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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 함세웅 신부 초청강연
(사)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에서는 11월 28일(금) 오후 7시 부천시청 3층 소통마당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함세웅 신부를 초청하여 ‘역사정의와 한국사회’를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한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시부는 “굴절된 한국근현대사를 바로잡고, 잊혀져가는 자랑스런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역사를 되새기며 아울러 친일반민족행위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강연회를 마련했다”며 부천시민들의 많은 참석을 당부했다. 함세웅 신부 강사약력▲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2014-11-24>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 함세웅 신부 초청강연
두 남자의 키스를 그리워한 시민… 왜 그랬을까?
[독일, 스페인 답사기①] 베를린, 그 서글픈 이야기 지난 11월 13일부터 21일까지 독일과 스페인 답사에 나섰다. DMZ 보존 실태, 도시 재생, 지역개발 성공 사례 견학이 목적이었다. 이 기사는 동행한 18명의 안전행정부 직원을 비롯한 지자체 공무원과의 토론 또는 대화를 토대로 작성했다. 도움을 준 윤광희, 이근행, 심창우, 이재연, 최숙자, 박광근, 문상규, 김규식, 양경종, 이재훈, 김선익, 고미경, 이상심, 김대성, 이유섭, 조광래, 김세학님께 감사드린다. – 기자말 ▲ 독일 베를린 장벽 114개의 벽화 중 하나. 오른쪽이 호네커, 왼쪽이 브레즈네프다. ⓒ 신광태 남자끼리 어쩌면 저렇게 리얼하게 키스할 수 있나. 114점의 베를린 장벽 벽화 중 유독 관심 깊게 본 그림이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당시 동독의 최고 권력자 호네커이고, 또 다른 사람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다. 1989년 통일 독일(아래 통독) 전 이 그림이 그려졌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이 벽화는 45.1km 규모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 그려졌다. 두 남자의 키스, 의미가 뭘까? “의미가 뭘까요?” 이 그림은 뭘 말하는 것일까. 다음날까지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통독에 불만을 느끼던 동독 출신 사람의 표현이겠죠.”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의 말이 정답인 듯했다. 통일은 독일 국민 모두의 축제였다는 선입견. 나는 너무 어려운 데서 이유를 찾으려 했다. 이 벽화는 실제 사건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란다. 1979년
김정한 선생은 30년대 저항문학과 70년대 민족문학 연결 고리
▲왼쪽부터 백지연 씨, 염무웅 교수.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②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첫 주자인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와 백지연 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13일 서울 운니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74년 자실 결성 무렵 사료들을 살펴보는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이호철-유시춘,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신경림 ‘농무’ 황석영 ‘객지’는 70년 전후 문학사적 전환의 상징 김수영·신동엽 등 60년대 참여문학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수렴됐지요 80년대 ‘딴따라’ 문화 만나면서 문학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겼어요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 백지연(이하 백) 1977년 해직교수들이 모여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1978년 발족한 해직교수협의회 이야기와 교육지표 사건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염무웅(이하 염) 유신체제하에서 처음 해직된 교수는 김병걸, 백낙청 두 분이었습니다. 1974년 말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때문이었지요. 교수와 문인들의 정치참여가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7)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上)
ㆍ조봉암에 위기감 느낀 이승만 “평화통일 주장은 범죄야” 간첩몰이로 진보당 일망타진 ■ 화근이 된 조봉암의 216만표 일명 ‘조봉암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진보당 사건의 상류에는 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 집권 시나리오가 보인다.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친이승만계의 원내 의석은 크게 감소되었다. 이승만은 국회 간선으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보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한다. 온갖 정치폭력과 위법이 난무한 ‘부산정치파동’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노리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 기립표결로 국회에서 가결된다. 6·25전란 중의 피란 수도 부산에서 자행된 이 위헌적인 직선제 개헌 덕분에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1952년 8월5일) 이때 조봉암은 79만여표를 얻는 데 불과한 군소 후보였다. 이승만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이번에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의 ‘3선금지’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른바 ‘3선개헌’을 감행한다. 의결정족수 미달의 개헌안을 ‘4사5입’이란 우격다짐으로 ‘가결’ 처리하고(1954년 11월19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1956년 5월15일) 당시의 제1야당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절세의 구호를 내걸고 선전했으나, 신익희 후보의 불의의 별세로 좌절하고 말았다. 개표 결과, 이승만은 504만여표로 당선되었는데, 조봉암은 유효표의 30%를 넘는 216만여표를 얻어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이런 결과를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적신호로 분석한 당시 여권에서는 조봉암을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이화장에서 끝난 이승만, 종로에서 끊어진 성곽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6) 이화장·창신동 ▲ 낙산 성곽 : 혜화문~동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대통령을 만들고, 떠나보낸 곳 <이화장(梨花莊)> 이제 다시 <비우당>을 거쳐 다시 낙산 정상에 위치한 공원으로 올라간다. 이 공원을 거쳐 약 300미터 쯤 성안으로 들어가면 이승만의 마지막 별장 <이화장(梨花莊)>이 보인다. 혜화문 근처의 <돈암장>과는 또 다른 별장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의 거처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호텔(1945. 10. 16 귀국) → 돈암장(1945. 10월말~1947. 8. 25) → 마포장(1947. 8. 25~1947. 10. 18) → 이화장(1947. 10.18~1948. 8. 22) →경무대(1948. 8. 22~1960. 4. 28) → 이화장(1960. 4. 28~1960. 5. 29) → 하와이 망명 이화장이 위치한 곳은 이화동이며, 이 일대는 본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梨花亭)이 있어서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처럼 모두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이다. ▲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 되어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과 4월혁명으로 경무대를 떠나고 미국으로 되돌아 갈기 직전 머물렀던 별장. [사진-유영호] 이화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 그리고 여러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은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의 불법을 통해 12년 장기집권을 하였지만 결국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쫓겨나고 다시 이곳 이화장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앞서 가본 <돈암장>에서는 이승만이 <돈암장>에 들어오기 이전의 미국생활에 대하여
왕산 허위의 죽음… 웃고 있는 한 사람
[박도 실록소설 ‘들꽃’ (14)] # 제4장 압록강을 건너다 ① <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철쭉꽃으로,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장소제공; 강원도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 ⓒ 박도 만장(輓章)이 십리를 잇다 왕산 허위가 경성감옥에서 감옥 개설 제1호로 교수형을 당하자 뜻있는 백성들은 피울음을 울었다. 일제의 감시 속에 고향 구미 임은동에서 치른 허위의 장례에는 만사(輓詞, 고인을 추모하여 지은 글)와 제문(祭文)이 장례기간 동안 이어졌고, 상여 뒤를 따르는 만장(輓章)이 십 리를 이었다. 하지만 구미 임은동 바로 이웃 마을 칠곡 오태동(현재는 구미시 오태동)에 사는 전 국무총리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張承遠)은 비탄에 빠지기는커녕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까닭은 왕산 허위에게 경상도 관찰사 벼슬자리 값으로 갚기로 한 20만 원을 통째로 떼어먹어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장승원은 집안 대대로 영남 제1의 만석꾼 갑부였다. 그는 늘 돈은 많았지만 벼슬이 없는 것을 자탄하다가 이웃 고을 왕산 허위가 고종 임금의 신임을 얻어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 비서원승 등 고관에 오르는 것을 보고 20만 원을 고액권으로 바꿔 보스턴 가죽 가방에 넣고 한양(서울)으로 올라갔다. 그는 왕산 집 문을 두드렸다. 인동
[세월호 특집다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세월호 특집 다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Origin link: http://docucow.com/29 다큐창작소에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하여 세월호 특집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전개과정과 구조활동의 문제점, 수사과정의 의혹, 침몰의 진짜 원인, 검찰 수사결과의 문제점, 정부-여당-정치인-극우단체들의 행태, 진실 추구의 필요성 등을 담았습니다. 본 영상이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밑거름이 되어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린 유가족들의 한을 풀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성/연출: 김상규 ㅣ조 연 출: 최아람 ㅣ 내레이션: 정훈석 제작: 다큐창작소,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미디어팀, 세월호참사가족대책위원회
한일대화 재개, 위안부 해법 나올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독려’ 발언 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대화가 재개될 예정이어서 해법이 마련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일 양국은 오는 27일 서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5차 국장급협의를 열기로 했다. 지난 9월 19일 도쿄에서 열린 지 약 두 달 만이다. 지난 네 차례의 만남에서 평행선을 달렸던 한일 국장급협의가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양국 정상이 국장급협의부터 한중일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의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지난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만찬 중 한일 국장급협의가 잘 진전되도록 독려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박 대통령은 이어 지난 13일 미얀마 네피도에서 열린 아세안+3정상회의에서 한중일 외교장관회담과 한중일 3국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제안했다. “머지 않은 장래에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이 개최되고, 이를 토대로 한중일 3국 정상회담도 개최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것이다. 한중일 정상회담은 당장 한일정상회담을 열기 어려운 만큼 우회로가 필요한 우리 정부나, 동북아시아에서 외교적 고립을 피하려 하는 일본정부 입장에서나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박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한중일 외교장관회의를 조기에 열어 정상회담 개최로 이어 나가고 싶다”며 환영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 따라서 다음주 열기로 한 한일 국장급협의는 결과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법의 계기를 마련하고 한중일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목이 될 수 있다. 이와
소녀이야기 (Herstory)
▲ 소녀 이야기 (Herstory) ※ English Subtitle Link: http://youtu.be/zYjXIye73ks※ Japanese Subtitle Link: (http://youtu.be/aEm6VYRjmCM)※영문판 1080p 고화질 (http://youtu.be/c9ihg1g8ZjU) ※감독 김준기 (Directed By Kim Junki (http://blog.naver.com/herstory2011))※목소리 故 정서운 Dubbed by Jeong Seowoon (1924~2004)
인왕산 기세에 밀린 경복궁의 좌청룡 낙산(駱山)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5) 낙산·삼선평·비우당·정순왕후 송씨 흔적들. ▲ 낙산 성곽 : 혜화문~동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낙산 성곽(혜화문 ~ 동대문 구간) 조선왕조의 적장자 세습을 힘들게 한 <낙산(駱山)> <돈암장>에서 <혜화문>쪽으로 돌아와 다시 성곽 길을 걷기로 하자. 한양의 내사산 가운데 가장 낮은 낙산성곽 길이다. 분명 산은 산이로되 해발 125미터의 낮은 산이라 등산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이다. 이 산은 그 모양이 낙타와 같이 생겼다 하여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낙산성곽 바로 옆에 위치한 마을이름은 마을주민의 65%가 65세 이상이라 ‘장수마을’로 불린다. 이곳은 일제시대를 거쳐 6.25 전쟁 시기 피난을 다니던 사람들과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돈을 벌러 왔던 빈민들이 정착하면서 구릉지형이었던 삼선동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주민들의 기본 거주기간이 40년 이상이라 마을공동체가 다른 곳보다 잘 발달되어있다고 하니 비탈진 언덕, 좁은 골목길 등이 달동네를 연상시키지만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곳이다. 장수마을을 옆으로 바라보며 산책하듯 걸어 올랐지만 금방 정상에 있는 낙산공원에 도착하였다. 경복궁은 좌청룡,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좌청룡은 장남을 상징하며, 우백호는 차남을 상징한다. 하지만 장남에 해당하는 좌청룡 낙산이 낮고, 차남에 해당하는 우백호 인왕산이 높고 험준한 까닭에 조선왕조는 적장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 세습이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적으로 26번 있었던 왕위계승에서 적장자로 순탄하게 계승된 경우는 단 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 여섯 명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