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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강제동원 피해자 측, 미쓰비시 국내자산 추심 승소…”尹정부 제3자 변제안 파탄”
강제동원 유족 측, 尹정부 제3자 변제안 거부 제3자 변제, 日기업 대신 韓기업이 배상 변제 추심 소송 승소…日기업 유족에 직접 배상해야 [서울=뉴시스] 장한지 기자 =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을 거부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족이 일본 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을 추심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51단독 이문세 부장판사는 18일 강제동원 피해자 고(故) 정창희 할아버지의 유족이 미쓰비시중공업의 손자회사인 국내 법인 엠에이치파워시스템즈코리아(엠에이치파워)를 상대로 낸 추심금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 <중략>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소장은 “윤석열 정부가 제안한 제3자 변제안은 파탄났고 이후 미쓰비시 판결을 받은 분들은 지금 제3자 변제기금이 바닥나 배상이 없다”며 “하루빨리 실질적 배상이 이뤄지고 피해자 구제 및 화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정씨는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했다며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 <중략> ———— 정한지 기자 <2025-02-18> 뉴시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피해자 측, 미쓰비시 국내자산 추심 승소…”尹정부 제3자 변제안 파탄” ※관련기사 ☞한겨레: ‘제3자 배상 거부’ 강제동원 피해자들, 미쓰비시 국내자산 추심 소송 승소 ☞연합뉴스: 日강제동원 기업에 직접 배상받을 길 열려…추심 첫 승소(종합) ☞KBS 뉴스: ‘강제 동원’ 추심 첫 승소…“직접 배상받을 길 열려” ☞YTN: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미쓰비시 국내 자산’ 추심 1심 승소
[보도자료] 미쓰비시중공업 추심금 소송 판결 선고 안내(판결 뒤 브리핑 예정)
<보도자료> 미쓰비시중공업 추심금 소송 판결 선고 안내(판결 뒤 브리핑 예정) – 때: 2025년 2월 18일(화) 14:00 – 곳: 서울 중앙지방법원 동관 357호 – 원고: 고 정창희 님 유족(2018 대법원 판결 승소 원고) –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된 미쓰비시중업공 상대 손해배상소송에서, 제3자 변제를 거부하신 고 정창희 님의유족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자산에 대한 집행절차를 진행해왔습니다. – 구체적으로 고 정창희 님의 유족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이 국내법인인 MH파워시스템즈코리아에 대해 가진 채권을 발견해 압류하였고, MH파워가 미쓰비시중공업이 아닌 망 정창희 유족에게 약 8천3백만원을 지급하라는 추심금 소송을 진행하였습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3가단5085617). – 위 추심금 소송의 1심 판결이 2025년 2월 18일(화) 14:00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민사법정 357호에서 선고됩니다. 선고 직후인 14:15경 소송대리인과 지원단의 브리핑이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1번 출입구 앞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 일제 강제동원 사건에서 히타치조센의 경우 피해자 측이 피고 기업이 공탁한 금원을 수령한 사례가 있지만, 피해자 측이 본안소송을 통해 배상금을 지급받는 판결이 선고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문의: 소송지원단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김영환(010-8402-1718)
[오마이뉴스] ‘친일했어도 그림만 잘 그리면 되나’라는 질문
[정진동 평전] 운보 김기창 기념관 논란과 역사정의실천협의회 활동 [편집자말]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1993년 봄 충북 청주에서는 ‘친일 화가 논쟁’이 거세게 불었다. 청원군 북일면(현재의 청주시 내수읍) 형동리 산 30번지 일대에 김기창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화가 김기창은 북일면 형동리 산 30번지 일대 임야 2만2000평에 청원군의 행정지원과 본인 부담 6억 원을 들여 기념관 및 위락 시설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천재 화가 그리고 친일 화가 이에 신경득(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친일 화가 김기창이 기념관을 짓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 김기창은 어떤 인물인가? 1913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1920년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는 이때 장티푸스에 걸려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돼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37년 제16회 선전에 <고담>을 출품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이듬해에 <하일(日)>로 총독상을 수상했으며 제18회와 제19회 선전에서 연이어 특선을 수상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1946년 우향 박래현과 결혼 후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을 시작으로 부부 작가로 전시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자유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지냈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시작으로 화단과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1989년 예술원 정회원이 됐다. 장애를 극복한 천재 화가로 명성을
[오마이뉴스] 12.3 내란으로 다시 생각하는 사관학교 교육
[주장] 대한민국 국군, 독립군을 계승한 민주 군대로 거듭나야 현재 대한민국 사관학교 교육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역대 독재정권은 군인, 경찰, 정보기관 등 무력을 앞세워 국민을 통제해 왔고 여기에 더해 우상화, 우민화 정책을 곁들였다. 이승만은 서울시를 자신의 호인 우남시로 만들려 했고 동상은 물론 화폐, 우표에도 자기 얼굴을 박아 넣는 등 봉건적 방식으로, 박정희는 위인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는 등 훈육적 방식을 택했다. 이승만·박정희가 모든 국민을 상대로 했다면 이명박·박근혜는 뉴라이트를 지원하고 교과서를 통해 직접 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물론 국민들이 강력히 저항하여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국정 교과서를 학교현장에서 막아냈지만, 윤석열 정권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듯하다. 바로 군대다. 2023년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시도는 신원식의 개인 일탈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군인들을 자신들의 역사관으로 묶어 놓으려는 친일뉴라이트 세력의 발버둥이었다. 1993년 하나회가 숙청되었지만 우리 군대 안에 뿌리 깊은 사대의식은 여전하다. 즉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주역이 아니며 창군에 실질적 역할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맡았으며 비록 그들이 친일의 오점이 있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육군이 백선엽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공군은 김정렬(1917~1992)을 여전히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세력이 적지 않다(*김정렬의 친일행적은 <친일인명사전> 참조).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다시 떠오른 독립군 정통론 물론 한국 군대 안에는 독립군을 국군의 정통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스포츠경향]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 미술관에서 2월 28일 부터 3월 5일까지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18명의 작가 전시에 관심 집중 전시 비용, 전국 투어 비용 마련을 위한 펀딩 시작 하루 만에 3,059,450원 넘겨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작가 18명이 모여 전시를 기획해, 관심이 집중 되고 있다.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회 ‘3.1 운동에서 빛의 혁명으로’는 오는 2월 28일(금)부터 3월 5일(수)까지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고양시민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가 주최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작가모임’이 주관한 전시회로 고경일, 김사리, 김서경, 김수빈, 김영미, 김운성, 김화순, 레오다브, 민정진, 박서연, 박성완, 백영욱, 이구영, 이정헌, 이하, 임대니, 조아진, 황은관 18명의 작가가 함께하고 있다. 사회 변화를 꿈꾸며 예술로 실천하고 연구하는 작가들이다. 전시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모두 ‘역사를 기록하는 작가모임’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2023년에는 대일항쟁기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작가들과 연대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현재, 철거 위기에 있는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 2024년 8월 28일(수)에는 고양시민단체가 주관하여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 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평화의 소녀상과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제작한 김운성·김서경 조각가 부부가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반일종족주의’ 공동저자)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패소 결정에 대한 대응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지난 2023년 11월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상이 일본인을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발언에 대해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놓은
[경향신문] 피 토한 고종, 통곡한 총리, 폭발한 민심…‘을씨년스러웠던’ 1905년 을사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피 토한 고종, 통곡한 총리, 폭발한 민심…‘을씨년스러웠던’ 1905년 을사년 겨울 ‘을씨년스럽다’는 ‘2025년 을사년’을 맞아 더욱 인구에 회자되는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을사년’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처럼 떠돌고 있다. ———— <중략> ———— ■이토의 안하무인 …<중략>… 15일 고종을 알현한 이토는 안하무인이었다. 예컨대 “한국이 누구 덕분에 독립을 유지하며 살아갔느냐…이제 동양의 평화를 위하려면 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신 행하는 것만 유일한 방책이니 즉시 동의해주기 바란다”고 겁박했다. 이토는 이날 4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내용을 제멋대로 정리했다. “한국 황제는…이번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同意セラルルノ止ムヲ得ザル所以), 그리고 이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의 장래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본사(本使·이토)에게 ‘당국자에게 명하여 일본 정부의 제안에 기초하여 타협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조작으로 드러났다.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소장된 보고서의 초안(1905년 12월8일 작성)에는 ‘(한국 황제는 이번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同意セラルルニアラザレバ)라 한 부분을 지워버리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同意セラルルノ止ムヲ得ザル所以)~’으로 둔갑시킨 흔적이 남아있다.(강성은 도쿄 조선대 교수) ———— <중략> ———— ■탈취된 외무장관의 도장 이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한 대신들은 이른바 협약안의 자구 수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결국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라는 허울좋은 전제조건을 넣고,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5조)’는 조항을 추가하는 선에서 조약문이
[동영상] 내란세력=친일파 모조리 뿌리 뽑읍시다!
※관련 기사 <2025-02-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촛불집회 나온 박은정 의원 “헌재에서 윤석열, 궤변 늘어놔”
[오마이뉴스] 하루 만에 친일파가 됐다? 이 사람이 벌인 끔찍한 일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병일 단 하루 동안의 일로 인해 친일파로 규정되고 목숨까지 잃은 흔치 않은 사례가 있다. 헌병보조원 강병일의 이야기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일반 경찰력만으로는 한국 민중과 의병들을 억누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본 헌병대를 한국 치안에 투입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일본 제국의회의 반발을 샀다. 일본 인력과 일본 재정으로 대한제국 현지의 헌병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다시 생각해 낸 것은 대한제국 인력과 재정으로 한국인 ‘폭도'(특히 의병)를 진압하는 헌병보조원 제도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1908년 6월 11일 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을 공포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폭도의 진압”을 위한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일본헌병대에 위탁하는 법령이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헌병보조원 제도의 기원이다. 일본 돈이 아닌 한국 돈으로 한국을 억압한다는 제국주의다운 발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최일선에서 한국인들을 억압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헌병보조원이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은 이들에게 말 못 할 시달림을 당하고 이들 전체를 증오하면서도, 그 지위만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자로 단죄하지는 않는다. 정부수립 직후의 친일파들을 긴장시킨 1948년 9월 22일의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4조 제6호는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반민족행위자(반민자)로 규정했다. 일제 군인이나 경찰이었을 뿐 아니라 악질적인 행위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민족에 해를 끼쳤어야 한다는
[한겨레] 대법 승소 ‘감격의 눈물’에도 전범기업 사과 못 받고 떠나
[가신이의 발자취]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지난달 27일 101살 나이로 별세 1943년 가마이시 제철소로 동원 2년 고된 노역에도 임금 못 받아 2005년 신일본제철 상대 소송 내 13년 만에 대법 승소 판결 받아내 “역사의 봄은 반드시 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전범 기업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건강 악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역의 한 요양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지난달 27일 101살 나이로 별세했다. 101년 전 태어난 그날 돌아가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해방’과 함께 애절하면서도 비통한 가운데 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필자와의 만남은 2018년부터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자문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고향이 전남 나주군 평동면 용동리 538번지인 고인은 외갓집에 살면서 나주 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7살에 졸업한 뒤 바로 서울 용산구의 한 상업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일제의 노동력 징발 수단이었던 ‘근로 보국대’에 동원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가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광고를 접하고 처음에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야마구치현 서부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일미광유회사 급사로 취직했다. 그러다 1943년 1월17일 일본 이와테현 도시인 가마이시의 제철소로 동원되었다. 거기서 1중대부터 6중대까지 10명에서 15명씩 조를 짜서 데리고 갔다. 군수물자를 만드는 제철소 일은 고됐다. 일본사람이 시키는 대로 철재를 나르다 넘어져 3개월 동안
[한겨레] 결국 뒷통수만 맞다 끝난 윤석열표 대일 외교
‘윤석열표 대일외교’의 최종적 실패가 다시 한번 입증됐다.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하시마(군함도) 탄광을 포함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면서 했던 약속을 이행하는 데 여전히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거듭 확인되면서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일본에 양보했지만, 일본은 과거사 왜곡으로 양보에 화답하면서 한·일 관계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이하 위원회)는 31일(현지시각) 일본이 제출한 메이지산업혁명 유산 관련 후속조치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증언 등을 전시해달라는 한국을 비롯한 회원국들의 요구사항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오히려 2020년 6월 도쿄 신주쿠에 문을 연 ‘산업유산정보센터’에 “‘한국병합 재검토 국제회의’에서 국제법의 귄위자인 구미의 법학자로부터 일한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법 관행에 비춰 ‘무효’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됐다”는 내용의 전시물을 설치해 운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권침탈의 합법성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2023년 3월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이었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를 중심으로 하는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촉구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2023년 5월 방한 당시 한국 쪽 강제동원 해법을 언급하면서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언급하는 등 최소한의 형식적인 측면이나마 성의를 보이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해 8월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