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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선언이 이승만 작품? 사료에도 없는 얘기”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5주년을 기념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단국대학교, 광복회, 독립기념관의 공동주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카이로선언’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 토론하고 있는 발표자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카이로선언’ 학술회의에서 발표자들과 토론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단국대, 독립기념관과 함께 이번 학술회의를 주최한 광복회의 박유철 회장은 축사를 통해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선언한 국제회의로서 그 의미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컸다. 그러나 이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그 결과, 지난해 모 언론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검증되지도 않은 사실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온갖 추측에 의한 가설이 난무하여, 자칫 카이로선언의 역사적인 가치마저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고 있다”며 이번 학술회의를 열게 된 구체적인 계기를 설명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의 ‘카이로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를 시작으로, 이재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안 반대운동’, 이상철 일본 류코쿠대 사회학부 교수의 ‘장제스 일기로 본 카이로 회의’, 조덕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연구원의 ‘카이로회담의 교섭 및 진행에 관한 연구’,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카이로선언과 연합국의 대한정책’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김구의 공인가, 이승만의 공인가 카이로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3년 11월 27일에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국의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채택한 선언으로, 종전 후 일본 문제에 대한 연합국 측의 처리방안을 합의한 것이었다. 특히 이 선언에서는 ‘한국 인민의
제암리교회 일제 만행 사건 (1919. 4. 15)
과거를 통해 오늘의 지혜를 배우는 오늘을 생각하며, 오늘은 4월 15일입니다. 1959년 월탄 박종화가 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비문’에 적힌 글입니다. ‘마침내 음력 3월 16일 오후 1시경 일본경찰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해 청년 21명과 여인 2명, 도합 23명을 무기로 위협하고는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렁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경기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1919년 4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두렁바위 마을 또는 제암리(堤巖里)로 불리는 곳. 이 마을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900년 전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서였다. 그 후 아펜젤러에게 전도를 받은 교인들이 증가하면서 1905년 정식으로 교회당이 세워졌습니다. 그곳이 바로 비극의 현장 제암리교횝니다. 3·1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던 1919년 3월 말. 제암리 교회 청년들은 천도교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습니다. 밤마다 일제 경찰 몰래 봉화의 불길을 올렸고 3월 30일과 4월 5일 옆 마을 발안의 장날을 맞아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열흘 뒤인 4월 15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가 30명의 헌병을 이끌고 제암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발안 장날의 가혹한 진압을 사과하겠다”며 15세 이상 되는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주민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 헌병들은 순식간에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2014.04.16] 라디오백년전쟁: 4.19 혁명과 한국민주주의
라디오백년전쟁: [04.16] 4.19 혁명과 한국민주주의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84226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17baeg.mp3
‘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1] 한국전쟁 / 친일파 / 학살 / 해방·분단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4월혁명, 세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할 이유 없었다? 모르는 소리“ [4월혁명, 네 번째 마당] 민주당 간부는 왜 깡패에게 맞아 죽어야 했나 프레시안 : 4월혁명의 원인을 3.15 부정 선거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일각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몰랐다는 강변과 맞닿은 흐름으로 보인다. 이는 4월혁명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에 더해, 중요한 여러 현상(예컨대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한 것 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3.15 부정 선거와 ‘피의 화요일’ 4.19 시위, ‘승리의 화요일’ 4.26 시위 같은 각종 시위에는 이승만 정권의 전반적인 성격이 집약돼 있다. 단순한 부정
[이상수의 고전중독] 왜 아직도 백년전쟁중인가
당나라 시인 서응(徐凝)은 이백의 호방한 시풍을 흉내 낸 <여산폭포>란 시의 마지막에서 “한줄기 폭포가 푸른 산빛을 갈라 깨뜨리네”(一條界破靑山色)라고 썼다. 송나라 시인 소식은 이 시가 저속하고 비루한 ‘나쁜 시’(惡詩)라며 장난삼아 절구를 한 수 지었다. “폭포 날아 떨어지며 흩뿌리는 물거품은 수없이 많건만/ 서응의 나쁜 시를 씻어내지 않는구나.”(飛流沫知多少/ 不與徐凝洗惡詩) 서응은 이 한 구절 때문에 ‘나쁜 시’의 대명사가 됐다. 그가 이런 성토를 당한 건, 세상을 향한 어떤 발언을 시에 담을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새로운 표현’(新意)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는 어떻게 다른가. 조선 중기 문인 어세겸은 ‘창에 쓰다’(書窓)란 시에서 말한다. “우연히 시상이 떠올라 창문에 써 붙이니/ 종이가 찢어지면 시 또한 찢어지리/ 좋은 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전할 것이요/ 나쁜 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침 뱉으리/ 사람들이 전한다면 종이가 찢어진들 무엇이 상하겠으며/ 사람들이 침 뱉는 시는 찢어져도 좋으리/ …천고의 뒤에 남은 시를 통해 나를 알리라.”(得句偶書窓/ 紙破詩亦破/ 好詩人必傳/ 惡詩人必唾/ 人傳破何傷/ 人唾破亦可/ …千載詩知我) 시흥을 깨는 ‘나쁜 시’를 씻어내는 일도 이렇게 어렵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일제 치하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시를 씀으로써 군국주의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앞장선 서정주 같은 이의 시는 어떻게 씻어내야 할까. 아직도 “미당의 친일행적은 아쉽지만 그가 쓴 시는 참 좋다”는 식의 어법이 적지 않다. 삶과 분리된 글재주만으로 문학을 논하는 일은 문학을 한낱
‘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1] 한국전쟁 / 친일파 / 학살 / 해방·분단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4월혁명, 세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할 이유 없었다? 모르는 소리“ [4월혁명, 네 번째 마당] 민주당 간부는 왜 깡패에게 맞아 죽어야 했나 프레시안 : 4월혁명의 원인을 3.15 부정 선거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일각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몰랐다는 강변과 맞닿은 흐름으로 보인다. 이는 4월혁명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에 더해, 중요한 여러 현상(예컨대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한 것 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3.15 부정 선거와 ‘피의 화요일’ 4.19 시위, ‘승리의 화요일’ 4.26 시위 같은 각종 시위에는 이승만 정권의 전반적인 성격이 집약돼 있다. 단순한 부정 선거에
왜 아직도 백년전쟁중인가
당나라 시인 서응(徐凝)은 이백의 호방한 시풍을 흉내 낸 <여산폭포>란 시의 마지막에서 “한줄기 폭포가 푸른 산빛을 갈라 깨뜨리네”(一條界破靑山色)라고 썼다. 송나라 시인 소식은 이 시가 저속하고 비루한 ‘나쁜 시’(惡詩)라며 장난삼아 절구를 한 수 지었다. “폭포 날아 떨어지며 흩뿌리는 물거품은 수없이 많건만/ 서응의 나쁜 시를 씻어내지 않는구나.”(飛流沫知多少/ 不與徐凝洗惡詩) 서응은 이 한 구절 때문에 ‘나쁜 시’의 대명사가 됐다. 그가 이런 성토를 당한 건, 세상을 향한 어떤 발언을 시에 담을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새로운 표현’(新意)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는 어떻게 다른가. 조선 중기 문인 어세겸은 ‘창에 쓰다’(書窓)란 시에서 말한다. “우연히 시상이 떠올라 창문에 써 붙이니/ 종이가 찢어지면 시 또한 찢어지리/ 좋은 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전할 것이요/ 나쁜 시는 사람들이 반드시 침 뱉으리/ 사람들이 전한다면 종이가 찢어진들 무엇이 상하겠으며/ 사람들이 침 뱉는 시는 찢어져도 좋으리/ …천고의 뒤에 남은 시를 통해 나를 알리라.”(得句偶書窓/ 紙破詩亦破/ 好詩人必傳/ 惡詩人必唾/ 人傳破何傷/ 人唾破亦可/ …千載詩知我) 시흥을 깨는 ‘나쁜 시’를 씻어내는 일도 이렇게 어렵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일제 치하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시를 씀으로써 군국주의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앞장선 서정주 같은 이의 시는 어떻게 씻어내야 할까. 아직도 “미당의 친일행적은 아쉽지만 그가 쓴 시는 참 좋다”는 식의 어법이 적지 않다. 삶과 분리된 글재주만으로 문학을 논하는 일은 문학을 한낱
[서평] 타이항산 아리랑
목차 감사의 글 프롤로그1부 아시아에 울려 퍼지는 독립의 함성일제식민시기 동아시아와 베이징, 동북지역 항일투쟁이화림 여사와 항일운동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와 대장정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독립투쟁의 여정2부 화중지역 항일유적지 탐사기자싱상하이 임시정부홍커우공원톈닝사난징대학살기념관3부 화북지역 항일유적지 탐사기첫째날: 후지좡에서 황페이핑촌둘째날: 스즈링에서 좡즈링셋째날: 상우촌에서 중위안촌넷째날: 스먼촌에서 진지루위열사능원부록 ※<출판사리뷰> 2005년E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는 한중항일역사탐방단이 탄생하게 된 단초를 마련하고 있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도올은 타이항산에 잠들어 있는 윤세주 열사의 영령비를 부여잡고 흐느낀다. 10부작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2010년 베이징대학교 한국대학원생 학생회를 주축으로 중국런민대, 칭화대, 중앙민족대학 등 베이징 소재 대학원생들이 역사탐방에 나서게 된다. 좌우의 이념이나 색깔을 걷어내고, 오롯이 한국인의 얼과 독립의 열망을 간직하고자 시작된 역사탐방은 벌써12여 회를 넘겼으며, 참여 인원도 수백 명에 달할 정도로 베이징 대학원생 사이에서 명물이 된 행사다.해방을 맞이한 지70년이 흘렀으나 광복의 의미가 이념에 의해 퇴색되고,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본질이 훼손되는 것만으로 이 시대의 불행은 시작된 셈이다. 아베 정권이 집권한 이후 일본의 우경화 정책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입장에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던진다. 그러한 의미에서2013년 화북지방의 역사탐방 때에는 베이징대학교 박사과정 연구원과 중국매스미디어대학(中國傳媒大學) 박사과정 연구원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 책의 엮은이가 한중항일역사탐방단이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전과 달리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에 의해 많은 성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베이징에 있는 대학원생은 물론 이 땅의
제암리 학살 95년… 아베는 이 만행을 알까
어느 날 당신이 나가는 교회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모이라고 한다면 “혹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19년 4월 15일 오늘, 지금으로부터 95년 전 제암리에서는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 순진하고 순박한 주민들은 일본군 중위가 설마 교회문을 걸어 닫고 총질을 해댈 줄 몰랐다. 다시 찾은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교회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늘도 희뿌연 하게 흐리고 초목들도 아직 깊은 겨울잠에 빠져있었다. 제암리 교회당에 총성이 울리고 양민들이 처참히 학살된 이후 세계의 양심은 이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저팬 애드버타이저> 기자 앨버트 피터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다소 길더라도 앨버트 피터 기자가 양심으로 쓴 글을 소개하니 인내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이 글은 제암리 사건 구술서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에서 인용했다. ▲ 제암리 학살현장 양민학살도 모자라 불을 싸지른 일본군의 만행으로 폐허가된 마을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제암리 학살의 비극(제암리3.1동순국기념관) 학살 현장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일본군이 제암리교회에 총부리를 겨눈 것은 유의해야 할 일이다. 조선 사람들이 전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는 전투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거칠고 흥분한 몇몇 군인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일본군의 정규 장교의 명령에 따라 조직적인 군 파견대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때에 진압할 저항이나 폭동도 없었다. 조선에 사법기관이 엄연히 존재하고 법정이 정기적으로 열리는데도 그것을 법률위반 행위로 고발할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