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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가요 트는 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인정하는 꼴

2014년 10월 29일 479

// ☞ 인터뷰 [바로 듣기] ▷ 한수진/사회자: 방송 중에 기미가요가 웬 말이냐.. 엊그제 한 종편방송이 토크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기미가요를 내보내서 논란이 되고 있죠. 자,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심 있는 일본인들 중에도 기미가요의 내용에 문제가 많다고 해서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이야기도 들리고 있는데요. 종편 방송이 무심코 틀었던 이 기미가요,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앙대학교 노동은 교수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 노동은 교수 / 중앙대학교: 안녕하세요. ▷ 한수진/사회자: 우선 교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기미가요라는 노래가 방송전파를 탄 게 어떤 점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 노동은 교수 / 중앙대학교: 기미가요가 침략전쟁의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기미가요가 일본 국가로 이미 공식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 침략전쟁의 상징을 우리가 그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게 이제 문제가 되는 거죠. ▷ 한수진/사회자: 한마디로, 말도 안 된다 하는 말씀이시고요. ▶ 노동은 교수 / 중앙대학교: 네. ▷ 한수진/사회자: 하나하나 좀 여쭙겠습니다. 기미가요가 일본 국가인 것은 맞는 거죠? ▶ 노동은 교수 / 중앙대학교: 그렇죠. ▷ 한수진/사회자: 그런데 노래라는 의미의 가요라는 말이 들어가요. ▶ 노동은 교수 / 중앙대학교: 그래서 기미라는 노래, 그런 뜻이 아니고 이게 이제 일본어기 때문에 이제 ‘천황이’ 할 때 ‘기미가’까지가 그렇거든요. 가는 설명하는 거니까, 그 다음에 요는 대대로 그런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은 독립문, 이런 사정 때문이다

2014년 10월 29일 798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상징으로 제작… 이완용이 현판 글씨도 써 ▲ 독립문 주변은 널찍한 공원으로 동네 주민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 김종성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서울시 서대문구 무악재 고개를 신나게 내려오다 보면 도로가에 널찍하게 자리한 독립문공원이 나타난다. 머리 위로 인왕산이 보이고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나무들이 풍성해 잠시 쉬어가곤 하는 곳이다. 이 독립문 공원엔 명소가 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외에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서재필 동상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이국적인 모양새로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독립문(사적 제32호)이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세운 19세기 말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독립’이란 이름 때문에 언뜻 보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지어진 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반일(反日)의 상징이 아니라 반청(反淸)의 상징물이다.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자주국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고종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든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뜻 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조선의 ‘독립’을 원했던 일제의 검은 속셈 ▲ 독립문 앞에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사진 아래)의 주춧돌이 서있다. ⓒ 김종성. 자료사진 독립문은 그 취지대로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세워졌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영은문은 ‘은혜로운 이들을 맞이하는 문’이란 뜻의

[시론] 한국방송 이사장의 몰역사적 언설 / 김삼웅

2014년 10월 28일 302

최근 백범 김구 선생을 폄훼하는 언설이 도를 더해 간다. 사인이 연구 목적에서 또는 공명심에서 비판하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공인이 정치적 의도에서 사실왜곡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것도 친일파 후손이라면 심각성은 더하다. 이인호 <한국방송>(KBS) 이사장의 백범 폄훼와 “해방 후 친일청산이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등 일련의 몰역사적 언설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임은 물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한다. 그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김구 선생을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1948년 대한민국 독립에는 반대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건 맞지 않다고 한 것”이라 부연했다. 백범은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43년엔 중국 장제스 총통을 움직여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는 등 독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1급 공로자다. 다만 그는 분단정부 대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암살되었다. 백범은 1962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며 최고 등급은 ‘대한민국장’인데, 김구·안중근·이승만 등에게 수여되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온 겨레의 열망이었다. 그래서 제헌헌법 제101조에 특별법 제정을 명시하고 반민족행위특별법을 만들었다.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반민특위가 짓밟히고, 그 결과 일제의 유산 청산에 실패했다. 제헌국회 의원들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서 반민법을 제정했다는 말인가. 이인호 이사장은 조부의 친일행적에 대해 “그 정도가 친일이라면 일제 때 중산층은 모두 친일”이라는 취지의 말을

서재필의 ‘철저한’ 사대주의와 애국자들의 감옥

2014년 10월 28일 1001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5) 서대문독립공원…서대문형무소 ▲ 서대문밖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한 서대문독립공원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서대문 밖 이야기 : 서대문독립공원 <서재필>, 갑신정변 후 죽을 때까지 조선말을 안 한 미국인 <딜쿠샤>에서 대신중고등학교 정문 앞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독립문>이 보인다. 여기부터 <독립공원>이라 부르는데 그 입구에 <독립문> 서있는 것이다. 그 뒤로 <서재필동상>과 <독립관>이 있고, 이어서 바로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해 있다. 특히 이곳은 학생들의 체험학습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자세히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참고로 독립공원은 무악산(또는 안산)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무악산과 인왕산 사이 고개를 <무악재>라 한다. 그리고 독립공원이 이 고개 아래 있다고 하여 ‘고개 현(峴)’ 자를 써서 현저동(峴底洞)이라 하며, 맞은 편 인왕산자락은 바로 무악동(毋岳洞)이라 지은 것이다. ▲ 독립협회에 의해 지어진 독립문으로 그 앞 두 개의 돌기둥은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의 주초이다. [사진-유영호] ▲ 중국사진들에게 연회를 베풀던 <모화관>이었으나 독립협회가 사용하면서 <독립관>으로 개칭한 건물. 본래 영천시장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복원하여 놓았다. [사진-유영호] 먼저 <독립공원>입구에 서있는 <독립문>부터 둘러 보자. <독립문>은 본래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迎恩門)>이 서있던 곳이며, 청일전쟁 후 주초(柱礎)만 남은 채 무너져 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협회가 세운 문이다. 이보다 350미터 아래 위치한 영천시장 앞에 중국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화관(慕華館)>(현 우리은행 독립문지점, 영천동 305)이 있었다. 이 모화관이 갑오개혁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사무실로

조선 최초 철도 개통식에 일장기 나부끼고…

2014년 10월 28일 560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38> 경인철도 개통되던 날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자 열강의 조선철도 부설권 쟁탈전에 불이 붙었다. 모스에 이어 그릴르(Grille)를 대표로 하는 프랑스의 피브릴르(Fives Lile) 회사가 7월에 경의선 부설권을 따냈다. 프랑스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함께 일본을 압박한 3국 간섭의 당사자였다. 시베리아횡단철도에 차관을 제공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했던 프랑스가 러시아 세력이 힘을 발휘하는 조선에서 철도 부설권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프랑스는 내친김에 서울-공주, 서울-목포 철도 부설권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서울-원산 간 부설권을 요구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단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반도로 내려오는 철도를 건설해 원산을 최종 목적지로 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열강들의 요구에 시달리던 조선정부는 강경책을 선택했다. 고종은 11월 칙령을 내려 향후 1년 동안은 그 어떤 나라에게도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양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고종의 칙령 이후 한국에서의 철도 부설권 쟁탈전은 수그러들었지만 물밑에서 진행되는 음모들은 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모스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경인철도 장악을 위한 우회 전략을 세운다. 모스가 주도하는 경인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모스는 자금난을 이유로 고무라 외무차관, 시부사와 에이이치 경부철도 발기위원 등에 경인철도 부설권의 양도 의사를 흘리고 다녔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일본이 아니었다. 1897년 4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모스를 도쿄로 불러들여 부설권 양도 동의를 얻었다. 이어 외무대신과 도쿄, 요코하마의

‘가만있어라’, 95년 전 이완용도 강조했다

2014년 10월 28일 476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7> 러시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건설하다 1896년 3월 29일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에 넘어가자 일본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 정부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철도 부설 교섭을 하지 말라고 압박을 해온 터였다. 4월 4일 주한 일본 공사 고무라는 외무대신 이완용을 찾았다. 고무라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으로 이완용을 찾은 이유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상실감뿐만이 아니었다. 모스의 경인철도 부설권 확보에 이어 프랑스인 그릴르가 경부철도와 경의철도 부설 특허를 따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간 조선의 모든 철도노선을 서구 열강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일본을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게 했다. 화가 잔뜩 난 고무라 공사는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굳히던 1894년의 조일협정을 상기시켰다. 철도부설에 관해 조선과 협의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들어 미국으로 넘어간 경인철도 부설권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완용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준비한 터였다. 잠시 당시의 면담 상황을 가상으로 재구성해보자. 고무라 주한공사 : 외무대신 각하! 어째서 경인철도 부설 계약을 모스와 할 수 있습니까. 조선의 철도 부설은 이미 우리 일본과 조선이 조약으로 합의한 사안입니다. 모스와의 계약은 불법이고 무효이니 철회를 바랍니다. 이완용 외무대신 : 공사께서는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금번 경인 철도 부설 계약은 주권국인 조선과 미국 사이에 합법적으로 협상을 해서 결정한 사항입니다. 귀국에서 간섭할 사안이 아니지요. 고무라 주한공사 : 지난 1894년의

반공 목사들이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반기 든 사연

2014년 10월 28일 157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0> 한일협정,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이야기 마당 4∼8] 친일파[이야기 마당 9∼15] 학살[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32∼41] 4월혁명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한일협정,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아니었으면 일본 자금도 못 들여왔다? [한일협정, 두 번째 마당] 아베 외조부 “돈으로 박정희를 만족시키면 된다” [한일협정, 세 번째 마당] “일본을 형님으로 모시겠소”, 고개 숙인 박정희 [한일협정, 네 번째 마당] 짓밟힌 한국, 일본·미국 짬짜미에 또 당했다 [한일협정, 다섯 번째 마당] 이대생들은 왜 ‘미장원·화장 자제’를 결의했나 [한일협정, 여섯 번째 마당] 조선·동아는 어쩌다 괘씸죄로 청와대에 찍혔나 [한일협정, 일곱 번째 마당] 또 망언한 일본…한국 정부는 왜 덮는 데 급급했나   프레시안 : 1964년에 이어 1965년에도 한일협정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중석 : 1965년에 가면 한일협정과 관련해 더 커다란 시위, 더 장기간에 걸친 시위가 벌어진다.

2014 불교평론 학술상에 김광식 교수

2014년 10월 28일 372

근현대불교사 살핀 <불교근대화의 이상…>으로 선정 <불교평론>이 한해 동안 출간된 불교저서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2014 불교평론 학술상’에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의 <불교근대화의 이상과 현실>(도서출판 선인)이 선정됐다. 김광식 교수는 “1993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의 연구 성과는 풍부함에 비해 불교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음을 알게 되고 근대불교의 연구에 나서게 됐다”며 “1993년, 임혜봉의 <친일불교론>에서 불교의 친일을 알게 됐지만 친일의 반대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스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항일불교, 민족불교를 조명하겠다는 연구방향을 세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94년부터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해 3ㆍ1운동 민족대표인 백용성ㆍ한용운ㆍ백초월 스님 등 독립운동가를 주목했으며 종단건설운동, 불교청년운동, 불교개혁론 등 일제 불교정책에 저항적인 흐름을 조명했다. 김 교수는 “이후 불교 근대화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정립하게 됐다”며 “‘불교근대화’는 근대불교를 설명하는 관점이면서 동시에 근대불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불교근대화의 이상과 현실>에게 학술상 수상이 주어짐을 보며 추후에도 근현대불교 연구의 개척이라는 화두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불교평론은 선정사유에 대해 “불교 근대화의 개념과 성격, 노선 등을 구체적인 자료에 근거해 역사적 맥락에서 서술했다”며 “불교 근대화를 둘러싼 여러 이슈에 관한 학문적 토론을 제기하는 가치 있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시상식은 12월 18일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열리며, 상패와 상금 500만원이 수여된다. <2014-10-27>현대불교 ☞기사원문: 2014 불교평론 학술상에 김광식 교수 ※관련기사 ☞법보신문: 1910년 경술국치부터 8·15 광복까지 불교 근대화 이상과 현실을 돌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