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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검찰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백년전쟁’에 대한 공안몰이를 즉각 중단하라
<성명> 검찰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백년전쟁’에 대한 공안몰이를 즉각 중단하라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서울 중앙지검은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가 지난 해 5월 2일 ‘백년전쟁’ 김지영 감독 최진아 피디와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을 상대로 제기한 사자명예훼손 소송을 형사1부에서 공안1부(부장검사 이현철)로 변경 재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지영 감독의 이적표현물 소지 및 배포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보도의 배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5월 9일 기자회견에서 배포한 자료집에서도 이미 상세히 밝혔듯이 ‘백년전쟁’은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만들어진 역사 다큐멘터리다. 또 김지영 감독이 그런 의심을 받아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만약 허위사실이나 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다면 정당한 절차에 따라 법의 판단을 구해보면 될 일이다. 그런데 검찰은 무려 1년간의 조사에도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느닷없이 공안부로 이관해 재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얼굴 없는 관계자의 이름으로 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형사부가 장기간에 걸친 조사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것은 전문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초 이승만 측의 소송 제기 자체가 무리였다는 반증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리기는커녕 다시 공안부로 재배당하는 납득할 수 없는 악수를 두고 있다. 사자명예훼손소송을 공안사건화하려는 검찰의 태도는 극우세력의 청탁수사인지 고위층의 하명수사인지 합리적 의심을 가지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설립 이래 일관되게 민족사정립과 역사정의실현에만 전념해왔다.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을
[기자회견]역사 다큐 , 국가보안법 웬말이냐!
역사 다큐 <백년전쟁>, 국가보안법 웬말이냐! 문화일보 기사(2014년 4월 10일)에 의하면 연구소가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사자(死者)명예훼손 고소 사건을 수사해 온 서울중앙지검은 사건을 형사부에서 공안부로 이첩하고 제작자에 대해 조사과정에서 이적표현물 배포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료와 증거를 바탕으로 제작된 역사 다큐멘터리에 대한 검찰의 이 같은 비상식적인 행태를 규탄하기 위해 연구소는 <아래>와 같이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아래> 역사 다큐 <백년전쟁>, 국가보안법 웬말이냐!민족문제연구소와 <백년전쟁>에 대한 공안 탄압 기도를 중단하라! ○ 때 : 2014년 4월 14일(월) 오전 11:00○ 곳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동문 삼거리 ○ 오시는 길 : 교대역 10번 출구 → 서울중앙지검과 서울고등법원 사이 지하철 이용시 지하철 2호선 서초역 하차, 7번 출구로 나오셔서 약 300미터 거리 지하철 2,3호선 교대역 하차, 10번 출구로 나오셔서 600미터 거리에 있는 15층 높이의 고동색 건물 시내버스, 마을버스 이용시 시내버스 : 5413, 740, 405, 400 마을버스 : 서초13, 서초21
검찰, 다큐 ‘백년전쟁’고소 사건 공안부에 재배당
검찰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자인 김지영 감독,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3명에 대한 고소 사건을 공안부에 재배당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지난해 5월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배당했으나, 동영상 내용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중앙지검 공안 1부(부장검사 이현철)에 재배당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다큐멘터리 내용 중 이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묘사하는 내용을 민감한 부분이라고 판단, 공안 검사들을 투입해 수사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1부는 사건을 재배당받고, 증거자료 등을 바탕으로 최근 김 감독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했다. 검찰은 임 소장 등 다른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는 대로 사법 처리 수위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민주변호사모임 박주민 변호사는 이 사건이 공안부에 재배당된 데 대해 “명예훼손 대상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하는 사건에 불과한데, 공안부에 배당한 건 검찰이 영화 내용에 대해 국가의 질서나 안정을 침해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라고 지적했다. 다큐 ‘백년전쟁’은 지난 2012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 측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과 비위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인수 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과 이 전 대통령 유족 측은 이 소장 등 3명을 지난해 5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고소된 세명은 민주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해 검찰 수사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중의소리<2014-04-10> 기사원문: ☞검찰, 다큐 ‘백년전쟁’고소 사건 공안부에 재배당 ※관련기사 뉴시스: [종합]檢, 다큐 ‘백년전쟁’ 고소사건
식민사관 추종자, 왜 이리 많은가 했더니…
작년 한 해 대한민국은 ‘역사전쟁’으로 뜨거웠다. 전쟁의 발단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였다. 문제의 교과서 저자들은 일제 시대를 긍정적으로 기술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를 역동적인 근대화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식민사관과 같은 말들이 오가면서 격렬한 역사 논쟁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속국이나 식민지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은 무려 7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제 식민사관의 담론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 어느 분야에서보다 강력한 한민족 민족주의에 휩싸여 있는 역사학계에서 왜 이런 일이 되풀되는 것일까. 역사학자 이희진은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에서, 우리나라 역사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대학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에게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지금까지 역사학의 주류를 꽉 틀어쥐고 있는 세력이 되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저자는 식민사학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 추종자들이 어떠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를 밝힌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역사가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따진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한국 고대사학계에 남아 있는 식민사학의 영향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한다. 식민사관, 왜 문제일까? ▲ 책 표지. ⓒ 책미래 관련사진보기 식민사학은 왜 문제인가. 식민사학의 뿌리는 황국사관이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이전 일본의 역사서술 목적을 천황지배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으로
[2014.04.09]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 4.19혁명
[2014.04.09] 박한용의 라디오 백년전쟁: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4.19혁명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378161 ☞[다운]: http://file.ssenhosting.com/data1/guitarkirk/140409baeg.mp3
서사 치유 연극 ‘상처꽃-울릉도1974’
[04.03~05.31] 서사치유연극 “상처꽃 – 울릉동 1974”
“대통령은 부정 선거 할 이유 없었다? 모르는 소리”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1] 한국전쟁 / 친일파 / 학살 / 해방·분단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프레시안 : 3.15 부정 선거와 관련해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부통령 문제다. ‘이승만은 문제가 없었고 이기붕 쪽이 문제였다’는 설명은 맞지 않지만,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이라는 점이 이승만 정부로선 몹시 거슬리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12월 담화 때도 그랬고, 1960년 2월 3일 정부에서 (3월 15일 선거를 치른다고) 공고한 직후(2월 13일)에도 러닝메이트에 관한 담화를 했다. 러닝메이트 이기붕이 당선되지 않으면 ‘나는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그것에 응종(應從)치 않겠다’, 따르지 않겠다는 거였다. 아니,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의) 최다 득표자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도록 헌법과 선거법에 해놓지 않았나. 이건 헌법과 선거법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또 국민에
“아베 야스쿠니 참배는 ‘정교분리’ 원칙 위배…위헌소송”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위헌 소송을 준비중인 활동가 즈시 미노루가 7일 야스쿠니신사의 전쟁박물관인 유슈칸에 전시된 2차대전 시기 일본군의 제로센 전투기 앞에 서 있다. 즈시 미노루 ‘야스쿠니 반대’ 활동가 인터뷰 “죽어서 야스쿠니서 만나자 강요한‘국가 신도’ 폐해 반성하는 뜻에서 헌법 20조 국가 ‘종교적 활동’ 금지”진보인사들과 힘 합쳐 소송 내기로 “여길 보세요. 다른 나라에 대해선 모두 ‘독립’이라고 표기를 했지요. 그러나 한국과 북한은 어떻습니까?” 7일 야스쿠니신사의 전쟁 박물관인 유수칸에서 전시물들을 둘러보던 ‘아베 야스쿠니참배 위헌소송’ 도쿄 사무국의 즈시 미노루(62·사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질문을 던졌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을 표시해둔 지도를 보니 다른 나라들에 대해선 모두 ‘독립’이라 표기했지만, 한국과 북한에는 ‘성립’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대만 부분엔 아예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즈시는 “왜 다른 나라들은 독립이라고 표시하면서 한국과 북한에 대해선 성립이라고 했을까. 결국 일본의 조선 합병은 정당한 것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일본의 진보적인 시민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40년 넘게 야스쿠니 반대 운동을 벌여온 즈시는 “21일 시작되는 야스쿠니신사의 춘계예대제(봄 제삿날)에 맞춰 도쿄 지방재판소에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의 위헌 여부를 묻는 소송을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소송의 호소인(한국의 발기인)들은 3월 말 현재 280명에 달하는 소송 원고단도 모집했다. 이와 별도로 오사카에서도 500명의
[신동립 잡기노트]윤치호 작사 애국가…정부, 모르는척 40년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20> 국사편찬위원회는 알고 있었다. ‘애국가는 윤치호에 의해 1907년에 작사됐음이 유력하다’고 1972년 일찌감치 공언했다. 그해 4월10일 문교부는 “국민교육에 필요하다”며 대외비 공문 ‘애국가 연혁 조사보고’를 국사편찬위에 요구했다. 그러자 국편위 기획관리부 자료관리실은 작사자와 연대 그리고 ‘가사의 변동상황과 관계인’을 조사, 문교부에 회신했다. 1974년 6월7일에는 문화공보부가 질의했다. 국편위 기획관리부 서무과는 ‘애국가에 대한 연혁’을 문공부에 회신했다. 애국가 작사자 논란, 1907년 이전 존재한 다양한 종류의 애국가와 가사, 애국가 작사의 시대적 배경 등을 담은 문건이다. 국편위가 문교부와 문공부에 보낸 이들 답변에는 공통된 내용이 있다. 먼저, 작사자다. “현재 애국가의 작사자로 논의되고 있는 인물은 윤치호·안창호·최병헌·김인식·민영환 등 5인이고 또한 단독작사설과 합작설(최병헌·윤치호) 및 개작설(민영환·김인식·안창호)이 있음. 이 중 윤치호설이 유력하나 현재로서는 미상임(72년), ‘윤치호설이 유력하나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려움(74년)” 다음, 작사 시기다. “융희 원년(1907)에 작사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도 애국가라는 제목으로 다른 내용의 가사를 화창한 사례가 있음.” 1896년 5월9일자 독립신문에 발표된 ‘학부주사 이필균 애국가’와 ‘묘동 이용우 애국가’ 등 10편과 다른 자료에 수록된 애국가 7편을 포함, 총 17편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와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인용한 애국가가 특히 주목된다.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1907년 개성에 설립한 실업학교다. 윤치호는 그 무렵 현재와 같은 애국가를 작사했다. 국편위는 “서구열강 및 일본제국주의의 침투에 대한 민족적인 시각에 따른 애국심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작사되어 널리 화창되었음”이라며 배경까지 보고했다. 또 ‘애국가의 가사(변동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