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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총리후보가 칭송한 윤치호의 친일행적
문창극 총리후보가 칭송한 윤치호의 친일행적 문창극 총리후보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과 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보고서에도 등재된, 윤치호의 반민족행위를 옹호한 망언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KBS 보도에 따르면 문창극 후보자는 2012년 자신이 장로로 있는 서울 온누리교회의 특별강연에서 윤치호에 대해 “이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배반하진 않았어요. 비록 친일은 했지만은 나중에, 기독교를 끝까지 가지고서 죽은 사람”이라며 “이 사람 영어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에요. 1891∼1892년 그때. 그러니 우리는 다 가서 죽어야죠. 우리는 사실 다 죽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창극 후보자의 종교 편향과 그릇된 역사인식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그가 칭송한 윤치호의 친일행적을 통해 조명해본다. 윤치호 尹致昊│伊東致昊, 1866~1945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중추원 고문·대화동맹 위원장 1866년 12월 21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이다. 호는 좌옹(佐翁)이다. 대한제국기 군부대신을 지내고 합병 후 남작 작위를 받은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이다.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1년 4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5월 도쿄(東京)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1년간 어학을 공부했다. 1883년 1월부터 일본 요코하마(橫濱) 주재 네덜란드영사관 서기관에게서 영어를 배우다가 조선에 부임하는 초대 미국공사인 푸트(Foote, Lucius Harwood)의 통역을 맡아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같은 해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에 임명되었다. 1884년 10월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고, 그해 12월의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친분이 있던 개화파들이 역적으로 몰리자 1885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여 2월 중서서원(中西書院)에 들어가 1888년 8월까지 영어와 근대 학문을 배웠다. 1888년 10월
[논평] 망국적 극우인사에 대한 총리후보 지명을 즉각 철회하라
▲ 문창극 총리후보 지명철회 촉구 기자회견 [민족문제연구소 논평] 망국적 극우인사에 대한 총리후보 지명을 즉각 철회하라 현 정권 들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 이하의 인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지만 망사를 넘어 참사에 가까운 인사 실패는 이번 총리후보 지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본다. 후보로 지명된 문창극 씨는 이전부터 이미 비뚤어진 역사인식과 정치 · 종교 편향으로 거센 비판을 받아온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가 내뱉은 민족성 비하 · 독립운동 폄훼 발언이나 친일파 옹호 궤변, 강제연행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망언은 식민사관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조선총독이나 일본총리의 발언을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다. 제주 4·3항쟁에 관한 퇴행적인 주장 또한 냉전적 사고에 찌든 시대착오적 망발로 지도자는 물론 언론인으로서도 자격 미달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 현실정치에 관한 일련의 칼럼들도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이나 편파적이고 악의적인 왜곡으로 일관하고 있어 언론인으로서 직업윤리마저 저버렸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도대체 이 정권의 인사 잣대는 무엇인가. 이 정권은 집권 이후 일관되게 ‘말 따로, 행동 따로’라는 기만적 행태를 보여왔다. 사회통합과 국가개혁의 적임자를 찾는다면서 극단적으로 분열적이고 수구적인 인사를 선택한 이번 사태가 단순히 인사 시스템의 붕괴라는 절차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 정권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있다고 판단된다.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극우
유네스코 중국 위안부 자료 접수…내달 내용 공개
중국, 軍위안부 자료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베이징=연합뉴스) 홍제성 특파원 = 중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중국 단독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한 사실을 10일 공식 확인했다. 중국 외교부는 “중국 측이 위안부 관련 자료를 등재 신청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연합뉴스의 질의에 대해 답변서를 보내 이같이 확인했다. (베이징=연합뉴스) 홍제성 특파원 = 유네스코(UNESCO·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가)가 중국 정부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및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 신경보(新京報)는 자체 취재를 통해 유네스코가 중국이 등재 신청한 두 분야의 자료를 접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12일 보도했다. 유네스코 언론 담당자는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 “신청된 관련 자료의 내용을 오는 7월 중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젝트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려면 심사등재위원회와 기술위원회 등을 거쳐 위원 14명으로 구성된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IAC가 등재권고를 결의하면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추인 절차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와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한 사실을 지난 10일 공식 확인한 바 있다. 장셴원(長憲文) 난징대 대학살역사연구소장은 “난징시 제2기록보관소(당안관)에서 이번 신청을 주도한 것“이라면서 일본군 위안부 자료 신청은 상하이(上海)사범대학에서 진행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장롄훙(張連紅) 난징사범대 난징대학살연구소장은 “등재 신청 준비는 올해 초부터 시작된 것“이라면서 “난징대학살은 인류문명사의 잔혹한 폭력행위로, 이같은 부정적 유산을 일본인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이해함으로써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긴급기자회견문]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정신을 유린·부정하는 문창극 총리 지명을 당장 철회하라
▲ 문창극 총리후보 지명철회 촉구 기자회견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정신을 유린·부정하는 문창극 총리 지명을 당장 철회하라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것은 참극이다. 박근혜 대통령 주변의 인물들이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어젯밤 KBS 뉴스를 통해 보도된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역사 인식은 차라리 일본의 극우주의자의 망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천황 폐하’의 자리를 ‘하나님’이 대신할 뿐이다. “일제 식민지배는 이조 500년을 허송세월한 조선 민족의 탓”이라는 주장은 일본 정한론자들의 그것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문창극은 “이 사람(윤치호)은 비록 친일은 했지만 기독교를 끝까지 가지고서 죽은 사람”이라고 윤치호를 치켜세운다. 기독교를 믿기만 하면 친일을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그러나 윤치호는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는 기독교 윤리에 충실하지도 않았다. 윤치호는 무모한 침략 전쟁터에 조선의 무고한 젊은이들을 내몬, 기독교 윤리에 반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문창극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것이 우리 민족의 DNA”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 역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장했던 내용 그대로다. 즉 조선인은 게으르다. 더럽다. 야만적이다. 무기력하다. 단결이 안 된다 등등. 그러니 부지런하고 위생적이며 문명화됐고 활기차며 단결이 잘 되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조선의 입장에서 축복이라는 것이다. 망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문창극은 심지어 독립투사들마저 능욕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갑자기 뜻밖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신”것이며 “미국한테
일본에서 父 제사 지낸 강종호 씨 “손 놓은 정부 야속”
강제징용 피해자 제사 (서울=연합뉴스) 지난 18일 아버지가 강제징용을 당한 강종호(73)씨가 일본 시모노세키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14.6.1.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제공>> leesh@yna.co.kr 일본에서 父 제사 지낸 강종호 씨 “손 놓은 정부 야속“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어쩌다 전장에 끌려가서 혼백이 돼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계십니까. 7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를 찾아온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지난달 18일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서 상복 차림의 강종호(73)씨는 조촐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사무치는 사부곡을 읊어 내려갔다. 바다와 맞닿은 항구 끝 자락에는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놓였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 따르면 강씨는 일제 강제징용피해자 강태휴(1923∼?)씨의 외아들이다. 제주도 출신인 강씨는 어렸을 적 선원이던 아버지가 일제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조차 없다. 그러나 조부모마저 1948년 제주 4·3 사건 때 집에 청장년층이 없다는 황당한 이유로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하면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70여년이 지난 올 2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도움으로 현지의 한 연금사무소에서 아버지의 기록을 발견했다. 선원수첩번호 45184. 선박명 제26호쿠신마루(北新丸). 아버지가 시모노세키에 있던 선박회사 하야시가네(현 마루하니치로주식회사) 소속으로 1944년 2∼3월 연금을 낸 기록을 찾은 것이다. 강제징용피해자 강태휴씨 아들 강종호씨 (서울=연합뉴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피해자 강태휴씨의 아들 강종호(73)씨.<< 관련 기사 참조 >> 2014.6.1 tsl@yna.co.kr “일본 나가사키에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는 고향 어른의 증언 하나로 9개월 동안 일본 각지의 연금사무소와 선박회사를 샅샅이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삶을 배우다
예술공장 두레 ‘다 그렇지는 않았다’노래·춤으로 경쾌하게 풀어낸 음악극14일까지 청주 문화공간 새벽서 공연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특권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고, 고귀한 신분일수록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있는 놈이 더하다. 우리 사회는 사회지도층의 도덕불감증, 공직자들의 무책임한 자세, 비윤리적인 행동들로 병들어 썩어갔고, 세월호 참사를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부조리한 사회에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나라의 독립에 헌신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이 경종을 울린다. 예술공장 두레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을 음악극으로 담은 ‘다 그렇지는 않았다’를 오는 14일까지 평일 오후 7시30분과 휴일 오후 4시 문화공간 새벽에서 공연한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시낭송, 노래, 극중의 극, 춤 등으로 경쾌하게 담아내 관객들이 보다 친숙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야기와 질문을 공유하고 즐길 수 있게 무대를 꾸몄다. 도심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카바레에 모인 사람들. 주인, 직원, 공연단과 단골 손님은 언제나 그 곳에 모여 시낭송, 노래, 연극을 통해 세상을 읽고 걱정한다. 스스로를 카바레티스트라 칭하고 갖가지 공연을 선보여 온 그들이 어느 날 저녁,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내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라가 망하자 6형제의 40여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과 일생을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이항복의 후손인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출생한 우당과 그의 형제는
[기고]홍범도 장군 유해, 언제까지 이역에 방치할 것인가
일제강점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전투가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몹시 빈약했을 것이고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는 그만큼 취약하게 보였을 것이다. 3대첩이 있었기에 부끄러운 식민지시대를 씻을 수 있고 당당한 민족의 상무정신을 이으면서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 결기를 갖게 되었다. 대첩은 국치를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병전쟁의 결실이고 이후 항일무장전쟁과 의열투쟁의 시발점이었다. 중국정부와 인민들에게도 정신적, 전략적 교훈을 주었다. 6월7일은 봉오동전투 74주년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재군비의 칼날을 품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추진하면서 동북아의 풍랑이 거세지고, 국내적으로는 역사왜곡 등 친일잔재들의 권력화가 갈수록 강화된다. 봉오동전투를 비롯하여 치열했던 항일투쟁은 묻혀지고 독립군에게 총질했던 일본군 출신들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가치전도의 세상이 되었다.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는 1920년 6월7일 새벽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한 봉오동에서 일본정규군 야스가와 부대와 니히미 중대를 격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앞서 6월4일에는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하여 격파시켰다.봉오동대첩과 관련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은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 아군 전사 4명, 중상 2명의 경미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신문 ‘상해시보’는 일본군이 독립군에 대패하여 150여명의 전사자와 수백명의 부상자를 내고,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했다고 보도했다.봉오동전투는 홍범도의 지휘하에 그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신민단의 소부대도 합세하여 봉오동 골짜기에서 정예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대첩이었다.일본군의
광주시교육청, 함세웅 신부 초청 공개강좌 개최
광주광역시교육청(교육감 장휘국)은 10일 오후 7시 광주 민주인권교육센터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함세웅 신부를 초청해 ‘평화교육 아카데미–달마다 만나는 민주.인권.평화이야기’ 4번째 강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강좌는 ‘6월 항쟁과 정치 민주화’를 주제로 ▲박재규와 10.26 사건 ▲박종철군의 죽음과 추모 기도 ▲4.13 호헌 조치에 맞선 사제들의 단식 기도 ▲박종철군 고문살인 진상과 은폐 조작 폭로 ▲6.10 민중항쟁과 6.29선언 ▲국민들의 방심과 김대중.김영삼 분열 등 6.10민주항쟁과 관련한 기억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예정이다. 시교육청이 지난 4월부터 11월까지 개최하는 ‘평화교육 아카데미–달마다 만나는 민주.인권.평화이야기’는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교직원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매달 역사적 사건과 기념일을 중심으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6.10민주항쟁일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의미 있는 날이다”며 “평화교육 아카데미 강좌를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과 의미를 되새겨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평화교육 아카데미는 일선 학교의 교직원 뿐만 아니라 참가를 희망하는 일반 시민도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 관련 자세한 사항은 시교육청 민주인권교육센터(062-712-6821)로 문의하면 된다. <2014-06-10>민중의소리 기사원문:☞ 광주시교육청, 함세웅 신부 초청 공개강좌 개최 ※관련기사 뉴시스:함세웅 신부 12일 광주서 ‘6월 항쟁’ 강좌 씨엔엔21: 6.10 민주항쟁기념일 맞아 함세웅 신부 초청 공개강좌 개최
시민사회 “정부가 6·10민주항쟁 기념식 파탄냈다”
‘6·10 청와대 만민공동회’ 참석자들이 10일 저녁 서울 종로구 동십자각 네거리에서 청와대로 향하다 삼청동 총리공관 앞에서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기념사업회 ‘낙하산 임명’ 반발 따로 기념식 열고 비판 선언문 6·10 민주항쟁 27돌을 맞은 10일 시민사회와 정부가 ‘6월 민주항쟁 기념식’을 따로따로 개최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낙하산 이사장’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6월 민주항쟁 계승 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불법임명 거부 국민대책위원회’ 등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6월 민주항쟁 기념 국민대회’를 열었다. 국민대책위 등은 지난달 27일 “이사장을 불법적으로 임명한 안전행정부 장관과 새 이사장인 박상증 목사의 이름으로 열리는 6·10 기념식에는 응할 수 없다”며 보이콧을 선언한 바 있다. 기념사업회 직원 등은 이날로 114일째 박 목사의 이사장실 출근을 막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3대 이사장을 지낸 함세웅 신부는 대회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개조를 이야기하지만, 개조의 대상은 새누리당과 청와대, 그리고 독재적인 유신잔당들”이라고 말했다. 이해동 목사도 “박 대통령이 주장하는 국가개조는 오만의 극치”라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문영희 전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 박재승 변호사 등 시민사회 원로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박근혜 정권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임원 선임에 부당하게 관여해 6·10 기념식을 파탄냈다”고 비판했다.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과 박영선 원내대표를 비롯해 문재인·박지원·원혜영 의원 등 20여명도 국민대회에 참석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우리 친일 사학자들이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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