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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정녕 국가는 아무런 책임 없다는 말인가

2014년 11월 2일 338

[전문가 분석] 유신 긴급조치에 면죄부 준 대법원 판결에 대해 며칠 전 대법원은 과거 유신헌법하 긴급조치로 인한 사법 피해자들이 당시 수사기관에서 행해졌던 고문 등 가혹행위를 이유로 하는 국가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국가배상 책임의 인정 요건을 제한하는 판단 부분이 포함된 판결을 내렸다. 민변은 바로 성명서를 발표해 ‘유신에게 면죄부를 준 반역사적 판결’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핵심은 유신헌법하 긴급조치가 이후 위헌 무효로 선언되고서 긴급조치가 적용됐던 유죄 판결이 재심을 통해 설령 무죄 판결로 번복되었다 하더라도 형사보상은 마땅히 있겠지만, 이로써 당연히 국가배상 책임이 발생하지는 않으며, 고문 내지 가혹행위와 같이 국가배상법에서 정하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가 별도로 전제돼야 한다고 밝히면서 국가배상 책임의 인정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한 데 있다.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여도 긴급조치에 근거한 수사나 재판 자체는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수년 전에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무효로 판단된 유신헌법하 긴급조치의 법집행과 법적용을 맡았던 수사기관이나 법관의 직무행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고 주장되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사법부가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위헌 무효’ 선언해놓고 이제 와서 반성과 책임 별개라는 건 과거 청산 의지도 역사성도 없이 자기정당화하는 형식논리일 뿐 대법원 판결이 전하는 메시지는 뭐든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것 국가배상 책임의 요건을 제한하는 이같은 대법원의 법리에는 나름 타당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형사법령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 반민특위 사건 (下)

2014년 11월 2일 1472

ㆍ불기소, 병보석, 무죄, 반민법 폐지… 이렇게 허망하고 통탄할 일이 또 있을까 ■ 이광수·최남선, 그들의 고백인즉 “성전(聖戰)의 용사로 부름 받은 그대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학병을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데 있으리. 나라 없이 부모 어데 있으리. 그대 처자 때문에 주저하는가./ 자손의 영광과 번창이 이 싸움 안 이기고 어데서 나리.”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으로 이름난 소설가 춘원 이광수.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도 참여하고 <흙>과 <민족개조론>을 썼는가 하면, 도산 안창호와 함께 옥고도 ?치른 그가 어떻게 조선 젊은이들에게 일본의 학병에 나가라는 이런 시(?)를 썼을까?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일본을 오가며 학병 권유 연설을 했던 그는 해방이 되자 “내가 친일을 한 것은 민족을 위해서 부득이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수감된 후 감방에서 한 주일 동안 밤새워 썼다는 ‘나의 고백’도 참회하는 말은 별로 없고 시종 친일행각의 합리화에 급급해 보였다. 그는 구속된 지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오등은 자에…’로 시작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당대의 명문장가 육당 최남선. 그가 일제 협력자로 변절하자 위당 정인보는 육당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최남선은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본시 그는 3·1운동에도 참가하고 그 일로 34개월이나 복역한 문화계의 지사였으나 나중엔 일본의 중추원 참의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를 맡는 등 친일 지식인의 상징으로 변모한다. 그는 반민특위 조사관의 체포에 응하면서

국내 최대 역사학대회 “한국사 국정화 충격적” 반발

2014년 11월 2일 628

“교육부 국정화 시도로 사회적 갈등 유발”…“역사교육에 정부 부당 간섭 말아야” 한국사와 동양사·서양사 등을 망라한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 소속 16개 역사학회가 최근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는 30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중단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통해 “역사교육이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이란 헌법정신에 따라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주도하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의 부당한 개입과 간섭을 중단하라”고 밝혔다. 윤병남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 의장 겸 역사학회 회장은 “전체 20개 소속 학회 가운데 사정상 참여하지 못한 일부 학회를 제외하고 16개 학회가 공동 성명에 참여한 것은 역사학계로서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며 “이번 성명서는 역사학계의 대다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의회는 성명서에서 “협의회 소속 16개 학회는 물론 한국사회나 국제사회 모두 교과서 국정제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는 데 공감하고 있던 터에,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부실 검정과 발행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비화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 회원들은 지난 8월 26일 교육부가 개최한 ‘한국사 교과서 발행 체제 개선 토론회’가 열린 경기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전환 반대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강성원 기자 협의회는 이어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는 5년마다 교체되는 정권의 개입과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라며 “역사교육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담보하고

외침과 식민지배, 독재에 상처받은 인왕산

2014년 11월 1일 937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6) 필운대·사직공원·국사당 ▲ 인왕산 성곽(사직동~창의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인왕산 성곽(사직동 ~ 창의문 구간) <필운대(弼雲臺)>, 권율의 사위가 된 개구장이 소년 이항복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다시 성곽 길로 돌아오며 성곽 안쪽으로 사직공원과 배화여고가 보인다. 배화여고는 필운대라는 곳으로 사직공원 보다 좀 멀리 있지만 도원수 권율과 관련된 것이니 먼저 가보도록 해보자. 배화여고 뒤뜰에 큰 암벽이 있는데 이 암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이항복의 집터이다. ‘필운’은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항복의 호이다. 그런데 본래 이 집은 권율의 집이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사위 이항복에게 이 집을 주고 자신은 앞서 보았던 성밖 행운동으로 옮긴 것이다. 여기 암벽에 쓰여진 ‘필운대’라는 글자는 이항복의 글씨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의 후손 이유원의 글씨라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필운대’라는 글씨 옆에 이곳을 설명하는 글은 분명 이유원이 쓴 것이다. 여기에 그는 필운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푸른 돌벽에는 흰구름이 깊이 잡겼도다.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했으니, 옛 조상들의 의복과 모자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弼雲臺(필운대)’각자. 백사 이항복이 처가인 권율장군의 집에 얹혀 살던 시절에 바위에 새긴 글이라 한다. 사진의 가운데 부분은 이항복의 후손이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쓴 글로 필운대를 설명하는 글이다. [사진-유영호] 우리는 ‘이항복’하면 어려서 이웃에 살던 죽마고우 이덕형과의 ‘오성과

내년 초등 “박정희 독재 감추기 심각”

2014년 11월 1일 349

[분석] 올해 교과서와 내년 적용 ‘실험본’ 교과서 비교… 교육부 관료가 기획 ▲ 초등<사회5-2> 실험본 교과서(오른쪽)와 올해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의 표지. ⓒ 윤근혁 내년부터 전국의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배울 예정인 <사회> 교과서가 이전 교과서에 비해 ‘박정희 미화, 독재 감추기가 심각하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국정교과서인 이 교과서의 편찬기획자 4명은 모두 교육부 관료들이다. 이런 사실은 30일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과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 교사들이 내년 적용 초등 <사회 5-2> 실험본 교과서와 올해 같은 과목의 교과서를 입수해 해당 내용을 비교, 분석한 결과 확인됐다. 실험본은 정식 적용 전 시범학교에 먼저 배포하는 교과서인데, 이 내용 가운데 일부는 수정된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유신 헌법 등 독재 행위를 주도한 주체를 이전 교과서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명시한 반면, 실험본은 ‘박정희 정부’ 또는 ‘정부’로 바꿔치기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서술로 보인다. 사라진 박정희 책임… “박정희→(박정희) 정부”로 바꿔치기 이를테면 이전 교과서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헌법을 통과시켰다”(114쪽)고 서술한 반면, 실험본은 “박정희 정부는 유신 헌법을 통과시켰다”(145쪽)고 돼 있다. 유신체제에서의 국민 탄압에 대해서도 이전 교과서는 “대통령은 국민의 요구에 강하게 맞섰다”(114쪽)고 표현했지만, 실험본은 “정부는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였다”(145쪽)고 적었다. 주체를 빼놓는 서술 방식은 이 뿐만이 아니다. ▲  분석 결과. ⓒ 윤근혁 이전 교과서는 “유신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출은 간접선거의 형태로 바뀌었다”(117쪽)고 이른바

[토요에세이] 줄줄이 박중양(朴重陽)

2014년 11월 1일 592

<2014-11-01> 한국일보   ☞기사원문: [토요에세이] 줄줄이 박중양(朴重陽)

‘논란’ 교학사 <한국사>, 전국 2곳 추가 채택

2014년 11월 1일 311

경기 안산 특성화고는 채택… 장교 자녀학교는 내부논란 중 ▲ 교학사의 <고교한국사> 교과서 표지. ⓒ 윤근혁  전국 고교 가운데 2곳에서 친일·독재미화 지적을 받은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올해 추가 채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3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유인태 의원(새정치민주연합)실과 경기도교육청 등에 따르면 올해 <한국사> 검정교과서 채택 대상 고교 450여 곳 가운데 경기 안산공고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학교는 안산지역에 있는 사립 특성화고다. 또한 같은 경기도지역에 있는 군 장교 자녀학교인 한민고가 교학사 교과서 채택 등을 놓고 내부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학교 관계자는 “다른 검정교과서에 대한 출판사 선택은 모두 끝났지만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서만 내부 (교과)협의회를 계속 열고 있는 상태”라면서 “(출판사 선택이) 민감한 사항이어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내부에서 교학사 교과서 채택 등을 놓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에도 이 학교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 시도를 하다가 학부모들의 반발 등으로 채택 시기를 올해로 늦춘 바 있다. 교학사 회장이 재단이사장을 맡아온 인천 한 고교의 <한국사>교과서 채택 시기는 2015년이다. 지난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전국에서 부산 부성고 한 곳이었다. 고교 <한국사>는 교학사를 비롯해 8개 출판사가 교과서를 펴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교육희망>(news.eduhope.net)에도 보냈습니다. <2014-10-3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논란’ 교학사 <한국사>, 전국 2곳 추가 채택

친일파 민영은의 청주 땅 4년6개월만에 ‘시민 품으로’

2014년 11월 1일 444

▲’친일파 민영은 후손들의 토지 소송에 대한 청주시민대책위’가 청주 상당사거리에 설치한 민영은 땅찾기 소송 승소 기념 동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청주=연합뉴스) 전창해 기자 = ‘친일파’ 민영은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챙겼던 청주 도심의 ‘알짜’ 땅이 곧 시민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온다. 법무부가 민영은의 후손 5명을 상대로 낸 소유권 확인 소송이 연내 마무리되면 문제의 땅은 최종 국가 소유가 된다. 후손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청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반만이다. 민영은은 1905년 6월 충주농공은행 설립 위원으로 활동했고, 1913년 5월부터 6년간 충북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는 등 일찌감치 친일 활동에 나섰던 대표적 친일파 인사다. 민영은의 후손 5명은 2011년 3월 청주 도심인 청주중학교와 서문대교, 성안길 부근에 있는 12필지(총 1천894.8㎡)의 도로를 철거하고 토지를 인도하라며 청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청주지법 1심 재판부는 2012년 11월 후손의 승소를 판결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꼭 1년 뒤 원심을 깨고 청주시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는 민영은이 취득한 문제의 땅은 친일행위의 대가로 추정되며,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의 국가 귀속 결정에 제외된 사정만으로 이를 뒤집기에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친일재산조사위가 규정한 ‘국고 환수 대상’에서 제외된 토지가 친일재산으로 인정되는 첫 사례였다. 이후 후손들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자 법무부는 문제의 땅을 국가로 귀속하기 위해 지난 2월 24일 후손을 상대로 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가 귀속 재판도 적잖게 애를 먹였다. 후손 5명 중 미국에 사는

너희는 애국자인가, 전봉준이 묻는다

2014년 10월 31일 1803

전봉준, 혁명의 기록 이이화 지음/생각정원·1만4000원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지음 모시는사람들·1만3000원 오늘 우리에게 120년 전의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십갑자를 두번 돌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건 아닐까. 주변 열강들은 새삼 제국주의적 마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나뉘어 서로 물어뜯기에 여념 없다. 위정자들은 가진 자들 편에 붙어 제 잇속 차리기 바쁘고, 국가안보를 외세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며, 내부 분열을 부추겨 정권 연장을 꾀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구한말 당시와 비슷하다는 걱정이 많은 요즘, 전봉준과 동학혁명을 되새기는 책 두권이 나왔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쓴 <전봉준, 혁명의 기록>은 수십년에 걸친 현장 답사와 자료 조사 끝에 ‘증류’한 맑은 액체 같은 책이다. 수식을 배제한 담백한 문장으로 전봉준의 생애를 되살려낸 평전이자, 동학혁명의 처음과 끝을 기록한 역사서다. 역적으로 몰려 금기시된 전봉준과 동학혁명은 신화로 구전되며 윤색이 더해진 터였다. 지은이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동학군이 남긴 자료뿐 아니라 조선 관군 및 일본군의 기록을 뒤져 사실을 좇았다. 사실에 관한한 보수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철저하다. 지금까지 나온 동학혁명을 다룬 책 가운데 가장 사실에 가까운 책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겠다. ▲전봉준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이 유일한 사진은 전북 순창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일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일본 영사의 허락을 받아 찍은 것이다. 생각정원 제공 지은이는 전봉준이 “싸움패인 줄만 알았더니

[인터뷰] 11년만에 승소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공부하러 갔다가 위안부 낙인…결국 이혼까지”

2014년 10월 31일 401

“제 나이 12살 때였어요. 일본인이었던 담임 선생님이 일본에 가면 (1년 먼저 근로정신대에 갔던)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죠. 또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도 할 수 있고 언니와 한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언니도 보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어서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죠.” 30일 오후, 1940년대 일본 군수기업 후지코시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84) 할머니는 벌써 70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시 김 할머니에게는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김 할머니의 언니도 그가 일본으로 가기 1년 전 ‘일본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할머니는 언니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후지코시,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김정주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뉴시스 “공부시켜 준다고 속여 데려가더니 일만시켜… 한 명이라도 정해진 일 못하면 밥도 안줘 풀까지 뜯어 먹었다” “여수, 순천, 벌교 등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 1천여명이 함께 갔어요. 그땐 일본에 도착만 하면 먼저간 언니가 마중 나와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막상 도착해보니 언니는 없었고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군부대 막사 같은 곳이었는데 사방에 철조망이 쳐져 도망갈 수도 없는 곳이었죠. 상하의로 이뤄진 국방색 군복 한 벌과 신발주머니 크기의 하얀색 위생주머니 하나만을 받고 일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