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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죽이곤 발로 꽉꽉…그날 이후 한동안 밥 못먹어”
[증언②] “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 1950년 대전 골령골 첫 학살 현장에서 대한청년단원으로 구덩이를 파고 학살과정을 목격했다고 밝힌 A씨. 그가 14일 오후 현장을 방문해 당시 자신이 직접 판 구덩이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이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여기 도랑 까지 핏물로 바다이 뻘겋었다고 해. 얼마나 죽였길래 골령골로 접어드는 길머리인 산내초등학교 후문 앞(대전 동구 낭월동). A씨(82. 대전광역시 동구)가 혀를 차며 말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대전 골령골에서는 최대 약 7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A씨는 학살이 시작된 첫 날, 구덩이를 직접 파고, 시체가 쌓인 구덩이에 흙을 덮었다. 또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18살 때였다. 14일 오후 그는 자신이 겪은 65년 전 참혹한 현장 속으로 안내했다(관련기사 : 증언① “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1950년 여름 어느 날, 새벽 2시 “모여라” 1950년 여름 어느 날. 다급한 고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2시쯤이었다. 대한청년단 마을 간부였다. 이 간부는 마을 대한청년단원이 있는 집을 일일이 돌며 괭이와 삽을 들고 모이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만 20명이 모였다. 다들 어디서 큰 사고가 나서 복구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한청년단은? 대한청년단은 1948년 12월, 좌익계 청년단체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우익청년단체였다. 출범 당시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는 선서문을 채택했다. 총재에 이승만, 최고 위원에 장택상, 유진산, 신성모 등을
국가관 강조하더니… 한민고, 채택
[발굴] 한민고 “학운위에서 복수채택”… 역사연대 “식민지근대화론 동조?” ▲ 경기 한민고 모습. ⓒ 한민고 홈페이지 ‘친일·독재 옹호와 무더기 오류’ 논란을 빚어온 교학사의 고교<한국사> 교과서를 경기도에 위치한 한민고등학교(아래 한민고)가 뒤늦게 채택한 사실이 밝혀졌다. 법인 정관에 ‘건전한 국가관’을 내세우며 국민세금을 들여 지난 해 3월 개교한 군인자녀 기숙형고인 이 학교는 지난해에도 교학사 교과서 채택 움직임을 보여 군인 가족들이 반발한 바 있다. 16일 한민고는 “지난 2월 말 학교운영위를 열어 <한국사> 교과서로 교학사와 미래엔 교과서를 복수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학교는 이 달부터 교학사 교과서 등으로 한국사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수업을 위해 자비로 복수 채택된 2권의 교과서를 모두 사야 했다. 한민고 “진보·보수 토론수업”… 역사연대 “친일 옹호가 보수냐” 이 학교 전영호 교장은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역사 교사 2명의 선발이 2월로 늦어짐에 따라 <한국사> 교과서도 늦게 채택하게 됐다”면서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진보와 보수 교과서를 복수로 채택해서 건전한 토론수업을 하기로 함에 따라 이 같이 결정한 것”이라고 채택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전 교장은 “역사 교사들이 교과서를 3배수 추천하는 교과협의회에 이사회나 학교 관리자들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학술단체협의회 등 465개 단체가 모인 역사정의실천연대의 방은희 사무국장은 “교학사 교과서가 비판받은 것은 보수 교과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일 옹호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라면서 “‘건전한 국가관’을 강조하는 이 학교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각을 가졌다는 지적을 받아 온
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 논란 속 개방
[앵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에서 살았던 신당동 가옥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개방됩니다. 박 전 대통령이 5.16을 계획하고 지휘한 장소로 박근혜 대통령의 어린 시절 모습 등 가족들의 생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김선희 기자가 미리 둘러봤습니다. [기자] 서울 중구 신당동 다산로, 현대식 건물이 늘어선 골목 끝에 붉은 색 기와를 얹은 주택 한 채, 등록문화재 제412호 박정희 대통령 가옥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1958년부터 3년 동안 가족과 살았던 곳이자 197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박근혜 대통령 등 유족이 머물렀던 이곳이 일반에 공개됩니다. 신당동 가옥 개방이 주목받는 것은 바로 이곳이 박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계획하고 지휘했던 장소로 한국 현대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는 1960년대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생활했던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는데 공을 들였습니다. 또 어린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 등 가족 사진과 영상 자료도 함께 전시합니다. [인터뷰:이재연, 시민] “그 때가 그립습니다. 그 때는 국민을 잘살게 해줬고…. 그런 분이 또 한번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조영훈,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본부 학예사] “이 가옥과 더불어서 지금 복원 추진 중인 이화장하고 윤보선 대통령 가옥을 우리 현대사를 반추할 수 있는 교육의 현장으로써 프로그램을 해서 개방 운영 할 예정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가옥은 또 1930년대부터 유행한 서양식과 일식, 한식이 절충된 새로운 주거형태인 ‘문화주택’ 가운데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있어 건축사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뉴스펀딩] 3화 아버지는 왜 일본에 끌려가 죽어야만 했을까
태어난지 13개월만에 아버지를 잃은 이희자 할머니 이희자 할머니는 1943년 1월, 당시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군속으로 징용당한 것이 1944년 2월이었으니까 할머니가 돌을 갓 지났을 때였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할머니는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남편 잡아먹을 상’ ‘애비 잡아먹은 딸년’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천덕꾸러기처럼 외가에서 자라면서 이희자 할머니는 제대로 학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 가끔 외할머니가 들려주신 아버지 이야기가 이희자 할머니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할머니는 지금도 추운 겨울날 어린 딸아이와 아내를 두고 눈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심정이 전해지면서 오랜 세월 쌓여온 설움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마흔이 넘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서야 상상 속에만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나를 두고 왜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가야만 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말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을 수는 없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집으로 통지서 한 장 온 적도 없고, 인편으로라도 연락을 받지 못했으니 가족들은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없는 식민지였으니까, 전쟁통이었으니까, 그 때는 다 그랬어,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 섞인 낙담으로 묻혀질 의문이 아니었습니다. ▲ 23살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오른쪽
“그 많던 친일인명사전 어디갔지?”…비치율 20%
【청주=뉴시스】연종영 기자 = 충북지역 공공도서관의 친일인명사전 비치율이 너무 낮아 역사교육의 기본이 흔들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13일 충북도의회 338회 임시회 2차 본회의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장선배(청주 3) 의원은 5분발언을 통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자라나는 세대에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도, 친일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인명사전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장 의원은 “충북도와 충북도교육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니 공공도서관과 각급 학교 도서관의 친일인명사전 비치율이 형편없었다”며 “11개 시·군과 교육청이 관리하는 41개 공공도서관 중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한 곳은 10곳이고 비치율은 24%였다”고 밝혔다. 이어 “중·고등학교 도서관도 전체 212곳 가운데 41개 교(중학교 128개교 중 20곳 비치, 고등학교 84개교 중 21곳 비치)에만 인명사전이 있어 비치율이 19%에 불과하다”며 “일선 학교마저 올바른 역사교육을 소홀히 한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꼬집었다. “공동도서관 비치율이 20%에 불과한 상황을 보면서 우리에게 친일청산 의지가 있는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며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기는 커녕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는데도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인식은 점차 무뎌지고 있다는 점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장 의원은 그러면서 “일부 청소년들이 3·1절을 ‘삼점일절’이라 읽고 야스쿠니 신사를 ‘야스쿠니 젠틀맨’이라고 말하는 게 현실”이라며 ” 단재 신채호 선생께선 ‘역사를 잃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고 하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종영 기자, jyy@newsis.com <2015-03-09>뉴시스 ☞기사원문: “그 많던 친일인명사전 어디갔지?”…비치율 20% ※관련기사 ☞충북일보: 장선배 도의원 “공공도서관 친일인명사전 비치율 고작 24%”
박물관·도서관·미술관… 문화공간 재탄생한 ‘일제 랜드마크’
ㆍ(10) 서울 ▲ 총독부 청사·서울역·조선은행 도심 속 식민지 권력 상징 즐비 근대 문학 속에선 주요 무대 ▲ 대다수 리모델링 거쳐 재활용 아픈 역사와 경성의 추억 증언 지난 3일 아침 서울에는 비가 내렸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려 서울광장으로 올라왔다. 오전 9시쯤 되니 비가 그치고 공기는 한결 맑아졌다. 서울도서관(옛 서울시 청사·등록문화재 제52호)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시민들이 무상한 표정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수평으로 긴 4층 건물로, 길게 뻗은 수직창이 현관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경성부 청사란 초기 건립 목적에 맞게 제국주의 건축 어휘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식민지배의 중심지였다. 일본은 식민지배의 상징성을 구축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건축물들을 빠른 속도로 도심 곳곳에 세웠다. ‘경성’은 1911년 행정구역을 5부8면제로 개편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36년에는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면적이 4배로 확장됐다. 그사이 인구도 20여만명에서 40만명으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가장 많게, 가장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서울이다. ▲ 서울 봉래동에 있는 옛 서울역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만주~조선~일본을 잇기 위해 경성역이란 이름으로 1925년 준공했다. 광복 이후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50여년간 도시화의 핵심 장소로 쓰였다. 2011년 전시, 공연 등을 선보이는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로 재개관했다. ■ 식민지배의 중심지가 됐던 서울 일본 식민지배의 대표적인 상징 건축물로는 조선총독부 청사, 서울(경성)을 관할하는 경성부 청사, 정신적 억압기제인 조선신궁을 꼽는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재판으로 본 현대사](22)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上)
ㆍ발톱 꺼내든 ‘박정희 공포정치’… ‘반유신’ 장준하·백기완 첫 희생양 ■ 유신정권의 폭주, 각계의 저항과 개헌운동 5·16 군사 쿠데타(국권 찬탈) – 헌법 파괴 – 위헌적 3공 헌법 – 역시 위헌적 3선개헌 – 7·4 남북공동선언 – 10·17 대통령특별선언, 비상계엄 선포 – 헌법 효력정지, 국회 해산(비상국무회의, 국회 기능 대행) – 국회 배제한 유신헌법 – 통대 선거(체육관 대통령) – 영구집권 체제. 박정희 권부(權府) 출현 후 헌정 파괴의 궤적을 메모식 명사구(名詞句)로만 나열해 보았다. 박정희의 폭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3년 8월에는, 해외에서 ‘유신’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본에서 납치해 왔고, 10월에 들어서자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가의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12월에는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하에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런 범국민적 저항에 몰리게 된 대통령 박정희와 국무총리 김종필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서명운동의 중지를 강력히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한다. 하지만 이미 전국적으로 번진 개헌(유신헌법 폐지)운동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74년의 새해 벽두인 1월7일, 61명의 문인들이 개헌서명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는가 하면, 군부정권의 여당인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의장을 역임한 정구영과 전 사무총장 예춘호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함으로써 집권자를 낭패에 빠뜨렸다. ▲일러스트 | 박건웅 ■ 긴급조치 1호, 개헌청원에 15년 징역 그러자 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뉴스펀딩] 3화 아버지는 왜 일본에 끌려가 죽어야만 했을까
태어난지 13개월만에 아버지를 잃은 이희자 할머니 이희자 할머니는 1943년 1월, 당시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군속으로 징용당한 것이 1944년 2월이었으니까 할머니가 돌을 갓 지났을 때였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할머니는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남편 잡아먹을 상’ ‘애비 잡아먹은 딸년’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천덕꾸러기처럼 외가에서 자라면서 이희자 할머니는 제대로 학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 가끔 외할머니가 들려주신 아버지 이야기가 이희자 할머니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할머니는 지금도 추운 겨울날 어린 딸아이와 아내를 두고 눈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심정이 전해지면서 오랜 세월 쌓여온 설움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마흔이 넘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서야 상상 속에만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나를 두고 왜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가야만 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말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을 수는 없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집으로 통지서 한 장 온 적도 없고, 인편으로라도 연락을 받지 못했으니 가족들은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없는 식민지였으니까, 전쟁통이었으니까, 그 때는 다 그랬어,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 섞인 낙담으로 묻혀질 의문이 아니었습니다. ▲ 23살 청년의 모습으로 남은 아버지(오른쪽
[2015.03.11] 1909년 11월. 이토히로부미 추도회와 친일파
▲[2015.03.11] 라디오백년전쟁: 1909년 11월. 이토히로부미 추도회와 친일파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638249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50311nrh1.mp3
박한용 “선대는 군사쿠데타 하고 후대는 역사쿠데타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금속노조 경남지부 ‘노동자 통일학교’ 강연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친일파를 연구하고 친일인명사전을 내는 사람들이 ‘종북’으로 몰리는 사회가 되는 게 문제”라며 “사전을 내고 <100년 전쟁> 영화를 만들고 하니까 북한과 연계된 거 아니냐고 하던데, 친일 문제 제기가 민족반역이 되는 사회가 문제”라고 말했다. 박 실장은 12일 저녁 창원노동회관에서 금속노조 경남지부가 마련한 ‘노동자 통일학교’에서 “친일역사로 본 근현대사 100년”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뉴라이트 교과서’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그는 “친일 문제를 넘어 역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교학사 교과서 내용을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들은 잘 모르는데, 그 내용은 끔찍하다”며 “현 수구보수세력이 무엇을 꿈꾸는지 알 수 있고, 미래 파시스트 양성 교육자료이며, 새누리당 지지자를 만드는 교육”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한 곳에서만 채택했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를 해서 실패하자 이번에는 국정교과서화를 하려고 한다”며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총대를 멨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다”고 덧붙였다.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12일 저녁 창원노동회관 대강당에서 금속노조 경남지부 초청으로 “친일역사로 본 근현대사 100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 윤성효 그러면서 그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역사 쿠데타다, 애비(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하고 딸(박근혜)은 역사쿠데타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기념관에서 방영하는 4분 짜리 홍보동영상을 틀어준 뒤, 그는 “웃음이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런 게 현재 초등학생한테 먹힌다는 것”이라며 “가장 좋은 학습은 세뇌다, 박정희기념관은 세뇌공작소다, 그 동영상을 교과서로 만든 게 교학사 역사교과서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