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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공조 본격화(종합)
한국-중국,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공조 본격화 (스자좡=연합뉴스) 홍제성 특파원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한국과 중국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2일 오전 중국 허베이(河北)성 성도인 스자좡(石家庄)시에서 피해자 추모 행사를 한 뒤 일본 기업을 상대로 중국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소송대표인 리윈더씨가 법원 대기실에서 소장을 들고 있는 모습. 중국 ‘추모·손배소 행사’에 한국인 피해자도 참석 (스자좡=연합뉴스) 홍제성 특파원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한국과 중국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일본을 상대로 본격적인 공조에 나섰다.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가족들은 2일 오전 중국 허베이(河北)성 성도인 스자좡(石家庄)시에서 피해자 추모 행사를 한 뒤 일본 기업을 상대로 중국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인 징용 피해자 가족 대표와 한국 변호사도 참석, 이들을 격려하면서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2차대전 중 미쓰비시(三菱) 머티어리얼(전 미쓰비시광업주식회사) 피해노동자대표단'(이하 대표단)은 이날 오전 스자좡 핑안(平安)공원 기념비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 행사를 열어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한중 양국의 피해자 대표들은 기념비에 헌화하고 묵념하면서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한국인 대표로는 이규매 원폭협회 기호2세회 총무,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장완익 변호사가 참석했다. ▲한·중 양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추모행사가 끝난 뒤 강제징용 피해자 기념비에서 기념촬영 하는 모습. 중국 대표단은 이어 피해자와 가족 등
[단독] 법원통신망에 ‘제주 4.3은 좌익폭동’ 파문
▲ 제주 4.3 66주년 희생자 추념식이 3일 제주평화공원에서 첫 국가의례로 열렸다. 제주 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3일 66주년 희생자 추념식이 첫 정부 주관행사로 치러진 가운데 법원내부통신망에 4.3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한 글이 올라와 파문이 일고 있다. 3일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법원내부통신망인 코트넷에는 ‘폭동을 항쟁이라 부르는 기막히고 비통한 현실’이라는 제목이 글이 게시됐다. 서울의 한 지방법원 직원이 작성한 글은 제주 4.3을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한 좌익 폭동으로 규정했다.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지부장 등 좌익 세력들이 제주도내 파출소 등을 습격해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으로 결국 같은해 5월 10일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폭동이었다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이다. 해당 직원은 또 4.3사건을 항쟁으로 부르는 사람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타도 대상으로 삼았으니 그들에게는 항쟁이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그는 이어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폭동을 항쟁으로 공연히 부르는 족속들이 생겨났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겨냥하기도 했다.하지만 해당 직원은 4.3 사건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제주 4.3과 관련해선 지난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 4.3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제주 4.3을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함에 따라 대통령은 같은해 국가권력에 의한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시기는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를 기점으로 다음해 4월
국민TV ‘개국 1주년 특집’ – 동학에서 언론혁명의 길을 묻다
[[2014.04.01] 국민TV ‘개국 1주년 특집’ 동학에서 언론혁명의 길을 묻다 ※ 대담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73170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01ma.mp3 ▲문학평론가/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 [[2014.04.01] 국민TV ‘개국 1주년 특집’ 동학에서 언론혁명의 길을 묻다 ※ 대담자: 이이화 (역사학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73169 ☞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01ma1.mp3
[04.02] 라디오백년전쟁: 만주의 친일무장집단 보민회 그리고 최정규
[[2014.04.02] 박한용의 라디오 백년전쟁: 만주의 친일무장집단 보민회 그리고 최정규 <!– –> [국민TV라디오] 박한용의 라디오 백년전쟁 [ 수 오후 15:00 본방송]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73168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02baeg.mp3
[인터뷰]역사소설『정도전』작가 임종일, 대화 한마디도 사료에 근거
대화 한마디도 사료에 근거, 역사소설 『정도전』의 작가 임종일 드라마 정도전의 인기가 대단하다. 3월 16일 방송된 정도전 22회는 전국 가구 시청률 15.6%를 기록하며 비슷한 시간대의 최강 TV프로그램 개그콘서트를 0.9% 앞섰다. 이러한 인기에 출판계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임종일 회원이 쓴 『정도전』(전 3권)을 비롯한 여러 종의 소설과 학술서 등이 2014년에 나온 책만 10여 권에 이를 정도다. 정도전이 이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500년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정도전! 그가 피를 토하듯 외쳤던 ‘민본’과 ‘혁명’이 600년을 거슬러 2014년 대한민국에 큰 울림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로는 뭔가 부족하다. 진짜 정도전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무엇을 접해야 할까? 집필에만 10년 넘게 걸린 최초의 정도전에 관한 역사소설 『정도전』의 작가로, 이번에 개정판을 낸 『정도전』(인문서원 펴냄)의 임종일 작가를 만났다. – 역사소설 『정도전』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개인적으로는 1990년의 ‘3당합당’이었어요. 민주화와 개혁을 열망하던 많은 이들에게 절망 그 자체였거든요. 당시 백과사전을 만드는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맡은 집필 꼭지가 정도전이었어요. 일본과 중국의 자료에서 정도전을 보고서 정도전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또 그가 우리 역사에 진짜 혁명가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소설로 써야겠다’ 결심했죠. 5권의 소설로 내는 데는 10년이 걸리고 말았어요(전 3권인 개정판과 달리 초판은 전 5권이었다). – 작가님의『정도전』이 가진 차별성은? 지금 나온 정도전 관련 소설들은 모두 제 작품이 나온 이후에
악질 친일경찰, 광복군 장군의 뺨을 때리다
[임기상의 역사산책⑧]해방 후 친일파 득세…의열단장 끝내 ‘평양 행’ ▣해방된 조국에서 수모를 당한 의열단 단장 1947년 7월 17일 남산공원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사진=시대의 창 제공) 중국에서 27년간 무장투쟁을 벌인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은 해방 후 석달이 지난 1945년 12월 1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에서 그의 앞길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은 김원봉은 임정을 탈퇴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주력했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중간파를 이끌고 좌익계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몰려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돼 친일경찰들한테 폭행을 당했다. 이어 공공연한 협박은 물론 테러 위협까지 받자 중국에서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김원봉은 남북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 마지막 회담인 평양의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북한을 선택한 건 친일경찰 노덕술의 폭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경찰서에 붙잡혀가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고 모욕을 당했으니….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은
조선인이 조선인 잡는 ‘간도특설대’ 아십니까?
[임기상의 역사산책⑨]죄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실제는 국군 수뇌부 간도특설대가 창립된 초기의 지휘부. (사진=서해문집 제공) ◈ 혼돈의 만주벌판…일본군, 조선청년 모아 독립군 토벌에 나서다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이 준 무기를 들고 조선 독립군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소설 같은 장면이 1930~1940년대에 만주벌판에서 실제 펼쳐졌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 침략 때문에 바빴고, 만주인을 주축으로 구성된 만주국 괴뢰군은 전투의지도 없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이에 따라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파인 간도성 성장 이범익 등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1938년 12월 14일 만주국 기병대가 쓰던 밍웨거우의 병영에서 간도특설대 1기 지원병 입대식이 열렸다. 간도특설대 1기 지원병 228명의 입소식을 알리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38년 12월 4일자 보도. (사진=서해문집 제공) 이때부터 일본군은 1945년 8월 15일 패망 때까지 7기에 걸쳐 매년 약 690명을 선발했다. 하사관을 포함한 사병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사람이 섞여 있었다. 이들의 토벌대상은 연변 일대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중 연합 독립군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동북항일연군 등 다양한 항일조직이 군대와 관헌의 추적을 피하면서 집단주거 마을시설과 격리된 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간도특설대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4년간 전투를 벌였다.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 청년들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친일 조선인 사이에 총질이 벌어진
한국외대 설립자 동상 건립 놓고 학내 ‘반발’
한국외국어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학교 설립자 동원(東園) 김흥배(1914~1987) 박사의 동상을 학내에 세우기로 하자 일부 동문과 학생들이 그의 친일 행적을 지적하며 반발하고 있다. 30일 외대에 따르면 이 학교 총동문회는 최근 동문들에게 다음 달 18일 개교 60주년 기념행사 초청장을 보내며 행사 중 하나로 ‘설립자 동상 제막식’을 소개했다. 김 박사는 해방 후 ㈜한국화재해상보험, ㈜동일방직공업, ㈜한국신탁 등은 물론 1954년 한국외대를 설립해 근대적 기업 경제와 교육 기반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애국외대 청년동문회’는 김 박사가 1938년 서울 마포구에 군납 물품을 만드는 노다(野田) 피복공장을 세워 광복 때까지 사장을 맡았고, 태평양전쟁 기간엔 지원 단체인 경성부총력연맹 이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문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2008년 친일인명사전 제작 당시 수록 예정자에 이름을 올렸으나,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최종 목록에서는 빠졌다. 청년동문회 관계자는 “설립자라는 이유로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정의와 진리의 전당인 대학에서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 22∼23일 전북 남원에서 열린 동문 워크숍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으며, 조만간 성명을 내고 학교 측에 면담을 요청할 계획이다. 한국외대 총학생회 업무를 수행하는 비상대책위원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무리 공적이 많다고 해도 친일 행적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비대위는 각 단과대 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 등으로 구성된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열어 대응 방법을 논의하기로 했다. 학교 측은 “동상 설립은 학교 법인인
고양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권리회복 캠페인 전개
▲고양시 제공 [나눔신문 김혜지 기자] 고양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고양시와 함께하는 위안부 피해자 권리회복 서명’ 캠페인을 전개한다. 고양시는 2일부터 ‘고양의 봄, 꽃 그리고 소녀’라는 주제로 서명 애플리케이션을 시 페이스북과 홈페이지를 통해 게시한다고 밝혔다. 시는 1억 명 서명을 목표로 이번 캠페인을 진행, 참여자들의 서명은 UN에 전달할 예정이다. 또한 영어, 중국어, 일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 아랍어 총 7개 다국어로 번역해 전 세계인들에게 서명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일본의 만행을 알릴 예정이다. 최성 고양시장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SNS를 통해 반인륜, 반문명, 반역사적인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것”이라며 “고양시가 제2의 3.1운동을 전개하겠다”며 서명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고양시와 함께하는 위안부 피해자 권리회복 서명 캠페인’은 고양시청 페이스북과 고양시청 홈페이지에서 동참할 수 있다. 페이스북: www.facebook.com/goyangcity/app_1401771180089477 홈페이지: http://her.fbapp.me/Museum/WebPage ※나눔뉴스 <2014-04-02> 기사원문: ☞ 고양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권리회복 캠페인 전개
만화로 보는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전시회에 걸린 탁영호의 만화 ‘꽃반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매 주 수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는 수요 집회가 1천회를 맞은 날, 그 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이 책은 소녀상의 이야기를 아이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만화를 통해 풀어내며,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꽃다운 소녀들의 아픔과 슬픔을 그리고 있다. 만화 ‘꽃반지’의 원화는 민족미술협의회에 주최했던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의 소녀들’과 지난 1월 30일부터 2월2일까지 프랑스 앙굴렘에서 열린 ‘2014알굴렘 국제 만화축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전시회에 출품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작품이다. 만화는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둘레에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해가 저물고 시위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나자 소녀상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러 뛰어간다. 소녀를 맞이한 이는 주름이 짙은 할머니. 웃으며 소녀를 맞이한 할머니는 순간 영정 사진으로 변한다. 장면이 바뀌며 한 남성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그는 연고자가 없는 할머니의 사후처리 중인 구청 직원이다. 할머니의 몇 가지 되지 않는 유품 속에 구리로 만든 꽃반지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장면은 구리 반지 속 꽃 문양 속으로 빨려들어 반지에 얽힌 슬픈 사연으로 이어진다. 비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원화의 색감과 질감은 두 소녀가 겪은 불안과 괴로움의 감성을 잘 담아내 감동을 더한다. 책은 만화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