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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파주 시민단체 “장산리에 학살자 전두환 묻힐 자리 없다”
[기사 발췌] (파주=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겨레 하나 파주지회 등 경기 파주지역 11개 시민단체는 30일 오후 파주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파주 문산읍 장산리 매장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중략… “장산리는 임진강과 북녘땅 개성이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조망을 갖춘 장소이자, 각종 평화통일 행사를 열어왔던 남북 화해의 상징적인 장소로 그 의미가 파주시민들에게 남다른 곳”이라며 “그런 장산리에 쿠데타, 광주학살, 군부독재, 민중 탄압의 상징인 전두환이 묻힐 자리는 없다. 나아가 파주 그 어디에도 학살자 전두환을 편히 잠들게 할 곳은 없다”고 주장했다. …중략… “파주시장은 한반도 평화 수도 파주시라는 이름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전두환의 매장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지금 당장 반대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승혁 기자 nsh@yna.co.kr <2023-11-30> 연합뉴스 ☞기사원문: 파주 시민단체 “장산리에 학살자 전두환 묻힐 자리 없다” ※관련기사 ☞뉴시스: ‘전두환 유해 안장 반대’ 파주 시민단체들 “파주의 봄 지키자” ☞YTN: 파주 시민단체 “장산리에 전두환 묻힐 자리 없다” ☞민중의소리: “학살범 여기 오지 마라” 전두환 유해 파주시 안장 추진에 지역주민 ‘반발’ ☞노컷뉴스: 시민단체들 “학살자 전두환, 파주 어디에도 편히 잠들 곳 없다” ☞경인일보: 파주 시민단체 “12·12 쿠데타 전두환 안장 막을 것” ☞경기일보: 파주 시민·사회단체들, “故전두환 유해 장산리 매장 막겠다”
민족사랑 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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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승소에 기여한 일본 야마모토 변호사의 증언 전문
[다운로드] [수정전문] 지난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33부(재판장 구회근)는 2016년 12월 고 김복동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 법원의 각하 판단을 취소하고 원고에게 청구금액 1인당 2억 원 전부와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 승소로 결론이 날 때까지 소송 대리인단과 관련 시민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그 외 결정적인 증언을 한 숨은 공로자가 있어 널리 알리고자 한다. 주인공은 일본변호사연합회 인권옹호위원회 산하 일한전후처리문제특별부회 위원으로 있는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이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1992년 변호사 등록을 한 이래 우키시마호 사건, 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 등 10여 건의 전후보상재판에 원고측 대리인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야마구치재판소 시모노세키 지원의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관련 세칭 관부(關釜)소송을 대리해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승소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2023년 5월 11일 한국 고등법원 재판정에서 이루어진 증인 심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판의 역사와 한일정부의 대응, 쟁점에 대한 법적 해석 등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치밀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재판부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정보 등을 삭제한 증언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한겨레: 한국 법정에 선 일본인 ‘위안부 증인’…“일본 정부가 장애물” ☞오마이뉴스: 법정에 선 일본인 변호사, 위안부 피해자 곁에서 한 호소
[오마이뉴스] 친일세력 지킴이… 이런 육군참모총장을 보았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채병덕 피살 1년 전에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 가서 김일성·김두봉과 4자 협상을 한 백범 김구는 분단세력뿐 아니라 친일세력의 미움도 받았다. 분단세력이 곧 친일세력이고 이것이 당시의 보수세력이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에게 최종 지시를 내린 쪽이 이승만이든 미국이든, 김구가 분단과 친일이 특징인 당시 보수세력의 미움을 산 것은 사실이다. 친일파들은 김구 암살에도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안두희가 소속된 미군방첩대(CIC)나 극우단체 백의사뿐 아니라, 거물급 친일파들이 포진한 ’88그룹’ 혹은 ’88구락부’도 백범 암살의 배후로 거론됐다. 일본 헌병대 출신인 김창룡과 더불어 이 그룹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 친일파는 김구 암살 당시의 육군총참모장인 채병덕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채병덕 편은 중일전쟁 초기인 1937년 12월에 일본 육사를 49기로 졸업한 그의 친일 이력을 이렇게 소개한다. “견습사관을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해 사세보의 군항을 지키는 중포(中砲) 장교로 복무했다. 1940년 육군포병학교를 수료했다. 일본 육군병기학교 교관, 오사카 육군 조병창 공장장 겸 병기행정부 부원을 거쳐 일제 패망 당시 육군 포병 소좌로서 경기도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부산 남쪽인 규슈현 서북부 군항인 사세보에서 야포를 다루며 항구를 지키는 장교였다. 침략전쟁기의 일본군에서 소령 계급까지 달았다. 무기 공장인 조병창의 공장장을 오사카에서도 지내고 경기도 부평에서도 지냈다. 항구든 무기든 일본을 위해 무언가를 지켜주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백범 김구 암살에 연루된 친일파 군인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22세 때인 1933년부터 제국주의의
[오마이뉴스] 두 아들의 아버지 ’46번 유골’… 그는 죽음을 강요받았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옥쇄 피해자 최병연 오는 28일 유해로 봉환되는 고 최병연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이중·삼중의 피해자다. 군무원인 일본 해군 군속으로 강제징용된 그는 징용 피해뿐 아니라 직접적인 전쟁 참화까지 입었다. 지금의 키리바시공화국에서 벌어진 타라와전투 때 도망가거나 투항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죽음을 맞았다. 호주와 하와이의 중간쯤인 이곳 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희생됐던 것이다. 동아시아 곳곳의 일제 식민지 주민들 상당수는 무기 같은 방어 수단도 갖추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내몰렸다. 병사가 아닌 최병연 같은 이들은 연합군 코앞에서 항복하거나 도주할 기회마저 차단당했다. ‘영광스러운’ 옥쇄(玉碎,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을 뿐이다. 최병연도 그런 피해자다. 강요받은 집단 죽음 1879년에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인 태평양전쟁 막판에 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열도는 1945년 6월까지 3개월간 미군의 공세에 노출됐다. 이로 인한 일본 측 사망자는 약 1만 8천 명이고 그중 1만여 명이 오키나와 주민들이다. 2010년에 공저작인 <현대 일본정치의 쟁점>에 실린 최기성 도쿄대 연구원의 논문 ‘일본 정치와 민족문제-오키나와의 전쟁 체험을 중심으로’는 “철혈근황대·여자학도대 등에 편성되었던 소년·소녀를 포함한 일반 주민 다수가 전투에 휩쓸리거나 일본군의 전투에 방해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집단 자결로 내몰리거나 희생되었다”고 한 뒤 오키나와인들에게 강요된 집단 옥쇄를 이렇게 설명한다.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은 당시 섬을 지배하던 수비대장이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주민을 진지 내에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투항을 권고하러
[오마이뉴스] 나라 팔아먹은 ‘친일 2관왕’… 이런 사람 또 나올지 모릅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제순 금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 118주년이다. 1905년 을사년에 대성공을 거둔 일본은 그로부터 두 번째 을사년인 1965년에도 대성공을 거뒀다(한일협정). 지금 일본은 윤석열 정부 임기 내인 2025년 을사년 때도 한번 더 대성공을 거둘 생각을 하고 있는듯 하다. 일본정부와 궁내청이 3번째 을사년인 2025년에 나루히토 일왕(천황)의 방한을 성사시켜 “요즘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 일한관계의 최종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지난 7월 13일 자 일본 여성지 <조세지신>에 보도됐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보좌하는 수상관저 관계자와 나루히토 일왕을 보좌하는 궁내청 관계자의 인터뷰에 기초했으므로 신빙성이 높은 보도다. (관련 기사: 첫 ‘일왕 방한’ 추진하는 기시다 총리, 무엇을 노리나, https://omn.kr/24sl7) 한때 을사보호조약으로도 불렸던 한일협상조약이 1905년 그날 체결됐다는 판단을 전제로 193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IMF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1997년 11월 17일부터 이날을 정부 주관의 기념일로 거행했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이 아닌 그다음 날 조인됐다.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조인된 것은 예정일보다 하루 뒤인 18일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에 인용된 조선총독부 발행물에 그렇게 적혀 있다. 총독부가 3·1운동 1년 전인 1918년에 펴낸 <조선의 보호 및 병합(朝鮮ノ保護及倂合)>은 “조인을 마친 것은 실로 11월 18일 오전 1시 반이었다”고 기술한다. 을사오적, 경술국적… 나라 팔아먹은 박제순 18일 새벽에 문제의 날인을 해준 인물은 을사오적인 친일파 박제순이다.
[경향신문] ‘일제 강제동원’ 부인해온 한·일 우익단체들 서울서 첫 심포지엄 열고 기미가요도 제창
종로 소녀상 옆에서 집회 “위안부는 공창” 주장도 [기사발췌] 윤석열 정부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 등을 부인해온 한·일 양국 단체들이 최근 왕성한 교류를 벌여 주목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서울에서 처음 합동 심포지엄을 열고, 기미가요 제창과 소녀상 인근 시위 등을 진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16일 식민지 근대화론 등으로 한국에서 논란이 됐던 <반일종족주의>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정안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지난달 28~29일 일본을 방문해 우익 성향 역사단체인 ‘역사인식문제연구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산케이는 정 위원이 당시 강연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 육군의 ‘특별지원병’ 징집과 관련해 강제성이 없다는 주장을 내놨다고 소개했다. …중략… 낙성대경제연구소와 역사인식문제연구회가 공동 행사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도쿄에서 첫 합동 심포지엄을 열었으며, 지난 9월에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두 번째 행사를 개최했다. 당시 행사에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된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도 영상으로 얼굴을 비춘 것으로 전해졌다. …중략… 이들 단체는 당시 행사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했으며, 다음날에는 종로구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 옆에서 집회를 진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집회에서는 “위안부는 일본군이 관리한 공창이었다”는 이들의 주장이 되풀이됐다. 박용하 기자 <2023-11-16> 경향신문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부인해온 한·일 우익단체들 서울서 첫 심포지엄 열고 기미가요도 제창
[한겨레] “울산의 열렬한 DJ 지지자 부친 생각하며 각본 맡았죠”
[짬]‘김대중 다큐’ 각본 쓰는 방현석 소설가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장편소설 ‘십년간’ ‘당신의 왼편’, 최근의 ‘범도’까지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창작 활동을 해온 소설가 방현석이 이번에는 영화 창작자로 변신했다. 내년 1월 개봉을 앞둔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의 각본을 맡았다. 같은 중앙대 예술대학 동료 교수인 민환기 감독(영화학과)의 제안으로 합류했지만 뜻밖에 방 작가와 영화의 인연은 길고도 깊다. 장편소설 ‘범도’로 제17회 임종국상을 수상한 방현석 작가를 시상식이 열린 지난 10일 서울 종로3가 카페에서 만났다. “인천에서 노동운동할 때 이은 감독이 찾아왔어요. 내 소설 ‘내딛는 첫발은’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에 쓸 수 있냐고 요청해 나도 노동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작품에) 베낀 건데 안 될 게 있겠냐고 흔쾌히 허락했어요. 당시 회사가 파업으로 폐업한다고 손 뗀 인천 한독금속 공장에서의 촬영까지 이어졌죠.” 1990년 영화판과 세상 모두를 뒤흔든 영화 ‘파업전야’ 이야기다. 그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삼십만 명이 어두운 지하방에 기꺼이 구겨 앉고 영화 한 편의 상영을 막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되는 상황을 낳은 ‘파업전야’를 통해, 그리고 대중적 성공으로 남북관계에 대한 시각을 바꿔낸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영화의 힘에 매료됐었다. “역사를 바꾸는 예술작품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문제를 다룬 수많은 한국 소설을 뛰어넘은 작품이죠. 이처럼 현실을 바꾸는 큰 힘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해 영화 제작에 뛰어들기도 했죠.”
[한겨레]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조선 상대 범죄 입증하고 싶었죠”
[짬] 임종국상 특별상 받은 히구치 유이치 전 관장 “저는 일본인이니까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 행위를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이니치 조선인’ 사회를 이해할 수 없고, 일본인 자신의 생각도 바뀌지 않습니다. 일본의 범죄 행위는 권력이 한 것이어서 서민과 관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경찰이 중심이 된 관리 체제의 틀 안에 (평범한) 일본인들도 들어가서 (조선인에 대한 감시 활동을) 한 것이 전시 일본 파시즘 체제의 중심적 문제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역사 문제는 그만 잊고, 한-일, 한-미-일 3국 간의 군사협력을 강화하자는 ‘꺼림직한 흐름’ 속에서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배 문제를 추궁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친일연구의 선구자인 고 임종국(1929~1989)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17회 임종국상 특별상 수상자 히구치 유이치(83) 전 고려박물관 관장은 10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한겨레와 만나 “(일본 사회가 조선을) 식민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지만, (조선인들을) 창씨개명하고 노동동원하고, 징병도 했으며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다”면서 “식민 지배가 초래한 조선인들에 대한 억압과 가해 행위를 더 조사해 일본인이 이를 인식하고 남북한 사람들과 우호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이기도 한 히구치 전 관장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인들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연구를 쏟아낸 대표적인 ‘시민 연구자’이다.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해 직업 연구가가 되는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