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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기고] 독립운동 폄훼보다 더한 역사부정은 없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지난달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2주년을 기념해 국가보훈부의 후원을 받아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 단원들을 초청했다. 고려극장 단원들은 지난달 16일과 18일 국회 대강당과 홍범도 장군이 안장된 대전에서 고려인 강제이주를 주제로 한 연극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그로부터 꼭 일주일 뒤 홍 장군을 비롯해 육군사관학교(육사)에 설치된 독립전쟁 영웅 흉상이 철거된다는 ‘가짜뉴스’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조만간 국민들은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등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 철거를 속절없이 지켜봐야 할 처지가 되었다. 고국 방문 공연을 마치고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고려극장 단원들은 물론 수십만 고려인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그들의 가슴 설렜던 고국 방문은 불과 일주일 만에 가슴에 박힌 ‘대못’이 되고 말았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6월 전 세계 750만 재외동포들을 위해 재외동포청을 설립했다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고려인 사회의 구심점이자 자부심인 홍 장군에 대한 온갖 모욕과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이런 자기분열적 행태는 재외동포들이 고국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8월29일 경술국치일을 앞두고 난데없이 자행된 흉상 철거 소식은 연초부터 벌어진 윤석열 정부의 수많은 역사 퇴행의 종합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일보다 더한 역사부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친일파를 되살린 이승만이나 친일 군인 출신 박정희조차도 감히 독립운동가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 직후 국민적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광복회 설립을 지원했고, 형식적으로나마 독립운동가에 대한 보훈정책 마련에 착수했다.
[한겨레] 임시정부 뜻 떠받든 ‘홍범도-러 연대’, 냉전 논리로 흠집내나
[기고] 홍범도 독립운동 왜곡 논란 최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년 10월~1943년 10월) 장군의 행적과 흉상 이전 문제가 큰 논란이 됐다. 때마침 올해 10월은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땅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한 지 80주기가 되는 달이다. 중앙아시아에 묻혀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지도 2년이 넘었다.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 그 정신과 가치,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 등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불멸의 자취를 반추하고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인 듯하다. 지난 8월29일과 31일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과 이념을 무리하게 재단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국무총리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도 바꿔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독립전쟁 영웅을 대하고 기려야 할까.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89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의병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일제와 싸웠던 대표적 무장투쟁가다. 그처럼 오랫동안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를 넘나들며 초지일관 항일투쟁을 벌인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 중국 옌볜(옛 북간도),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의 한인들까지 모두 그를 추앙하고 있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주요 무대였던 북한 함경도 지방과 중국 옌볜,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그의 활동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가 민담과 민요,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해 전해
[KBS] 100년 전 학생들이 겪은 간토학살…“기록 없다” 발뺌 언제까지?
(KBS뉴스, 2023.9.02) 기사원문보기 ☞ 100년 전 학생들이 겪은 간토학살…“기록 없다” 발뺌 언제까지? [특파원 리포트]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간토_대학살) : 간토 대학살(關東大虐殺) 혹은 관동 대학살은 1923년 일본 도쿄 등을 포함한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당시 혼란을 조선 민간인에게 전가하여 무차별 대량한 학살한 사건이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關東大地震朝鮮人虐殺事件) 또는 ‘1923년 조선인 대학살’이라고도 불린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1] 혹은 6,600명[2]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추가 자료가 발굴되면서, 희생자가 약 2만 3,058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4 <기사 발췌> KBS가 100년 전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 간토 학살, 그 참상의 기록을 새롭게 발굴했습니다. 간토대지진은 도쿄를 비롯해 일본 수도권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극심한 혼란 속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방화한다’ 같은 어이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조선인들은 일본인 자경단 등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언비어 속 조선인 무차별 공격 “메구로(※도쿄에 있는 한 행정구역 지명) 방면에서 여자아이가 파랗게 질린 채 보자기를 메고 도망쳐 왔다. 듣고 보니 ‘조선인 3,000명이 메구로 화약고를 덮친다는 것이다. (중략) 모두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칼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 막대기를 든 사람이 무리를 지어 경비하고 있다. 꼭 갑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옛날 무사 같았다. 조선인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조선인 소란으로 밤을 새웠다.” – <진재기 3-갑(甲)> 중에서- “저녁에 조선인들이 방화하거나 우물에 독을 넣거나 한다고 전해 들어 지역민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오마이뉴스] 윤석열 국방부, 홍범도 흉상 철거로 친일을 선언하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 ‘겨레강좌’에서 주장올바른 근현대사 역사인식이 중요 8월 겨레강좌가 지난 30일 저녁 6시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강사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이었다. 방학진 실장은 ‘윤석열 국방부의 친일선언’이라는 주제하에 열띤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홍범도장군 흉상 이전과 관련된 주제를 강의하여 더욱 큰 호응을 받았다. 방학진 실장은 “흉상 이전과 관련된 근현대사 역사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강의 내용 일부를 수록한다. 2010년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미군정 당시 설립된 군사영어학교와 관련된 언급이었다.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적으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 군정청과의 원활한 협조에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으며…”(이하 생략) 당시 군사영어학교의 초대 교장은 리스 미군 소령이었으며 부교장은 원용덕으로서 친일 군인이었다. 현재의 육사는 미 군정기인 1945년 12월 미군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기인한다.당시 미군은 남한 통치에 필요한 언어의 통역관이 필요했다. 미 군정은 정상적인 정치집단이 아닌 군인들이 통치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군사 영어학교를 만들어 장교를 양성했던 것이다. 이후 이곳은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된다. 군사영어학교는 애초 태생부터 친일군인들을 중용하였고,
[노컷뉴스] [기고]육사와 국방부 앞세운 친일극우세력의 역사 쿠데타
(노컷뉴스, 2023.8.31) 기사원문보기 ☞ [기고]육사와 국방부 앞세운 친일극우세력의 역사 쿠데타 육군, 해군·공군과 달리 한동안 독립운동을 뿌리로 인정않아 ‘흉상’으로 ‘반성’했던 육군, 尹정부 들어 독립운동사 지우기 궁극적으로 대통령이 동의…’뉴라이트’ 친일극우세력 인식 반영 홍범도는 시작…김구 등 독립운동가 차례차례 ‘적’ 규정될 것 육사·국방부 앞세운 ‘역사 쿠데타’, 국민이 막아내야 지난주 목요일 저녁 육군사관학교(육사)가 교내에 세운 독립운동가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하려고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이가 없어서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국회 소통관에 가서 흉상 철거 시도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철거하고 대신에 친일군인 흉상을 세우려는 게 맞는다면 그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총독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 상황을 보면 내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여론이 나빠지자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소련공산당 입당 경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만 철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발 물러서는 시늉을 했지만 문제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육사 교내에 흉상이 세워질 만한 독립운동가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모욕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한동안 독립운동을 자신의 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육군이 그랬다. 친일군인들이 정부 수립 이후 육군의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제1대부터 제10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육군 참모총장이 모두 일본군 아니면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런 가운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해군과 공군이 자신의
[오마이뉴스] 윤석열 정권이 생각하는 홍범도의 ‘죄목’ 살펴보니
[김종성의 히,스토리]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오마이뉴스, 2023.8.30) 기사 원문보기 무장 독립투사 다섯 분의 흉상을 육사 경내에서 치우겠다고 나선 윤석열 정권의 공세가 홍범도 쪽으로 집중되고 있다. 국민들의 격한 반발로 인해 5인 전체를 폄하하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소련과 연계된 홍범도의 ‘결격 사유’를 부각시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28일 국방부가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윤 정권이 생각하는 홍범도의 ‘죄목’은 이렇다.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음.”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을 소련공산당과 연관 지어 설명했지만, 이는 부정확하다. 1921년 6월 28일 자유를 의미하는 스보보드니에서 발생한 자유시 참변 당시, 현지에서 공권력을 행사한 주체는 소비에트공산당이 아니었다. 1920년 4월 6일 수립된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치타공화국)이 주권을 행사하는 곳이었다. 극동공화국은 소련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지만, 소비에트의 일원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별개였다. 소비에트에 합병된 것은 1922년 11월이다. 2005년 <대동문화연구> 제52집에 수록된 홍웅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논문 ‘극동공화국 건설에 나타난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의 한 단면’은 “소비에트공화국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독자성을 지닌 독특한
[오마이뉴스] 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의 일갈 “백선엽은 가짜 영웅”
한설 예비역 준장, 페이스북 통해 백선엽 강도 높게 비판 ☞(오마이뉴스, 2023.8.30) 기사 원문보기: 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의 일갈 “백선엽은 가짜 영웅”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의 한 예비역 장군이 육사의 독립투사 흉상 이전 방침을 지적하면서 백선엽 장군 동상을 육사에 세우려는 움직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육군역사연구소장을 지낸 한설 예비역 육군 준장(육사 40기)은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한국전쟁을 알기나 하고서 백선엽 운운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육사가 독립투사 흉상을 철거하고 백선엽 동상을 세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성토했다. 한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전쟁영웅 동상을 왜 육사에 세우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다들 백선엽을 이야기한다”며 “백선엽은 가짜 영웅이면서, 진짜 영웅들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매장해 버린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백선엽을 왜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백선엽은 한국전쟁 초기 제1사단의 붕괴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단장이었다. 부대를 버려두고 농부옷으로 갈아입고 사라졌다 3일 만에 나타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전쟁 초기 단계에서 부대가 철수하고 무너지는 상황에서 백 장군이 자신이 지휘해야 할 1사단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것이다. 백 장군의 최대 전공으로 꼽는 다부동 전투에 대해서도 한 장군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부동 전투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다부동 전투는 실패한 전투”라면서 “백선엽의 제1사단이 방어를 잘못해서 북한군이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 2부
☞ (08.31)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2부 ☞ (08.30)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부 홍범도의 삶과 항일독립전쟁을 다룬 신간 ‘범도’를 방현석 작가를 직접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방현석 작가는 울산에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왔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시와 소설을 공부하면서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인천의 공장에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1988년에 발표한 데뷔작 <내딛는 첫발은>은 그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후로 소설집 《새벽출정》과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발표했고, 이 작품들로 신동엽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받습니다 방송에서 방현석 작가는 말했다 저는 만주와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답사하고 홍범도의 삶을 추적하며 <범도>를 집필한 지난 13년 동안 단 한 번도 홍범도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총사령관 자리를 최진동에게 양보하고 1군사령관으로 내려가 싸웠고, 죽기 열흘 전에는 잔치를 열어 옛 동지들을 배불리 먹이고 위로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부하들에게 극장 수위로 모은 돈을 모두 털어주고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일본군의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그와 함께 싸웠던 큰아들 양순은 일본군과 교전 중에 전사했고, 작은아들 용환도 항일전선에서 숨졌습니다. 재산 한 푼 남기지 않았고, 핏줄 하나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들이 남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항전을 포기하지
[오마이뉴스] “육사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오마이뉴스, 2023.8.30) 기사원문보기 ☞ “육사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이게 이슈] 육군본부 정훈감 지낸 표명렬 예비역 준장 인터뷰 육군사관학교(육사)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낸 표명렬 예비역 육군 준장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치우는 건 육사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1938년생인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육사 18기(1958년)로 중위 복무 중이던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표 장군은 ‘공보정훈’ 관련 보직을 연이어 맡으며 육군의 ‘정신 무장’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 왔다. 표 장군은 정훈감 재직 시 독립군과 광복군 인사들을 육사로 초청해 생도들의 사열을 받게 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예편한 후에는 우리 군을 인권 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며 천주교인권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이라크 파병이 추진될 당시 이에 반대하며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나와 평화재향군인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 인사들을 대한민국 ‘육사’로 초청했던 예비역 장군은 이번 홍범도 흉상 논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30일 오후 표명렬 장군을 인터뷰했다. –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생 동안 대한민국 군대 개혁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표명렬입니다. 저는 지난 1965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위관 장교였습니다. 이때 미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지금껏 정훈 관련
[기자회견문] 국방부發 역사쿠테타 당장 멈추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기자회견문] 국방부發 역사쿠테타 당장 멈추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윤석열 정부 국방부는 독립전쟁 영웅에게 공산주의 망령을 뒤집어 씌워 역사에서 지워내려 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항일독립전쟁 영웅 다섯 분의 흉상 철거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훼손하고 反헌법적 행위를 지시한 자는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다섯 분의 흉상은 그냥 세운 것이 아닙니다. 대한독립군과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고 자랑스러운 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 철거 시도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뿌리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이기에 국민이 저항하는 것입니다. 국방부에게 묻겠습니다. 한국군의 전사(前史)에서 독립군과 광복군의 역사를 지워버리면, 국군의 정통성은 어디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국군 창설 이후의 역사만 기리겠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도 부정하는 것입니까? 광복을 세계 2차대전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복은 결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빼앗긴 날부터 독립을 되찾는 날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이겨낸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독립전쟁’의 역사가 있었고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이라는 자랑스러운 승리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외치며 목숨 바친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그리고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흉상 철거 문제를 두고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국민적 상식에 반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다하신 독립전쟁 영웅의 명예를 더럽히고 공산주의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