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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특별기고]한국사 국정화, 삐뚤어진 교과서 만들 텐가
[이이화 특별기고] 올해는 민족사적으로 환희와 비극이 교차한 광복과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들머리부터 이완구 국무총리 인준을 두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는데 또 일본 총리 아베는 봄을 맞이해 군국주의 부활을 외칠 모양이다. 그런데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지난 연말, 올 3월에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한국사의 국정화를 결정짓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작업이 지금 내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의도와 목적은 무엇일까? 아마도 남북이 분단되어 있으면서 이질적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대 상황에서 정부의 통제 아래 두고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군국 국가나 전제체제적 발상이다. 현재 일본에서도 군국주의적 발상으로 근현대사 중심의 교과서 서술을 왜곡하고 있으나 국정으로 가자는 논의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현재 교과서 발행제도의 세계적 추세는 검정과 인정, 자유채택제로 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국정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를 겪었거나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나라인 북한을 비롯해 베트남, 러시아다. 불행하게도 1970년대 반민주적·반역사적·반동적 유신체제를 겪었던 한국도 한때 한국사 국정교과서 국가에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를 더 돌아보자. 조선왕조 시대에도 사학이든 관학이든 아동교육 교과서로 <천자문> <동몽선습>을 가르쳤으나 국정교과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채택하였다. 대한제국 시대에 신교육의 보급에 따라 교과서가 발행되었으나 검정 또는 인정 제도를 시행하여 채택의 자율성이 상당히 보장되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 당국은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을 현장에서 몰아내고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필수로 가르치면서도
[단독]“화폐 속 세종·이순신… 친일 화가 그림 빼자” “지금까지 봐왔는데 그때 우리는 얼 없었나”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지난 23일 법안심사소위에서 때아닌 ‘친일’ 논쟁이 벌어졌다. 화폐 등에 그려져 있는 위인들 초상화 중 친일 반민족행위 전력이 있는 화가들의 그림을 빼자는 법안을 놓고 여야가 찬반으로 갈려 설전을 벌인 것이다. 이날 심의된 법안은 새정치민주연합 배재정·조정식 의원이 각각 발의한 것이다. 배 의원은 지난 2013년 7월 국가공인 영정을 지정하고, 이를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10년 단위로 공모해 재지정하는 법안을 냈다. 국가공인 영정 지정 등을 위한 위원회 설치 등도 담았다. 조 의원도 지난해 11월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다만 ‘친일 반민족 행위자 저작의 영정지정 불가’를 명시한 것이 배 의원 법안과 달랐다. 두 법안 모두 “친일 전력 화가들이 그린 위인 초상화를 정부가 나서서 더이상 쓰지 말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으로 담겼다. 문제된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1만원권 세종대왕, 이당 김은호 화백의 5만원권 신사임당, 월전 장우성 화백의 100원짜리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초상화 등이다. 김기창·김은호 화백은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에 의해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다. 장 화백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경향신문이 26일 입수한 국회 속기록 초고를 보면, 여야의 첨예한 친일 논쟁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새정치민주연합 김태년 의원은 “일반 그림과 달리 우리 민족의 혼과 얼, 자긍심 등을 담는 그림이어야 하는데, 친일파 화가들 그림이라면 민족적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 아닌가”라며
뻥 뚫린 두개골 아래엔 M1 탄피… “끔찍해서 못 보겠다”
[유해발굴 4일째]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시간이 부족하다” ▲ 오른쪽 두개골 아래 또다른 두개골이 보인다. 두 유해의 몸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끔찍해서 못 보겠네요. 끔찍해서…” 26일 오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유해발굴 자원봉사를 하던 희생자 유가족 이계성씨가 탄식을 쏟아냈다. 이씨의 아버지는 1950년 이곳에서 살해됐다. 그의 시선이 발굴 중인 유해에 멈췄다. 뻥 뚫린 두개골이 반쯤 드러나 있다. 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이 붓질을 반복하자 한참 뒤 팔뼈가 모습을 보였다. 다음 순간 보인 것은 두개골 방향으로 꺾인 다리뼈다. 박 단장은 “시신이 반쯤 접힐 정도로 구덩이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포개진 머리뼈에 얹힌 M1 탄피… “확인 사살 증거” ▲ 두멍 뚫린 두개골과 그 아래에서 발견된 M1 소총 탄피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구멍 뚫린 두개골(가운데)을 중심으로 아래쪽이 팔뼈이고 윗쪽은 다리뼈다. 시신의 다리가 머리쪽으로 접혀 있음을 보여준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뒤이어 머리뼈 아래에서 당시 남한 군인들이 사용한 M1 소총 탄피가 나왔다. 자신의 머리를 구멍 낸 가해자를 증명하려는 듯 시신은 그 물증을 지니고 있다. 뻥 뚫린 머리뼈와 함께 나온 탄피는 학살이 끝난 뒤 다시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쏴 확인사살했다는 증언을 뒷받침한다. 내동댕이친 시신의 머리에 다시 총구를 들이댄 것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여쯤 흘렸을까? 앞서 드러난 두개골 아래에서 또 다른 머리뼈가 나타났다. 머리와 머리가 서로
일제 경찰 작성 ‘감시대상 인물카드’ DB로 공개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일제 강점기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가 등 ‘문제 인물’로 낙인한 이들을 관리하고자 만든 카드 형태 기록이 온라인으로 공개된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자체 소장한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 6천264장을 제96주년 3·1절을 맞아 데이터베이스(DB)로 서비스한다고 26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인물카드는 일제 경찰에 검거 또는 수배되거나 감시를 받던 인물에 대해 당시 경기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이다. 유관순, 한용운, 안창호 등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포함돼 ‘수형자 카드’ 또는 ‘독립운동가 신상기록카드’ 등으로도 불렸다. 가로 15㎝·세로 10㎝ 크기 카드에 사진과 함께 이름, 본적, 주소 등 신상정보와 검거 시기 및 관서, 죄목, 재판 정보 등 사법처리 내역이 기록돼 있다. 일제는 3·1운동으로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이 고양되자 위기감을 느끼고는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관리를 강화하고자 인물카드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작성 시기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후반 또는 1920년 무렵으로 보이며, 유관순을 비롯해 3·1운동 관련자 700여명의 카드 760건도 남아 있다. 국편 관계자는 “일제 경찰당국은 일제의 통치에 반대, 반항했거나 그런 행동을 취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의 명부를 만들어 일상을 추적·감시했다”며 “인물카드는 이런 인물들에 대한 수사와 체포의 효율성을 높일 기초자료로 고안돼 일제 말기까지 사용됐다”고 말했다. 카드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는 이광수나 최린처럼 이후 친일로 변절한 이들이나 경제사범, 일본인과 중국인도 일부 포함됐다. 수배, 체포 이후 등 신병 확보 여부에 따라 한 인물에 관한 카드가 여러
14살 학생부터 기생, 승려까지…일제 판결문에 드러난 3·1 만세운동
“대정 8년(1919) 4월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갔을 때 윤수선(尹秀善)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 강덕수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 박소수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략)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武安) 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丁)의 도로를 열어 지어 걸었다.” 일제 강점기 3·1운동에 나선 밀양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14~15살 소년들에 대한 판결문의 한 대목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부터 기생, 승려까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일제 강점기 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확인됐다. 일제에 의해 식민화된 당시 법원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소년들에게도 보안법과 형법 등을 적용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국가기록원은 일제의 판결문을 통해 본 영남과 호남, 제주의 3·1운동을 담은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펴냈다고 26일 밝혔다. 남부지역 3·1운동의 전개양상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판결문 원문 50건(286명)을 한글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지난해 경기·강원·충청 등 중부지역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을 펴낸 데 이어 두번째다. 이번에 펴낸 자료집에 실린 판결문을 살펴보면, 기생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통영의 기생조합 소속 기생 정막래(21)와 이소선(20)은 금반지와 금비녀 등을 팔아 같은 복장차림으로, 수천명이 함께 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탰다. 식민지 법원은 정막래와 이소선에게 각각 징역
고교생까지 합세… 유해발굴 현장 ‘북적’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3일째… 자원봉사로 참여한 조영선 민변 사무총장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이 북적였다. 유해발굴을 위한 일손이 부족하다는 하소연이 전해지자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으로 몰려 생기가 넘쳤다. 발굴 3일째인 이날 40여 명이 일손과 마음을 보태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인근 금산에서 생업을 뒤로 하고 50대 남성이 달려왔다. 고교생 2명도 현장을 찾아 삽을 들었다.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아래 민변) 소속 6명의 변호사들이 유해매장지를 방문, 삽과 호미를 들고 희생자들을 변호했다. 유가족들은 직접 떡과 식혜를 만들어 유해발굴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 유해발굴 3일 째인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유해발굴 현장. 가로 약 3mx 세로 약 8m 구덩이에 유해가 즐비하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25일 오후)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현장 자원봉사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곳곳에서 마음을 전해오고 있다. 김동춘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지금 대전 산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 유족들의 주도로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라며 “현대사와 한국전쟁 학살의 물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니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한 번 가보시기 바란다”고 권유했다. 김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하던 지난 2007년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29명의 유해 발굴 현장 사진을 소개하며 “이를 원형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면 난징등과 견줄 가장 좋은 평화교육 현장이 됐을 것”이라며 “당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고 지금 봐도 많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구덩이에 층층이 쌓아”… 살해 증언과 일치한 현장
[유해발굴 둘째날] ‘A1 탄피’가 발견된 매장지 흙이 유독 까만 이유는? ▲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드러났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1950년 당시 촬영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여기요 여기! 이것 좀 보세요!” 24일 오전 11시쯤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유해발굴 현장.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하던 발굴팀 자원봉사자가 김민철 총괄 진행요원(민족문제연구소)을 불렀다. 서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뼈와 팔뼈, 두개골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박선주 발굴단장(68, 충북대 명예교수)은 “희생자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포개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구덩이 안에 배추포기 쌓듯 층층이 쌓아 놓았다’는 당시 현장에서 살해과정에 참여한 관계자 증언과도 일치한다. 당시 현장 살해 모습이 담긴 사진에도 구덩이 안에 시신을 포개 놓은 장면이 눈에 띈다. (관련 기사 :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오후가 되자 작업자들이 숨소리가 커졌다. 삽질하는 작업자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유해 발굴지에서 파낸 흙을 옮겨 놓은 흙더미가 높아졌다. 흙더미가 커질수록 드러난 유해도 늘어났다. 수백 여 점의 유해 파편이 즐비하다. 검정 고무신과 뒷굽이 있는 신발도 각각 발굴됐다. 흰색 단추도 나왔다. 희생자들을 민간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있는 현장 ▲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매장지에서 발굴된 A1소총 탄피(아래)와 탄두(원안). 탄두 아래 희생자 두개골로 보이는 뼈가 박혀 있다. 이날 발굴조사단은 A1소총
고교생까지 합세… 유해발굴 현장 ‘북적’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3일째… 자원봉사로 참여한 조영선 민변 사무총장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이 북적였다. 유해발굴을 위한 일손이 부족하다는 하소연이 전해지자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으로 몰려 생기가 넘쳤다. 발굴 3일째인 이날 40여 명이 일손과 마음을 보태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인근 금산에서 생업을 뒤로 하고 50대 남성이 달려왔다. 고교생 2명도 현장을 찾아 삽을 들었다.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아래 민변) 소속 6명의 변호사들이 유해매장지를 방문, 삽과 호미를 들고 희생자들을 변호했다. 유가족들은 직접 떡과 식혜를 만들어 유해발굴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 유해발굴 3일 째인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유해발굴 현장. 가로 약 3mx 세로 약 8m 구덩이에 유해가 즐비하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25일 오후)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현장 자원봉사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곳곳에서 마음을 전해오고 있다. 김동춘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지금 대전 산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 유족들의 주도로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라며 “현대사와 한국전쟁 학살의 물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니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한 번 가보시기 바란다”고 권유했다. 김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하던 지난 2007년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29명의 유해 발굴 현장 사진을 소개하며 “이를 원형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면 난징등과 견줄 가장 좋은 평화교육 현장이 됐을 것”이라며 “당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고 지금 봐도 많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이날
[2015.02.23] 일본군 헌병보조원에서 대한민국 특무대장으로 변신한 김창룡 1
▲[2015.02.23] 백년전쟁 : 일본군 헌병보조원에서 대한민국 특무대장으로 변신한 김창룡 1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626606 ☞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50218nrh1.mp3
“구덩이에 층층이 쌓아”… 살해 증언과 일치한 현장
[유해발굴 둘째날] ‘A1 탄피’가 발견된 매장지 흙이 유독 까만 이유는? ▲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드러났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1950년 당시 촬영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여기요 여기! 이것 좀 보세요!” 24일 오전 11시쯤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유해발굴 현장.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하던 발굴팀 자원봉사자가 김민철 총괄 진행요원(민족문제연구소)을 불렀다. 서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뼈와 팔뼈, 두개골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박선주 발굴단장(68, 충북대 명예교수)은 “희생자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포개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구덩이 안에 배추포기 쌓듯 층층이 쌓아 놓았다’는 당시 현장에서 살해과정에 참여한 관계자 증언과도 일치한다. 당시 현장 살해 모습이 담긴 사진에도 구덩이 안에 시신을 포개 놓은 장면이 눈에 띈다. (관련 기사 :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오후가 되자 작업자들이 숨소리가 커졌다. 삽질하는 작업자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유해 발굴지에서 파낸 흙을 옮겨 놓은 흙더미가 높아졌다. 흙더미가 커질수록 드러난 유해도 늘어났다. 수백 여 점의 유해 파편이 즐비하다. 검정 고무신과 뒷굽이 있는 신발도 각각 발굴됐다. 흰색 단추도 나왔다. 희생자들을 민간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있는 현장 ▲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매장지에서 발굴된 A1소총 탄피(아래)와 탄두(원안). 탄두 아래 희생자 두개골로 보이는 뼈가 박혀 있다. 이날 발굴조사단은 A1소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