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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스포츠 경향] 이승환, 일제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 위해 3천만원 기부

2024년 10월 23일 164

가수 이승환이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를 위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21일 “이승환이 지난 19일 ‘스무 번째 차카게 살자!’의 수익금 가운데 3000만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이어 “기부금 증서를 전달하며 2015년 군함도, 2024년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과정에서 일본 정보의 역사 왜곡에 맞서 한국 정보의 외교 포기에 맞서 강제 동원 역사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지지를 보내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익금은 강제동원 역사를 알리는 일에 쓰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승환은 지난 19일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스무 번째 콘서트 ‘차카게 살자’를 진행했다. 이승환이 직접 기획한 이 콘서트는 2001년 시작돼 20년간 진행됐다. 이승환은 수익금을 소아암 어린이를 위해 기부해왔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자행된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에도 나선 것이다. 특히 이승환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자선 콘서트 진행을 마무리한다. 이승환은 이날 마지막 자선 콘서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임재성 변호사에게 기부 증서를 전달하며 “우리를 잊지 않는 우리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 3000만원을 기부한다”고 했다. 이선명 기자 <2024-10-22> 스포츠경향 ☞기사원문: 이승환, 일제 강제동원 피해 알리기 위해 3천만원 기부

[오마이뉴스] ‘조선인 잡는 조선인’ 대전현충원에 8명 안장

2024년 10월 23일 179

애국지사 곁에 누워 국가의 영예를 누리는 참담한 현실 1937년 일제는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근거지였던 만주 지역에서는 동북항일연군 등 일제에 맞선 독립군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요.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열차나 헌병 부대를 습격하는 등 전투를 이어갔고요. 독립 의지를 알리고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선전 활동에 주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독립군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는데요. 이들을 확실하게 ‘토벌’하여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만주를 지배하던 일제는 이른바 ‘오족협화’ 이념을 내세우고 있었는데요. ‘조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야마토족 등 5개 민족이 협력하고 화합하여 서방 제국주의를 막아내고 아시아인의 번영을 이루자’는 정치 구호였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자기들의 침략 전쟁에 다른 민족까지 총알받이로 동원할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1937년 6월에는 만주 내 러시아인들로 이루어진 ‘아사노(浅野)부대’, 1939년 신장 방면의 회교부대, 1941년 몽골인 기병대원들로 이루어진 ‘이소노(磯野)부대’와 퉁구스족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오로촌(鄂倫春)부대’가 각각 창설됐습니다. 조선인이 조선인 잡는 ‘간도특설대’ 이런 흐름 속에서 1938년 9월 조선인들로 만들어진 부대 바로 ‘간도특설대’였습니다. 당시 간도성 성장을 맡고 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범익이 건의해 부대가 만들어지게 됐는데요. 안도현치안대, 훈춘국경감시대, 연길현청년훈련소, 봉천만군군관학교 및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대원을 선발했고, 위관급 이상의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 조선인 하사관 9명으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부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주 전 지역에 대대적인 선전 홍보를 했는데요. 조선인 청년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유도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24년 10월 22일 182

5.18 유공자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독립·민주화운동 사적지 순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지난 18일~19일 독립·민주화운동 사적지를 순례했다. 5.18 민주화운동 공로자들과 친일 왜곡 역사를 바로 잡으려 평생을 바쳐온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방학진 실장, 연구소 회원들과 시민이 주인공이다. 5.18 민주화운동 공로자회 서울지부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일반 시민을 초청해 독립 운동의 산실인 안동을 순례지로 선택한 이유는 왜곡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새롭게 다잡기 위함이었다. 5.18 민주화운동 공로자회는 해마다 상, 하반기 두 차례 민주화운동 사적지 순례를 이어오고 있다. 임태경 5.18 민주화운동 공로자회 서울지부 사무국장은 “상반기는 5.18을 잊지 않기 위해 광주 망월동과 중심 순례를, 하반기 역시 광주 전남지역 민중항쟁 사적지를 중심으로 순례를 이어왔다. 이번에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경북 지역과 원주를 순례지로 결정해 안동의 임청각과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는 것은 독립·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온전히 새겨보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첫 순례지 경북 독립운동의 기둥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청각길 63(법흥동)에 위치한다. 임청각은 1518년 낙향한 이명이 도연명의 ‘귀거래사’ 싯구를 빌려 이름을 지은 조선 시대 가장 규모가 큰 양반 99간 규모의 주택으로 500년 역사를 간직한 보물이다. 임청각은 사당, 별당형 정자 군자정, 본채인 안채,중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뤄진 조선 시대 대표적 주택이다. 1942년 일제 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88칸 건물 중 부속 건물이 철거되어

[오마이뉴스] 부정축재 들통나 사라진 정치인의 문제적 과거

2024년 10월 23일 110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래혁 한국의 반정부운동에서 1979년까지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반민주정권에 대한 대항뿐 아니라 친일정권에 대한 대항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이다. 1979년까지의 역대 정권들은 친일파가 국가운영의 주축을 이루거나(이승만 정권), 친일파가 국가지도자인 상태에서 이들이 국정에 많이 참여하는 정권(장면·박정희)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의 반정부운동에서는 그런 성격이 나타나게 됐다. 미군정기나 이승만정권 때는 친일파들이 경찰의 주축을 이룬 데 비해,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 때는 이들이 군부를 주도했다. 5·16 쿠데타 1년 뒤인 1962년 8월 17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라는 기밀전문은 친일파 군인들의 분포와 관련해 “공군은 일본파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으며, 해병대는 함경-만주파가 지배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육군 내의 친일세력이 약해졌음을 전제한 뒤 친일파 정일권과 백선엽을 거명하면서 “육군 내의 전통적인 구 파벌들은 정일권의 개인적인 지도력하에 있는 함경-만주파의 장교들과 백선엽의 사적 지도력하에 조직된 평안도 출신이 다수인 장교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친일세력의 영향력은 박정희 정권이 전반기인 제3공화국에서 후반기인 제4공화국(유신체제)으로 넘어갈 때도 상당했다. 2016년에 <한국사학보> 제65호에 실린 허은 고려대 교수의 ‘냉전분단시대 대(對)유격대 국가의 등장’은 “1972년까지 국가체제의 재편을 주도한 이들이 만군 출신”이었다고 말한다. 만주국 군대에서 부역한 세력이 유신체제 등장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1980년 이후의 정권들도 친일청산을 훼방하고 대일 예속을 유지했다. 그러나 해방 이전에 친일파로 부역한 사람들이 국가지도자가 되거나 국정운영에 대거 참여하는 현상은 없었다. 좀더 활동할 수 있었던 친일파들이 1980년부터

[보도자료] 청일전쟁 130년 · 러일전쟁 120년 기획 학술토론회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 개최

2024년 10월 21일 1157

☞ 다운로드: [보도자료]   l   [자료집] 청일전쟁 130년 · 러일전쟁 120년 기획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 학술토론회 열려 주최 : 민족문제연구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주관 : 근현대사기념관 후원 : 식민지역사박물관 때 : 10월 24일(목) 10:00~17:00 곳 : 서울역사박물관 아주개홀 민족문제연구소는 동학농민혁명 · 청일전쟁 130년 / 러일전쟁 120년이 되는 해를 맞아 지난 8월 2일부터 기획전시 〈한반도 운명을 바꾼 그들의 전쟁〉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10월 16일부터는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고 있다. 이어 10월 24일에는 서울역사박물관 아주개홀에서 올 한 해 기획사업을 결산하는 학술토론회를 가진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강북구가 공동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 학술토론회는 청일·러일 두 제국주의 전쟁을 조선의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세기를 넘어 재현되고 있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격돌이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늠해 보는 의미 있는 논쟁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근대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음은 물론, 국제 역학관계의 변화까지 가져온 세계사의 중대 사건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두 차례 전쟁의 결과, 조선은 식민지로 청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단서가 열렸으며, 제정 러시아는 급격한 몰락의 길로 들어선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오르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양대 전쟁은 전장이 되었던 한반도에 막대한 물적·인적 손실을 끼쳤으며, 조선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청국, 러시아라는 대국과의 정면

[MBC뉴스] [단독] 환수된 거물 친일파 땅, 다시 후손에 수의계약‥12건 첫 확인

2024년 10월 21일 615

앵커 10여 년 전,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고, 국가가 친일파들의 행적을 조사한 뒤 이들이 일제 때 축적한 땅을 환수했는데요. 그런데, 이 중 최소 12건이 수의 계약 형태로 친일파 후손들에게 다시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정부의 친일 재산 매각 실태가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세웅 기자가 단독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제 침탈기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 이완용, 그 옆으론 탁지부 대신 고영희가 서 있습니다. 지금의 기재부 장관급인 고영희는 한일병합에 가담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10만 엔, 현재 가치 25억여 원을 하사받았습니다. 아들 때엔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급하는 등 4대에 걸쳐 일제에 협력하고 부를 축적했습니다. [조미은/성균관대 역사디자인연구소 이사장] “그냥 일제 강점기가 되고 나서 친일을 했다가 아니라, 나라를 잃는데, 적극적으로 이완용과 함께 일제의 입장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고…” 지난 2005년 뒤늦게 친일재산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고영희 일가 땅 44만㎡가 차례로 국가에 환수됐습니다. 15년 전 환수된 충남 예산 땅. 부지에 있는 창고 세 동은 환수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일제 침탈 시기 얻은 재산이란 점을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김 모 씨(91세)/마을 주민] “<여기에 고 씨 땅이 많아요?> 보이는 건 여기 다 기었어 (맞았어.) 여기, 저기, 저 뒤까지 다 그랬어. 땅만 몰수한 거지.” 현재 창고 세 동 가운데 두 동은 사실상 형태만 남아 있고, 한 동은 초목에 뒤덮여 방치돼 있습니다. 그런데,

[역발상 S3] 동아시아의 유행가 시대 1914~1945_6부

2024년 10월 21일 64

진행: MC노(노기환) 출연: 이준희, 신현준 PD: 김세호 그대 그립다(복혜숙. 1930년 음반): 원곡은 1929년 일본에서 발표된 후타무라 테이이치 노래 ‘君恋し'(삿사 코카(佐々紅華) 작곡). 이후 유행가 혹은 가요곡으로 불리며 여러 차례 다시 녹음되기도 한 일본 유행가의 고전이지만, 당시에는 재즈송으로 불림. ‘2부 구성’이라는 점이 당시 통상적인 유행가와 다른데, 말하자면 코러스(후렴/싸비)가 명확하다는 것. 가수라기보다는 배우였던 복혜숙에게는 이런 곡이 낯설었는지, 음정·박자를 자주 놓침. 조선 최초로 레코드에 ‘재즈송’이 표기되었다는 기록의 가치가 있음. 일본 초판에는 곡종 자리에 ‘폭스트로트’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920년대 일본 재즈를 2박자 폭스트로트 리듬, 즉 사교댄스 리듬이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줌 跳舞時代(춘춘, 1933년 음반): 곡종은 ‘유행가’로 표기되어 있지만, ‘문명화된 여자’인 화자가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니면서 “남녀 쌍쌍이 추는 트로트(道樂道)”에 빠져 있다는 가사가 나옴. 작사자 천진위(陳君玉)는 중국 대륙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대만에서 신문학운동에 참여. 작곡자는 대만 유행가 고전을 많이 작곡한 덩위셴(鄧雨賢). 앞서 들었던 ‘望春風’도 그의 작품. 하지만 도쿄에서 녹음이 진행될 때 편곡을 담당한 이는 니키 타키오(仁木他喜雄). 2003년에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는데, 춘춘의 후배인 가수 아이아이(愛愛)의 구술과 대만 가수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취입 여행을 가는 재연 장면이 나옴 ダイナ(디크 미네(ディック・ミネ). 1934년 음반): 1925년 미국에서 발표된 Dinah(해리 아크스트(Harry Akst) 작곡)의 번안곡. 1934년 나카노 타다하루(中野忠晴)의 음반이 처음 나왔고, 이어 같은 해 연말에 디크 미네의 ‘재즈송’ 음반이 발표되어 크게 히트. 디크 미네는

[보도자료]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

2024년 10월 15일 162

[보도자료] [다운로드]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 특별전 근현대사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을 맞아 오는 10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특별전시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서울시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와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의 후원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한다. 개막식은 16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던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순간이자,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사건의 전개 과정을 대동여지도, 대한여지도, 일본 점령지 실측지도, 조선내란지도 등 19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에서 제작된 다양한 지도를 통해 시각적으로 조명한다. 이와 함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의 최초 판본인 1880년 인제 경진판과 현존하는 『용담유사』 판본 중 가장 오래된 1893년 계사판,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포고문, 임명장, 농민군 편지를 비롯해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전시된다. 또한 청일전쟁 화보집, 사진, 일본 군인들이 사용하던 화투패와 같은 희귀 유물도 함께 소개된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다시금 요동치는 상황에서, 1894년의 혁명과 전쟁이 남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사진 별도 첨부 포스터

[오마이뉴스] 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2024년 10월 14일 193

[김종성의 히,스토리] 이승만을 위한 변명에 돈을 쏟아붓다 뉴라이트든 올드라이트든 이승만을 옹호하는 세력은 ‘공과 과를 함께 살피자’고 한다. 이럴 때마다 그들이 이승만의 ‘과’를 방어하기 위해 내놓는 논리들이 있다. 민족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등의 논리를 내세운다. 한국전쟁 전후에 민간인 학살을 많이 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피학살자들이 공산 빨갱이와 연관됐다’는 등으로 받아친다.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을 훼방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런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없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한편, 독립운동을 방해해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대응 논리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1919년이 아닌 1948년에 두는 건국절 논리를 통해 임시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간접적 접근법이 현재까지는 두드러진다. 이승만 옹호 세력이 가장 크게 곤란을 느끼는 부분은 아무래도 1960년 4·19혁명이다. 이승만을 옹호하려면 이승만을 몰아낸 4·19의 가치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이것만큼은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 시절의 1980년 헌법을 제외한 1963년 이후의 역대 헌법 전문에 4·19가 명기됐다. 이 점 때문에도 4·19를 섣불리 비판하기 힘들지만, 꼭 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20세기의 올드라이트와 달리 21세기의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세워 3·1운동을 간접적으로 부정한다. 헌법 전문에 명기된 3·1운동에 대해서도 생채기를 내고 있으니, 이들이 오로지 헌법 전문이 무서워 4·19를 부정하지 못한다고 보기는 힘들 듯 같다. 이승만의 선거부정과 실정이 너무도 명백한 데다가 어린 아이들까지 시위에

[오마이뉴스] 빨치산 문제의 허위를 알려주는 친일파

2024년 10월 14일 183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백일 빨치산은 산간지대에서 활동한 좌익 무장집단이란 이미지로 한국 사회에 각인돼 있다. 국토의 70%가 산이라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산악 지역이 무장세력의 장기적인 근거지가 되지 못한다. ‘빨치산’은 혁명적 신념을 가진 전사의 이미지도 연상시키지만, 한국에서는 부정적 이미지와 훨씬 많이 결합돼 있다. 2011년에 <역사비평> 제94호에 수록된 김진환 건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빨치산, 역사의 격랑에 선 사람’은 우리 사회에 유포된 빨치산 이미지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인간적인 빨치산’은 반공정권과 토벌 군경이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 시민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싶어했던 빨치산의 전형이다. 토벌작전이 계속되고 있던 1954년 지리산에서 토벌 당국의 적극적 후원으로 촬영된 <피아골>은 빨치산을 살인과 강간을 서슴지 않는 잔혹한 인간상으로 그려냈고, 이후 영화 <남부군>이 나오기 전까지 빨치산 관련 영화들은 <피아골>에서 묘사된 빨치산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부정적 이미지로 점철된 빨치산의 반대편에는 이승만 정권의 토벌 군경이 있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 수호자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이런 그림은 흔히 한국 사회의 극단적 좌우 대립을 설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빨치산 문제의 본질이 다른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진압군 사령관이 있다. 서울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묘소 위쪽인 장군1묘역에 누워 있는 김백일이 그런 증언을 역설적으로 하고 있다. 진압군 사령관 김백일의 역설 이곳 묘비 하단의 석판은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북간도 옌지현(연길현)에서 출생한 김백일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다. 석판은 “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