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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이 비열한가요?” 이원복 교수 만화에 불쾌한 네티즌들… 페북지기 초이스
“친일파 청산주의자들을 비열한 인간으로 묘사하다니, 실망스럽습니다.” “어릴 때 먼나라 이웃나라 많이 읽었는데. 일제 부역자들을 단죄하는데 반대하고 보수에 대한 반대를 공산주의에 대한 찬동으로 비난하다니….” 학습만화 장르의 창시자로 1000만부 이상의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린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로 이름을 날리는 이원복(68) 덕성여대 석좌교수를 향한 네티즌들의 비난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만화 내용이 지나치게 보수 편향적이라는 비판인데요. 최근에는 특히 ‘열혈 애독자’였다는 한 독자의 평가글이 인터넷에 오르면서 이 교수를 향한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습니다. 17일 페북지기 초이스입니다. 논란은 진보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유머’ 회원 A씨가 최근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 가면 갈수록 너무 실망이 크네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습니다. A씨는 이 교수의 만화를 캡처해 올리고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보수 편향적이어서 학습만화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우선 ‘이원복의 세계사 산책’의 제6화 ‘이상과 현실’편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교수는 만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엘리트 계급 가운데 스스로 권위를 부정하고 기득권을 부정·파괴하는 자들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 혁명 이후의 낭만주의와 19세기 말 무정부주의,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만화에서 ‘혁명에 성공한 프랑스 엘리트들은 폭력을 동반하는 무정부주의로 흐르기도 했다’거나 ‘프랑스 혁명에 자극 받아 철저한 탄압과 감시 체제를 편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에선 좌절 끝에 폭력을 사용하는 무정부주의로 귀결됐다’고도 합니다. 이어 우리나라 좌파 세력도 거론되는데요. 만화에서 이 교수는 ‘20대가 넘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는 머리가 빈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6) 국회 프락치 사건 (下)
ㆍ재판부, 변호인 증인 신청 모두 기각… 무죄 입증 길 막아 ■ 검찰 측 증인만 채택 경찰 발표에서 남로당 비밀문건을 자기 국부에 은닉했다는 여인 정재한, 그녀를 법정 증언대에 세울 경우 우려되는 상황 때문에 아예 조기 처형을 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나왔다. 더욱 이상한 것은 당시 정 여인이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또 다른 이야기다. 이 사실은 오제도 검사가 훗날 그레고리 핸더슨(사건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과 국회 담당자)에게 한 말에서 처음 알려졌다. 핸더슨의 기록을 보면 오제도는 의외의 말을 했다. 정재한이 전향해 풀려났을 것이며 아마도 ‘보도연맹’에 넘겨졌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프락치사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이 사건의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왔던 이재남도 전향해서 풀려난 뒤 지금 어디에서인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핸더슨의 ‘프락치사건 기록’ 중 육필원고 – 김정기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2>, 235쪽, 한울, 2008) 오제도 검사의 그런 말이 사실이었다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남로당의 중앙위원 또는 월북문건연락원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니, 참으로 모순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재판부의 심리 자세에도 의아스러운 점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검찰이 신청한 증인은 다 받아들인 반면,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증거 조사와 증인 신청은 모두 기각했기 때문에 ‘무죄 입증’의 길이 막혀버렸다는 사실이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법정에서의 남로당
일제·독재에 순종한 역사, 조선·동아 다시 보기
[조선·동아 대해부]일제에서 이승만으로, 박정희로, 전두환으로 권력을 좇아간 부나방의 역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20년 3월5일과 4월1일 창간됐다. 94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신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수도 없이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론지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던 시기로 있었지만 탄압이 거세지고 불법적 권력이 강해지면 표변해 권력의 편에 섰다. 최근 발간된 <조선일보 대해부> <동아일보 대해부>는 부끄러운 94년간의 지면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이 신문들이 추종한 ‘일본제국주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키워드를 중심으로 책 내용을 정리했다. ▶“그대는 적이 아니라” 일제 찬양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처음부터 일제를 추종한 건 아니었다. 한때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인 1920년 6월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등>이란 연속 기획물을 내면서 “왜놈”, “총과 칼로써 조선민족을 죽이려 한다”고 비판하며 7~8년간 민족지로 활약했다. 이완용과 버금가는 친일파 송병준이 인수하고도 조선일보는 조선 총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설을 실었고, 일본 경찰이 조선인 28명을 학살한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일제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전조선기자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항일단체 신간회 설립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1928년 무기정간 이후 논조가 서서히 바뀌었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친일 성향이 노골화됐다. 동아일보의 민족지 역사는 5개월로 매우 짧다. 창간 15일 후 <평화에서 만세 소요>로 발매반포금지 처분을 받았고, 일본의 삼종신기(칼·거울·옥새) 숭배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한 9월25일자 사설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동아일보의 친일논조는 1921년 속간부터 시작된다. ▲ 조선일보 1936년 1월1일자 1면 이
개헌청원 낸 문인들 구속, 저항의 ‘자실’이 싹 텄다
▲1974년 11월18일 서울 광화문 의사회관(지금의 교보빌딩) 안에 있던 문인협회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식을 마친 뒤, 문인 대표들이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와 ‘자유언론 실천 선언’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를 비판한 이 선언 직후 대부분은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 끌려갔다. 왼쪽부터 송기원·고은·조해일·황석영·임정남·염무웅·박태순 등이다. 작가회의 제공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①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첫 주자인 문학평론가 염무웅(오른쪽) 교수와 백지연(왼쪽)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주 서울 운니동 운현궁 돌담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이호철-유시춘,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염무웅은 염무웅(73) 영남대 명예교수는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최인훈론’이 당선된 이래 반세기 동안 문예비평과 문인운동의 선두에 서왔다. 67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에 참여해 72년
식민지 철도는 일본군부터 나르기 시작했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0> 잭 런던이 기록한 조선 1891년 5월 31일 착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조금씩 그 형체를 갖추어나갔다. 1901년경에는 몇 개 구간의 난공사 지역을 제외하고는 열차가 달릴 수 있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요구조건을 무산시켜 청을 방어한 러시아는 대가를 톡톡히 챙겼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일전쟁이 마무리된 다음 해인 1896년 5월 청의 외교 실권자 이홍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새로운 차르가 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즉위식에 청의 사절단장으로 참여한 것이다. 모스크바의 야심가들은 이홍장을 포섭하기로 마음을 먹고 청과의 교섭카드를 준비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 책임자 비테 재무장관과 로바노프 외무장관 등이 테이블 위에서 배팅을 했다. 모스크바 테이블위에서 던져진 카드는 러시아와 청나라의 동맹이었다. 일본의 군사력과 맞섰다가 녹다운된 전력이 있는 청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군사동맹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민 패의 뒷면에는 만주를 통과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이란 이권이 있었다. 이홍장은 러시아가 내민 패의 앞면을 보고 반색했지만, 뒷면을 본 후 얼굴이 굳어졌다. 이홍장에 대한 러시아 측의 집요한 설득과 모스크바와 베이징 간 긴급 전문이 수차례 오간 끝에 6월 3일,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와 청의 상호방위조약이 담긴 청러밀약이 체결된다. 청을 보호하는 대가로 챙긴 철도노선은 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을 대폭 단축시키는 지름길이었다. 국제 정치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웃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비스마르크의 말은 새겨들을만하다. 국제관계에서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
성북동에서 새기는 전형필, 이태준, 한용운의 삶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3) 간송미술관·수연산방·심우장 ▲숙정문 밖 성북동 일대. [자료-유영호] ‘민족의 혼’을 간직한 <간송미술관> 식민지 조선의 애국적 부자 ‘간송 전형필’, 일제시대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다. 그는 현재 종로 4가 일대에 형성된 당시 배오개(梨峴) 시장의 돈줄을 쥐락펴락하던 거상의 후예였다. 그의 재산 논 4만 마지기에서 나오는 수입만 해도 1년에 15만원씩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서울 시내 큰 기와집 1채의 가격이 1천원하던 시대였다. 그가 이렇게 큰 부자가 된 것이 지금에 와서 보면 국가적으로는 다행이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슬픈 일들이 함께 닥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1906년 태어나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하지만 양육은 친부모가 그대로 맡았다. 이런 성장배경 속에서 훗날 전형필의 조부모, 부모, 삼촌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운명을 함으로써 양가의 재산 모두들 전형필이 상속받게 된 것이다. ▲ 일제시대 이현시장의 거부 간송 전형필, 그는 전 재산을 쏟아 일본으로 빠져 나가는 국보급 문화재를 지켰다. [사진출처-간송미술관 홈페이지] 이처럼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곳은 조선의 문화재이다. 1930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민족 33인 가운데 한 명인 당대 최고의 고미술품 감식가 오세창의 문하에 드나들면서부터 그는 민족의 중요성을 깨우쳤고, 일제에 의해 사라져 가는 우리문화재에 대하여 자신의 혼과 재산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 첫발로 1932년 인사동의 <한남서림>(관훈동 18번지, 현 명신당필방)을 인수하여 이곳을 우리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당시
요정정치 ‘대원각’, 백석과 얽혀 길상사로 이어진 사연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2) 삼청각·길상사·성락원 ▲ 숙정문 밖 성북동 일대. [자료-유영호] 숙정문 밖 이야기 : 성북동 <성북동>부촌이 만들어진 역사 이제 북문인 숙정문을 통해 성밖의 성북동일대를 잠시 돌아보기로 하자. 성북동(城北洞)이란 동명은 글자 그대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 일제시대와 해방전후의 많은 유적지가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은 1970년까지만 해도 청와대 뒷산인 백악에 가려져 지리적, 안보적이유로 개발이 늦었던 곳이다. 그런데 왜 이곳이 서울에서 몇 안되는 부촌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성북동의 10만 7천여평에 이르는 넓은 땅이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 소유였다. 그의 소유가 된 것은 간단히 말해 동작동 약 3만 6천평의 신용호 소유의 땅을 국립묘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수용하면서 대신 미개발된 성북동 땅을 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용호의 동작동 토지가 사기로 획득한 땅이라는데 있었다. 신용호는 동작동 땅의 원주인이 가등기상태라는 것을 알고 토지사기꾼과 합세하여 1957년 관련서류를 위변조해서 정식재판을 통해 신용호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후 1970년 12월 청와대 인근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삼청터널>이 개통되면서 땅값은 급등하였고, 신용호는 성북동 땅을 분할매각하면서 거액을 챙길 수 있었다. 이 돈이 결국 교보생명의 창업자금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후 동작동 땅에 대한 소송이 붙고 2심재판에서 신용호의 사기죄가 인정되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불리하게 되자 신용호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교보생명 지분의 35%를 넘기며 이 사건에
버스정류장 이름이 ‘빨래터’… 이런 동네도 있다
[북촌기행①] 북촌제일경과 이경이 있는 원서동(苑西洞)길 ▲ 백악과 응봉 그리고 북촌 백악 아래 경복궁, 응봉 아래 창덕궁, 그 사이에 북촌이 자리 잡았다. ⓒ 김정봉 세운상가 옥상에 올랐다. 경복궁 주산(主山)인 백악(북악)에서 창덕궁의 주산인 응봉(鷹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백악줄기가 마지막으로 용을 써서 응봉에 솟았다. 그 사이로 어머니 가슴에 얼굴 감추듯 슬그머니 파고든 동네가 북촌이다. 누구나 한 번쯤 살고 싶어 하는 길지 중의 길지다. 삼청동, 가회동, 계동, 재동, 안국동, 원서동과 율곡로 건너 경운동, 관훈동, 운니동까지가 북촌이다. 한강은 강남과 강북을,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갈랐다 조선 건국 이래 청계천과 종각을 중심으로 북쪽에 북촌이, 목면산(남산) 아래에 남촌이 있었다. 한강이 강남과 강북을 나누듯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갈랐다. 신분과 재산, 당색에 따라 각각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살았다. 북촌에는 누가 살았을까? 북촌에 팔판동(八判洞)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덟 명의 판서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북촌에는 주로 고위관료와 당시 실세가 살았다. 반면 남촌에는 <허생전>의 허생처럼 몰락한 가난한 양반, 하급관리들이 살았다. 이런 현상은 조선 말기에 더욱 심해졌다. 영·정조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간 북촌의 주인은 집권 실세, 노론이었다. 오죽했으면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남산 밑은 술을 잘 빚고 북촌은 떡을 잘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말이다. 세상시름을 잊으려 술 잘 먹고 술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남촌과 떡을 자주 해먹은 부자 동네, 북촌의 생활상을 드러낸 말이다. ▲
긴박했던 북촌의 46시간… 역사책 한 권 쓰겠네
[북촌기행②] 북촌 계동길(상) ― 역사의 보물단지, 현대 사옥 언저리 ▲ 계동길 정경 평온해만 보이는 계동길은 갑신정변, 건준 결성, 우익정당 조직, 3.1운동 물밑작업 등 굴곡진 근현대사의 물줄기가 소용돌이 친 곳이었다 ⓒ 김정봉 북촌은 당대 권력을 쥐락펴락한 실세들이 모여 살다보니 근현대사의 중심이 되었다. 계동의 집들과 건물, 계동·재동·가회동에 살았던 인물만 엮어도 훌륭한 근현대사가 된다. 대원군의 개혁정치, 갑신정변, 3·1운동 물밑 작업,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우익정당 조직 등 굴곡진 근현대사의 물줄기가 북촌에서 소용돌이 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북촌 중에 특히 중앙학교에서 현대사옥으로 이어지는 계동길은 소용돌이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계동의 유래를 들어보면 참 재미나다. 계동은 제생원에서 나왔다. 제생원이 있다 하여 붙여진 동네 이름, 제생동(濟生洞)은 계생동(桂生洞)과 섞여 불리다가, 계생동이 기생동(妓生洞)으로 들린다 하여 아예 ‘생’자가 빠지고 그냥 계동으로 바뀌었다 한다. 승문원·제생원·관상감·경우궁·계동궁… 모두 사라졌다 ▲ 김옥균 집터에서 본 계동 현대사옥 김옥균은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살았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갑신정변 현장이었던 현대사옥이 훤히 보인다 ⓒ 김정봉 ▲ 현대사옥 정경 현대사옥 자리에는 승문원, 제생원, 경우궁, 계동궁, 관상감이 있었다. 지금은 표지석에 이름만 남긴 채 사라져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관상감 관천대만 비교적 온전히 남아 터를 지키고 있다. 멀리 키 작은 첨성대, 관천대가 살짝 보인다 ⓒ 김정봉 무심히 지나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계동길 어귀, 아치형틀에 고동색 줄무늬 건물, 누가 봐도 현대 사옥이라는 것을
“난잎으로 칼을 얻다”‥우당 이회영과 6형제 회고전
▲우당 이회영 선생의 묵란. ’11월17일’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스런 날이다. 이날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일이기도 하다. 이에 후손 대표와 우당기념사업회는 오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난잎으로 칼을 얻다 – 우당 이회영과 6형제’전을 연다. 전시는 을사늑약 체결일이자 우당 이회영의 기일인 11월17일부터 2015년 3월1일까지 진행된다. 덕수궁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장소이면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 밀사’ 파견이 결정된 장소다. 우당은 독립운동 초기 신민회 핵심으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1907년 고종에게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할 것을 계획, 건의해 추인받았다. 이때 고종은 백지에 국새를 찍어 이회영에게 밀서를 건넸다. 헤이그 밀사가 실패하고 경술국치가 이뤄지자 우당과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을 결행했다. 이곳에서 형제들은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준비, 청산리대첩의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산실로 졸업생 총 3500여명을 배출했다. 우당은 베이징 시절, 굶주림속에서도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묵란(墨蘭)을 그려 내다 팔았다. 그러나 끝내 우당은 1932년 11월17일 조국해방을 보지 못 하고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6형제 중 성재 이시영(초대 부통령)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 땅을 밟았을 뿐이다. 우당의 묵란은 추자 김정희,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이어 한국 묵란 화풍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당의 묵란 5점과 벼루, 6형제의 역사 실물자료, 영상물들이 공개된다. ▲우당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시종기’ 이번 전시에는 우당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육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