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주요기사

“동아일보 사주, 친일깡패에게 거액 건내려 했다”

2014년 12월 11일 1638

[동아일보 대해부 1권] 이봉창 의거를 ‘대불경 사건’ 김구선생 독립운동에 ‘테러 음모’ 동아일보는 창간 4개월부터 친일 논조를 선보였다. 조선인의 민족성을 헐뜯는 사설 <조선인의 단처를 논하여 반성을 촉하노라>를 7회에 걸쳐 연재했다. 웅장한 기풍과 지속성, 신앙심이 없고, 게으르고(태타의 폐가 유함), 당파열이 심하고, 관리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한다(배관열이 심함)는 것이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동아일보는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언론계, 그리고 나아가서 전 조선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을 1924년 1월2일부터 5회에 걸쳐 1면에 실었다.  가장 문제가 됐던 2회 사설 ‘정치적 결사와 운동’을 보자. 조선인에게 정치적 생활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것이 제1인이요”라고 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만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치권의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대수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력한 절개 의식이 있었던 것이 제2인이다.”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황당하고도 반민족적 논리를 펼친 것이다. 이 사설이 나오기 전 이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조선 독립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동아일보는 <동아일보사사>(1권)에서 “이 사설의 집필자인 이광수는…‘조선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부분의 삽입으로 표현상의 오류를 저지른 것도 사실”, “그것은 역시 이광수의 사견으로 받아들여져야

장총 겨눈 마적 두목, 어머니 비녀 챙겨 사라졌다

2014년 12월 11일 555

[박도 실록소설 ‘들꽃’ (20)] # 제5장 망명생활의 시작 ②< 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구절초, 약용으로도 쓰인다. 꽃말은 ‘순수’, ‘어머니의 사랑’이다.ⓒ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해마다 올라 가는 소작료 우리 일행(만주 망명 가족단)은 첫 해 통화현 다황거우에서 죽도록 고생만 했다. 이듬해 좀 더 나은 곳을 찾아간 곳은 거기서 오십 리 떨어진 진두허였다. 그곳에서 중국인들의 토지를 소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면 우선 살 집과 1년 농사 지으며 먹을 양식과 약간의 농비 그리고 채소를 갈아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채전을 주었다. 그때 우리들은 당장 먹을 게 없었기에 그 정도의 대우에도 감지덕지였다. 우리 일행은 중국인 지주가 마련해 준 걸로 먹고 살면서 그해 농사를 지어 추수한 뒤 그들이 미리 준 양식과 소작료를 갚았다. 우리가 소작료를 갚을 때는 땅의 질에 따라 달랐다. 처음 황무지를 개간한 첫 해는 대체로 지주와 소작인의 비율이 1대9, 이듬해는 2대8, 3대 7로 등으로 점차 올라가다가 개간이 완전히 끝나면 5대5로 나눴다. 초기의 중국인들은 인심이 좋았는데, 차차 그들도 매우 영악해져 우리 동포들은 몹시 힘들었다. 애초 동북의 중국인들은

서대문형무소 ‘이념논란’…보수단체 “민주화 역사 지워라”

2014년 12월 11일 917

보수단체, 서대문형무소 관리권 이전 방안 추진 “가처분신청도 낼 계획” ▲서대문형무소/사진=김유진 기자 서대문형무소에 대해 일부 보수단체가 민주화 역사를 지우라는 요구를 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10일 한 보수단체에 따르면 이들은 국가보훈처, 감사원, 새누리당 등 여러 유력기관에 민원을 넣어 현재 서대문구 출자 도시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서대문형무소를 정부가 관리하도록 관리권을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단체 관계자는 “일제시대 독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성지인 서대문형무소에서 유신 실정법을 위반한 반국가단체 관계자들에 대한 전시와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며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공원 이름이 ‘서대문독립공원’인 만큼 여기서는 독립에 대한 전시만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서대문구에서 ‘독립민주페스티벌’이나 ‘민주열사 풋프린팅 행사’ 등을 통해 독재에 항거한 민주열사들의 역사를 전시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서대문구청 산하 도시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국가보훈처나 국가에서 만든 특별전담관리기구가 전담해 관리하기를 바라고 있다. 해당 보수단체 관계자는 “광복회·순국선열유족회 등 독립운동 희생자 단체와 함께 조만간 행사중지가처분신청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이전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묘사한 역사관의 전시방향도 문제삼고 있다. 이들은 “어린 학생들이 드나드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묘사하는 책자를 팔고 있다”며 “관리권 이전을 통해 역사바르게살리기운동으로 인한 비정상화의 정상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던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서대문구치소에 수차례

19세기말 선교사들 둥지 튼 양인촌, 정동

2014년 12월 11일 882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4) 배재학당 터·서대문정거장 터 ▲정동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미국 기독교의 선교기지, <정동> 19세기 말 정동은 양인촌(洋人村)이라 말할 만큼 우리나라에 와있는 서양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던 곳이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위시하여 서구열강들의 공사관들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와 거의 동시에 선교기관들이 들어섰다. 이후 이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이곳 정동은 양인촌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기관은 주로 미국선교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이미 일제의 조선침략이 을사늑약에 앞선 가쓰라-테프트 밀약(1905.7.29)을 통해 미국에 의한 승인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주도적인 선교활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점이 서구제국주의에 동반한 선교활동과 다르다. 즉 조선에서의 선교는 동양제국주의에 동반된 서양의 선교활동이었다. 하지만 1910년 개최된 애딘버러 세계선교자대회에서 이미 정리되었듯이 기독교는 제국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이곳 정동은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 전초기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정동길을 사이에 두고 남서쪽에 감리교의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가 위치하였으며, 북동쪽으로 장로교의 언더우드학당(경신고 전신), 정동여학교(정신여고 전신),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 전신)가 위치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북동쪽의 장로교의 학교 및 교회는 모두 정동 밖으로 떠났다. 그 이유는 1897년 대한제국이 건립되고 고종이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음으로써 경운궁을 더욱 확장해 나가면서 당시 경운궁 뒤편에 위치해 있던 장로교의 여러 기관들이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동장로교회는 현재 광화문 쪽 새문안길로 이전하면서 이름 또한 새문안교회로

‘이토 을사조약 성공’ ‘의병 소탕’… 기막힌 국정교과서

2014년 12월 11일 395

ㆍ현 4학년생이 6학년 때 수업… 쪽당 2개꼴 350여개 ‘엉터리’  ㆍ일본 시각 서술도 적잖아… “편향된 역사인식 심어줄 우려”  2016년부터 전국의 초등학교 6학년들이 배울 예정인 국정 초등 역사(사회5-2)교과서 실험본이 쪽당 2개꼴로 총 350여개의 오류가 담긴 ‘무더기 오류 교과서’라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가 좌우를 떠나 역사교과서의 오류를 줄이겠다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의 불씨를 지피고 있지만 그 취지가 무색해지는 셈이다.  역사정의실천연대는 9일 “역사 연구자들과 역사 교사들이 초등 역사 실험본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350건이 넘는 무더기 오류와 편향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 무성의한 편집 등 총체적인 문제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실험본 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전체 학교에 사용되기 전 1년간 일부 학교에서 시험적으로 사용하는 교과서다. 이번 학기에 전국 16개 학교 학생들이 실제 수업에서 사용했다.   ▲ 청에 인질로 끌려가 있는 소현세자(왼쪽)가 서양 문물을 접하고 있다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15쪽).   ▲ 머리 모양이나 복장으로 미루어 학생으로 보기 어려운 사진에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105쪽). 실천연대가 밝힌 오류들을 보면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혼동한 오류들이 속출했다.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입은 옷을 국왕의 곤룡포로 잘못 그리거나(15쪽),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으로 미뤄 다른 곳에선 평양기생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은 사진(105쪽)을 싣고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1860년 서양의 여러 나라가 일본과 손잡고 청을 공격했다는 기술(60쪽)도 잘못됐다. 실제로 1860년 베이징을 점령한 것은

초등 국정교과서에 “독도… 역사분쟁” 서술

2014년 12월 10일 350

연이은 <사회5-2> 실험본 서술 논란… “일본 주장대로 표현, 큰 문제” 지적 ▲ 초등<사회5-2> 실험본 교과서 171쪽. 무더기 오류 논란을 빚고 있는 초등 국정<사회5-2> 교과서 실험본이 ‘독도’ 관련 서술에서 ‘역사분쟁’ 지역화를 인정하는 듯한 표현을 쓴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일본 아베 정권이 목표로 하는 ‘독도 역사 분쟁지역화’를 통한 국제재판소 제소와 궤를 같이 한다는 지적이다. 독도 다룬 ‘171쪽 제목과 내용에서 역사분쟁’ 10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교문위) 소속 도종환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초등 <사회5-2> 교과서는 171쪽의 제목과 본문에서 ‘역사분쟁’이란 표현을 각각 1번씩 썼다. 이 교과서는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분쟁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어 본문에서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한 교과서를 학교에서 사용하기도 했다”면서 곧바로 다음처럼 서술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분쟁을 해결하고 주변 나라들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현재 일본의 아베 정권은 독도 역사 분쟁지역화를 통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목표로 지난해부터 2년 연속 시마네현이 주최하는 ‘다케시마의 날'(2월 22일) 행사에 차관급 관료를 파견했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지난 달에도 “독도를 역사 분쟁지역화하는 것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주는 일”이라면서 독도 입도지원센터 설립에 제동을 건 바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역사 분쟁지역화 극구 반대했는데… 도종환 의원은 “해당 교과서는 교육부의 책임 아래 만드는 국정교과서이기 때문에 역사서술에 오류가 있다면 더욱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서 “일본의 주장대로 독도를 역사분쟁화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대위 출범

2014년 12월 10일 243

현업언론인과 시민사회·문화예술 등 39개 단체 참여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등 현업언론인과 시민사회·문화예술 등 39개 단체가 함께하는 공대위는 “권력이 짓밟은 MBC를 국민이 일으켜 세우자”며 9일 출범을 선언했다. 공대위는 “MBC에서 언론의 자유는 말살됐고, 방송의 공정성은 실종됐다”면서 “MBC의 끝없는 추락은 언론장악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이어 “권력을 잡은 정권은 MBC를 장악하기 위해 낙하산 사장을 임명했고, 정권과 결탁한 부역자들은 MBC를 무참히 짓밟았다”며 “MBC는 더 이상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도, 진실보도를 위해 ‘무한도전’하는 방송사도 아니다. 민주화 이래 MBC가 쌓아온 비판언론의 전통은 낙하산 체제와 함께 산산이 무너졌다. MBC는 땡전뉴스나 다름없는 기레기 방송으로 몰락했다”고 주장했다. 공대위는 “하지만 오늘 우리는 MBC를 이대로 포기하지 말자고 얘기하려고 한다. 권력이 짓밟은 MBC를 국민이 일으켜 세우자고 호소하려고 한다”면서 “권력은 공영방송을 내다 버리려 하지만, 우리는 MBC를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국민이 MBC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는) 긴 호흡으로 끈질기게 싸울 것이다. 우리는 MBC에 대해 다시 떠들고, MBC의 문제를 알려나갈 것이다”면서 “MBC를 찾아가 화도 내고 고함도 지르는 등 ‘국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작은 실천부터 함께해 나갈 것이다”고 밝혔다. 다음은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선언문이다. 권력이 짓밟은 MBC, 국민이 일으켜 세우자!  지금 MBC의 현실은 말 그대로 참혹하다. MBC에서 언론의 자유는 말살됐고, 방송의 공정성은 실종됐다. 각종 평가에서 MBC의 자리는

광주시의회 이은방 의원 “광주 역사 교육 절실”

2014년 12월 10일 282

(광주=연합뉴스) 송형일 기자 = “경열로, 의재로를 아십니까” 광주시의회 이은방 의원은 9일 보도자료를 내고 “시의 도로명과 주소명에 대한 홍보·교육과 함께 역사성을 재검토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광주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인 광주발전거버넌스연구회 대표의원인 이 의원은 “친일 인사인 김백일 장군의 이름이 초등학교나 도로명으로 버젓이 된 사례를 보듯, 광주 역사 교육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또 “광주시는 관련 전담팀을 구성하고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현재 사용되는 도로명 등에 대한 역사성 등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광주시내 22곳 도로명에 지역과 관련한 인물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경열(정지 장군 시호)로, 충장(김덕령 의병장 시호)로, 제봉(고경명 의병장 호)로, 의재(남종화의 대가 허백련 선생 호)로 등이다. 이 의원은 “많은 시민들이 도로명에 얽힌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시민공동체 의식과 광주정신 회복 등을 위해 홍보와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8일에는 광주시의회에서 노성태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이 ‘도로명을 중심으로 한 광주의 역사 바로알기’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광주시의회는 제7대 의회 출범과 함께 의정발전과 관련된 주요시책 연구 활동을 위해 의정혁신연구회(대표의원 김보현)와 광주발전거버넌스연구회(대표의원 이은방)를 구성·운영하고 있다. <2014-12-09> 연합뉴스 ☞기사원문: 광주시의회 이은방 의원 “광주 역사 교육 절실”

‘이토 을사조약 성공’ ‘의병 소탕’… 기막힌 국정교과서

2014년 12월 10일 1343

ㆍ현 4학년생이 6학년 때 수업… 쪽당 2개꼴 350여개 ‘엉터리’  ㆍ일본 시각 서술도 적잖아… “편향된 역사인식 심어줄 우려”  2016년부터 전국의 초등학교 6학년들이 배울 예정인 국정 초등 역사(사회5-2)교과서 실험본이 쪽당 2개꼴로 총 350여개의 오류가 담긴 ‘무더기 오류 교과서’라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가 좌우를 떠나 역사교과서의 오류를 줄이겠다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의 불씨를 지피고 있지만 그 취지가 무색해지는 셈이다.  역사정의실천연대는 9일 “역사 연구자들과 역사 교사들이 초등 역사 실험본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350건이 넘는 무더기 오류와 편향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 무성의한 편집 등 총체적인 문제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실험본 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전체 학교에 사용되기 전 1년간 일부 학교에서 시험적으로 사용하는 교과서다. 이번 학기에 전국 16개 학교 학생들이 실제 수업에서 사용했다.   ▲ 청에 인질로 끌려가 있는 소현세자(왼쪽)가 서양 문물을 접하고 있다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15쪽).   ▲ 머리 모양이나 복장으로 미루어 학생으로 보기 어려운 사진에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105쪽). 실천연대가 밝힌 오류들을 보면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혼동한 오류들이 속출했다.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입은 옷을 국왕의 곤룡포로 잘못 그리거나(15쪽),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으로 미뤄 다른 곳에선 평양기생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은 사진(105쪽)을 싣고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1860년 서양의 여러 나라가 일본과 손잡고 청을 공격했다는 기술(60쪽)도 잘못됐다. 실제로 1860년 베이징을 점령한 것은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2014년 12월 9일 290

ㆍ죽산 사형 9개월 뒤 이승만 하야… 52년 만에 재심서 ‘무죄’ ■ 재심 기각 18시간 만의 사형 집행 재심이 기각된 다음날(1959년 7월31일), 변호인단이 다시 한번 재심청구서를 내려고 한 바로 그날,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대법원에서 재심 기각결정을 통보한 지 18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 11시3분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죽산은 사형장에 들어가서도 눈을 감은 채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입회 목사의 기도가 끝난 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승만 박사와 싸워 졌으니, 패자가 승자로부터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처형되는 그 시각, 서대문형무소 철문 밖에는 매일처럼 죽산을 면회하러 오는 조카 조규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호명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정오의 사이렌이 울린 뒤에야 그의 앞에 나타난 간수(형무관) 입에서 이런 말이 떨어졌다.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으니 내일 오시랍니다.” 죽산은 또 진보당 간사장으로서 함께 옥고를 치른 윤길중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결국엔 어느 땐가 평화통일을 할 날이 올 것이고, 온 국민이 고루 잘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되지.” 그는 또 대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