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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해, 못 찾는 이유 있다
body,table,td,input,select,textarea{font-family : verdana,굴림;font-size :9pt;line-height : 140%;}img{border : 0;}A:link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visited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hover { text-decoration:none; color:#3E8FFC;}P{margin-top:2px;margin-bottom:2px;}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서른두 살의 젋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노래하며 순국한 지 꼭 104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에서 펴낸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안 의사의 순국 104주기에 맞춰 출간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저자 안태근·김월배, 스토리하우스)는 아직까지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는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문제를 집중 조명한 책이다. 그간 우리 정부뿐만 아니라 북한 정부가 시도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체적인 지역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를 맞아 펴낸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이번에 책을 펴낸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고 있는 안태근 교수(한국외대)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20년 동안의 추적 끝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지난 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백 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영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는데((그는 작년 정년퇴직 전까지 EBS 한국교육방송공사에서 PD 생활을 하였다-기자 주), 그 작품의 가장 큰 의의는 방송사상 최초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매장되어있을 것으로
“동학, 드라마·영화화…다양한 예술장르로 대중화해야”
‘왜 이들은 목숨을 걸고 봉기했나’ 화두 삼아 / 서울 남산에 ‘전봉준 장군 동상’ 세우고 싶어 ▲ 역사학자 이이화 씨가 ‘전북일보 리더스아카데미 강좌’에 연사로 초대돼 동학혁명 관련 특강을 하고 있는 모습. 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그 자체가 역동적인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혁명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별 울림을 주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최대 민중항쟁이었던 그 역사가 전면에 부상한 것은 고작 100주년에 즈음해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의 베일을 벗기려는 노력이 있었고,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타고 학계의 재조명 작업이 내부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직도 많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있지만, 오늘의 모습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앞에 서기까지 연구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역사찾기’를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본 기획에서 혁명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묻혀있던 자료를 찾아내고, 현장을 누빈 연구자와 활동가를 만난다. 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역사학자 이이화(77)는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전봉준 장군처럼 키가 작고, 목소리가 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기질과 비슷해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찾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활동을 한 것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30대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활동을 바탕으로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설로‘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책과 현장을 넘나들었다.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후 관련 공식 직함은 없지만, 2주갑은 그를 현장으로 다시 불러냈다.
일본인 교사 “안중근, 히로부미 저격은 옳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옳았습니다.” 일본 사회교과서부교재 편집위원 스즈키 히토시(60)씨는 27일 전북 전주시 근영중학교 교단에서 한국 학생에게 자신의 역사관을 소신 있게 전했다. 스즈키씨가 한국을 찾아 자신의 소신을 밝혀 온 지 올해로 10년째. 스즈키씨는 일본인으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관을 지키며 한·일 양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한·일 양국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그의 행동은 큰 의미가 있다. <img width="551" height="423" style="width: 543px; height: 283px;" alt=" ⓒ연합뉴스 일본 사회교과서부교재 편집위원 스즈키 히토시 씨” src=”http://www.sisainlive.com/news/photo/201403/19806_38881_3426.jpg” border=”1″> ⓒ연합뉴스 일본 사회교과서부교재 편집위원 스즈키 히토시 씨 이날 열린 ‘제10차 한일역사 공동수업’에서도 스즈키씨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핵심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정당한 행동을 한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또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중국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소개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의외겠지만 일본에도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추모하는 일본인이 많다”면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제국주의를 저격한 평화론자다”고 소신을 밝혔다. 스즈키씨가 공동수업에서 안중근 의사 외에도 천문학자 나일성과 일본인 작곡가 사카에씨의 우정을 소개하면서 한·일 양국 간의 민간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요코하마중학교에 재직할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째 공을 들인 공동수업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재조명하고 역사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한일 우정 등 한일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안중근 의사 유묵 경매서 유찰… “국가서 매입해 소장해야” 주장도
안중근 의사가 직접 쓴 글씨가 경매에 나왔으나 결국 주인을 찾지 못했다.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은 지난 27일(목) 경매에 출품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유찰됐다고 밝혔다. 한자로 ‘敬天(경천)’이라고 적혀있는 이 유묵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여순감옥에서 쓴 것이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 국가와 국민이 스스로의 본분에 맞게 도리를 지키고 양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안중근 의사는 유묵은 7억원을 시작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서울옥션 측은 약 7억 5천만원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경매 응찰자가 나오지 않으면서 결국 유찰로 마감됐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유찰됐다는 소식에 네티즌들도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작품이라는 반응과 함께 “정부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매입해 박물관에서 전시를 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의사의 유묵 20여 점은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를 평가를 받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등록돼 있다. 1972년에 ‘극락'(보물 569-19호), ‘국가안위노심초사'(보물 569-22호) 등이 보물로 지정됐으며, 2000년 이후에는 ‘위국헌신군인본분'(보물 569-23호),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보물 569-25호) 등이 추가 지정됐다. 현재 안중근 의사의 유묵 중 다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관리 중이다. 한편 이날 경매에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자조, 자립, 자위’는 5000만원에, 박 전 대통령이 당시 국무총리에게 보냈던 편지는 650만원에 낙찰됐다. ▲ 안중근 의사의 유묵 ‘敬天(경천)’ (사진=서울옥션) ※유니온프레스<2014-03-28> 기사원문: ☞ 안중근 의사 유묵 경매서 유찰… “국가서 매입해 소장해야” 주장도
‘친일 미화’ 이배용 원장,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
통일부 통일교육위원회 중앙의장에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위촉됐다. 이 원장은 자신의 저서에 명성황후를 ‘민비’로 기술하는가 하면, 이화여대 초대총장을 지낸 김활란의 행적을 미화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인사다. 통일부 통일교육원은 26일 제19기 통일교육위원 중앙의장에 이배용 원장을 위촉했다고 밝혔다. 교육원은 이번에 새로 위촉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반도 통일시대 준비를 위한 새로운 통일 담론을 형성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원장의 친일적인 역사관이 중앙의장에 위촉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 원장은 2005년 본인의 저서 <한국 역사 속의 여성들>에 명성황후를 민비로 표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민비가 명성황후를 비하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비춰볼 때 그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원장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인 김활란에 대해서는 친일 행적은 빼버린 채 “일제의 극심한 회유가 교차되는 가운데 끝까지 이화를 지키려는 그는 크나큰 시련과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고 묘사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활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2012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초대 관장 공모에서 이 원장이 부적격자로 판정됐던 전례도 있다. 문화부는 당시 관장 응모에 4명이 접수, 면접까지 거쳤지만 최종적인 합격자를 선정하지 못했다. 이 원장을 포함해 응모자를 모두 부적격자로 처리한 이유에 대해 문화부는 역사박물관 관장 자리는 균형 잡힌 역사관과 관리·소통능력 등을 종합 검토해야 하는데, 응시자 중에 제반 요건에 부합하는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원장의 이러한 역사관으로 인해 지난해 국감에서는
[03.26] 박한용의 생얼현대사 – 간도특설대 그리고 김동한, 이범익, 백선엽
[[2014.03.26] 박한용의 생얼현대사: 간도특설대 그리고 김동한, 이범익, 백선엽 <!– –> [국민TV라디오] 박한용의 생얼 현대사 [ 수 오후 15:30 본방송] ☞바로가기: http://www.podbbang.com/ch/6647?e=21367757
일본 강제 노역 피해자에게 “조센징은 돌아가라”
일제 강점기에 12~15세 한국인 소녀 1000여 명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던 군수기업 ‘후지코시(不二越)’의 정기 주주총회에서 한국인 ‘근로정신대’ 피해 유족에게 “조센징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비하 발언이 나왔다. ‘태평양 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 협의회’와 ‘제2차 후지코시 강제 연행·강제 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는 25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지코시 주주총회에서의 혐오 발언 규탄 및 여자 근로정신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 단체에 따르면, 지난 2월 19일 후지코시의 제131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한 일본인 주주가 ‘근로정신대’ 피해 유족인 김명배(83) 씨에게 “조센징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한국인 혐오 발언을 했다. 1944년 후지코시에 끌려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아내가 숨지자, 대신 손해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김 씨는 이날 주주총회에 참여해 “누구나 일을 했으면 보상(임금)을 줘야 한다. 후지코시가 한국인 강제 노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질문했다가 일본인 주주로부터 이 같은 발언을 들었다. 김 씨는 후지코시의 주주로 가입하고 주주총회에 참여했었다. 나카가와 미유키 ‘제2차 후지코시 강제 연행·강제 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연락회’ 사무국장은 “이번 차별 발언은 일본인 주주 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후지코시가 지난 10년간 재판에서 보여준 차별적인 생각이 발언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아베 정권이 한국과 중국을 멸시하고 왜곡하면서 일본 우익들의 세가 커졌다”며 “일본 우익들은 공공연하게 ‘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발언을 한다”고 비판했다. ▲ 일본 강제 노역 피해자들이 25일 주한
[칼럼]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언제까지 미룰텐가
body,table,td,input,select,textarea{font-family : verdana,굴림;font-size :9pt;line-height : 140%;}img{border : 0;}A:link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visited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hover { text-decoration:none; color:#3E8FFC;}P{margin-top:2px;margin-bottom:2px;}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어머니가 해준 흰 모시를 차려입은 그이의 낯빛은 약간 창백해 보였지만 충분히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듯했다. 교도소장은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남길 말은 없으며 다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일본 관리들이 동양의 평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 기도가 허락되자 그는 잠시 기도를 올렸다. 올가미가 목에 걸렸고 마침내 사형이 집행됐다. 15분 후 검시의사의 확인 아래 시신은 교도소측이 준비한 관에 입관, 교도소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조도선과 우덕순 유동하 등 함께 거사를 행한 3인의 동지들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허용됐다. 우덕순은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오후 1시 시신은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1910년 4월14일 스트레이츠 타임스> 3월26일,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지 104번째 기일을 맞는다. 그러나 임의 유해는 104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조국이 해방되면 유해를 조국의 강산에 묻어달라고 한 유언을 해방 70년을 맞는 오늘까지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정부가 유해발굴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명박정부 시절 중국정부의 협조 아래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작업을 29일간 벌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중국 뤼순 형무소의 소장 딸이 자신이
[단독]“누가 쐈나? 이토의 마지막 말” 안중근의거 상세묘사 1909년 싱가포르신문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가 다가오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저격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저격 속보를 전했고 11월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고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09년 11월18일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2014.03.25. <사진=싱가포르 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2014-03-25 안중근의사 회색양복 차림..다른 일본인 치명상 피해 조준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를 하루 앞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일부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10월26일 장춘에서 기차를 타고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당초 이토는 러시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