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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심층취재] 한심한 교과서…표지에 일본인 사진

2013년 5월 3일 631

<앵커 멘트>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이 공통으로 배우는 국정 교과섭니다.  표지에 나온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 단란한 가족의 모습 참 보기 좋은데요. 그런데 이 사람들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입니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 표지에 웬 일본 사람들이 등장했을까요? 황정환 기자가 심층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초등학교 교실에서 수업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교과서 표지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국적입니다. 다른 교과서 표지의 활짝 웃는 가족 역시, 짙은 쌍꺼풀과 광대뼈 없는 얼굴이 우리나라 사람과 분명 차이납니다. 모두 일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윤여환(충남대 회화과 교수) : “남방계 특징을 잘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일본 사람들의 얼굴로 보입니다.” 일본 사람을 표지에 사용한 교과서는 이게 다가 아닙니다. 올해 이 출판사가 낸 초등학교 1~2학년용 국정교과서 8권 가운데 3권의 표지사진 인물이 일본인이고, 다른 한 권도 해외에서 공급된 것으로 국적불명입니다. 문제의 출판사는 5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대표적인 교과서 전문업체, 사진 제공업체 홈페이지에 들어가 ‘일본사람’으로 검색하면 관련 사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도, 출처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조용석(지학사/발행인/콘텐츠본부 실장) : “주제에 맞도록 사진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는 검증을 했는데, 검증 과정이 충분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올해부터 전국의 초등학교 1~2학년 학생 87만 명이 이 책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도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인터뷰> 이현(교육부 교과서기획과 연구사) :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사진을 넣었는데 그런 부분들이 당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역사교육

[성명서] 아베신조 내각각료와 국회의원 163명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규탄한다!

2013년 5월 1일 812

<AWC일본연 항의성명서>   아베 신조 내각 각료와 국회의원 163명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규탄한다! (1) 4월21일부터 야스쿠니 신사에서 진행되는 춘기예대제(春期例大祭)에 즈음하여 아베 신조 내각의 각료들이 잇달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다. 4월20일에 신도  요시타카 총무상이, 다음 21일에는 아소 다로 부총리와 후루야 케이지 납치문제 담당상이 참배를 했고, 28일에는 이나다 도모미 행정개혁상도 참배를 해서 아베 내각의 각료 4명이 참배한 것이다. 또 아베 수상 자신도 신사에 바치는 공물인 ??(마사카키)를 봉납했다. 또한 23일에는 ‘다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국회의원 168명이 집단적으로 참배했다. 이번 참배는 지금까지 국회의원 집단 참배에서 괴거 최고 수준으로 인원 수가 많았다. 그 중 132명이 자민당 의원이며, 25명이 일본 유신회 의원, 민주당 의원도 5명이 포함되어 있다. (2) 이에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가 반발하자 아베 수상을 비롯한 아배 내각 각료들은 그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베 수상은 국회답변에서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잃은 영령에 대해 존숭의 뜻을 표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자유가 있다’고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를 정당화했다. 아베 수상은 한국과 중국 정부의 항의를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하며,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3) 야스쿠니 신사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전쟁, 그리고 그 전쟁을 수행한 천황의 군대의 정신적 지주였다.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일본군 군인을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영령이라 불렀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교과서에 실린 작가 이름이 ‘우르르’…모두 친일파

2013년 4월 26일 2595

[서평]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교주본 발간 즈음에 윤대석 명지대 국문과 교수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분노와 부끄러움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에도 그리 흔치 않던 세로쓰기로 된 <친일문학론>이 나열한 그 긴 작가의 목록과 그들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자극적인 언어는 고등학교 때까지 품어왔던 한국 근대문학에 대한 생각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그 목록이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의 작가 목록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작품의 노골성 때문에 교과서적 지식에 대한 반감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는데, 아마 그것이 문학회 신입생 세미나 교재로 <친일문학론>을 선택한 선배들의 의도였을 터이다.광주항쟁의 실상과 비슷한 충격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최소한 나에게 그 책은 광주항쟁의 실상을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구국의 영도자’ 전두환, ‘보통사람’ 노태우가 살인마였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위대한 시인ㆍ소설가들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동격이었고, 그것은 사고의 전도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그러기에 ‘자화상(임종국 선생이 <사상계>를 통해 1960년 발표한 시-편집자주)‘을 서문으로 책 앞머리에 붙인 임종국과 마찬가지로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고 임종국 선생 ⓒ민족문제연구소동시대에 나온 김지하의 시 ‘오적’이 권력 엘리트들의 치부를 드러냈다면, <친일문학론>은 문학 엘리트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66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 책은 너무 오랫동안 홀로 이러한 계몽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임종국의 ‘외로운 열정‘은 바다를 건너 오무라 마스오(번역), 사에구사 도시카쓰(연구)의 공명을 이끌어내기도 했으나, 이 땅의 연구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외면은 역설적으로 공감의 결과이기도 했다. <친일문학론>이 외면당하던 시기에 한국 근대문학

민족문제연구소 교주본 발간

2013년 4월 25일 387

  반세기만에 거듭난 ‘친일파’ 연구의 고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문학론> 교주본 발간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인터넷 서점 바로가기 : <친일문학론> 임종국 저 이건제 교주, 민족문제연구소 편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인 1966년 7월 출간되어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으며, 1970-80년대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기 옥중 필독서로 인기를 끌었던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한층 정교해진 내용으로 다시 선보였다. 초판이 발간된 지 거의 50여 년 만에 사실상의 개정판이 발간된 것이다.   <친일문학론>은 친일문제 연구의 단서를 연 기념비적 저작으로 문학은 물론 각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많은 저술과 논문들이 여기에서 시사점을 얻었으며 이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2009년 11월 발간된 <친일인명사전>도 그 정신사적 원류를 <친일문학론>에서 찾고 있다. <친일문학론>이 없었다면 ‘친일’이라는 금기의 영역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채 온전한 성역으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교주본 <친일문학론>은 원저의 골간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나 전면적인 검증을 거쳐 오류를 바로잡고 읽기 쉽게 재구성한 점이 돋보인다.    첫째, 원저에 기술된 기초 사실이나 인용문을 철저히 원자료와 대조하여 오기와 오역, 착오 등을 바로잡았다. 둘째, 어려운 한자말이나 당시 용어를 알기 쉽게 풀이하고, 나아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사항을 각주(전체 각주 373개)로 처리하였다. 셋째, 한자어, 인명, 지명 등을 가능한 한 한글화하고 필요할 경우에만 한자를 병기하였다.  378명의 한자 표기 일본인명을 각종 근거를 찾아 일본어 발음으로 풀어낸 것도

[성명서] 일본 정부 관료와 정치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력 규탄한다

2013년 4월 24일 1032

[성명서] 일본 정부 관료와 정치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력 규탄한다 일본 여야 국회의원 168명이 23일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총리는 공물을 봉납하고 부총리 등 정부 각료 세 명도 참배했다. 과거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 지배에 혈안이 되었던 제국주의의 망령들이 이들에 의해 ‘애국’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야스쿠니란 무엇인가. 과거 일본의 대외침략의 발진기지이자 천황제 파시즘의 심장부이며, 현재는 시대착오적인 일본 우익의 영혼이다. 요컨대 A급 전범을 애국자로 숭앙하고 천황을 앞세운 ‘살아있는 침략신사’이다. 이러한 야스쿠니 신사에 정부 각료와 정치인이 대거 집단참배를 했다는 것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전면 거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아시아 피해민중을 다시 모욕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현 일본 정부는 교과서를 뜯어고쳐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독도 등 타국 영토에 대해 시비를 걸어 내부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고 있다. 이를 빌미로 자국의 헌법마저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 극우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실로 아시아에서 새로운 분쟁의 출발은 일본에서 시작되고 있다. 일본 정치인의 대규모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로의 회귀이자 일본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행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총체적 극우화! 이것이야말로 오늘 일본의 현주소이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포기했다.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앞세우며 구제불능의 국가로 가고 있다. 120년전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비난하며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한다’고 한 적이 있다. 뒤이어

[논평] 친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나라, 일본

2013년 4월 23일 346

<논평>  친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나라, 일본   일본 여야 국회의원 168명이 23일 오전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총리는 공물을 봉납했으며, 아소 부총리 등 정부 각료 세 명도 참배했다. 이는 이웃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깡그리 무시하는 ‘참사’에 가까운 도발행위이다. 야스쿠니신사가 무엇인가. 침략자와 가해자들의 사당이자,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도구로서 일제 침략 지배의 최대 상징이었다. 그런 야스쿠니신사에 정부 각료와 정치인이 대거 참배했다는 것은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을 받은 나라들과 민중들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완전히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이웃나라와 친구가 되기를 거부한 정치적 행위로서 함께 살아갈 의사가 없음을 스스로 선언한 망동이다. 그들의 졸렬한 행동과 역사인식에 분노를 넘어 도저히 구제불능한 국가라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 하는가. 일본 정계의 총체적인 반동화는 일본 국내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최대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총리는 교과서 문제에 근린조항을 무력화시키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왜곡된 역사교육을 강화하려 하고, 영토 분쟁을 야기시켜 시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게 하며,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평화헌법마저 개정해서 군사대국화를 합법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국제적 갈등을 증폭시켜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는 행위임을 뻔히 알면서도 강행하는 것은 이웃과 공존할 의사가 없거나 상대를 멸시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120여년 전 후쿠자와 유기치가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조선을 비난하며 ‘아시아의 나쁜

대법 “친일재산 환수 정당”…친일파 민병석 후손 패소

2013년 4월 23일 818

친일파(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이 소유한 ‘친일재산’에 대해 국가가 환수 결정한 것은 정당하다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왔다. 1910년 10월 한일합병조약 공을 인정받아 자작을 수여받은 민병석은 1912년에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일대에 많은 땅을 사정받았다. 민병석은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각 임명돼 활동하는 등 친일파로 분류됐다. 민병석은 1940년 사망해 아들 민OO씨가 단독으로 토지를 상속받았다. 그런데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2007년 8월 “민병석은 특별법에서 정한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로’에 해당하고, 각 토지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친일재산)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국가 소유로 귀속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에 민병석의 후손인 민OO씨는 “특별법은 헌법에서 규정된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 금지 및 연좌제 금지에 위반되는 등 현행 헌법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국가 소유 귀속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소송을 냈다.하지만 1심인 서울행정법원 제6부(재판장 전성수 부장판사)는 2009년 1월 민OO씨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귀속결정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는 우리나라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압적인 불법통치를 자행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해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한 대가로 관직과 재산을 하사받아 자자손손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추구한 행위로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반역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러한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친일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공익적 필요성이 중대해 이를 실현하는 특별법의 규정은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헌법이념과 정신을 고양하는

전기자동차 회사 사장이 현대사 프로그램을?

2013년 4월 16일 740

<그때 그 순간> 외주 제작 의혹의 전말 외주제작 비리 사건으로 퇴출됐던 인물의 외주사가 [현대사] 프로그램 제작 어제(19일) 기자회견에서 사측이 개편 때 강행하고 있는 <그때 그 순간> 제작 외주사에 대한 의혹을 밝힌 바 있다. 현재 <그때 그 순간>은 두 개의 외주 제작사가 담당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A 업체의 사장은 2005년 사내외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요기획> 방송 사태 때의 담당 외주 제작사 사장의 친동생으로, <수요기획>에서 방송이 되었던 전기자동차 업체의 사장이었다. 이 사건으로 감사가 진행돼 당시의 문제 외주업체는 퇴출이 되었는데, 8년후 사건의 주역이 다시 나타나 이번 개편 논란의 핵심인 <그때 그 순간>의 외주제작을 맡게 됐다. 친동생의 회사를, 그것도 상당부분 과장, 왜곡된 내용을방송해 퇴출까지 됐던 부도덕한 사건의 관련자들이 현대사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이는 명백히 재감사가 실시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 전모를 밝힌다. A 외주사의 실질적인 대표는 과거 문제를 일으켜퇴출당한 J씨 충격적인 사실은 A사의 경우 실질적인 대표가 2005년도에 문제를 일으켜 퇴출당한 J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 A사의 대표는 J씨의 동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불과 1년전 기사만 보더라도 J씨가 대표, 동생은 본부장으로 소개되어있다. 2005년 J씨가 퇴출된 과정은 당시 KBS노보에 수차례에 걸쳐 자세히 기사화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당시 B사의 대표였던 J씨는 같은 해 6월에 방송된 수요기획 ‘자동차, 반란을 꿈꾸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한 벤처회사가 100일 동안의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EBS, 반민특위 다큐 제작 사실상 중단 파문

2013년 4월 11일 1308

방송계, 근현대사 둘러싼 잇따른 역사 다큐 갈등…제작 PD 다른 부서 발령에 노조“EBS 초유의 사건” 반발 허완 기자 | nina@mediatoday.co.kr   EBS가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김진혁 PD를 수학교육팀으로 ‘복귀’시켰다. 사실상 프로그램 제작이 어렵게 된 것이다. EBS 측은 “프로그램 중단 여부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밝혔지만, 근현대사를 다루는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수난’을 겪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EBS는 8일 인사 발령을 내어 <다큐프라임-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를 제작하던 김진혁 PD를 수학교육팀으로 복귀시켰다. 앞서 지난 1월15일, EBS는 지난해부터 해당 프로그램을 준비·제작해오던 김 PD를 돌연 수학교육팀으로 발령 낸 바 있다. 논란이 이어지자 EBS는 같은 달 28일 김 PD를 원소속부서인 교육다큐부로 ‘파견’냈다. 그런데 프로그램 제작이 완료되기도 전에 다시 김 PD를 수능 등 교재 제작 부서인 수학교육팀으로 ‘복귀’시킨 것이다.       ▲ EBS 사옥     김진혁 PD가 준비하던 프로그램은 독립유공자 후손들, 그 중에서도 해방 직후인 반민족행위특조사위원회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민특위는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 등을 위해 구성됐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경찰 및 사법부를 장악하고 있던 친일파 등의 견제 속에 강제 해산됐다. 특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위원들은 ‘간첩’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김 PD는 지난 1월 인사 발령이 난 직후 “EBS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아이템”이라며 “이 정도 이야기도 하지 못하면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