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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친일파에게 명예까지 갖게 할 수는 없다”

2014년 11월 14일 277

[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방학진  1989년 고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 저술과 친일인명사전의 모태가 된 친일파 목록을 카드 형태로 남겨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 이 뜻을 이어받아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백년전쟁’과 ‘친일인명사전’ 등으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재야 사학가 고 임종국님을 기리는 의미의 제8회 임종국상 시상이 있었다. 수상자는 김효순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학술 부문)와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사회 부문)가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사무국장 방학진씨를 만나 상의 의미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이고,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 민족문제연구소 내 자료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 이성관 – 민족문제연구소는 어떤 단체입니까?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이신 임종국 선생님의 뜻을 이어서 친일행위를 한 자들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뜻있는 후학들이 설립한 연구소입니다. 원래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습니다. 우리가 친일파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친일파연구소, 이렇게 할 수는 없어서 반민족문제연구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당시 정부가 그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앞에 ‘반’이라는 글자를 뺀 것이죠. 그래서 현재 이름만 보면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렇지 않은 것이죠.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날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에 살면서 다른 길을 갔던 친일파들의 행위를 밝혀냄으로써 반대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죠. 저희는 그런 연구를 하기 위해서 연구소를

강제연행 역사는 끝난 게 아니라 살아있는 문제

2014년 11월 14일 336

ㆍ‘임종국상’ 수상하는 히다 유이치 일본네트워크 공동대표 ㆍ60년대부터 진상 규명 활동… 징용자 월급 강제 차입 확인 ㆍ한국 진상조사위에 자료 제공 “아베 신조 총리가 과거를 부정하려고 해도 과거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민들이 지적하면서 과거를 부정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 히다 유이치 공동대표(64·사진)는 “아베 총리는 고노담화를 바꾸고 싶어하고 강제연행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11일 서울 청량리동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난 히다 대표는 시민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네트워크가 제8회 임종국상 사회부문 수상자로 결정돼 공동대표 자격으로 방한했다. 임종국상은 친일 청산을 위한 저술 활동에 앞장섰던 임종국 선생(1929~1989)의 뜻을 기려 2005년 제정된 상이다. 네트워크는 1960년대부터 일본에서 조선인·중국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활동을 벌여오던 연구자·시민운동가·단체들이 모여 2005년 만든 조직이다. 출범 이래 일제강점기 조선인 군인·군속, 징용자,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물론 희생자 유골 확인, 미불 임금 처리, 비밀자료 공개 등 과거사 전반에 걸쳐 치열하게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해왔다. 현재 30여개 단체와 개인 등 400여명이 네트워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히다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결성 초기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골을 조사한 일을 꼽았다. 당시 기후현, 홋카이도에 남아 있는 유골을 조사했는데 유골을 한국의 유족들에게 전달해주면서 “일본이 저지른 강제연행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제라고 실감했다”고 말했다. 2004년 11월 한국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자신들이

혐한 출판물 전시회서 日 헤이트 스피치 인격살인 실태 고발

2014년 11월 14일 272

전문가들, 법적 제재 필요성 강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최재천 의원과 재일대한민국민단은 11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1층 로비에서 ‘일본 헤이트 스피치·혐한 출판물 전시회 개막식’을 개최했다.(뉴스한국)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최재천 의원과 재일대한민국민단은 11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1층 로비에서 ‘일본 헤이트 스피치·혐한 출판물 전시회 개막식’을 개최했다.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증오발언)란 인종차별적 증오발언을 의미하며, 현재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 등을 비하하고 공격하는 행동과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 최근 ‘재일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을 중심으로 매주 도쿄, 고베, 가와사키, 삿포로 등 일본 각지에서 빈번하게 혐한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11년부터 올해 7월까지 도쿄에서만 349건이 발생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박사는 개막식에서 혐한 세력의 구체적 발언을 예로 들어 헤이트 스피치의 실태를 설명했다. 작년 2월 9일 신오쿠보에서 열린 ‘불령선인 추방하자, 한류박멸’ 시위에서 시위대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은 범죄자다”, “한국인을 비틀어 죽여라”, “한국인은 기생충, 바퀴벌레, 범죄자다”, “조선민족은 일본의 적이다” 등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같은 달 14일 츠루하시에서 열린 시위에서는 한 일본 여자 중학생이 “나는 한국인이 싫다. 계속 우쭐대면 난징 대학살이 아니라 츠루하시 대학살을 저지를거야”라고 말했다. 미국 CNN 방송 등 외신은 이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했고 일본 사회의 헤이트 스피치 문제점이 세계적으로 부각됐다. 법무법인 보다의 정소연 변호사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에 주목했다. 현재 국제사회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탄압·배제·폭력을 가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규정, 헤이트

[2014.11.12] 을사늑약 특집 친일파 열전 이완용 1편

2014년 11월 14일 252

※ [2014.11.12] 을사늑약 특집 친일파 열전 이완용 1편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540278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41112nrh1.mp3

국제법상 ‘안중근’ 日 형법 적용은 불법!

2014년 11월 13일 399

안중근 재판, 한국 사법권 장악하려는 일제의 공작과정 [한국NGO신문]은동기 최정윤 기자 = ‘동아시아역사시민네트워크’가 주최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후원하는 ‘2014년 동아넷 학술시민대토론회’가 ‘안중근의사 재판의 국제법적, 역사적 재조명’이란 주제로 지난 10일 오후 2시 30분부터 6시까지 국가인권위원회 8층에서 개최되었다. ▲ 안중근의사 재판에 관한 동아넷 학술 시민대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대토론회의 1부 개회사에서 동아시아역사시민네트워크 이장희 상임공동대표는 “대한민국이 엄중한 시점에 놓여있는 만큼, 우리민족의 에너지를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순국한 안중근의사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밝히며 “우리민족 에너지를 통합하고 양심을 인식할 수 있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국제법적,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한반도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은 “오늘 토론회가 일제의 불법적인 재판에 대한 비판과 안중근의사 의거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안중근 가치에 대한 공유를 통해 우리시대에 제 2, 제3의 안중근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첫 주제와 관련해 신운용 책임연구원이 발표하고 있다  첫 주제 발표에 나선 안중근 평화연구원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한국이 본 안중근의사 재판의 역사적 분석, 평가’라는 주제에서 “러시아가 안중근을 신속하게 일제에 넘긴 사적 배경은 일제의 재외 한인에 대한 사법권 침탈”이라면서 “일제가 불법적으로 일본 국내법을 안중근 재판에 적용한 것이 위반이라는 것은 1910년 4월 5일 칙령 제196호를 통해 입증된다.”라고 밝히고 “안중근 재판은 러시아가 일제에 신병을 인도함으로써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사법권을 장악하려는

“북한이 곧 남침”…일본이 거짓 정보를 거듭 흘린 이유

2014년 11월 13일 458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4> 한일협정,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이야기 마당 4∼8] 친일파[이야기 마당 9∼15] 학살[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32∼41] 4월혁명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한일협정,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아니었으면 일본 자금도 못 들여왔다? [한일협정, 두 번째 마당] 아베 외조부 “돈으로 박정희를 만족시키면 된다” [한일협정, 세 번째 마당] “일본을 형님으로 모시겠소”, 고개 숙인 박정희 [한일협정, 네 번째 마당] 짓밟힌 한국, 일본·미국 짬짜미에 또 당했다 [한일협정, 다섯 번째 마당] 이대생들은 왜 ‘미장원·화장 자제’를 결의했나 [한일협정, 여섯 번째 마당] 조선·동아는 어쩌다 괘씸죄로 청와대에 찍혔나 [한일협정, 일곱 번째 마당] 또 망언한 일본…한국 정부는 왜 덮는 데 급급했나 [한일협정, 여덟 번째 마당] 반공 목사들이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반기 든 사연 [한일협정, 아홉 번째 마당] 일본에 그렇게 당하고도 동남아에 밀린 한국, 왜? [한일협정, 열 번째 마당]

“강제연행 역사는 끝난 게 아니라 살아있는 문제”

2014년 11월 13일 250

ㆍ‘임종국상’ 수상하는 히다 유이치 일본네트워크 공동대표 ㆍ60년대부터 진상 규명 활동… 징용자 월급 강제 차입 확인 ㆍ한국 진상조사위에 자료 제공 “아베 신조 총리가 과거를 부정하려고 해도 과거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민들이 지적하면서 과거를 부정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 히다 유이치 공동대표(64·사진)는 “아베 총리는 고노담화를 바꾸고 싶어하고 강제연행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11일 서울 청량리동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난 히다 대표는 시민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네트워크가 제8회 임종국상 사회부문 수상자로 결정돼 공동대표 자격으로 방한했다. 임종국상은 친일 청산을 위한 저술 활동에 앞장섰던 임종국 선생(1929~1989)의 뜻을 기려 2005년 제정된 상이다. 네트워크는 1960년대부터 일본에서 조선인·중국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활동을 벌여오던 연구자·시민운동가·단체들이 모여 2005년 만든 조직이다. 출범 이래 일제강점기 조선인 군인·군속, 징용자,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물론 희생자 유골 확인, 미불 임금 처리, 비밀자료 공개 등 과거사 전반에 걸쳐 치열하게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해왔다. 현재 30여개 단체와 개인 등 400여명이 네트워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히다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결성 초기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유골을 조사한 일을 꼽았다. 당시 기후현, 홋카이도에 남아 있는 유골을 조사했는데 유골을 한국의 유족들에게 전달해주면서 “일본이 저지른 강제연행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제라고 실감했다”고 말했다. 2004년 11월 한국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자신들이

[이야기가 있는 아침] “오욕의 역사도 역사다”

2014년 11월 12일 807

▲ 임종국 선생 1989년 오늘은 친일 연구에 한 평생을 바쳤던 재야 사학자 임종국씨가 사망한 날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친일’을 거론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눈총을 받거나 혹은 사상이 불온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기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임씨는 평생을 친일 연구에 바쳤습니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는 총독부 관보나 복사가 어려운 매일신보에서 필요한 것들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쓸 정도로 자료 수집에 집착했습니다. “내가 왜 친일파냐”며 항의하러 왔다가 임씨가 내놓은 자료 앞에 그냥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인이었던 그는 작가 ‘이상’에 빠져 평론집 ‘이상 전집’을 내놓았습니다. 현실의 벽에 부닥쳐 도피와 자기분열로 치달았던 이상의 모습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나 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유명 작가들의 친일 행적을 보게 되고 이때부터 그는 친일에 대한 자료조사에 빠져듭니다. 해방 후 당시 내로라 하던 작가들이 일제하에서는 대부분이 ‘내선일체’를 예찬하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친일문학론’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아버지 임문호씨의 친일 연설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학자적 양심으로 아버지의 친일행적까지 넣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500부를 찍은 초판이 다 팔리는 데는 13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나마 1000부는 일본에서 구매했습니다. 재야 사학자의 ‘이단’적인 책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죠. 혹자는 그럴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굳이 옛 것을 끄집어 내서 무엇하겠느냐고. 굳이 오욕의 역사를 밝히는

이번엔 ‘친일문제연구총서’ 내년부터 10년 동안 만든다

2014년 11월 12일 2045

ㆍ친일인명사전편찬위 주관… 2단계 계획 확정 ㆍ‘열전 친일파’ ‘친일 군인’ 등 일반인·학생 교양서도 펴내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광복 70주년인 내년부터 10년 동안 ‘친일문제연구총서’를 발간한다.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주관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친일사전편찬위 전체 회의를 열어 향후 10년간 진행될 ‘친일문제연구총서’ 발간계획을 2단계로 구분해 확정했다고 11일 밝혔다. 우선 1단계(2015~2020년)로 내년부터 <친일인명사전> 보완작업을 시작해 2019년 개정증보판을 펴낼 예정이다. 5년 전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찬양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한국인의 목록을 정리한 인명사전이다. 총 3권 3000여쪽에 달하는 이 사전에는 을사조약을 전후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4389명의 친일 행적과 광복 이후 행적이 기록돼 있다. 연구소 측은 지역·해외·경제 분야의 친일 인물을 추가 조사해 초판본의 부족한 점을 메운다는 계획이다. 박수현 연구실장은 “<친일인명사전> 초판본 발간 당시에는 연구 성과와 자료 부족으로 인해 지역과 해외의 친일파 기술에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다”며 “그간 추가로 발굴된 사료들을 DB화하고 제보 등을 활용해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학술 서적으로는 <조선총독부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일제협력단체사전> 등 단체·기구편을 발간할 계획이다. 이 자료들을 정리해 토대 연구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이 중 <조선총독부기구사전>은 조선총독부 기구의 조직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일제가 식민통치를 어떻게 했는지 실상을 조명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연구자를 위한 사전 편찬과 함께, 일반인들이 친일문제에 쉽게 접근하도록 대중서도 펴낼 계획이다. 내년에는 중등학교에서도

600년간 닫혀있던 창의문과 숙정문

2014년 11월 12일 1392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1) 창의문·세종로·1.21사태소나무·숙정문 ▲북악산 성곽. 창의문~숙정문 구간. [자료-유영호] 북악산 성곽(창의문~숙정문 구간) <창의문(彰義門)>, 인조반정 그리고 이괄의 난 이제 도성 밖 부암동일대의 기행을 마치고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으로 돌아왔다. 먼저 창의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던 문루를 영조 16년(1740)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물론 1958년 보수를 하였지만 큰 틀에서 지금까지 300년 가까이 그 원형이 유지된 문이다. 또 조선시대 이 일대에서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골이 깊고 수석이 밝게 빛나서 아름다운 모습’에 개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 또는 자하동(紫霞洞)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창의문을 <자하문>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이유로 창의문 밑을 지나는 터널을 <자하문터널>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 한양도성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 궁궐의 지맥을 보존하기 위하여 항상 닫혀있던 문이지만 사소문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사건을 많이 겪었던 문이다. [사진-유영호] 창의문은 최초 건립 이후 항상 폐쇄된 문이었다.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이 상소하기를 창의문과 숙정문 일대는 “바로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되므로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북소문인 창의문과 북문인 숙정문은 태종 때 폐쇄되었다. 단지 세종 때 도성 수축을 위하여 편의상 두 문을 연 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왕의 명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창의문을 어명(御命)에 의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이 딱 한번 있었다. 마치 1968년 북의 무장조직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것처럼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