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주요기사

[알림] ‘시베리아 삭풍회’ 이재섭 회장 별세

2014년 3월 5일 504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끌려갔다 해방 후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억류됐던 피해자들의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의 이재섭 회장이 지난 3일 오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베리아 삭풍회’는 1990년 12월 결성되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전후피해보상을 위한 힘겨운 투쟁을 벌여오고 있는 단체이다. 고인은 故 이병주 회장에 이어 2011년부터 회장직을 맡아왔다. 고인은 시베리아 억류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여 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리는 한편, 고령임에도 피해자들의 권익을 되찾는 활동에 진력해 왔다. 경기도 시흥이 고향인 故 이재섭 회장(1925년생, 향년90세)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8월 1일 징병2기생으로 평양공병대에 강제징집당했다. 이후 만주국 관동군으로 전속되어 북만주 국경에 위치한 하이라루 20495공병부대에 배속되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945년 9월 15일부터 크라스노야르스크 제1수용소에서 3년 5개월동안 수용되었다. 강제징집된 조선인 출신임에도 부당하고 참혹한 포로생활을 겪은 고인은 1948년 12월 28일 드디어 나호트카항을 거쳐 흥남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통과하여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적성국인 소련에서 귀환했다는 사실과 북한을 통과하여 남하하였다는 이유로 또다시 인천수용소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시베리아 억류 귀환자들은 풀려난 뒤에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어 감시당하는 등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안고 살아왔다.                      ▲ 故 이재섭 회장의 빈소 모습 민족문제연구소는 2003년부터 ‘시베리아 삭풍회’와 인연을 맺고 피해보상운동을 지원해 왔다. 지난 2009년에는 시베리아 억류 귀환

[인터뷰] “일제 피해자 배상받게 법률지원에 온힘”

2014년 3월 3일 339

  제2회 변호사 공익대상 수상 이상갑·장완익·최봉태 변호사[이상갑] 소록도 강제수용 한센병력자 보상청구 노력[장완익] 日기업 대상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에 앞장[최봉태] 한일협정 문서공개 소송제기… 승소 이끌어 이상갑(47·사법연수원 28기) 변호사는 2003년 12월 일제강점기 시절 소록도에 강제수용된 한센병력자 124명을 도와 일본후생노동성에 보상청구를 했다가 기각되자 광주지역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법률지원단을 구성해 10여 차례 소록도를 방문,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진술서를 작성하고 관련 집회에 참석하는 등 일본 후생노동청에 보상청구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당시 16차례나 일본을 오갔지만, 일본은 표면적으로 응하기만 할 뿐 전혀 진전이 없었다”며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를 견디며 협상에 참석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2009년 10월에는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회원으로 가입해 광주 미쓰비시자동차 판매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으며 2010년에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가 있는 도쿄와 강제노동이 벌어진 나고야를 번갈아가며 16차례 열린 양측 간 협상에 15차례 참여했다. 제2회 변호사공익대상 수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봉태 변호사, 위철환 협회장, 이상갑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51·19기) 변호사는 2000년 미쓰비시 중공업과 2005년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대리해 1,2심에서 패소했지만,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과 2013년 파기환송심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또 2012년과 2013년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 등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등 강제동원 피해자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힘썼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등에 관한 특별법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한국은 왜 ‘쓰레기통’이라는 조롱을 당해야 했나

2014년 3월 3일 423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학살, 두 번째 마당] “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학살,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학살, 네 번째 마당] “애가 부모에게 수류탄 던졌다”? 무서운 이승만[학살, 다섯 번째 마당] 일본도로 국민 목 친 학살자가 이순신과 동급?[학살,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014년 3월 3일 808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민음 한국사>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잊고 있었던 의문점 몇 가지가 다시 떠오른다. 완전 무장한 식민 통치 세력에 맞서 어떻게 200만 명이 넘는 비무장, 비조직 대중이 목숨을 걸고 시위를 벌일 수 있었을까?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던 천도교(동학)와 기독교가 어떻게

“친일 행적이 걸려서…” 제천 반야월기념관 건립 재검토

2014년 3월 3일 423

제천=뉴시스 이성기 기자 = 충북 제천시가 2012년도부터 추진해 오는 8일 착공하려던 ‘반야월 기념관’ 건립 사업의 명칭과 사업 내용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뉴시스 3월2일 보도> 오는 8일 개최하려던 2주기 반야월 추모음악회와 기공식도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애초 이 사업은 제천 홍보에 효자 노릇을 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와 한국 가요사를 조명하기 위해 총 사업비 43억원을 들여 ‘한국가요사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가 도비 5억원을 포함한 총 사업비 10억원 규모로 축소하면서 ‘(가칭)반야월 선생 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해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사업 추진 과정에서 기념관 명칭으로 사용하려던 ‘반야월 선생 기념관’은 반야월 선생의 과거 친일 행적과 관련, 친일인사에 대한 기념관 건립과 명칭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비등해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제천시는 “연초에 최명현 제천시장이 봉양읍 시정설명회에서 이 사업과 관련한 구상을 밝힌 것처럼 박달재 정상에 한국 가요사의 요람을 만들겠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며 “반야월 개인의 음악사를 조명하는 것이 아닌 ‘울고 넘는 박달재’와 한국가요사를 조망하면서 아울러 박달재를 명소화할 기념관 건립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기념관 명칭과 관련해서는 “한국 가요사에서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가 갖는 비중과 박달재의 문화적 가치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명칭과 내용으로 변경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가수 겸 작사가인 반야월(본명 박창오)은 1917년 8월1일 경남 마산에서 출생했으며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노랫말을 많이 작사했다. ‘넋두리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건립 결의대회

2014년 3월 3일 367

[수원인터넷뉴스] 수원시는 1일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창립행사를 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비 건립 결의를 다졌다.  이날 열린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건립 결의대회에는 수요집회 등을 통해 줄기차게 일본정부의 공식사과 요구와 국내외에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해 온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를 비롯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 정진숙 수원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박은순 수원여성회 대표, 이성호 수원시민사회단체협의회 대표, 이완모 수원새마을단체협의회 회장, 이호헌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 이규선 수원YWCA 사무총장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취지문은 미래세대를 대표해 이민주 화홍중학교 학생이 낭독해 주목을 끌었다. 건립취지문에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인권과 명예회복 뿐만 아니라 인권을 보호하자는 평화 정신을 담고 있다”며 “일본군 위안부 존재와 그들의 아픔을 시민들과 후세들에게 진실하게 알리는 역사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는 이날 창립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앞으로 시민단체 등과 연계해 추모건립 재원마련을 위해 시민모금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수원시는 일본군 위안부 존재와 그들의 아픔을 시민과 후세에게 알리는 역사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 니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다. 염태영 시장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추모비 건립 부지를 무상제공하고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염 시장은 “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게 될 것”이라면서 “매년 기념식을 열고 사람들이 이

진주서 6·25전쟁때 학살 민간인 유해 35구 발굴

2014년 3월 3일 530

진주서 6·25전쟁때 학살 민간인 유해 발굴 (진주=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6·25전쟁 때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 유해를 찾으려고 경남 진주에서 진행한 민간차원의 첫 발굴작업에서 최소 3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3일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인근 야산의 발굴현장에서 연 설명회에서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손에 유해를 들고 발굴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진주=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6·25전쟁 때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 유해를 찾으려고 경남 진주에서 진행한 민간차원의 첫 발굴작업에서 최소 3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으로 이뤄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3일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인근 야산의 발굴현장에서 설명회를 열고 유해 발굴작업 결과를 설명했다. 지난달 24일부터 발굴조사를 벌여온 공동조사단은 이곳은 습도와 산성도가 높아 유해 보존상태가 매우 나쁜 상태의 유해 35구가 매장돼 있었다고 밝혔다. 머리뼈 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지 뼈만 남아 있는 상태를 고려하면 최소 35구의 시신이 매장됐을 것으로 조사단은 추정했다. 6·25전쟁때 학살 민간인 유해 발굴(진주=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6·25전쟁 때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 유해를 찾으려고 경남 진주에서 진행한 민간차원의 첫 발굴작업에서 최소 3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3일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인근 야산의 발굴현장에서 연 설명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진주 민간인 희생자유족회 강병현 회장이 발굴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2014.3.3 << 지방기사 참고>> bong@yna.co.kr 또 완전한 사지

찬란한 ‘3·1 혁명’, 누가 ‘3·1 운동’으로 바꿨나

2014년 3월 3일 169

[주장] 70년간 잃어버렸던 ‘혁명’ 이름 이젠 되찾아야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로부터 비롯되어 몇 달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일거에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3·1 운동’으로 부른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 가운데 ‘3·1 운동’만큼 이름에서 신성불가침의 위상을 확보한 경우는 따로 없다. 왜 그럴까? 제헌헌법부터 시작해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헌법이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명시해 놓은 데서 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헌법이 ‘3·1 운동’으로 규정했으니 거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헌헌법에 ‘3·1 운동’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전에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헌법초안에 ‘3·1 혁명’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실제로 제헌국회의 헌법 논의과정에서 ‘3·1 혁명’은 갑자기 ‘3·1 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60년 이상 ‘3·1 운동’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이 마치 특허등록된 상표처럼 쓰여 왔다. 그런 가운데 과연 ‘3·1 운동’이라는 이름이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일대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담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1 혁명’ 100주년을 불과 5년 앞둔 이제 지금까지 해왔듯이 ‘3·1 운동’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3·1 혁명’으로 바꾸어 써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3·1 혁명’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3·1 혁명’, 인민은 더 이상 신민이 아니었다 첫

강제징용이 귀한 부르심? 청산 없으면 이런 문장 또 본다.

2014년 3월 3일 844

장하구나, 학도 출진.그대들, 가서이제, 맞이하는, 12월 8일반석의 기초는 구축되고그대들이, 미소하는, 전장을 생각하며나는, 지금 질풍과 같이도의의 날개를 퍼덕이면서포연 속을 치달리는그대들, 학병의 영자를 본다. (조우식 <학병 출진하다>에서) 오늘부터는 해 떠오르는 나라의 수호신이옵신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아아 이 이름!1억 함께 복을 입으며지금 이 시간 새로운 결의를 가슴에 새기오리다. – 김소운 <야마모토 이소로쿠 원수 국장일> 중에서 낯 뜨거운 문장들이다.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의 일부다. 광기가 서려있다. 일본인이 지었다하기에도 지금 곱씹기엔 너무나 비이성적인 글귀다. 하물며 한국인 문학가들의 글이란다. 서글프다. 징병제가 시행될 무렵인 1943년 8월, 이 순간을 마치 감격에 벅차오른다며 표현한 문장이 여럿이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을 위해 총을 잡으라고 독려한다.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는 일이 멋지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묘사된다. 같은 민족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우리 민족과 국가가 망하다 못해 나중엔 그 언어와 문자마저 송두리째 빼앗길 비운에 처했을 때 작가와 시인들은 어떻게 처신했나.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이 영광의 날나도 사나이였더면 나두 사나이였더면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노천명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중에서 점입가경이다. 강제징용이 ‘귀한 부르심’이라니. 남자들이 일제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영광’이니 여자들도 무엇인가를 하라고 권한다. 이 알 수 없는 결연함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강제 징용된 이들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군수물자 수리에 동원되고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 시를 쓴 자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제 만행 고발 만화전’ 佛서 9월에 열린다.

2014년 3월 3일 487

  ▲김용민 시사만화가의 작품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을 꼬집었다. (전국시사만화협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장봉군·김용민·서민호·이희재 등 시사만화가를 포함해 만화가 33명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회를 프랑스에서 개최한다. 2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전국시사만화협회에 따르면 33명의 국내 만화작가들은 오는 9월 프랑스 쌩-쥐스트-르-마르텔에서 열리는 ‘세계시사만화축제’에서 독립 부스를 마련해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올해로 33회째인 세계시사만화축제는 매년 전 세계 800여명의 유명 작가들이 모이는 세계 최대 만화제의 하나다. 최근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고발한 한국 기획전이 깊은 인상을 남긴 가운데 근현대사 전반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비해 시사·예술적 성격이 강한 세계시사만화축제의 작품은 더욱 풍자적이고 도발적이다. 김용민 작가는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유대인 희생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사진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을 나란히 배치해 일본의 역사 인식을 꼬집는다.  ▲일본의 독도 야욕을 비판한 이희재 만화가의 ‘나중일기-독도’. (전국시사만화협회 제공) 이희재 작가는 ‘난중일기-독도’라는 작품에서 일본의 영토 야욕을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이다. 행사장인 쌩-쥐스트-르-마르텔은 1944년 나치 독일이 수백 명의 민간인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오라두-쉬르-글랑 마을과 가깝다. 1919년 일제가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벌인 제암리 교회 학살을 연상시킨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희재 작가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저지하려는 만화가들의 작은 외침이 울림이 되어 일제의 만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