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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시론] 4월혁명 정신으로 ‘반민주인명사전’ 만들자 / 김삼웅

2014년 4월 24일 387

4·19 민주혁명 54주년을 맞는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4월혁명은 반동과 역류를 거듭하며 수모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4·19를 짓밟은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르고 그 주동자들이 영웅으로 치켜세워지는 반민주 반공화 반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독재자가 거침없이 신격화되고 도처에 동상이 세워진다. 헌법전문의 ‘임시정부 법통’과 ‘4월혁명정신 계승’은 종잇장의 인쇄물에 불과하고, 현실은 쿠데타 아류세력의 장중에서 움직인다.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가 원시형이라면 박정희의 6·8 부정선거는 근대형이고 이명박의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부정선거는 탈근대, 초근대형이었다. 이승만의 부정에 저항하고 박정희의 부정을 규탄했던 국민이 이명박의 부정에 침묵하는 세태가 되었다. 그리고 입만 열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는 허튼소리에 자만한다. 집단망각증세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렸는데도 민주주의국가를 자부하는 것은 무지일까 망각일까.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그래서 제안한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준비하자. 10년 장병에 7년 묵은 쑥이 특효라면 이제라도 쑥을 묵히는 일이 중요하다. 이승만 이래 민주주의를 짓밟은 반민주 인명사전을 만들자.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데 앞장선 권력자, 정상배, 언론의 탈을 쓰고 독재를 비호하는 사이비 언론인, 곡필 지식인, 권력의 충견이 된 ‘검·판사’, 경찰, 교육자, 종교인 등의 죄상을 찾아서 역사의 필주(筆誅)를 가하자. 해방 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4월혁명 후 이승만 독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10·26 후 박정희 쿠데타와 유신을 청소하지 못하고, 6월항쟁 후 전두환 군부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결과가 친일세력과 반민주세력의 온존·창궐·득세를 가져왔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4·19 민주혁명에 성공하고도 민주혁명의 가치와

[2014.04.23] 4월 혁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14년 4월 23일 385

라디오백년전쟁: [04.23] 4월 혁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87397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23baeg.mp3

공안부로 간 ‘백년전쟁’, ‘국가원수모독죄’의 부활?

2014년 4월 21일 870

법조계 “국보법 아닌 친고죄 공안부 배당 전례없어”민족문제硏 “후속편 차단·역사 학자 위축 의도” 최근 검찰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진 등에 대한 수사를 이례적으로 형사부에서 공안부로 재배당하자, 영화를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를 향한 공안탄압 의도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당초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지난해 5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가 김지영 백년전쟁 감독과 최진아 PD,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형사1부로 배정하고 지난해 12월부터 피고소인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2월 11일 김 감독에 대한 형사1부의 3차 조사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검찰 정기인사로 담당 검사가 한 차례 교체됐으며, 이 후 불과 한 달 만에 백년전쟁 관련 소송 사건이 공안1부(이현철 부장검사)로 재배당됐다. 윤웅걸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니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과 관련한 사건이고, 대한민국 역사와도 관련성이 있어 공안부에서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려는 취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통상 검찰 직제에 따르면 공안 제1부는 간첩 등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과 선거사범을 전담하는 부서이다. 때문에 사자명예훼손과 같은 ‘친고죄’(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하는 범죄) 사건을 안보·선거사범을 전담하는 공안부서에서 수사하는 것 자체가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라는 게 법조인들의 지적이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측 변호인단의 이민석 변호사는 1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사자명예훼손은 고소한 사람이 소를 취하하면 언제든 수사가 종결되는 친고죄인데 선거나 공공의 안녕에 관한 사안을 다루는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2014년 4월 19일 393

body,table,td,input,select,textarea{font-family : verdana,굴림;font-size :9pt;line-height : 140%;}img{border : 0;}A:link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visited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hover { text-decoration:none; color:#3E8FFC;}P{margin-top:2px;margin-bottom:2px;}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1] 한국전쟁 / 친일파 / 학살 / 해방·분단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4월혁명, 세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할 이유 없었다? 모르는 소리” [4월혁명, 네 번째 마당] 민주당 간부는 왜 깡패에게 맞아 죽어야 했나 [4월혁명, 다섯 번째 마당] ‘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프레시안 : 4월혁명에 대해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이승만의 정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했다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실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고 해체했다기보다는 비판적 발전을 모색하는 ‘건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중석 : 이승만의 정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와는 너무나

“카이로 선언이 이승만 작품? 사료에도 없는 얘기”

2014년 4월 19일 837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5주년을 기념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단국대학교, 광복회, 독립기념관의 공동주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카이로선언’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 토론하고 있는 발표자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카이로선언’ 학술회의에서 발표자들과 토론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단국대, 독립기념관과 함께 이번 학술회의를 주최한 광복회의 박유철 회장은 축사를 통해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선언한 국제회의로서 그 의미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컸다. 그러나 이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그 결과, 지난해 모 언론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검증되지도 않은 사실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온갖 추측에 의한 가설이 난무하여, 자칫 카이로선언의 역사적인 가치마저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고 있다”며 이번 학술회의를 열게 된 구체적인 계기를 설명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의 ‘카이로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를 시작으로, 이재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안 반대운동’, 이상철 일본 류코쿠대 사회학부 교수의 ‘장제스 일기로 본 카이로 회의’, 조덕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연구원의 ‘카이로회담의 교섭 및 진행에 관한 연구’,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카이로선언과 연합국의 대한정책’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김구의 공인가, 이승만의 공인가 카이로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3년 11월 27일에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국의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채택한 선언으로, 종전 후 일본 문제에 대한 연합국 측의 처리방안을 합의한 것이었다. 특히 이 선언에서는 ‘한국 인민의

제암리교회 일제 만행 사건 (1919. 4. 15)

2014년 4월 16일 557

과거를 통해 오늘의 지혜를 배우는 오늘을 생각하며, 오늘은 4월 15일입니다. 1959년 월탄 박종화가 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비문’에 적힌 글입니다. ‘마침내 음력 3월 16일 오후 1시경 일본경찰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해 청년 21명과 여인 2명, 도합 23명을 무기로 위협하고는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렁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경기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1919년 4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두렁바위 마을 또는 제암리(堤巖里)로 불리는 곳. 이 마을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900년 전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서였다. 그 후 아펜젤러에게 전도를 받은 교인들이 증가하면서 1905년 정식으로 교회당이 세워졌습니다. 그곳이 바로 비극의 현장 제암리교횝니다.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던 1919년 3월 말. 제암리 교회 청년들은 천도교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습니다. 밤마다 일제 경찰 몰래 봉화의 불길을 올렸고 3월 30일과 4월 5일 옆 마을 발안의 장날을 맞아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열흘 뒤인 4월 15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가 30명의 헌병을 이끌고 제암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발안 장날의 가혹한 진압을 사과하겠다”며 15세 이상 되는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 헌병들은 순식간에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2014.04.16] 라디오백년전쟁: 4.19 혁명과 한국민주주의

2014년 4월 19일 423

라디오백년전쟁: [04.16] 4.19 혁명과 한국민주주의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84226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17baeg.mp3

‘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2014년 4월 16일 1202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1] 한국전쟁 / 친일파 / 학살 / 해방·분단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4월혁명, 세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할 이유 없었다? 모르는 소리“ [4월혁명, 네 번째 마당] 민주당 간부는 왜 깡패에게 맞아 죽어야 했나 프레시안 : 4월혁명의 원인을 3.15 부정 선거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일각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몰랐다는 강변과 맞닿은 흐름으로 보인다. 이는 4월혁명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에 더해, 중요한 여러 현상(예컨대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한 것 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3.15 부정 선거와 ‘피의 화요일’ 4.19 시위, ‘승리의 화요일’ 4.26 시위 같은 각종 시위에는 이승만 정권의 전반적인 성격이 집약돼 있다. 단순한 부정

[이상수의 고전중독] 왜 아직도 백년전쟁중인가

2014년 4월 16일 799

  당나라 시인 서응(徐凝)은 이백의 호방한 시풍을 흉내 낸 <여산폭포>란 시의 마지막에서 “한줄기 폭포가 푸른 산빛을 갈라 깨뜨리네”(一條界破靑山色)라고 썼다. 송나라 시인 소식은 이 시가 저속하고 비루한 ‘나쁜 시’(惡詩)라며 장난삼아 절구를 한 수 지었다. “폭포 날아 떨어지며 흩뿌리는 물거품은 수없이 많건만/ 서응의 나쁜 시를 씻어내지 않는구나.”(飛流沫知多少/ 不與徐凝洗惡詩) 서응은 이 한 구절 때문에 ‘나쁜 시’의 대명사가 됐다. 그가 이런 성토를 당한 건, 세상을 향한 어떤 발언을 시에 담을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새로운 표현’(新意)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는 어떻게 다른가. 조선 중기 문인 어세겸은 ‘창에 쓰다’(書窓)란 시에서 말한다. “우연히 시상이 떠올라 창문에 써 붙이니/ 종이가 찢어지면 시 또한 찢어지리/ 좋은 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전할 것이요/ 나쁜 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침 뱉으리/ 사람들이 전한다면 종이가 찢어진들 무엇이 상하겠으며/ 사람들이 침 뱉는 시는 찢어져도 좋으리/ …천고의 뒤에 남은 시를 통해 나를 알리라.”(得句偶書窓/ 紙破詩亦破/ 好詩人必傳/ 惡詩人必唾/ 人傳破何傷/ 人唾破亦可/ …千載詩知我) 시흥을 깨는 ‘나쁜 시’를 씻어내는 일도 이렇게 어렵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일제 치하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시를 씀으로써 군국주의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앞장선 서정주 같은 이의 시는 어떻게 씻어내야 할까. 아직도 “미당의 친일행적은 아쉽지만 그가 쓴 시는 참 좋다”는 식의 어법이 적지 않다. 삶과 분리된 글재주만으로 문학을 논하는 일은 문학을 한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