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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유해 말로만 찾는다는 국가보훈처
[헤럴드용산동작=권지나기자] 국가보훈처가 광복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안중근의사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지역에 탐지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혔으나, 중국 측의 발굴 허가조차 받지 못한 상황에서 사업 추진 계획을 밝혀 빈축을 사고 있다. 또 안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임에도 불구, 남북한 공동 발굴작업에 대한 협의조차 검토하지 않아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가보훈처는 지난달 19일 열린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지난 2013년 옛 뤼순 감옥 묘지에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이 지역에 지표투과레이더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중국 측에 요청했다”며 “매장지로 추정되는 중국지역에 대해 올해 지하탐지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안중근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은 지난 2005년, 2008년에 진행됐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올해로 세 번째를 맞고 있다. ◆올해 유해 찾기 사업, 이전 사업과 어떻게 다르나? 안중근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은 올해로 세 번째로 추진되는 사업으로 앞서 남북이 2005년 장관급회담에서 공동조사에 합의한 바 있으며, 지난 2008년에는 류순 감옥 소장의 딸이 증언한 내용을 바탕으로 발굴이 진행됐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후 2013년 옛 뤼순 감옥 묘지터에 위치한 안 의사 묘지를 참배했다는 새로운 증언이 나오면서 보훈처를 중심으로 재발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옛 뤼순 감옥 묘지 터에 대해서는 그동안 유해 발굴 조사나 탐지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뤼순 감옥 건물 뒤편에서만 진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보훈처는 해당
민문연, 23일 대전서 한국전쟁 민간인 유해 발굴
☞ 한국전쟁 유해발굴 개토제 및 발굴조사 참가신청 안내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민족문제연구소는 23일부터 대전시 동구 낭월동(옛 산내면) 인근 지역에서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 유해 발굴을 진행한다고 17일 밝혔다. 연구소에 따르면 낭월동 인근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후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연구소는 지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수천여명이 세 차례에 걸쳐 학살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소는 앞서 작년 2월 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등과 함께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을 출범, 경남 진주 명석면 일대에서 1차 유해 발굴 조사를 거쳐 39명의 유해와 유품을 찾아낸 바 있다. 이번 대전 지역 발굴에서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등 19개 지역 시민단체가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함께 하기로 했다. 연구소는 “한국전쟁 당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뚜렷한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고 이름 모를 산속에 버려졌다”며 “우리나라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사회 통합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국가 폭력에 희생된 분들의 진상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tsl@yna.co.kr <2015-02-17> 연합뉴스 ☞기사원문: 민문연, 23일 대전서 한국전쟁 민간인 유해 발굴 ※관련영상 ※관련뉴스 ☞YTN: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전쟁 유해 발굴 예정 ☞대전뉴스: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2차 유해 발굴 ☞통일뉴스: “60년의 어둠 거두어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한겨레: 한국전쟁 초기 민간인 4400~8000명 학살…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23일
‘신민’ 만들기가 ‘국민’ 만들기로… 일본도 버린 ‘잔재’ 여전히 답습
ㆍ(6) 교육 – 교육에 숨은 식민권력 ▲ 미 군정의 일본 교육개혁 교사 권한 강화, 국가 통제 약화 평화·민주시민교육 강조 ▲ 한국은 중앙집권적 교육과정 사범대 중심 교원 양성 그대로 유신체제에서 오히려 강화 ▲ 과도한 국가주도적 교육 체제 교장·교사·학생 수직적 관계로 학생 인권·교권, 해방되지 않아 “어떤 선생님은 수업 전에 차렷 경례를 10번이나 시킨 적도 있어요. ‘각이 안 살아있다’고. 몇 년 전 다녔던 미국 중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님이 수평적 관계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한국에선 대체로 선생님들이 위에 있고 학생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한자를 제대로 못 쓴다고 손바닥 맞고, 체육선생님들은 걸핏하면 엎드려뻗쳐를 시켜서 허벅지 뒤를 때리는데, 내가 맞을 때도, 친구들이 맞는 걸 봐도 기분이 정말 나빠요.” (서울 ㄱ중 3학년 여학생) “90년대 후반 사립중에 부임했는데, 제가 다닐 때의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중앙현관으로 못 다니게 하고 한달에 한번은 운동장 조회에서 교장선생님 훈화를 듣고, 아침마다 선도부, 생활지도부 교사가 교문에서 아이들 두발, 복장을 단속하고…. 아이들에게만 그런 문화가 남아 있는 게 아니었어요. 월요일마다 열리는 교무회의는 교장, 교감선생님의 지시사항만 전달하는 자리고, 교사들은 입도 뻥긋 못하는 분위기예요.” (서울 ㄴ중 40대 교사) 1996년 3월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학교라는 의미의 ‘국민학교’가 일제히 ‘초등학교’로 바뀌며 일제 잔재 청산의 물꼬가 터진 듯했다. 그러나 해방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일제가
‘조봉암 농림장관’ 천거한 대지주 출신 한학자
[손병관의 인물현대사⑥-2] 윤여준의 부친 윤석오 ▲ 1958년 8월 10일 경향신문 1면에 실린 윤석오의 동정 기사 ⓒ 경향신문 이승만 말 받아쓰며 능력 인정받아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부친 윤석오(1912~1980)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권력 지형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한학자였던 그는 1945년 11월의 어느 날 고하 송진우(한민당 수석총무)의 추천으로 돈암장에 머물던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위당 정인보(윤석오의 스승, 초대 감찰위원장)의 친구였던 송진우는 윤석오에게 “여기서 힘든 일을 잘 이겨내면 나중에 큰일을 하게 된다”는 언질을 줬다고 한다. 그러나 윤석오와 이승만의 인연을 맺어준 송진우는 그해 12월 30일 암살당한다.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동안 한국어를 자주 쓸 일이 없었기에 귀국 직후 그의 말투를 받아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석오는 이 부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그의 신임을 얻게 됐다. 윤씨는 이승만이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과 하지 사령관과의 갈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마포장 시절(1947.8.25~10.18)을 포함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8년간 이승만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아들 윤여준은 마포장 시절에 대해 “이제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끝났다는 얘기가 나오고, 말 그대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이 지은 한시를 윤석오가 강평하고 자구를 고치며 소일하는 나날도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1947년 10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이 미국과 한민당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승만의 권세가 올라가고 ‘비서 윤석오’의 위상도 달라지게 됐다. “이승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9) 월간 ‘다리’ 필화사건 (上)
ㆍ기관원 M “김대중 관련 출판 말라”… 대선 전 필자·편집자 구속 ■ 쿠데타 정권하의 필화 홍수 압제 정권이 능사로 침해하는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보아 신체의 자유와 정신적 자유로 대별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적 자유 중에서도 언론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포괄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접점에서 필화(또는 설화)가 일어난다. 독재정권의 극한이라 할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유별나게 필화가 잦았던 것은 바로 그 집권자의 반민주적 체질을 반영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의 ‘민족일보’ 사건(1961)을 서막으로 하여 이 땅에 빚어진 필화를 대충 열거해보면 이러하다. 조선일보 리영희 기자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사건(1964), MBC사장 황용주의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 사건(1964), 작가 남정현의 소설 ‘분지’ 사건(1965), 동양통신의 ‘군기’ 사건(1968), 신동아의 ‘차관’ 기사 사건(1968), 김지하의 담시 ‘오적’ 사건(1970), 시인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사건(1975), 한승헌의 ‘어떤 조사’ 사건(1975), 월간 ‘다리’지 사건(1971), ‘민중교육’지 사건(1986), 세 언론인의 ‘보도지침’ 폭로사건(1986) 등이 형사문제로까지 번진 사례들이었다. 감옥이나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더라도 연행, 입건 또는 일시 구속된 사례는 일람표를 만들기에 지칠 정도로 많았다. 형사처벌과는 달리 행정조치로 폐간당한 경우도 있으니 ‘사상계’ 사건(1970)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러스트 | 박건웅 ■ ‘사상계’를 잇는 비판적 정론지로 ‘사상계’는 1953년 장준하 주도하에 창간된 종합 월간지로서 지식인과 학생층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으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월간지가 5·16 후의 군정 연장, 굴욕적 대일외교, 부정부패 등을 격렬하게
‘신민’ 만들기가 ‘국민’ 만들기로… 일본도 버린 ‘잔재’ 여전히 답습
ㆍ(6) 교육 – 교육에 숨은 식민권력 ▲ 미 군정의 일본 교육개혁 교사 권한 강화, 국가 통제 약화 평화·민주시민교육 강조 ▲ 한국은 중앙집권적 교육과정 사범대 중심 교원 양성 그대로 유신체제에서 오히려 강화 ▲ 과도한 국가주도적 교육 체제 교장·교사·학생 수직적 관계로 학생 인권·교권, 해방되지 않아 “어떤 선생님은 수업 전에 차렷 경례를 10번이나 시킨 적도 있어요. ‘각이 안 살아있다’고. 몇 년 전 다녔던 미국 중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님이 수평적 관계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한국에선 대체로 선생님들이 위에 있고 학생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한자를 제대로 못 쓴다고 손바닥 맞고, 체육선생님들은 걸핏하면 엎드려뻗쳐를 시켜서 허벅지 뒤를 때리는데, 내가 맞을 때도, 친구들이 맞는 걸 봐도 기분이 정말 나빠요.” (서울 ㄱ중 3학년 여학생) “90년대 후반 사립중에 부임했는데, 제가 다닐 때의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중앙현관으로 못 다니게 하고 한달에 한번은 운동장 조회에서 교장선생님 훈화를 듣고, 아침마다 선도부, 생활지도부 교사가 교문에서 아이들 두발, 복장을 단속하고…. 아이들에게만 그런 문화가 남아 있는 게 아니었어요. 월요일마다 열리는 교무회의는 교장, 교감선생님의 지시사항만 전달하는 자리고, 교사들은 입도 뻥긋 못하는 분위기예요.” (서울 ㄴ중 40대 교사) 1996년 3월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학교라는 의미의 ‘국민학교’가 일제히 ‘초등학교’로 바뀌며 일제 잔재 청산의 물꼬가 터진 듯했다. 그러나 해방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일제가
[2015.02.11] 울밑에 흐르는 친일의 선율 홍난파
▲[2015.02.11] 라디오백년전쟁: 울밑에 흐르는 친일의 선율 홍난파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620627 ☞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50211nrh1.mp3
독립운동가 설립 덕성여대, 극우편향의 이원복 교수 신임총장 선출
친일파 청산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비열한 인간으로 사회주의 신봉자를 머리가 빈 인간으로 묘사하는 등 극우편향의 역사인식을 보여 온 이원복 교수가 덕성여자대학교 신임총장으로 선출됐다. 덕성여대는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설립하였으나 친일파 송금선이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탈취하였으며 최근까지 재단의 전횡으로 분규가 끊이지 않아왔다. 이원복 교수의 정치편향을 분석한 국민일보 기사와 덕성여대 재단의 비리를 비판하다 2년간 해직으로 고통을 겪은 뒤 복직한 한상권 사학과 교수의 총장선출에 대한 비판 글을 전재한다. <편집자> ☞ 한상권 덕성여대교수의 이원복 총장 선출에 대한 비판문 “친일파 청산주의자들을 비열한 인간으로 묘사하다니, 실망스럽습니다.” “어릴 때 먼나라 이웃나라 많이 읽었는데. 일제 부역자들을 단죄하는데 반대하고 보수에 대한 반대를 공산주의에 대한 찬동으로 비난하다니….” 학습만화 장르의 창시자로 1000만부 이상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린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로 이름을 날리는 이원복(68) 덕성여대 석좌교수를 향한 네티즌들의 비난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만화 내용이 지나치게 보수 편향적이라는 비판인데요. 최근에는 특히 ‘열혈 애독자’였다는 한 독자의 평가글이 인터넷에 오르면서 이 교수를 향한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습니다. 17일 페북지기 초이스입니다. 논란은 진보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유머’ 회원 A씨가 최근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 가면 갈수록 너무 실망이 크네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습니다. A씨는 이 교수의 만화를 캡처해 올리고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보수 편향적이어서 학습만화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우선 ‘이원복의 세계사 산책’의 제6화 ‘이상과 현실’편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교수는 만화에서
‘거리의 원로’ 증언록…“부끄러운 시대 기록해야만 했다”
☞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집중 인터뷰 듣기 (2015.02.17)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을 쓴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이 시대가 부끄러워, 잊지 않기 위해서 책을 썼다”고 했다. 옷깃에 단 리본 배지가 눈에 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만열 교수, 5년 만에 산문집 펴내 4대강 사업·세월호 참사 등 다룬 2010년 이후 50여편 포함 62편 묶어 2003년 퇴직뒤 거침없는 현실 발언 “젊은이들, 정의 실행부터 고민해야 제 이득 위해 신앙·직위 이용한 MB 속죄해야 할 이가 자서전 내다니” 이 책에는 1993년부터 2015년 1월까지 20여년 동안 쓴 글 가운데 62편을 묶었다. 이 중 50여편이 2010년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대에 쓴 글들로 4대강 사업, 미네르바 사건, 세월호 참사,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 등을 다뤘다. 한국 사회와 교회에 “분노하라”, “고백하라”며 준엄하게 꾸짖는 글이 대부분이다. 지난 6일,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그의 옷자락에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노란 리본 배지가 여전히 붙어있었다. “주위에서 떼라고 야단이지만 아직 배지를 다는 건 ‘속죄하자’는 뜻이 있다. 이런 세태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괴롭지 않다. 하지만 증언해야만 했다.” 세월호 유족의 단식농성장 옆에서 태연히 통닭을 뜯는 “일베류의 ‘패륜과 야만’” 행위에 더해 “십자가를 내세워 단식농성자들을 ‘종북’으로 몰아가는 듯한 행태”를 보며 그는 “십자가가 남을 저주하는 데에 사용되듯 이렇게 남용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종북’을 소리높여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다”고 책에 썼다. 이 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 이달호 지부장 취임
“지금은 해방 정국 못지않게 엄중한 시점이기에 책임이 막중” 각오 밝혀 ▲ 이달호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뉴스피크]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 제8대 지부장에 이달호 전 수원화성박물관장이 취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는 지난 10일 오후 수원화성박물관 영상교육실(수원시 팔달구 소재)에서 제7대, 8대 지부장 이취임식을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제7대 지부장을 역임한 이호헌 선생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주현 매원감리교회 담임목사, 양훈도 대안미디어 너머 대표, 민진영 경기민언련 사무처장,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김영호 병학연구소 소장 등 60여명이 자리를 함께 해 축하의 뜻을 전했다. 이달호 지부장은 취임사를 통해 “올해는 조국해방 70년이자, 분단 70년이 되는 해인데, 우리나라의 분단원인은 1905년 카스라테프트 조약에 따른 미국을 배후로 한 일본이다”면서 “지금은 해방 정국 못지않게 엄중한 시점이기에 책임이 막중하다”고 각오를 밝혔다. 또한 “민족 문제를 남북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국제정세까지 보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찾고, 자주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달호 지부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했으며,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를 거쳐 상명대학교 사학과에서 ‘화성 건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기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수원시 학예연구사를 거쳐 수원화성박물관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수원화성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 배추 방동규 선생과 신용승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 상임고문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이취임식에 이어 방동규 선생(<배추가 돌아왔다> 저자.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조선 3대 구라’로 불리며 별명 이 ‘배추’임) 초청 좌잠회가 열려 파란만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