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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하는 ‘친일’도로, 사라지는 ‘항일’도로
해방 70년을 맞는 오늘 일부 도로는 여전히 친일의 자취를 담고 있는 반면, 기존에 담겨 있던 독립운동가의 흔적은 도로명에서 배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 친일의 자취 인촌로 조방로…”명칭 변경 어려워” 25일 행정자치부와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서울 성북구와 전북 고창군에는 ‘인촌로’가 있다. 인촌은 고려대학교 설립자 김성수의 호(號)로, 성북구에는 고려대가 위치해 있고 고창군은 김성수의 고향인 탓에 이 같은 도로명이 붙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인촌로’ (사진=박종민 기자) 문제는 김성수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지난 2009년 친일 인물로 규정됐다는 점이다. 그가 일제 강점시기 전국 일간지에 조선총독부의 태평양전쟁 동원을 위한 징병과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을 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기고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인촌기념회와 후손은 위원회 결정에 대해 취소 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관할 구청은 법원의 최종 판결이 어떻든 도로명 변경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성북구청 관계자는 “이에 대한 민원이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에 바뀌기는 힘들 것”이라며 “재판에서 친일파라고 최종 결정된다 해도 현행법상 구에서 도로명 주소를 변경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부산의 경우 범일동 시민회관 인근 도로가 ‘조방로’로 명명돼 있다. 1968년 사라진 ‘조선방직’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일제가 면사방직과 판매를 위해 설립한 조선방직은 시민지 시대 우리 민족에 대한 가혹한 노동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때문에 1943년 조선방직 파괴를 시도하다 체포된 독립운동가 이광우의 아들이, 1인 시위를 하면서까지 명칭 변경을 요구했지만 그 이름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 항일의 뜻 새긴
대전 산내 유해발굴 개토제 현장 …”아부지 아부지…” 중년의 딸 애끊는 사부곡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수천명 …낭월동서 학살당했다 알려져 “유해라도 찾아 모시고 싶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공동조사단 제2차 유해발굴 개토제가 23일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낭월동) 유해발굴지에서 열려 한 유가족이 오열을 하고 있다. 전우용 기자 yongdsc@ggilbo.com 23일 오전 9시 경 대전 동구 낭월동(구 산내면 골령골)의 -대전형무소 정치범 및 민간인 집단 1학살지-를 알리는 비석 주위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추모의 침묵에 빠져드는 유족들은 저마다 부모, 형제, 친지를 잃은 기억을 떠올리며 깊은 회한에 젖어 들었다. 한반도에 전쟁의 포화가 드리웠던 1950년 대전 산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혔다. 생각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야만 속에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할 국가의 이성은 깊게 매장됐다. 개토제가 열린 이날 오전 하늘에서는 검은 까마귀들이 날갯짓을 하며 울어댔다. 이 골짜기에서 희생된 이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 명. ‘흙을 파기 전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개토제는 산자와 죽은자를 연결해주는 의식. 한삼을 나빌레는 경기민요인의 춤과 유가족들의 제례는 사라진 그들의 넋을 의로했다. 검은 비석 앞에서 한 중년여성은 “아부지 내가 왔는데 대답이 없소. 아부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소. 누가 이랬는가.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라고 목 놓아 울었다. 비통의 정서에 이를 지켜보던 한 중년 남성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가 학살된 이후 힘겨운 삶을 살아온 유족들은 그 고된 삶을 주저리주저리 다른
유해공동조사단 “청·장년 일손 절실” 참여 호소
[유해 발굴 둘째 날] 대전 산내 골령골… 일손 부족으로 작업 일시 중단 ▲ 유해공동조사단에 참여한 한 자원봉사자가 호미질로 조심스럽게 부서진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호미와 괭이를 이용,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일군 흙은 다시 양동이에 담아 옮겨야 한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24일 오전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작업이 일손부족으로 일시 중단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유해발굴을 위한 청년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발굴 둘째 날인 이날, 박선주 발굴단장(68,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은 “유해 매장지 깊이가 약 1.5미터 정도로 추정된다”며 “현재 주로 참여하는 여성들만으로는 흙을 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대전 및 인근지역에 거주하는 청·장년들의 일손이 절실하다”며 참여를 호소했다. 공동조사단에는 약 20명이 참여하고 있지만 대부분 여대생 등 여성들이다. 공동조사단은 23일 발굴 작업을 시작했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유해가 약 1. 5미터까지 켜켜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관련기사: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 약 1.2미터 아래에 희생자의 다리뼈로 추정되는 유해가 드러났다.(붉은 색 원안). 유해가 깊이 1.5 미터까지 켜켜이 쌓여 잇는 것으로 보인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유해를 훼손하지 않으려면 수작업에 의존해야 한다. 호미와 괭이를 이용,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일군 흙은 다시 ?양동이에 담아 옮겨야 한다. 때문에 땅을 파내려갈 청·장년들의 참여가 요구된다. 공동조사단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23일 오전 10시 대전
“친일작품 쓴 유치환·이원수 맨얼굴 봐야”
▲왼쪽부터 유치환 시인, 이원수 아동문학가. 박태일 교수 ‘…부왜문학’ 펴내 유치환 5편·이원수 5편 분석 “항일세력 죽음 능멸하는 등 식민 시대 제 이득만 꾀해” <깃발> <행복>의 시인 유치환(왼쪽 사진)과 <고향의 봄>의 이원수(오른쪽)의 친일 문학을 규명한 연구서가 나왔다. 박태일 경남대 국문과 교수는 새로 낸 책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소명출판)에서 이 두 문인의 친일 작품을 공개하면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문학적 평가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2004년에 낸 책 <경남·부산 지역문학 연구 1>에서 이 두사람과 소설가 김정한 등 세 문인의 친일 혐의를 제기한 바 있다. 새로 낸 책에서 박 교수는 유치환(1908~1967)이 1940년대 전반기 만주 체류 때 쓴 시 네편과 산문 한편에 친일 혐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가운데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敵)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도다”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수(首)>라는 작품은 항일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의 죽음을 반대쪽에 서서 능멸하며 “타자의 ‘생명’에 대한 잔혹한 가학심리까지 내보이고 있”다고 박 교수는 비판한다. 이와 함께 “‘대동아전쟁’ 승리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새 음악 건설, 새 미래 건설, 그것을 짊어지고 나갈 새 세대의 도래”라는 주제를 담은 <전야>와 “아세아의 산맥 넘에서/ 동방의 새벽을 이르키다”라는 구절이 포함된 <북두성> 역시 친일 작품으로 읽힌다고 그는 파악했다. 박 교수는 이런 시들이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황국신민’으로서 각오를 다진 노골적인 친일 산문 <대동아전쟁과
“역사를 과거의 일로만 보지 말자“
<광복 70주년 릴레이 인터뷰 ③>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과 17일 연구소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근현대사 140년의 획기를 이루는 시기다. 외세 침탈을 받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에 대해 제대로 진단해보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모색하는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본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대역사(役事)를 통해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올해를 ‘해방 70년’ 만이 아니라 ‘근현대사 140년’이라는 보다 큰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의 역사적 의미는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부터 일제 식민 36년을 포함해 일제 침략 70년 만에 해방됐고, 그 이후 불완전하지만 해방 70년, 분단 역사 70년이 되는 해”라는 것. 조세열 사무총장은 17일 서울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를 “을미사변 120년 되고, 을사늑약 110년, 경술국치 105년 되는 해”이자 “현대사에서 중요한 것은 한일협정 50년이 되는 해”라고 짚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든지, 영토 문제, 동북아 전후청산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에 “한일협정 50년 간의 변화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는 ‘해방 70년’을 맞아 일회적 이벤트성 행사를 지양하기 위해 2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며 “성과를 남기고 활용할 수 있는 사업에 치중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이 광복 70주년과 한일협정 50주년 관련 주요 사업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친일인명사전과 탄핵반대 촛불시위, 도올의 호소에 3천만원 원고료 쌓여
[창간 15주년] 오마이뉴스를 만든 100대 기사·사건③ 언론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마이뉴스가 헤쳐온 길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오마이뉴스 15년의 역사를 100대 기사와 사건으로 풀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41] 국민 모금으로 만든 친일인명사전 (2004. 1. 8) ▲ 2004년 1월 19일 저녁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 달성 기념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독립군가 ‘압록강행진곡’을 다같이 부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지금이라도 일제강점기 친일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호소를 야당은 대놓고 묵살했고, 행정자치부와 국무조정실 등 정부 부처들은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결정적으로 2003년 12월 29일 국회 예결위 예산조정소위(위원장 박종근 한나라당 의원)가 예산조정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에 책정된 예산 5억 원 전액을 삭감해 사업 자체가 좌초돼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차라리 친일인명사전 발간비용을 우리가 모으자”는 고등학교 철학교사 김호롱씨의 익명 댓글(1월7일)은 광야를 불사르는 한알의 불씨가 되었다. (http://omn.kr/bnre) 이튿날부터 시작된 캠페인으로 모인 성금은 19일 5억 원을 돌파해 7억 원의 편찬자금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그날 저녁 7시 서울 명동의 옛 반민특위 표석 앞에서는 작은 성공을 축하하는 누리꾼들의 ‘번개’가 열렸다. 2009년 11월 8일 완간된 친일인명사전(총3권, 3000여 쪽)은 친일인사 4389명의 기록을 담았다. [42] ‘탄핵 반대’ 촛불시위 현장 중계 (2004. 3. 20) ▲ 2004년
25일 ‘화성의 독립운동’ 역사문화 토크콘서트
【화성=뉴시스】김기원 기자 = 경기 화성시는 ‘화성의 독립운동, 무엇이 일제를 두렵게 했나?’란 주제로 역사문화 토크콘서트를 연다고 22일 밝혔다. 역사문화 토크콘서트는 오는 25일 오후 2시∼4시까지 화성문화원 대강당에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의 사회로 진행된다. 전문패널로 수원대 박환 교수, 청암대 성주현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연구위원이 참석해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학술적 연구 성과를 발표한다. 이날 발안만세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스코필드 박사를 통해 제암리 학살사건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된 과정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등이 소개된다. 일제강점기 화성은 어떤 모습이었나, 향남?팔탄지역의 독립운동 이끈 사람들, 일제는 왜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으켰을까,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다 등의 소주제로 나눠 시민들의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갈 예정이다. 화성문화원은 이 같은 연구성과를 토대로 화성독립운동 기념관 건립를 추진할 계획이다. 고정석 문화원장은 “이번 행사로 시민들이 화성지역 순국열사들에 대한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kkw517@newsis.com <2015-02-18> 뉴시스 ☞기사원문: 25일 ‘화성의 독립운동’ 역사문화 토크콘서트 ※관련기사 ☞경기인터넷뉴스: [영상뉴스] 화성시, 25일 ‘화성의 독립운동’ 조명 토크콘서트 ☞경기eTV뉴스: 화성시 역사문화 토크 콘서트, “화성의 독립운동, 무엇이 일제를 두렵게 했나?” ☞케이에스피뉴스: 화성문화원, 화성시 역사문화 토크콘서트 개최 ☞아시아투데이: 화성시, 25일 역사문화 토크 콘서트 개최 ☞신아일보: 화성, 제1회 역사문화 토크 콘서트 개최
80세 보성여관 여전히 손님 맞고… 78세 보성강발전소 ‘생생’
ㆍ(7) 전남 벌교읍 ▲ 쌀·해산물 수탈 포구로 번성 현부자 집·소화다리 과거 흔적 벌교금융조합은 문화재로 지정 ‘삐걱’. 널빤지가 부대끼며 내는 소리는 80년이나 된 건물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2층에 오르자 4칸짜리 널찍한 ‘다다미방’이 펼쳐졌다. 다다미방 끝 창문에서 내려다본 전남 보성군 벌교읍은 퇴락한 건물들 속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한 토막씩 숨어 있었다. ‘보성여관’. 1935년 문을 연 이 여관은 등록문화재이지만 현재도 숙박이 가능하다. 1층에서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김성춘 매니저는 “지금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정도로 보면 된다”고 했다. 건물이 7채에 방이 13개나 됐던 보성여관은 번성했던 벌교의 모습을 대변한다. 지금은 인구 1만4000명 남짓한 소읍이지만 일제시대 벌교는 전남 4대 도시였다.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자료’를 보면 1935년 전남지역 인구는 목포 6만734명, 광주 5만4607명, 여수 2만8205명, 벌교 2만4254명이었다. 순천은 2만1938명에 그쳤다. 일본인만 벌교에 550명이 넘게 살았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남아있는 ‘보성여관’. 일제시대인 1935년에 지어진 이 여관은 현재로 치면 ‘특급 호텔’ 수준으로 당시 방이 13개나 됐다. 한옥과 일본식 건축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로 1층은 온돌이지만 2층에는 4칸짜리 널찍한 ‘다다미방’이 있다. 해방과 함께 쇠락하며 잊혀진 도시 벌교를 다시 살려낸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조정래(72)였다. 벌교를 무대로 <태백산맥>을 쓴 작가는 벌교읍 100년을 기념해 발행된 ‘벌교읍지’에 이렇게 적었다. “시골이 무대가 되는 작품을 구성하게 되면 어김없이 벌교의 풍광 전체가 일시에 떠올라 의식을 꽉 채워버리는 것이다.
96년 전 독립선언 감격 그대로…성안길서 릴레이 낭독
▲【서울=뉴시스】 허경 기자 = 민족문제연구소가 삼일절을 맞아 1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연구소에서 독립선언서 원본 등 일본 식민지 시절의 자료를 전시하는 역사관을 열고 있다. 역사관은 일제시대 발간된 잡지, 엽서, 일본이 만든 ‘한국병합 기념화보’등 100여점의 자료가 전시된다. neohk@newsis.com 2010-03-01 다음 달 1일부터 연말까지 매일 낮 12시 성안길에서 【청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96년 전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선언의 감격이 충북 청주에서 이어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은 충북발전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와 공동으로 다음 달 1일부터 연말까지 10개월간 ‘365일 독립선언서 릴레이 낭독 행사’를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주최 측은 일본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만방에 외쳤던 선열의 숭고한 역사를 계승 발전하기 위해 날마다 낮 12시 청주 성안길 로데오거리에서 행사를 진행한다. 독립선언서 낭독은 청주문화재단 인터넷 홈페이지(www.cjculture.org) 또는 전화(043-219-1014 문화예술부)로 국민 누구나 가족·단체 등으로 사전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다. 96주년 삼일절인 다음 달 1일에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비롯해 자유와 독립을 주제로 한 플래시몹 퍼포먼스, 시민이 자신의 주체적인 독립 의지를 공표하는 ‘나는 □□로부터 독립하련다’ 낭독 등 다채로운 개막 행사가 펼쳐진다. 청주문화재단 김호일 사무총장은 “기미년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권병덕·신석구·신홍식 선생 등 4명의 인물이 청주 출신일 만큼 청주는 충절과 의기의 전통이 이어져 온 문화도시”라며 “청주의 역사·인문학 자산을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ksw64@newsis.com <2015-02-18> 뉴시스 ☞기사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