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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정희 생일을 국가기념일로?” ‘북한식 발상’ 맞나
[팩트체크] 이철우 경북도지사 제안…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 탄생 기념일’ 찾기 어려워 이철우 경북도지사 “박정희 생일, 국가기념일 제정 검토 필요” 윤석열 정부에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국민의힘 소속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박정희 생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고 제안했다. 지난 14일 경북 구미시 박정희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6돌 숭모제 및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이 지사는 16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구호를 외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 등을 펼쳐 5000년 가난을 물리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 달성에 크게 기여, 한강의 기적을 만든 위대한 영웅으로 여러 나라에서 찬사”하고 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 탄신일을 기념하는 날을 제정, 우리도 하면 된다는 신념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저출산 등 국가적 현안을 해결하고 세계 초일류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일부 누리꾼은 ‘박정희 탄신 기념일’ 제안이 ‘북한 따라하기’라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 북한 외에 전직 국가원수 생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사례가 있는지 따져봤다. 민주공화국에서 ‘국가원수 탄생 기념일’ 찾기 어려워 북한의 경우 김일성(4월 15일)과 김정일(2월 16일) 생일을 각각 국가 명절인 ‘태양절’과 ‘광명성절’로 지정했다. 우리나라도 국가기념일은 아니지만 지난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전 대통령 80회 생일을 맞아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경축기념식을 열었다. 우리 정부는 현재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른 5개 국경일 외에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53개 기념일을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대중가요의 역사 ‘가왕열전 5편 최희준’
☞ (11.14) ‘역발상’ 시즌 2: 대중가요의 역사 ‘가왕열전 5편 최희준’ 출연:이준희(옛가요 전문가) 이영미(대중문화 평론가) 오늘의 이야기:가왕 열전 5편 최희준 최희준 1936~2018년. 서울 출생 원래 본명이 최성준이지만, 개명해서 본명도 최희준으로 경복고, 서울대학교 법대 행정학과(55학번). 대학 재학 중 교내 축제에서 부른 노래로 주목을 받아 1959년 졸업 후 본격적인 가수 활동 시작. 미8군쇼에서 무대 활동을 하다가 1961년 비너스레코드에서 음반 데뷔 군복무로 인한 공백(1964년 2월 전역)이 있긴 했지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톱 가수로 활약 1. 학사가수 대표주자: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손석우 사·곡, 1961년) 비너스레코드에서 데뷔한 학사가수의 아이콘, 최희준과 김상희 2. 미8군쇼: <내 사랑 쥬리안>(손석우 사·곡, 1962년) 한국의 냇 킹 콜 3. 방송과 영화 주제가: <맨발의 청춘>(유호 사, 이봉조 곡, 1964년) 1960년대는 최희준의 시대인 동시에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의 시대 4. 1960년대 유명 스탠더드팝 작곡가들과 모두 작업: <빛과 그림자>(길옥윤 사·곡, 1966년) 손석우에서 시작해 작곡가의 폭이 점차 확대. 김호길(<진고개 신사>), 이봉조(<맨발의 청춘>), 한동훈(<옛 이야기>), 홍현걸(<엄처시하>), 서영은(<노신사>), 심지어 길옥윤(<빛과 그림자>)까지 5. 초대 가수왕: <하숙생>(김석야 사, 김호길 곡, 1966년) 1965년 제1회 방송가요대상 가수상, 1966년 제1회 10대가수청백전에서 모두 최고 인기가수로 선정. 1966년 당시 수상곡이 <하숙생> 6. 최고의 학벌+노래로 형성된 서민적 풍모: <엄처시하>(김석야 사, 홍현걸 곡, 1965년) 아마도 그 덕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 대중가요 가수로서는 전무후무한 이력 7. 가창의 영향력?: <가장무도회>(심영식 사,
[영상] 故 강만길 선생을 그리며
〈강만길 선생 연보〉 〈다운로드〉 강만길(姜萬吉, 1933년 10월 25일~2023년 6월 23일)선생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 호는 여사(黎史)이다. 고려대학교 교수 · 청명문화재단 이사장 ·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 상지대학교 총장 ·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위원장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창립 당시부터 고문으로 참여하고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 내일을여는역사재단 명예이사장을 맡아 깊은 인연을 이어 왔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한국민족운동사론』 등 180여 권에 이르는 선구적인 업적을 남겨 한국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등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였다.
[성명]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은 윤석열 정부를 규탄한다.
[다운로드] [성명]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또다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은 윤석열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파비안 살비올리(Fabián Salviol) 유엔 진실, 정의, 배상 및 재발방지 증진에 관한 특별보고관(Special Rapporteur on the promotion of truth, justice, reparation and guarantees of non-recurrence, 이하 ‘진실정의 특보’)가 9월 13일(제네바 현지시각) 제54차 인권이사회에서 대한민국 방문조사보고서를 공식 발표했다. 진실정의 특보는 보고서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미흡한 대응에 우려를 표하며 대한민국 정부 및 인권침해 관련국에 30건의 권고사항을 발표하며 고령의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과거사 청산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특히 일본군성노예제 생존 피해자들이 국제기준에 따라 진실, 정의, 만족을 포함한 배상 및 재발 방지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2015 한일합의’를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정의 특보 발표 후 이어진 대한민국 정부의 답변에서 윤성덕 주 제네바 한국 대표부 대사는 진실정의 특보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2015 한일합의’를 “양국 간 공식 합의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공식 사죄, 배상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피해자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국제 인권기준에도 부합하지 않아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2015 한일합의’를 또다시 되살리려는 한국 정부의 반역사적이며, 반인권적인 태도를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한국 정부는 진실정의 특보 보고서에 대한 공식 답변 보고서에서 지난 5월 7일 기시다 총리가
[연합뉴스] 제16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령자에 이명학 박사
[기사 발췌] ▲ 재단법인 역사와 책임(이사장 함세웅)은 제16회 ‘강만길연구지원금'(2천만원) 수령자로 이명학(40·사진) 한국교원대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 수여식은 17일 오후 5시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 7층 체칠리아홀. …중략… 강만길연구지원금의 재원은 지난 6월23일 작고한 사학자 강만길(1933∼2023) 전 고려대 교수가 사재를 출연해서 만든 강만길연구기금이다. 올해 심사대상은 2021년 후기와 2022년 전기 학위 논문 20편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2023-11-10> 연합뉴스 ☞기사원문: [동정] 제16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령자에 이명학 박사
[영상][국제회의] 한일 과거청산 운동의 기억과 전망
[하이라이트 영상] [국제회의] 한일 과거청산 운동의 기억과 전망 개회사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1부 한일 과거청산의 성과와 과제 -발표1 일본의 ‘전후보상운동’의 역사와 과제발표 야노 히데키 | 토론 김민철 -발표2 강제동원 관련 특별법의 성과와 과제발표 장완익 | 토론 나카타 미쓰노부 2부 한일 과거청산의 현안과 쟁점 -발표3 피해자 유족과 함께 걸어왔다, 2010년10월 고베‧오사카‧교토증언집회가 그 출발점발표 우에다 케이시 | 토론 김영환 -발표4 피해자 인권 회복의 길을 묻다 –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철회소송발표 남상구 | 토론 즈시 미노루 3부 한일 과거청산 운동과 나 -발표5 김승은 한국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을 돌아보다 -발표6 기무라 아야코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피해자・유족과의 인연을 소중히 -발표7 야마모토 나오요시 한국인 피해자 소송 지원 운동과 나 -발표8 나카가와 미유키 후지코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와 함께 투쟁하며 전체토론 -길윤형, 후루카와 마사키, 정은주 *하이라이트 영상에는 개회사와 발표 부분만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일본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일에 동원된 인물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만조 현대 한국인들은 광개토태왕(광개토대왕)과 세종·정조를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한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요임금·순임금과 우왕·탕왕·문왕·무왕을 성군으로 인식했다. 조선왕조 설계자인 정도전은 법전인 <조선경국전>에서 “요임금·순임금 시대에는 군주와 신하가 모두 성자였다”, “우왕·탕왕·문왕·무왕 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현자였다”고 칭송했다. 이런 인식은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들에 의해 공유됐다. 조선시대에도 불교나 신선도(국선도) 등의 영향력이 상당했지만, 사회를 이끄는 유학자들이 요·순과 우왕·탕왕·문왕·무왕을 떠받들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위 6명 중 하나를 언급해야 무난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일본은 그런 분위기까지도 한국 지배에 활용됐다. 일본의 지배를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일에 이용했다. 여기에도 친일파들이 동원됐다. 유학자 정만조의 행적이 이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철종 임금 때인 1858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정만조는 고종 시절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우수한 선비들이 임명되는 요직을 거쳤던 것이다. 유교 이념을 많이 다루는 이런 관직을 역임했기 때문에, 그는 요·순 및 우·탕·문·무왕과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대한제국 멸망 5년 뒤인 1915년에 요시히토 일왕(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자 한시 한 수를 작성했다. 다이쇼(大正)란 연호를 사용해 다이쇼왕으로도 불리는 요시히토를 위해 그가 지은 시가 조선총독부 관계자들과 친일파 이완용·박제순·조중응 등이 만든 스터디 모임인 이문회(以文會)의 기관지에 실렸다. <이문회지> 제3집에 수록된 이 시는 “흰 깃발 선명하게 휘날리며/ 해는 바야흐로 중천에 뜨고/ 불복종을 생각하는
[통일뉴스] 2023년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수상자로 선정
[기사 발췌] 2023년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선정됐다. 민족일보기념사업회(이사장 원희복)는 10일 “2023년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중략…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을 시작으로, 민족문제연구소 부소장을 거쳐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에 부임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18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는 등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길문학>주간, 계간 <한국문학평론>주간 등 문예잡지 활동도 소홀히하지 않으며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한국문학연구소 소장을 지내는 등 문학평론가로서 성가를 높였다. 민족일보기념사업회는 “그는 진보 언론인, 정의를 규명하는 역사가, 실천적 문학평론가, 민주화 운동가로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는 고난에서도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하면서 “이러한 올곧은 삶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지금도 검찰독재, 민생파탄, 전쟁 위기 극복을 추구하는 ‘전국비상시국회의’에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며, “언론 및 출판, 역사정의, 실천문학, 원로로써 사회활동은 [민족일보]가 추구했던 정신과 부합한다는 판단으로 제5회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2023년 조용수언론상 시상식은 11월 14일 오후 6시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통일뉴스] 창간 23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이승현 기자 shlee@tongilnews.com <2023-11-10> 통일뉴스 ☞기사원문: 2023년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수상자로 선정 ※관련기사 ☞시민언론 민들레: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 수상 ☞한국기자협회: 제5회 조용수언론상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오마이뉴스] 전두환 정권 때 준공된 대전현충원, 아직 남은 전두환의 흔적들
(오마이뉴스, 2023.11.13) 기사원문 보기 ☞ 전두환 정권 때 준공된 대전현충원, 아직 남은 전두환의 흔적들 대전현충원은 1985년 11월 13일에 당시에는 대전국립묘지라는 이름으로 준공되었는데요. 대전현충원은 전두환 정권 때 준공되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전두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현충원 현충문은 1983년 5월에 한옥을 본떠 만들었는데, 현충문에 걸린 현판이 2020년 5월 29일에 ‘안중근체’로 교체되었습니다. …중략… 대전현충원은 전두환 정권 때 준공되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전두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현충탑 앞에는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고 쓰여 있는 헌시비가 있습니다. 이 헌시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바치는 글로, 가곡으로 유명한 ‘가고파’의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었지만, 글씨는 ‘현충문’ 글씨와 마찬가지로 전두환이 쓴 것이었습니다. …중략… …중략… 전두환씨가 처음으로 대전현충원(당시 대전국립묘지)을 찾은 것은 1986년 6월 19일이었습니다. 이날 전두환씨는 참배를 하고 현충문 안쪽의 화단에 금송을 식재하기도 했습니다. …중략…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바 있던 안현태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뇌물 수수 및 방조죄)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복권되었다는 이유로 2011년에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기습 안장된 바 있었기 때문에, 내란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특별사면받은 전두환의 대전현충원 안장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국가보훈처는 ‘현행법상 국립묘지 안장이 불가능하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전씨 유해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치고 장지를 정하지 못한 채 아직까지 연희동 자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