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기사
KBS 시사기획 10
일제 시대, 같은 시대였지만 다른 두 삶이 있었다.친일의 길과 항일의 길.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조선귀족들의 삶은 윤택했고,그 후손들도 조상의 후광을 입어 좋은 교육을 받고 양지에서 살고 있다.하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온 재산을 내던지고 자식들의 목숨까지 나라에 바쳤던 독립 운동가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후손들의 고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친일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항일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과거와 후손들의 현재를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과제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친일 재산 귀속, 그 후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 행위자의 재산을 국고 귀속한지도 어느덧 5년이 지났다.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 행위자 160여 명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지만,대부분의 후손들이 반성하지 않고 소송 대열에 뛰어들어,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해체된 지금도 60여 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친일 재산 환수법 자체가 위헌이라며 위헌 소원을 낸 후손도 다수이다.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행동에 대해 후손이 얼마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한일합방의 공으로’ 지난 5월 박병대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친일 재산 문제였다.박병대 대법관은 고등법원 판사 시절, 친일 행위자 이해승의 후손이 국가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달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이해승이 친일한 것은 맞지만,한일합방 이전에 친일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며 국가는 이해승 후손에게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관련법이 ‘한일합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의 재산을 환수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이해승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 행위자인데도
친일파 김연수의 ‘秀堂門’ 현판
▲전주 종합운동장 정문과 그 위에 걸린 김연수의 현판 ©민족문제연구소 전주 종합경기장 정문 일주문에는 친일파의 공적을 기념하는 현판 ‘秀堂門’이 버젓이 걸려있어 시민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수당문은 제44회 전국체육대회(1963년)때 삼양사 회장으로 있던 김연수가 낸 성금으로 세운 것으로,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김연수의 호를 따 ‘수당문’이라고 새겨 현판을 걸었다고 알려진다. 수당 김연수(金秊秀, 1896~1979)는 전북 고부(현 고창군)의 만석꾼인 김경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2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기업 활동을 시작했다. 형 인촌 김성수와 업무 분담을 통하여 토지와 자본을 증대시켜 대지주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1936년에 경기도 관선의원과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위원, 1937년에는 경기도 애국기 헌납 기성회 발기,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 이듬해에는 일왕으로부터 견수포장(絹嫂褒章)을 수여 받았다.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직후 2만원(지금의 2억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친 이래 1943년까지 바친 국방헌금 총계가 80만원을 넘었다. 특히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원의 조선항공 공업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친일 정치활동을 통해 일제의 전쟁협력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1942년 1월 14일, ‘일억일심’이라는 연두 소감을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조선의 민중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여 자발적으로 황민화 운동 실천에 앞장선다. 1944년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권세대(日本勸世隊)’에 참여하여 일본 유학생들에게 학병을 권유하는 유세 활동으로 유명했다.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의 학도들이 입대하여 죽어야 황국신민이 될 수 있고, 그래야 조선인이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식 열려
“친일인명사전을 선생님 영전에… “ [의를 좇는 사람 (3)]-친일 연구 선구자 임종국 선생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도(parkdo) 기자 ▲ 14주기 추모제가 열렸던 천안공원 묘역의 ‘나주 임종국지묘’ ⓒ2003 박도 2003년 11월 9일 오후 2시 정각, 천안공원 묘원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주관으로 나주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잠시 멈춘 공원 묘원 식장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회원, 광복회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이기형 시인, 비전향 장기수 정순택옹, 정신대 황금주님 등 100여 참배객이 모인 가운데 추모식이 엄숙히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과 동 연구소 충남지부 전재진씨의 공동 사회로 고인 약력 소개, 고인 육성 듣기, 추모 말씀, 살풀이 춤, 헌화·헌주 순으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참배객들이 고인을 기리고 있다. ⓒ2003 박도 고인의 육성 녹음은 돌아가시기 전, 기독교방송에서 임헌영 문학평론가와 대담한 테이프로, 당신이 친일 연구를 하게 된 배경 설명이었다. 1945년 임종국 선생이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찾아왔다. 그때 일본군은 물러가면서 20년 후 다시 조선에 온다고 했는데 정말 꼭 20년 뒤인 1965년 한일회담이 성사되었다. 임 선생은 이를 보고 일본의 재침을 경계하고자 친일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임헌영 소장은 즉석 추모사를 통해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민족문제연구소가 창설되었으며 오늘의 이 난세는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고 역설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추진 중인 친일인명사전이
김영진 의원, 신일철에 징용자 피해보상 요구
민주당 김영진 의원이 태평양전쟁 중 옛 일본제철(현 신일본제철)에 강제 동원됐던 징용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를 타결하려고 방일했지만, 일본 측의 냉대에 부딪혔다.20일 김 의원실과 태평양 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에 따르면 김 의원은 이날 오전 11시께 도쿄역 부근에 있는 신일철 본사를 방문했다. 무네오카 쇼지(宗岡正二) 신일철 사장을 만나 보상 문제 해결을 촉구할 목적이었고, 국내 징용 피해자 단체와 일본의 ‘신일철 재판 지원회 일본 사무국’ 회원 등 10여명이 동행했다. 하지만 신일철측은 “사전 약속 없이 사장을 만날 수는 없다”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실무자를 1층 로비에 내려 보내 김 의원 등 한국 국회의원 61명의 강제연행 문제 전면 해결 요구 서명이 담긴 서한을 받았을 뿐이다. 신일철이 이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일본이나 한국 법원이 징용 피해 생존자나 사망자 유족이 낸 소송에 대해 “1965년 한일협약으로 개인 피해 청구권도 소멸했고,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법적으로 다른 회사”라고 패소 판결을 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의원 측 관계자는 “법원이 비슷한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했는데도 미쓰비시 중공업은 피해자 측과 자발적인 보상 협상을 하고 있다”며 “신일철이 판결만 믿고 피해자들을 냉대한다면 국제적인 반(反)신일철 캠페인이라도 벌려야 할 것”이라고 불쾌해했다.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 1심 기각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에서 7월 21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가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일본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은 2만1,142여명인데 이 중에는 해방 후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거나 생환한 사람까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일본정부와 야스쿠니신사는 유족들에게 합사에 대한 의견을 확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사망사실 자체를 통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합사한 것이었다. ▲ 재판이 열리기에 앞서 진행된 사전 집회 모습 따라서 2001년 6월 29일 시작된 재한군인군속 재판과정에서 부친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원고 55명은 피해자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의 영새부에서 빼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2006년 5월 25일 도쿄지방재판소는 ‘전몰자 통지는 일반적인 행정사무행위이며 전몰자 합사는 야스쿠니신사가 한 것이다’라고 하여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한국 측 원고 이희자 등 유족10명과 생존자 1명은 일본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대상으로 특화된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하고 2007년 2월 26일 ‘합사취하’ 소송을 시작했다. 이 소송에서 원고들은 공식적인 사죄문을 공표할 것, 일본정부가 야스쿠니신사에 사망자 명단을 제공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 영새부(靈璽簿), 제신부(祭神簿), 제신명표(祭神名票)에서 피해자들의 이름을 삭제할 것 등을 요구했다. 앞선 군인군속재판에서 재판부는 ‘합사는 종교단체인 야스쿠니신사의 독자적인 행위로 일본국은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가 사망하기 전 시점에는 ‘죽은 후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족들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야스쿠니신사측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다. 따라서 이번 ‘합사취하’ 소송에서 생존자 김희종 본인의 요구에 대해 일본재판부가 어떻게 결정할지가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식
▲임종국선생님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연구의 선구자 고 임종국 선생의 14주기 추모식이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특히 올해는 뒤늦게나마 선생의 고귀한 업적을 공중파(한국방송 인물현대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해였습니다.친일청산과 역사정의실현을 위해 달려온 올 한해를 뒤돌아보고, 선생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자리입니다.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다음>▣ 모이는 곳 : 지하철 3호선 양재역 8번 출구 외교안보연구원 앞(전세버스 대기)▣ 모이는 때 : 2003년 11월 9일(일) 오전 11시 30분▣ 묘역 : 천안공원묘원 무학지구 철쭉 4-1▣ 회비 : 1만원(당일 접수)▣ 문의 : 사무국(02-969-0226)▣ 연락 : 방학진(011-784-1546)▣ 주최 :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민족문제연구소·천안민주단체협의회▣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약도 : 이 곳을 클릭하세요.(http://minjok.or.kr/mailnews/image/chunanmap.gif) ※ 서울에서 전세버스로 함께 출발하실 분은 11월 9일(일) 외교안보연구원 앞으로 11시 30분까지, 그리고 승용차를 이용해 개별적으로 오실 분은 오후 2시까지 천안공원묘원 무학지구 철쭉 4-1로 오시면 됩니다. 2시부터 추모식 행사를 시작합니다. 천안공원 찾아오시는 길은 천안삼거리→(공주방면)→목천휴게소→ 백제휴게소→행정초등학교→ 천안공원묘원입니다. – 사진은 임종국 선생의 생전 모습(왼쪽)과 작년 13주기 추모식 행사 ▲13기 추모제 ©민족문제연구소
죽은 자를 위한 변호인가? 산자를 위한 호구책인가?
▲복거일의 [죽은자들을 위한 변호]의 책 표지 ©민족문제연구소 이런 저런 이유로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21세기의 친일문제-』라는 책을 읽어야만 했다. 읽으면서 문득 김완섭이 쓴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수준이나 세련도 면에서 김완섭의 책과 다소 격은 달리 하지만, ‘건시나 곶감이나 매한가지’라는 우리 속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다만 김완섭이 ‘변명’하는 것과 달리 복거일은 ‘변호’ 즉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파’라 불리는 이들에 대해 법적․도덕적 복권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복거일에게 그들은 ‘친일파’라기 보다는 ‘죽은 자’일 뿐이다. 어두운 지하에서 말 한마디 변명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후세에 매도당하는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죽은 자들을 위해 산자가 아무런 대가없이 처절하게 변호하겠다는 21세기 인권변호사가 바로 복거일이다. ‘소수자를 위한 인권변호사’ 복거일이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거일이 주장하는 것들 1) 당시 강한 나라들이 약한 나라를 합병하는 것을 극히 자연스런 과정으로 여기는 시대 조건 속에서,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합법이었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 또한 공식적이고 실질적이었다.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 일본은 조선인의 의병 투쟁을 잔혹하게 탄압했지만, 1920년대 이후 일제의 조선 통치는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안정화되었다. 조선 사람들 또한 식민통치를 합법적으로 여겼고 여기에 순응했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잘살았다. 2) 친일파란 사실상 성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며 그러한 개념으로 처벌할 수 있는 친일파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민관 폭파의거 66주년 기념식
■ 찾아오시는 길(지도클릭) 2011.7.22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책소개] ≪제주기행≫, 주강현, 웅진지식하우스
우리 연구소 연구위원인 주강현 제주대학교 석좌교수가 제주도를 인문학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제주기행≫을 출간했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로 널리 알려진 주교수는 역사민속학과 해양문명사 분야에서 주목받는 문제작들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대중과 소통하고 있는 대표적 인문학자 중 한 사람이다. 신간 ≪제주기행≫은 저자의 장기인 현지밀착형의 심도있는 문화이해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휘한 역저로 제주도의 원형질에 다가설 수 있는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해 준다. – 편집자 주 ≪제주기행≫ 책표지 ⓒ웅진지식하우스 [서평] ≪제주기행≫, 주강현, 웅진지식하우스 관광의 섬 제주도를 인문학으로 본격 탐색한 교양서가 출간되었다. 제주대 석좌교수이자 민속학자, 해양문명사가인 주강현 교수의 《제주 기행》은 제주도를 바람, 돌, 여자, 곶자왈, 귤, 신, 화산, 잠녀, 우영팟, 삼촌 등 15개의 DNA로 분류해 제주의 원형질을 이해하고자 한다. 학문과 학문의 경계, 제주민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시선과 제주의 곳곳을 누비며 착실히 발품을 판 내력이 돋보이는 제주 인문 기행서다. ■ 당신이 아는 제주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올레’로 일컬어지는 제주 걷기 여행이 트렌드가 되면서 제주의 자연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 한때 동남아시아의 휴양지로 떠나던 사람들이 제주로 발길을 돌리면서, 제주를 찾는 관광객 수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중이다. 뿐만 아니다. 제주에 아예 눌러앉는 외지인도 증가하고 있다. 2011년 1분기 제주특별자치도의 타 시도 전출자수는 3만 5089명, 타 시도에서 전입된 인구는 3만 5566명으로 477명이 순유입(전입인구-전출인구)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전체 순유입 인구 437명보다 40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