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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3.1절] “유관순 시신 여섯 토막 훼손”, 사실일까

2011년 3월 4일 4824

해마다 3월이 오면 우리는 잊히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거족적으로 일어난 ‘3.1만세의거’가 그것입니다. 혹자는 또 심지어 역사교과서조차도 이를 두고 ‘3.1(만세)운동’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정확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의거’로 인해 구속된 조선인이 4만 7000여명, 사망자가 7509명에 달했는데, 이를 ‘운동(運動, movement)’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당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3.1만세의거’를 생각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입니다. 물론 유 열사 말고도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도 있고, 또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 혹은 참여한 조선백성이 수 만 명도 넘습니다. 그들 역시 의거의 주역들이며, 또 우리가 기억해야할 분들임에는 분명합니다. 유관순 열사의 옥중 사진서울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현충원)에는 애국지사 묘역이 별도로 있습니다.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이와는 별도로 또 있습니다)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투쟁을 하시다 돌아가신 애국선열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두 곳 그 어디에도 유관순 열사의 묘소는 없습니다. 유 열사는 서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 추모관에 위패로 안치돼 있습니다. 왜일까요?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3.1만세의거 당시 유 열사의 활동상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3.1만세의거 당시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의 학생이었습니다.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해 거사 계획을 감지한 열사는 의거 전날 서명학 등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마침내 3월 1일 열사는 6명의

친일잔재 청산 코드로 탄핵정국 읽기

2004년 3월 19일 1507

▲한양환 영산대 교수·정치학     ©한양환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즈음하여 3권분립의 원칙에 입각한 입법부의 정당한 권력 행사에 이어 이제는 사법, 즉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남았을 뿐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과연 지금의 상황을 그러한 헌법적 형식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 70%의 국민이 반대하는 사안을 국회의원의 70%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가결시키는 한국식 대의민주주의는 이제 그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당성마저 상실한 듯하다. 교통범칙금도 사과로는 모면되지 않을 만큼 이른바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에서, 사과만 했으면 무마될 수도 있었던 경미한 과실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데는 분명 무언가 다른 곡절이 있다. 일부에서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바야흐로 극한상황에 다다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민·련’으로 통칭되는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이 전반적인 패배가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최후의 저항을 감행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보수에 대한 개념 정의마저 혼미하고, 비교적 진보성향을 보여 온 민주당이 탄핵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과정을 단순히 진보, 보수간 갈등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김대중 정권 시절, 시가 6억원 이상 호화아파트에 대한 중과세 여부로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우던 지금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분명 한 배를 탄 동일한 진보세력이었다. 과연 그 무엇이 분명한 사리판단과 ‘입바른 소리’로 유명한 조순형 대표체제의 민주당을 호남의 전통적 지지층 이탈 가능성을 무릅쓰면서까지 작금의 정치적 무리수를 두게 했는가. 한편, 우리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직무정지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의 위기를 실감치 않는 것은 상당부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만인봉화의 봉수짱을 찾습니다.

2004년 3월 18일 917

만인봉화의 봉수짱을 찾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3월 1일 ‘역사정의 실현, 만인봉화 100일 대장정’을 시작하였습니다.그로부터 20여일가까이 지나면서 약 400여분이 봉수대를 밝혀주셨습니다.이 자리를 빌어 국민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전국 방방곡곡, 우리 선열들의 얼이 어린 그 곳 우리 산하에 국민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이 지속적으로 든든히 자리함으로써 진정한 대한독립이 이루어지도록 앞으로도 저희 민족문제연구소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봉수짱은 이런 우리의 굳건한 목표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분들입니다.봉수짱은 매 24시간마다 1명의 새 봉수꾼을 발굴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과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그 선봉에 서실21세기 신독립운동의 첨병 봉수짱을 모집합니다.21세기 신독립운동의 첨병, 봉수짱에 지원하실 분은 사무국으로 전화(02-969-0226)또는 메일(minjok@minjok.or.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국민여러분의 많은 성원부탁드립니다.

일본에서 일제침략상 조망한 전시회 연다

2011년 3월 3일 727

3.1절 92주년 맞아 일본에서 ‘강제병합100년 특별전’ 개최 일제침략상을 전면적으로 조망한 일본 내 전시는 처음   –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일기도 최초 공개 –   국내에서 15만 명이 관람하여 크게 호응을 받았던 강제병합100년 특별전「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기획전시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의 초청을 받아 3월 1일 교토 현지에서 개막식을 가진다.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와 리츠메이칸대학의 코리아연구센터, 국제평화박물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일본 내 개최 자체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실상을 가감없이 전면적으로 조명한 전시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집 소장하고 있는 3만여 점의 유물 중 일본측에서 엄선한 80여 점의 희귀본만 소개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자료(조선총독부 자료, 경찰앨범, 조선주둔군 앨범)와 의병격문, 독립선언서 등 항일의지를 보여주는 독립운동자료, 징병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의 수난사 자료(사진, 엽서, 편지), 식민지 조선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생활사 자료와 교과서 등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증언영상 “내가 겪은 강제동원”과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영상 “독립을 꿈꾼 청춘들”도 일본어 자막을 입혀 전시장 내에서 상영된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일기와 그 따님으로 역시 독립운동을 한 지복영 여사의 미간행 자서전 유고가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로 일본에서 공개될 예정이어서 주목을 끈다. 리츠메이칸대학 개교 1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3월 2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과거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침략, 지배, 수탈했는가를 생생하게 알림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교육이

민족문제硏 ‘일제하 생활사 박물관’ 추진

2011년 3월 3일 239

  ※ 일제강점기 민중생활역사관 건립계획(안) 내려받기   민족문제硏 ‘일제하 생활사 박물관‘ 추진 2011-02-21 05:33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 20주년을 맞는 올해 일제강점기 민중생활역사관 건립을 추진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1일 “올해 상반기 안에 역사관 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건립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역사관은 일제 치하에서 식민통치를 미화하고 선전하는 사료와 포스터, 화보, 팸플릿, 기록 영화 등과 징병ㆍ징용 관련 서류와 증명서, 군복이나 가방, 목총, 유골과 함께 매장한 부장물 등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피해자들의 기록화와 소장품, 당시의 학교 성적표나 일기, 애국 부인회 공로장 등의 구체적인 생활 자료 등도 망라할 계획이어서 일제 치하 민중의 생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연구소가 창립 이래 지금까지 확보한 관련 사료는 약 6만 점에 이른다. 전국 300여 개 박물관 중 일제 강점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곳은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등 두 곳뿐인데, 이 전시관들은 독립운동 위주의 저항의 역사가 중심이어서 생활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1991년 2월 창립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학술 연구와 시민운동을 병행하면서 창립 18년 만인 2009년 오랜 작업과 난관 끝에 4천389명의 친일 행각을 담은 3천 페이지짜리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임헌영 소장은 “연구소 창립의 1차 목표였던 사전 발간을 18년 만에 마무리했고 이제는 성년이 됐다“며 “일제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과업이고 우리 삶과 연관돼 있는지 보여주려는 정신을

‘왜구’ 대 ‘친일파’

2004년 3월 17일 947

‘왜구’ 대 ‘친일파’ [곧은소리]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 정경희/언론인 “왜인들은 상선(商船)을 타고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이 오면 ‘남만(南蠻)에서 사신(使臣)이 왔다’고 나라에 큰 경사가 난 것처럼 떠듭니다.”이것은 강항(姜抗·1567∼1618)이 선조 31년(1597)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돼 일본에 끌려갔다 풀려서 돌아와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 적혀있는 것이다. 별시(別試)에서 문과에 급제,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거친 그는 정유재란 때 고향인 전라도 영광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다 왜군의 포로가 됐다. 그가 돌아온 것은 3년 뒤인 선조 34년(1600)이었다.그가 체험한 일본은 ‘왜구’로 불리는 해적활동을 통해 한반도나 중국대륙과 접촉할 뿐, 동북아문명권의 일원으로 참여한 일이 없는 섬나라였다. 그래서 남만(=동남아)에 근거를 둔 서양 상선이 들어오면 왜인들은 마치 외국 사절단이 온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장사꾼과 외교사절을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일본이 동북아의 어느 나라보다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우세한 군사력으로 동북아를 유린할 때에도 문명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문명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한 역사적 경험이 없는 왜구의 나라다운 만행이었다.예를 들어 종군위안부라는 성(性)노예제도로 집단강간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야만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패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세계의 경제대국이지만 왜구의 문화, 왜구의 심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해적 후손 일본의 정치 꾼들 그래서 일본의 정치 꾼 들은 끊임없이 한국을 모욕하는 망언을 일삼고 있다. 작년 5월말 일본의 집권 자민당 정조회장(政調會長) 마쇼다로(麻生太郞)가

친일논란에 휩싸인 유관순 영정 제작

2004년 3월 17일 993

◆ 친일논란에 휩싸인 유관순 영정 제작 충절의 고장으로 유명한 천안시.그런데 최근 이곳이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새로 제작되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맡은 화가 때문이다. ▲장우성 화백그런데 화가는 다름 아닌 지난 86년 유관순열사의 영정을 그렸던 장우성 화백. 장화백의 친일 논란은 이미 지난 1992년부터 학계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일부 미술계 인사들과 민족 단체들은 “항일운동의 국민적 상징인 유열사의 영정을 친일 경력이 문제되는 화백에게 두 번이나 의뢰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영정 제작의 중단과 함께 새로운 작가 선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화백은 친일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나섰는데… 천안시는 현재 영정 제작을 중단하고 민족단체의 친일자료와 더불어 장화백의 반증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유관순 영정제작을 둘러싼 친일 논란의 실태와 논란이 불거지게 된 이유를 진단해 본다. □ 방영일시 : 3월 18일(목) 저녁 7시 30분□ 연출 : 이기홍, 박형노, 곽한범, 곽철웅 / 진행: 박성준 아나운서 □ 작가 : 김영리, 김지은 / 자료조사원 : 박은정, 정연숙http://daejeon.kbs.co.kr/program/pro_tv04.htm ▲유관순 열사 영정     ©윤평호 기자

“친일인명사전, 정작 필요한 공공도서관에는 없다”

2011년 3월 3일 389

[집중인터뷰] 창립 2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방 송 : FM 98.1 (18:00~20:00)■ 방송일 : 2011년 3월 1일 (화) 오후 7시 30분■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 연 :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정관용> 시사자키 3부 시작합니다. 오늘 3부는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과의 인터뷰로 꾸미겠습니다. 오늘 3.1절이에요. 이런 날이 되면 역사인식,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다룬 기사들이 많이 눈에 띄지요.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이런 특별한 날에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새기고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지난 20년 간 꾸준히 활동해온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오늘 하실 말씀이 참 많을 것 같은데요, 친일이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준 것, 이것이 민족문제연구소 지난 20년의 성과라고 말씀하시는 임헌영 소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임헌영> 예, 안녕하세요.▶정관용> 벌서 20년이 되었네요?▷임헌영> 예, 세월이 참 빠릅니다. 우리가 늙는 것은 생각 안하고 20주년 되는 것만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정관용> 축하드립니다.▷임헌영> 고맙습니다.▶정관용> 초등학생들한테 3.1절이 어떤 날이냐고 물어봤더니요, 3.1절을 광복절로 알고 있는 친구들도 꽤 있다고 그러고요, 어떤 친구는 안중근 의사가 누군가를 치료해준 날이다.▷임헌영> 상당히 기발한 상상력이, 만화적입니다. 참 역사의식이라는 게 그렇지요, 미국에서 보면 독립선언서를 읽어주고 이게 무슨 문구냐고 물었더니 공산당 선언이라고 나왔다는 그런 여론조사도 나왔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역사를 얼마나 안 가르치면 이렇게 되는 거지요?▶정관용> 글쎄 말입니다.

할아버지(윤기섭)께 여쭤볼 것이 많습니다

2011년 3월 3일 1506

故 윤기섭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학감과 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장년층의 교육을 통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으로 이 글은 선생의 외손자인 정철승 변호사가 하늘에 계시는 조부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정철승 변호사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고문변호사 겸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마흔 일곱번째 편지 – 2011년 3월 1일           할아버지(윤기섭)께 여쭤볼 것이 많습니다. 할아버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이 영하 17도까지 내려가서 10년 만에 닥친 한파니 뭐니 하며 아우성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100년 전인 1911년 망국을 통곡하시며 동지들과 함께 만주 땅 서간도 유하현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셨던 그 암담했던 시절의 겨울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초봄의 훈기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윤기섭 선생   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의 학감과 교장으로 재직하시며 독립군이자 장래 조국의 동량이 될 젊은이들의 교육에 혼신을 다 바치셨습니다. 어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당시의 할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草)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항상 할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할아버지는 1887년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시다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서울 보성학교를 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하셨던 엘리트 지식인이셨습니다. 당시의 애국적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독립운동가가 유랑극단 배우로 살아간 사연

2004년 3월 17일 1357

친일인명사전 편찬 온힘 조문기 이사장 친일 반민족행위에 관한 한 ‘잔재’는 커녕 ‘본체(本體)’조차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며 아예 ‘친일잔재 청산’이란 용어 자체를 거부하는 항일 독립투사가 있다. 일제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45년 7월 약관의 나이에 거물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한 부민관 집회에 폭탄을 투척했던 그는 친일파, 또는 그 후예였던 역대 정권이 ‘단상’에서 주는 상을 받기 위해 ‘단하’에 조아리고 있을 수는 없다며 3·1절이나 8·15행사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생존한 수백명 독립투사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친일인명 사전’ 편찬에 강한 집념을 불태우면서 ‘내가 죽으면 관에 사전을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겨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78)을 경기 수원시 천천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최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경향신문의 ‘잊혀져가는 독립유공자들’ 시리즈를 통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됐듯이 조문기의 10평 남짓한 서민아파트는 신산스러운 그의 삶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다만 팔순을 눈앞에 둔 노령임에도 형형한 눈매와 의기(義氣)가 넘쳐 흐르는 강건한 몸가짐, 벽장 가득이 꽂혀 있는 항일·친일관련 서적과 자료집은 그 곤궁함을 무엇으로 버텨왔는지 짐작케 했다. 친일인사 보기싫어 정부행사 불참 조문기는 “최근 친일인명사전 예산삭감 파동과 누더기가 된 채로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에도 눈을 부라리는 수구언론들의 모습이야말로 친일잔재가 아닌 친일본체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전국 곳곳에 거물급 친일파들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면서 최근 밀양에 있는 박춘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