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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양평, 몽양 여운형생가기념관 개관 3주년 뮤지엄 콘서트 (12.13)

2014년 12월 8일 241

양평군 몽양 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는 오는 13일 개관 3주년을 맞아 기념식 및 뮤지엄 콘서트를 개최한다. 오후 2시부터 개최되는 이날 행사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식과 함께 2014년 한해를 마무리 하는 <뮤지엄 콘서트>를 개최한다. 박경호씨 사회로 진행되는 뮤지엄콘서트는 노래하는 나들, 이란, 최용석의 다양한 음악과 함께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과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홍보실장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최,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주관으로 국가보훈처와 양서농협의 후원으로 마련됐다. 몽양 여운형생가기념관은 양평군이 34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신원리 623-1번지 일원에 총면적 1천55㎡ 규모의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공사를 마치고 2011년 11월 27일 개관했다.   ⓒ 동부중앙신문(주) 김현술 기자 news9114@hanmail.net

친일·분단과 함께 축소, 파괴된 덕수궁

2014년 12월 8일 1111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2) 정동·덕수궁 돌담길 ▲ 정동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서소문 ~ 돈의문 구간 : 정동일대 정동(貞洞) 유래와 신덕왕후 강 씨의 운명 서소문일대에서 있었던 구한말 의병전쟁을 상상하며 길을 건너면 바로 중구 정동이다. 정동은 덕수궁을 위시하여 여러 역사흔적들이 남아있어 1900 년를 전후한 격동의 현대사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으로 수많은 역사기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먼저 정동의 동명은 바로 이곳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의 묘 ‘정릉’이 있었던데 유래한다.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던 탓에 그의 무덤을 사대문 안에 두었으며,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까지 건설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신덕왕후의 사망에 앞서 그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정비 신의왕후의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이 격분하여 훗날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의왕후 소생 태종 이방원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고, 또 그의 묘를 파괴하여 지금의 사대문밖 성북동으로 이전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일국의 왕으로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주:태평관)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 가장 큰 명분은 사대문 안에 위패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 위패를 모실 수 있는 곳은

일본 시민단체 “내년 한일협정 50돌…체결과정 철저 검정할 것”

2014년 12월 8일 470

“14일 중의원 선거에서 아베 정권이 다시 집권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베 정권은 그동안 진행해온 역사 수정주의 정책을 간단히 그만두진 않을 겁니다. 일-한 시민들의 한층 더 끈끈한 연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7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분교구 분교구민회관 3층.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돌을 맞아 한-일 양국의 우호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 시민들이 모여 만든 ‘한일 유대회복 캠페인’(이하 캠페인)의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이 입을 열었다. 캠페인은 4년 전인 2010년 8월 ‘한-일 병합조약은 무효’라는 양국 ‘시민공동선언’을 내놓은 일본의 활동가들이 위안부 문제 등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의 개선책을 찾기 위해 지난 2월 출범시킨 단체다. 캠페인은 이날 ‘2015년,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캠페인은 내년 중점추진 사업으로 지난 50년간 한일관계의 기본 원칙인 ‘1965년 한일협정’의 체결과정을 검정하기로 했다. 현재 핵심 갈등 현안인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 문제 등이 한일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 차이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선의 있는 선조처를 요구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모든 양국간 현안은 한일협정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양국은 애매한 한일협정 조항 탓에 식민지배의 불법성 등에 대해서도 해방 70년이 되도록 인식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한일협정 문서공개 운동을 꾸준히 진행해 온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국제정보대학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앞으로 한일협정의 교섭 내용과

조선 봉건왕조에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까지

2014년 12월 5일 1597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1) 숭례문·선혜청·칠패시장·명동과 충무로 ▲ 숭례문~서소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숭례문 ~ 서소문 구간  육백년을 지켜 온 국보1호 <숭례문>, 신자유주의로 무너지다.  현재 국보1호인 숭례문은 2008년 2월 어느 시민의 방화로 인하여 현재의 것은 홍예(석문)와 현판 그리고 문루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비록 지난 조선시대의 것은 아닐지라도 한양도성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의미는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에 여전히 국보1위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숭례문이 갖고 있는 도성에서의 지위와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숭례문(崇禮門)에서 ‘례(禮)’는 오행(五行)에서 말하는 불(火)을 뜻하며, 오방(五方)에서 말하는 남방(南方)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쪽의 관악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다름 아닌 불의 산(火山)이다. 남쪽에서 들이치는 이 화기를 막아야 경복궁이 온전하고 백성들의 삶이 편안하다. 그래서 남쪽의 문을 통해서 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불과 같은 모습의 숭(崇)자를 택했다. 숭(崇)자 위에 있는 산(山)은 산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함으로써 관악산의 기세를 억누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세 곳 대문과 달리 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형상하기 위하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못은 단지 숭례문뿐 아니라 다른 세 곳의 대문 근처에도 있어 관악산의 화기 때문만은 아니며, 모든 대문의 화재예방과 휴양시설, 풍수적 의미 등 다양하게

“불교계 일제 친일승려 청산 안됐다”

2014년 12월 5일 559

윤기엽 박사, 호국불교연구 학술세미나서 주장 불교계 친일승려 대부분은 기존의 권력과 지위를 그대로 유지, 세습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윤기엽 박사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불교사회연구소(소장 법안 스님) 호국불교연구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 불교와 국가’를 주제로 발제에 나선 연세대 윤기엽 박사. ‘한국 불교와 국가’라는 주제로 발제에 나선 윤 박사는 “해방 후 정치권의 친일파 청산이 실패로 끝난 것처럼, 불교계의 친일승려도 청산되지 않았다”며 “결국 친일불교를 단죄하지 않은 불교계의 역사적 과오가 생겨났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정치권에 기대어 권력의 시혜를 누리려는 다수의 정치승려를 양산하게 됐다”며 “그들에 의해 불교계는 파행적 행보를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윤 박사는 “청일전쟁 이후 대세가 일본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면서 불교계의 주류도 친일불교로 급선회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조선조를 거치면서 자생력이 취약한 불교계가 시대 조류에 휩쓸려 친일화의 길을 걸었던 것은 결코 이례적 현상으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윤 박사는 “박정희 유신정권기인 1975년 12월 17일에는 호국승군단이 결성됐다”며 “19세기 말 갑오경장 때 폐지됐던 승군이 20세기 대한민국에 부활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 승군단 발단의 목적은 국가 유사시 구국선봉에 섰던 호국법통을 이어받아 불법을 통한 호국안보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군사정권의 안보논리에 따라 불교계 전체가 승병 체제로 편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윤 박사는 “1994년 조계종 총무원장 3선 연임을 기도하다가 불교계의 반발로 축출된 서의현 총무원장의 정치적 발언에 주목해야 한다”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日王 생일 참석자들에 호통치는 아주머니

2014년 12월 5일 260

▲유튜브 영상 캡처 서울 한복판에서 아키히토 일왕(81)의 생일 축하연이 열린다는 소식에 한 아주머니가 추운 날씨 속에 2시간 동안 파티 참석자들을 꾸짖었다. 이 장면을 담은 영상은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 호텔 앞에서 촬영됐다.  독립미디어 활동가 미디어몽구는 4일 “생일 파티에 초대받고 온 모든 축하객과 분위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아주머니 영상을 공유하고 싶다”며 4분 분량의 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게재했다.  영상엔 활빈단 등 보수단체의 기습 시위에 이어 호텔 앞에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는 차량을 향해 욕설을 섞어가며 꾸짖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담겼다. 이 아주머니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일본왕 생일파티에 참여하는 xxx들 자폭하라” “x물이나 먹어라” “전범 국가 왕 생일 파티에 와서 얻어 X먹으러 왔냐” “너네 나라로 돌아가” 등으로 호통쳤다.  아주머니는 “지난해 롯데호텔에서 생일 파티를 열었을 때도 갔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니냐”며 “저 사람들은 욕 들어 마땅하다. 더 심한 욕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면서 “한국에서 일왕의 생일 축하파티가 열리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인터넷에선 일왕 생일파티가 열린 그랜드하얏트서울 호텔에 대한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일본대사관 관계자는 5일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대사관은 약 300명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대사관은 지난 7월 롯데호텔에서 자위대 창설 60주년 기념식을 열려다가 여론의 반발로 호텔 측이 행사 취소를 통보하자 일본대사관저로 장소를 옮겨 행사를 축소 진행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

친일파가 쓰고, 친일파가 세운 친일파 기념비

2014년 12월 5일 377

광주 ‘백일로’ 지명 유래 김백일 기념비, 친일 사학자 이병도가 써 ▲ 육군보병학교 홈페이지에 ‘학교상징물’로 게시된 김백일 기념비를 보면, 지은이와 세운이에 각각 이병도, 정일권이란 이름이 올라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다. 김백일 기념비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돼 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 ⓒ 육군보병학교 홈페이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소재지인 광주 서구 ‘백일로’가 친일인사 김백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된 가운데, 육군보병학교에 있는 김백일 기념비의 글쓴이와 세운이 역시 친일인사로 확인됐다. (관련기사 : “광주 ‘백일로’ 유래는 친일파 장교 김백일”) 육군보병학교 홈페이지(바로가기)에 ‘학교상징물’로 게시된 김백일 기념비를 보면, 지은이와 세운이에 각각 이병도, 정일권이란 이름이 올라있는데, 두 사람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다. 특히 김백일 기념비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돼 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어 시민사회가 반발하고 있다. 이병도·정일권, 각각 친일 사학자·군인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소재지인 광주 서구 ‘백일로’가 친일인사 김백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육군보병학교에 있는 김백일 기념비의 글쓴이와 세운이 역시 친일인사로 확인됐다. 육군보병학교 홈페이지에 ‘학교상징물’로 게시된 김백일 기념비를 보면, 지은이와 세운이에 각각 이병도, 정일권이란 이름이 올라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다. ⓒ 친일인명사전 김백일 기념비의 글을 쓴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활동했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조선총독부 직속기구로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병도는 1939년 11월

[2014.12.03] 을사늑약 특집 친일파 열전 이완용 4편

2014년 12월 4일 261

▲라디오 백년전쟁 – 을사늑약 특집 친일파 열전 이완용 4편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554642 ☞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41203nrh1.mp3

이리저리 떠도는 ‘반민특위’ 표석

2014년 12월 4일 621

울 명동은 백화점 본점들이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상공인들의 역사도 어느 곳보다 오래됐을 정도로 상업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동시에 한국의 정치사회사에서도 의미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해방 뒤 친일부역의 ‘흑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의 중심지도 바로 명동이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설치한 기구로, 일제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거나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죽이거나 박해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실현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정의실현’보다는 ‘질서유지’를 우선시했던 미군정에 의해 친일부역자들이 다시금 권력을 쥔 현실에서 친일 청산은 쉽지 않았다. 친일부역자들의 경제적.물리적 힘에 기대어 1인 장기 독재를 꿈꾸던 이승만 입장에서도 반민특위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급기야 경찰을 동원해 완력으로 방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반민특위는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강제 해산되어버렸다.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하던 이들이 거꾸로 친일부역자들에 의해 ‘역청산’되어 버린 쓰라린 역사…. 친일부역자들은 이후 반공주의자로 둔갑해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며 독재정권의 전위대이자 몸통 그 자체가 되니, 미완의 역사 청산이 남긴 후과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결말이다. 다행히 지난 역사를 모두가 잊고만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반민특위가 해산된 지 50년만인 1999년,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KB국민은행 명동영업부 빌딩 밑에 그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석을 세웠다. 그리고 최근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반민특위 표석이 원래 자리에서 지하주차장 입구로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2014년 12월 3일 377

ㆍ“특무대가 시켜 거짓말” 양명산 진술번복에도 대법 “사형” ■ 조봉암 ‘간첩 무죄’ 판결의 파장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배기호)가 조봉암의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일부) 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조봉암 피고인은 간첩행위를 한 일이 없으며, 간첩 박정호와는 만난 일도 없고, 정우갑과는 만난 일이 있지만 면담 내용이나 경위로 보아 유죄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 …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를 위반했거나 북한과 야합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사실은 이를 인정할 수 없고, 진보당의 정강 정책도 국가변란이나 북한에 호응한 행위로 볼 수 없으며, 진보당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국헌을 위배했다는 공소사실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1심 판결은 조 피고인이 양명산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점과 무기 불법 소지의 점만을 유죄로 인정하고, (양명산과 같이) 징역 5년에 처한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1심 판결 직후, 조·양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무죄 선고에 이은 보석 결정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반공청년 200여명 법원 난입, ‘용공판사 타도하라’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인정 않고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이 사건을 둘러싼 정권 측의 노림수에 비추어 볼 때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선고 3일 뒤에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958년 7월5일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자칭 반공청년 200여명이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법원 정문으로 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