영광스러운’ 옥쇄(玉碎,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을 뿐이다. 최병연도 그런 피해자다. 강요받은 집단 죽음 1879년에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인 태평양전쟁 막판에 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열도는 1945년 6월까지 3개월간 미군의 공세에 노출됐다. 이로 인한 일본 측 사망자는 약 1만 8천 명이고 그중 1만여 명이 오키나와 주민들이다. 2010년에 공저작인 <현대 일본정치의 쟁점>에 실린 최기성 도쿄대 연구원의 논문 ‘일본 정치와 민족문제-오키나와의 전쟁 체험을 중심으로’는 “철혈근황대·여자학도대 등에 편성되었던 소년·소녀를 포함한 일반 주민 다수가 전투에 휩쓸리거나 일본군의 전투에 방해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집단 자결로 내몰리거나 희생되었다”고 한 뒤 오키나와인들에게 강요된 집단 옥쇄를 이렇게 설명한다.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은 당시 섬을 지배하던 수비대장이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주민을 진지 내에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투항을 권고하러
[오마이뉴스] 나라 팔아먹은 ‘친일 2관왕’… 이런 사람 또 나올지 모릅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제순 금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 118주년이다. 1905년 을사년에 대성공을 거둔 일본은 그로부터 두 번째 을사년인 1965년에도 대성공을 거뒀다(한일협정). 지금 일본은 윤석열 정부 임기 내인 2025년 을사년 때도 한번 더 대성공을 거둘 생각을 하고 있는듯 하다. 일본정부와 궁내청이 3번째 을사년인 2025년에 나루히토 일왕(천황)의 방한을 성사시켜 “요즘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 일한관계의 최종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지난 7월 13일 자 일본 여성지 <조세지신>에 보도됐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보좌하는 수상관저 관계자와 나루히토 일왕을 보좌하는 궁내청 관계자의 인터뷰에 기초했으므로 신빙성이 높은 보도다. (관련 기사: 첫 ‘일왕 방한’ 추진하는 기시다 총리, 무엇을 노리나, https://omn.kr/24sl7) 한때 을사보호조약으로도 불렸던 한일협상조약이 1905년 그날 체결됐다는 판단을 전제로 193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IMF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1997년 11월 17일부터 이날을 정부 주관의 기념일로 거행했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이 아닌 그다음 날 조인됐다.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조인된 것은 예정일보다 하루 뒤인 18일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에 인용된 조선총독부 발행물에 그렇게 적혀 있다. 총독부가 3·1운동 1년 전인 1918년에 펴낸 <조선의 보호 및 병합(朝鮮ノ保護及倂合)>은 “조인을 마친 것은 실로 11월 18일 오전 1시 반이었다”고 기술한다. 을사오적, 경술국적… 나라 팔아먹은 박제순 18일 새벽에 문제의 날인을 해준 인물은 을사오적인 친일파 박제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