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주요기사

[성명]강제동원피해자의 신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파기환송심 판결을 환영한다

2013년 7월 10일 857

  강제동원피해자의 신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파기환송심 판결을 환영한다   오늘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들에 대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현 신일철주금 주식회사, 이하 신일본제철)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 이후 다시 한번 일제강점기에 청년들을 강제동원하여 노동을 강요한 전범기업의 책임을 확인한 것으로 오랜 기간 일제 강제동원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들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이를 환영한다. 신일본제철을 대상으로 1995년 9월 ‘가마이시 소송’을 제기한 날로부터 오늘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고들이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끝까지 싸운 이유는 젊은 시절에 당한 피해가 크며 그 피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의가 지속되고 인권이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피해자들의 호소가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재판은 단순히 부도덕한 기업과 개인의 분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년 5월 24일 판결에서 대법원은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다룬 협정이 아니며, 또한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비롯한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음을 대한한국의 헌법정신에 근거하여 명확히 밝혔다. 이 재판을 통해서 당시 일본제철(오사카, 가마이시, 야하타제철소)에 강제동원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신체의 자유와 인격권, 생존권 등을 훼손당한 역사의 상처를 이제서야 다소라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2015년이면 피해자들이 강제노동하던 공장에서 벗어난 지 70여년이 된다. 피해자들의

광주 중외공원 ‘친일파’ 안용백 동상 철거키로

2013년 7월 5일 1081

3·1운동 탑과 나란히 있는 친일파 동상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3·1운동 기념탑과 내선일체 정책을 찬양하고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동상이 나란히 설치돼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28일 오후 광주 북구 운암동 중외공원에 설치된 안용백(1901~1977년) 선생 동상은 주변에 3·1운동 기념탑과 안중근 의사 동상 등과 함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3·1절을 앞두고 친일파 동상 철거 또는 공적과 친일행적을 함께 기록한 안내판 세우기 등에 대한 시민 의견을 묻는 서명운동을 계획하고 있다. 2013. 2. 28 <<지방기사 참조>> areum@yna.co.kr  (광주=연합뉴스) 전승현 기자 = 광주 중외공원에 3·1운동 기념탑과 나란히 있는 ‘친일파’ 안용백(1901~1977년)의 동상이 철거된다.광주시립미술관의 한 관계자는 4일 “친일논란이 제기됐던 안용백 선생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했다”며 “이르면 금주 안에 철거할 것”이라고 말했다.지난 1982년 2월 중외공원(당시 광주어린이대공원)에 설치된 ‘안용백 동상’은 주변에 3·1운동 기념탑과 안중근 의사 동상 등과 함께 있다.동상 주변에는 “경성제국대학 윤리과를 졸업하고 일찍이 조선철학회를 조직하였고 경남 하동군수를 지내고 조국광복이 되던 해에는 경남 중고등학교 초대 교장직을 위시로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전남교육위원회 교육감 등을 역임하면서 후학을 길러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가 어린이 교육을 위해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실례했습니다’라는 말을 생활화하자는 ‘미고안실 운동’을 전개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3·1운동 탑과 나란히 있는 친일파 동상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3·1운동 기념탑과 내선일체 정책을 찬양하고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동상이 나란히 설치돼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 알지만, 시청률 때문에?’…채널A ‘멘붕’ 해명

2013년 7월 5일 928

  지난 3월26일 방송된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 ‘막말방송’ 채널A <쾌도난마>, “개선의 여지가 없다” 지난 3월26일 방송된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 종합편성채널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가 ‘막말방송’으로 중징계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심의에 나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들은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질타했고, 채널A 측은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시청률도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차차 개선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시청률 때문에 ‘막말방송’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자인하는 ‘해명 아닌 해명’을 내놓은 셈이다. 방송통신심위위원회 방송심의소위원회(소위원장 권혁부)는 3일 회의를 열어 지난 5월21일과 3월26일 방송된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 등에 대해 심의를 벌였다. 시사평론가 이봉규씨가 출연해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역사왜곡 5적’ 중 하나로 규정하면서 ‘꽃뱀’, ‘사기꾼’ 등의 표현을 쓰는 한편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을 방송한 부분과, ‘여성정치인 5대 얼짱’ 순위를 매긴 방송이 안건에 올라온 것이다.  ‘문제 알지만, 시청률 때문에?’…채널A ‘멘붕’ 해명 먼저 심의가 이뤄진 ‘백년전쟁’ 관련 방송에 대해 위원들은 ‘방송 품위’와 ‘객관성’ 문제를 지적했다. 권혁부 위원은 “이 프로그램은 비유가 너무 비약적이고 방송품위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권 위원은 이봉규씨가 방송에서 <백년전쟁>의 제작진을 ‘꽃뱀’에 비유하거나, ‘북한에 보내서 살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발언한 것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표현을 써서 비판하는 건 매우 부적절하고 방송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장낙인 위원은 “확인되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언급하고 있다”며 “바로잡아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제대로 된 방송이 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입학비리 의혹 영훈학원의 속살, 이건 몰랐을 거다

2013년 6월 27일 707

친일파가 설립한 사학법인… MB 정부 당시 전성기 구가설립 50년을 맞이하는 영훈학원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손자가 사회적 배려대상으로, 그것도 학교 측이 성적을 조작해 입학시켰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영훈 사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교감의 자살 사건에 이어 김하주 이사장의 검찰 소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훈학원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국제중 설립 취소와 임시이사 파견까지 예상된다. 그동안 영훈학원은 수차례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친일파 논쟁을 불러일으킨 설립 배경부터 폐교 위기가 나오고 있는 지금까지 영훈학원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대한민국 1호 국제중 설립자는 친일파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영훈학원 설립자 김영훈 ⓒ 민족문제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지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10여 년간의 조사 연구 끝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 인물 4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박제순·이완용 등 을사오적과 언론·종교·예술 등 분야별로 활동한 대표적 친일 인사들까지 포함됐다.  이중 관료로 분류된 친일 인사들의 명단에는 일제 강점기 당진군수와 예산군수 등을 역임한 김영훈이 포함돼 있는데, 그가 바로 영훈학원의 설립자다. 그는 광복 후 이승만 정권에서 서울시 초대 교육감을 지냈고, 196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영훈학원을 설립한 뒤 1985년 작고할 때까지 영훈초·중·고교 교장을 번갈아 맡은 ‘종신 교장’이었다.  현재 이사장인 김하주씨는 그의 아들이다. 1981년에 취임한 이후 32년째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금도 영훈학원 교내에는 친일파 논란의 당사자인 김영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학교 졸업생들은 설립자가 친일 논란의 중심인물이라는 말을 학교에서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친일 논란의 한가운데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2013년 6월 21일 1117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③]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1>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아래는 서 교수 인터뷰 앞부분이다. <편집자>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안병욱 ①] “일베-뉴라이트-<조선>은 이어져 있다”[안병욱 ②] “남로당식 사관? <조선>, 흉기 들고 난동”프레시안 : 대선 후 어느새 반년이 흘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도 100일이 넘었다.서중석 :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크게 우리 사회에 드리웠다. 박정희 신드롬은 정치인 박근혜가 인기를 누리는 데도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큰 힘으로 작용했다.박정희 신드롬이 지워지고

“일베-뉴라이트-은 이어져 있다”

2013년 6월 21일 770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①]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1>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아래는 안 교수 인터뷰 앞부분이다. <편집자>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올해, 역사 문제와 관련해 많은 일이 있었다. 이승만·박정희를 다룬 <백년전쟁> 논란, 한국현대사학회와 역사 교과서 논란, 종합편성채널(종편)들의 5.18 왜곡 방송,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논란, 전두환 추징금 문제까지 굵직한 사안들이 이어졌다.안병욱 : 그 문제들이 한 축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해방 후) 초기에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을 때 이승만·박정희 등이 나와서 독재를 했다. 권력자들이 법을 벗어나서 사적으로 폭력을 행했고, 그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공권력의 행태처럼

[공지] ‘이승만을 재평가한다’ – 백년전쟁 관련 토론회

2013년 6월 21일 3033

[공지]   ‘백년전쟁’관련 토론회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특집방송   ‘이승만을 재평가한다’     오는 24일 저녁 7시 CBS가 주관하는 ‘백년전쟁’관련 토론회 ‘이승만을 재평가한다’에 이승만측 토론자로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이 참석하는데 대해 비판과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박주필의 그간 언동에 비춰볼 때 그가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라는 판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연구소가 이미 시대정신의 제안을 수용했고 방송일정이 정해진 터라 부득이하게 토론회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전공학자들의 참석은 해외체류 등으로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상대 토론자가 부적절한 인물이고 격이 맞지 않긴 하지만 이승만 측을 대표한다니 토론을 피한다는 비방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면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연구소의 입장입니다. 이 점 널리 이해해 주시고 연구소 측 토론자로 나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성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3 . 6 . 21   민족문제연구소     토론회 :  ‘이승만을 재평가한다’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특집방송 때 : 6월 24일 저녁 7시 곳 : CBS 스튜디오 생방송 : CBS라디오(표준FM 98.1Mhz) / 유튜브

“남로당식 사관? , 흉기 들고 난동”

2013년 6월 20일 554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②]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2>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아래는 안 교수 인터뷰 뒷부분이다. <편집자>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안병욱 ①] “일베-뉴라이트-<조선>은 이어져 있다”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들이 참여한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 있었다. 5월 31일엔 한국현대사학회와 아산정책연구원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토론회도 열렸다.안병욱 : 인터넷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들이 일베에 모이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지식인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 극우 세력이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고 심지어 전두환을 찬양하며 일대기까지 썼다.

장준하 선생 발자취 따라 자전거 달린다

2013년 6월 20일 713

<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를 떠나며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공동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밀감식팀은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당해 목이 손상돼서 즉사 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졌거나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비록 민간 발표이나 이로써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서 실족해 죽었다는 정부의 공식보도를 37년 만에 부정하는 것으로,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로 인정된다면,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광복을 찾기 위해 한 몸을 다 바친 광복군 대위가 해방 후에 자신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조선인 출신 일본군 중위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독립투사 중에 독립투사이며 나라와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극우 보수주의자가 해방 정국에 기회주의자인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니.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당시 대통령에게는 군부정권 시절임에도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 장준하 선생이 눈엣가시였으리라.   장준하 선생의 유해는 3월 30일 겨레장으로 다시 장례를 치르고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들끓던 여론은 잠잠해졌다. 자전거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다음 목적지로 장준하 선생이 중국 서주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 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장준하 선생의 삶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