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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 재건, ‘이념적 광기의 시대’로의 퇴행
서북청년단의 정치테러, 권력 비호로 가능 스스로 반공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던 선우휘가 쓴 ‘테러리스트’라는 소설이 있다. 해방정국과 분단정부 수립과정에서 “빨갱이를 치는”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필요악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던 한 우익청년단체의 회원들이 정작 분단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정권에 버림받아 “영락없이 룸펜”으로 전락해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짐승처럼 멱살을 부여잡고 뒤엉키는 모습을 그린 결론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소설에 나오는 몰락한 우익청년단체란 서북청년회(약칭 서청)를 가리킨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말 출범한 이래 이승만정권이 1948년 12월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이라는 어용단체를 꾸릴 때까지 2년 남짓 존재했다.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당시 가장 악명 높은 테러집단이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 가운데 특히 혈기왕성한 청년층이 ‘반공’을 표방하면서 만든 청년단체였다. 그러나 말이 청년단체이지 하는 짓은 정치깡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을 비호하던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조차 나중에는 진저리를 칠 정도의 비인간적 테러집단이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 활동의 기본은 ‘빨갱이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벌인 폭행, 암살, 그리고 집단학살이었다. 서북청년회의 백색테러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좌익에게만 테러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누구에게라도 좌익의 혐의를 씌워 테러를 자행했다. 그리고 테러의 끝은 암살과 집단학살이었다. 1948년에 일어난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 바로 이승만정권의 하수인이던 서북청년회였다. 실제로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 출신이었다. 서북청년회의 암살 명단에 오른 것은 정치지도자만이 아니었다. ‘좌익편’이라는 이유로 현직검사가 암살되기도 했다. 그런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국가가 책임져야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 (서울=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다래헌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에서 박선주 발굴단장이 유해발굴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도연 기자 = 정부가 한국전쟁기에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배·보상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으로 이뤄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2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를 열어 “정부와 사회는 유족과 시민이 진주에서 지난 3월 발굴한 유해에 대해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조사단은 “진주 발굴 조사 결과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인 39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이 지역에서 713명이 희생당했다는 조사가 있어 아직도 많은 유해가 묻혀 있다. 유해가 거의 삭은 것을 보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삭아 없어질 것”이라며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유족회 김광년 공동대표의장은 “앞으로 유해 발굴사업을 계속 추진해나가겠다”며 “유해를 한군데 모아 평화관 등을 만들어 후세에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공동조사단은 지난 3월 경남 진주에서 진행한 민간차원의 첫 발굴작업에서 최소 3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버클과 탄두, 탄피, 옷핀, 단추 등 82점의 유품도 나왔다. 당시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버클과 와이셔츠 단추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희생자들은 당시 사회적 신분이 있는 민간인으로 추정되며 주로 경찰이 사용하던
남산, 치욕의 통감관저에서 공포의 중정까지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0) 안기부 터·문학의집·남산한옥마을·한국의집 ▲ 예장동, 필동 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예장동, 필동일대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및 조선총독부 안중근기념관에서 일제 강점기는 조선신궁 참배를 위한 ‘동참로’라 불렸던 현재의 ‘소파로’를 따라 일제 강점기 일본의 본거지였던 중구 예장동방향으로 가보도록 하자. 그런데, 이곳을 향해 걷다 보면 가는 길 왼쪽에 <한양공원>이라 새겨진 돌이 있다. 이것은 본래 남산3호 터널 북쪽에 있었으나 터널공사로 이리로 옮겨진 것이다. 1910년 일본이 남산일대를 공원화하면서 개장식 때 고종이 보낸 ‘漢陽公園(한양공원)’ 친필을 새겨 둔 것이다. 하지만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제는 한양공원을 1918년 폐쇄하였다. 한편 이 기념석 뒤편은 현재 모두 정으로 쪼아 알아 볼 수 없는 상태로 보아 아마도 공원개장의 후원자명단 같은 것이 적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 1910년 도성 안 남산일대는 일제에 의해 <한양공원>으로 개원되었다가 이후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1918년 폐쇄되었다. 사진 속 글씨는 고종 어필이다. [사진-유영호] 이렇게 한양공원 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숭의여자대학교와 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해 있다. 바로 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구 조선통감부)가 1926년 경복궁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있던 곳이다. 또 서울애니매이션센터 앞 버스정거장에는 바로 이곳이 1921년 의열단 김익상에 의해 조선총독부를 향하여 폭탄이 던져진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그런데 김익상은 정작 이곳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그 뒤 6개월 후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그곳에서
‘친일파 김백일’, 상무대에 강감찬·이순신·안중근 동상과 함께?
광주 시민사회 “체제 지켜낸 전쟁영웅이라도 친일행적 지울 수 없다”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1일 오전 광주 첨단 정부합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훈처에 ‘친일파 김백일’ 현충시설 지정 철회와 기념물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광주는 최근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이 학교·공원·도로 등에 사용된 것이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거세다.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704명 명단에도 포함된 김찬규가 ‘호국영웅 김백일’로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인 것. 광주 서구에 학교·어린이공원·도로명·지구명 등 친일파 딴 이름 곳곳에 광주 서구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공원, 도로명 등에까지 ‘백일’이란 명칭이 쓰이고 있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이전한 주소도 ‘백일로’다. 게다가 서구 화정4동 백일지구는 90~92년에 택지개발이 이뤄졌다. 광주시에 따르면, 백일지구의 ‘백일’은 택지개발 전 이곳에 위치해 있던 백일사격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백일’이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 토벌부대 주축인물이었던 친일파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김백일 장군은 만주 일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된 독립군 토벌부대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김백일 장군의 친일행적 등을 살펴 보면,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패망·해산할 때까지 간도지역 등에서 독립군 토벌작전을 모두 108차례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이른다. 당시 그의 본명은 ‘김찬규’였다. 그는 해방 뒤 월남하면서 “세상이 다 붉은 색으로 물들어도 나 혼자만은 반공에 입각해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김백일로 개명했다. 이처럼 친일파의 이름 사용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남산에 박혀있는 치명적인 친일의 흔적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9) 남소문·조선신궁 ▲ 남산 성곽을 따라가는 남소문~숭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남산 성곽(남소문 ~ 숭례문 구간) ‘존재하였다는 사실’조차 잊혀진 <남소문> 옛 타워호텔 입구에서 창충단로를 따라 한남동 방향으로 약 200미터 남짓 언덕길을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외로운 표석이 하나 있다. 이것이 <남소문>표석이다. 흔히 사람들은 <광희문>을 남소문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광희문은 남소문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광희문이 이곳 남소문보다 약 60년 먼저 태조 5년(1396)에 건설되었지만 광희문을 남소문이라 하지는 않고 그저 수구문, 시구문이라 속칭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세조 1년(1457) 이곳 남산 아래 진짜 남소문이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남소문은 수레가 다닐 수 없어 실용성이 떨어지고, 또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를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건설된 지 12년 만에 예종 1년(1469) 폐쇄하게 된다. 그 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숙종 때에는 붕당정치가 심화되었던 관계로 정권 획득을 위해 남인(南人)들이 문을 개통하자고 한데 반하여 서인(西人)들은 이를 반대하였던 것도 이채롭다. 이처럼 남소문은 비록 폐쇄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경강(京江)> 남소문 터에서 다시 성곽 길을 따라 남산을 힘겹게 올랐다. 남산에서 성곽의
천안출신 독립운동가 이동녕 일생 무대 오른다
천안시립무용단, 12월 4·5일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서 ‘100년의 꿈’ 2회 공연 – 애국충절의 고장 천안시민 자긍심 고취·독립운동가의 독립의지와 민족애 재조명 –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친 천안출신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무용작품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천안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천안시립무용단(상임안무자 김종덕)은 제11회 정기공연으로 12월 4일∼5일 저녁 8시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석오 이동녕선생의 일생을 통해 애국지사의 고장 천안을 새롭게 조명하는 석오 이동녕 ‘100년의 꿈’을 공연한다. 이번 작품은 항일무장투쟁의 전사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 하고도 두 해가 되는 해로 천안 목천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의 독립의지와 민족애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로, 백범 김구선생이 존경했던 인물이며, 윤봉길의사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이동녕 선생의 초상화가 발견될 만큼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던 분이다. 일제 침략에 맞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치며 임시정부의 결집에 노력했고, ‘산류천석(山溜穿石/산에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을 신념으로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투쟁할 것을 독려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특히 이번 작품공연으로 이동녕 선생을 통해 애국지사의 고장인 천안을 새롭게 조명하고 한국창작춤의 동시대성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종덕 상임안무자는 “천안시립무용단은 시민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단체로 시민의 눈높이게 맞는 동시대성을 바탕으로 시민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2015년은 광복 70주년으로 나라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공감하는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것이며,
아이들 울음도 그치게 한 말, “일본순사 온다”
[박도 실록소설 ‘들꽃’ (16)] # 제4장 압록강을 건너다 ③ <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국화, 사군자의 하나로 절개, 지조를 상징한다. ⓒ 박도 황현의 절명시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전라도 구례 고을의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秋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 옛일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삼천리 금수강산은 경술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단박에 그 빛을 잃었다. 경북 선산군 구미 임은동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 앞은 낙동강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갯벌에는 갈대숲이 무성하여 바람이 부는 날에는 은빛갈대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 아이들은 사시사철 낙동강 모래톱에서 뛰어놀기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하지만 정미년(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 폐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왕산 허위가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했다. 그 이후 일본 헌병이나 경찰들은 걸핏하면 동네에 나타나 의병대장 왕산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때부터 구미 임은동은 웃음소리를 잃은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서북청년단 재건 총회 ‘몸싸움’ 속 강행 논란
↑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립청소년수련관에서 예정된 ‘서북청년단 재건 총회’를 앞두고 장소 대관 불허 방침에 따라 철수를 요구하는 수련관 관계자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이들에게 폭력과 테러를 자행한 극우반공단체다./사진=뉴스1제공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을 훼손하려다 논란이 됐던 ‘서북청년단’의 재건 총회가 폭력사태 속에 강행돼 논란이 되고 있다.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등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이하 재건위) 소속 50여명은 지난 28일 오후 2시 재건 총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서울시 청소년 수련관은 행사 진행 하루 전인 지난 27일 대관 승인을 취소했다. 재건위는 대관 승인 취소에 항의하며 수련관측 관계자와 몸싸움을 벌이며 항의했다. 이들은 카페 테이블 등 시설물을 이동시키고 현수막과 깃발 등을 설치하면서 이를 제지하려는 수련관 관계자와 몸싸움을 벌여 이 과정에서 수련관 관계자가 넘어지기도 했다. 충돌이 거세질 조짐을 보이자 전날 수련관측의 시설보호 요청으로 현장에 대기 중이던 경찰이 투입돼 충돌은 중단됐다. 그러자 재건위는 장소를 옮겨 행사를 강행했다. 서북청년단은 “이미 서면계약을 작성하고 계약금이 반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법한 대관”이라며 “권리행사방해죄와 업무방해죄로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재건위는 재건총회를 열기 위해 지난달 27일 수련관을 대관했으나 수련관측은 지난 27일 대관 운영규칙에 어긋난다며 대관 취소를 통보했다. 수련관의 시설대관 운영원칙은 청소년 수련관의 설립취지 및 운영 내용에 반하거나, 특정한 정당이나 종교의 목적을 가지고 있거나 시설대관의 취지에 부적합하다고
서을성곽과 ‘장충단’ 깔고 앉은 대저택, 그리고 반공·친일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8) 장충단·박문사·신라호텔·구 타워호텔·자유센터 ▲ 장충단 공원일대 장충동에서 남산입구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장충단 공원일대(장충동 ~ 남산입구 구간) 장충동 성곽 길을 깔고 앉은 대저택들 <광희문>부터 장충체육관까지의 성곽 길에는 성곽이 없다. 거의 모두 땅 속에 묻혀있거나 그 일부가 주택의 담장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다. 장충동은 성북동, 평창동, 한남동 등과 더불어 정치인과 기업인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부촌 가운데 하나였다. 한때는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고 이병철회장도 이곳에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부자들도 1980년대 후반부터 강남으로 상당수 떠나면서 지난날의 위세는 점차 잃어가고 있다. ▲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의 자택. [사진-유영호] 한편, 장충동1가와 신당동의 경계는 한양성곽을 기준으로 나뉘게 되는데 지도를 펼쳐보면 이 경계선이 장충동 대저택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곧 그 주택이 서울성곽 위에 올라서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기주택의 전망을 위해 성곽을 타고 앉은 꼴이다. 앞서 혜화문 옆 전 서울시장공관과 같은 셈이다. 주택의 전망을 위해 이처럼 성곽을 타고 앉은 주택이 앞서는 공공기관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부잣집 대저택이었다. 그것도 두 개 법정동에 걸쳐 하나의 주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당동’은 본래 ‘귀신 신(神)’자를 쓴 ‘신당(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에서 유래한 동명이다. 이것이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바뀐 것인데, ‘귀신 신(神)’자가 ‘새 신(新)’자로 바뀌어서 그런지 귀신이 이처럼 성곽을 깔고 앉은 집주인을 못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상상을 해본다. <장충단(奬忠壇)>
12월의 호국인물 ‘최용남 소장’· 독립운동가에 ‘오면직 선생’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12월의 호국인물과 독립운동가에 해군 최용남 소장과 오면직 선생이 각각 선정됐다. 28일 전쟁기념관은 6ㆍ25전쟁 당시 북한 무장수송선을 격침한 ‘백두산함’의 함장 최용남 소장(1923.10~1998.11)을 ’12월의 호국인물’로선정했다고 밝혔다. 평안남도 용성군에서 태어난 최 소장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 1946년 5월 1일 해군 참위로 임관했다. 이후 진해 기지교육대 교관, 함정부 부관 등을 역임하고 1950년 4월에 제2함대 PC함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6ㆍ25전쟁 중 부산 해역으로 침투하던 북한 무장수송선(1천t급ㆍ무장병력 600여명 탑승)을 발견하고 당시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인 백두산함 함장으로서 적함을 추격해 격침했다. 별다른 사격연습과 교전경험도 없이 야간과 악천후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당시 ‘대한해협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최 소장은 이 밖에도 서ㆍ남해안 봉쇄작전, 여수 철수작전 등에서 북한군의 해상침투를 저지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고,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해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1953년부터는 해병 학교장으로 부임해 해병양성에 힘썼고, 이후 해병대사령부에서 작전국장, 참모부장 겸 군수국장,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65년 해병 소장으로 예편했다. 12월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오면직 선생(사진)은 친일세력 처단과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해 의열투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오 선생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양산학교와 평양 대성중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했다. 1922년 스승인 김구 선생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한 후 한국노병회 파견원 신분으로 중국 허난(河南)성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에는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및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다. 1932년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모의에 참여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