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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범 “중국인 831명 살해..생체해부도 자행”
2차 대전 당시 중국인 831명을 살해했다고 실토한 일본군 전범의 자백서가 공개됐습니다.일제 전범 자백서를 잇따라 공개하고 있는 중국 중앙 기록보관소는 11번째 순서로 이같은 내용이 담긴 전범 게이지 사가나카의 자백서를 홈페이지에 실었습니다.게이지는 자술서에 지난 1937년 4월부터 1945년 9월 3일까지 자신이 살해한 중국인이 민간인 400여 명을 포함해 모두 831명이라고 진술했습니다.게이지는 이들을 총살과 참수 등의 방법으로 살해했다며, 중국인 병사 1명을 산채로 해부해 살해했다고도 밝혔습니다.중국 당국은 지난 3일부터 매일 1편씩 일제 전범의 자백서를 공개하며 일본에 대한 역사 공세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2014-07-13> YTN ☞기사원문: 일본 전범 “중국인 831명 살해..생체해부도 자행” ※관련기사 ☞YTN: ‘생체 해부해 살해‘..日 전범 자백 11번째 ☞아주경제: “중국인 831명 살해” 11번째 일본군 전범 자백서 공개
日 전범 우노 신타로의 중국 침략 친필 자백서 공개
중국 중앙기록보관소는 7월 9일 일본 전범 우노 신타로(野晉太)의 중국 침략 사실에 관한 친필 자백서 요약 내용을 공개했다. 우노 신타로가 1954년 8월에 쓴 친필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20년 일본 히로시마 현에서 출생했다. 1941년 4~9월에 일본 39사단 232연대 사병으로 중국 후베이(湖北) 한커우(漢口)에 파병됐다가 후에 일본으로 귀환했다. 1942년 4월~1945년 5월에 후베이 232연대에 있었고, 1945년 5월에 232연대 설립 군관을 지내다 같은 해 8월에 소련군에 의해 체포됐다. 중요한 범죄 내용: 1941년 5월 10일 후베이성 징먼(荊門)현 난차오푸(南橋鋪) 북서쪽 30㎞ 지점에서 민가로 침입, 중국 민간인 1명에게서 강제로 솥을 빼앗고 있을 때 2소대 대장 타나카 중위가 다가와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이 솥을 약탈해 갔다고 말했다”고 대답하자 타나카는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여라”고 명령했다. 타나카가 그 민간인을 총살하게 했다. 1942년 5월 하순, 후베이 중샹(鍾祥)현 궈류(郭劉)만에서 이 마을의 중국 민가 건물 10개(30가구)를 모두 불태웠다. 또, 마을 주민 1명(약 40세 남자)을 신사군(新四軍) 전사의 용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하고 내 명령에 따라 분대장 나카타 하사가 물고문한 후 내가 목을 베었다. 1943년 2~3월 후베이성 당양(當陽)현 셴런자이인자(仙人砦尹家) 서쪽에서 소형 붉은색 통과 중형 붉은색 통(모두 분사형 독가스로 방사량은 상세하지 않음)을 방사해 항일군을 혼란에 빠뜨린 후 보총과 대포로 공격해 항일군의 반격을 좌절시켰고 이 기간에 군인 200명을 학살했다.” 1943년 4월 상순 후베이성 이창(宜昌)현 톈바오산(天寶山)에서
日 전범, “중국-소련인 대량 살상용 세균 배양”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소련군의 진공에 대비해 대규모 세균전을 준비했다는 내용의 일제 전범 자백서가 10일 공개됐다. 지난 3일부터 ‘일본 전범 자백서 45편 연속 공개‘ 활동에 나선 중국 중앙당안국(기록보관소)은 이런 내용이 담긴 전범 히데오 사카키바라의 자백서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군의관 출신인 히데오는 1944년 11월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일본군의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의 린커우(林口)지대장으로 근무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哈爾濱)에 주둔했던 731부대는 린커우(林口), 하이린(海林), 무단장(牡丹江) 등 주변 지역에 예하 부대인 643지대, 162지대 등을 배치해 본대와 유사한 세균전 준비작업을 수행하게 했다. 히데오는 전범으로 수감된 1956년 4~5월 작성한 자술서에서 “린커우지대의 임무에 따라 나는 재임 기간 부하들에게 세균 보존·배양을 명령해 세균전을 준비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 (세균무기) 생산량을 중·소 국경의 동부지역에 살포했다면 대량의 소련군을 섬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중·소 양 국민을 학살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고 털어놨다. 히데오는 “세균전 준비를 위해 부대원 25명을 상설 쥐잡기반으로 편성해 1945년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간 총 2만6천 마리의 쥐를 731부대로 보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세균무기 개발·제조를 위해 무고한 양민을 실험도구로 사용한 사실도 자백했다. 히데오는 “731부대의 명령에 따라 지대에 보관 중이던 티푸스균과 A형 파라티푸스균을 731부대로 보내 독극물의 위력을 실험하기도 했다“면서 “이들 세균은 우물에 시험관 1~2개 분량만 풀면 학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위력이었고 이를 직접 확인하기
[팟캐스트]’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9부 남과 북, 분단으로 치닫다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외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8부 선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세우자 해방, 국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왔습니다. 세계 정세를 읽으며 건국 준비를 서둘렀던 여운형과 안재홍은 바로 그날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이튿날부터 활발하게 건국 준비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견하였듯이, 이 활동은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이었고, 목적지는 멀고도 험난하였지요. 해방이 곧 독립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해방이 곧 독립은 아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민주주의의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였을까요?국가는 만들어지는 것인데, 과연 1945년 우리는 어떻게 어떤 국가를 만들려고 했을까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외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9부 남과 북, 분단으로 치닫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 6. 3. 해방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던 1946년 6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연설을 전하는 신문 기사입니다. 누구의 상상에도 ‘분단’이란 말이 없었을 때, 이승만은 ‘분단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구실로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하였을까요? 그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한민국의 기원을 찾는 우리 이야기도
“김구 선생 암살한 안두희를 죽이러 왔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57]4명의 의인, 릴레이하듯 추적해 끝내 처단하다 ◈ 평범한 시민 박기서, 법 대신 정의의 이름으로 안두희를 때려죽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초상화. 살아서는 패했으나 역사 속에 승리자로 우뚝 섰다. (사진=백범 김구기념관 제공)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의 한 아파트에 몽둥이를 든 중년 남성이 들이닥쳤다.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경기도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박기서라는 평범한 가장으로, 평소에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가게에 가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40Cm 크기)를 4천원 주고 사서 안두희 집으로 달려간 것이다. 박기서 씨는 누워 있는 안두희에게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고 고함을 쳤다. 이어 준비해간 나일롱 끈으로 두 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했다.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시면서 계속 두들겨 팼다. 이윽고 안두희는 욕된 인생을 마감했다. ▲정의봉을 들어 보이고 있는 박기서씨. 박씨는 이 봉으로 안두희를 처단했다. (사진=책보세 제공) 박기서 씨는 안두희 씨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신곡본동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한 후 경찰에 자수했다. 고해성사를 들은 이준희 신부는 이렇게 회고했다. “박기서 씨는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데 역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2014.07.09] 최후의 제국 군인 박정희
라디오백년전쟁: [[07.09] 최후의 제국 군인 박정희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439383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40709bns.mp3
“아버지 강제합사 경위 알려고 한국서 찾아왔는데…”
▲ 10일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 앞에서 유족 박남순(오른쪽 두번째)씨 등이 한국인 강제합사를 철회하라는 내용이 담긴 펼침막을 펼치려다 일본 경찰이 제지하자 항의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유족 문전박대변호인단의 설명 요청도 거부 “70년을 기다린 사람이야. 왜 이래!” “지금 재판을 하는 원고와 피고 입장이기 때문에 대화에 응할 수 없습니다.”(야스쿠니신사 관계자) 10일 오전 11시 일본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 신문 앞. 야스쿠니신사에 강제 합사된 부친의 합사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신사를 찾은 유족 박남순(71)씨 일행의 발걸음은 신사 쪽의 강력한 거부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선친의 유골이 왜 유족들의 사전 동의나 사후 통보도 없이 신사에 합사됐는지 알려달라는 유족들의 외침은 “현재 재판중인 사안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는 신사의 벽에 부닥쳐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야스쿠니합사철폐 원고단의 오구치 아키히코 변호사가 “멀리 한국에서 유족이 직접 찾아왔는데 좀더 성의 있는 대응을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결국 신사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지난 9일 ‘야스쿠니에 강제 합사된 한국인들의 이름을 신사의 명부(영새부)에서 삭제해 달라’는 야스쿠니합사철폐 2차 소송 1차 변론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진행됐다. 1차 변론을 마친 일본 변호단은 “아버지가 신사에 합사된 경위를 알고 싶다”는 유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사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사 쪽은 9일 설명 요청을 한 차례 거부한 뒤 10일 유족들이 직접 현장을 찾아 다시 한번 부탁을 했는데도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통’의 특별한 선배는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2>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32∼41] 4월혁명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日전범 “중국인 부녀자 성폭행하고 일반인 고문살해”
사사키 노스케 中 ‘일본전범 자백서‘ 제4탄 공개…”위안소에 중국인 부녀 있었다“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일본군이 중국 침략전쟁 당시 부녀자 수십 명을 성폭행하고 일반인을 ‘간첩‘ 혐의로 붙잡아 고문한 뒤 살해했다는 내용의 ‘전범 자백서‘가 6일 공개됐다. 지난 3일부터 ‘일본 전범 자백서 45편 연속 공개‘ 활동에 나선 중국 중앙당안국(기록보관소)은 6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전범 사사키 노스케(佐佐眞之助)의 자백서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사사키는 1932년 관동군 제10사단 보병 제63연대 제3대대장으로 중국에서 복무하기 시작해 1945년 관동군 제3방면군 제39사단장이 됐다. 이 자백서는 1945년 8월 소련군에 체포된 그가 1954년∼1956년 작성한 것이다. 사사키는 이 자백서에서 자신의 지휘하는 부대가 1932년 10월 ‘간첩 혐의‘로 약 30명의 중국인을 체포해 고문한 뒤 21명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살해된 사람 중 15명은 항일군인이었고 6명은 일반인이었다. 그는 또 “1940년 10월 휘하 대대가 저장(浙江)성 지역에서 독가스를 사용해 국민당 군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고 10월 충칭군 전사, 포로, 중상자 등 600여 명을 살해했다“고 적었다. 사사키는 또 1941∼1945년 휘하 부대들이 다수 항일군인과 항일단체 활동가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50여 명을 살해했고 포로 5명을 ‘총검술 교육‘에 이용해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1945년 3월 후베이성 샹판(襄樊)작전 중 충칭군 병사 3천500명과 중국인 200명을 살해하고 중국인 부녀 약 50명을 성폭행했다고 진술했다. 사사키는 “후베이성 당양(當陽)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위안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