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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정부·여당의 친일인명사전 제작결정에 대한 긴급논평

2004년 8월 15일 429

   정부 여당은 8월 15일 당정협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행정자치부의 자체 수집자료 등을 취합해 친일인명록과 친일사전 등을 백서형식으로 편찬할 방침을 정했다 한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관련 기관을 통해 증거 수집에 착수하는 한편 친일인명사전을 편찬 중인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에도 자문을 구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개정법안으로 제출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에서는 위원회의 최종 업무의 하나로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하기로 되어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을 2006년까지 발간하기 위해 꾸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정부가 동일한 내용의 작업을 또 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며 동시에 정략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간 정부와 여당은 민간부문에서 십수 년간추진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작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관련 예산의 전액 삭감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또한 올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신청한 친일인명사전 편찬관련 4차년도(2005년도) 예산 책정을 회피함으로써 내년 사전 편찬 사업마저 국민모금으로 해결해야 할 실정이다.   따라서 위 당정협의의 결정은 민간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대한 지원은 외면한 채, 친일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염원을 정치적 이해몰이로 끌고 가려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이에 우리는 정부·여당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 여당은 민간에서 추진하고 있는「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취지를 왜곡시키는 어떤 형태의 시도도 즉각 중단하라. 2. 정부·여당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련의 과거사청산문제가 국가적·민족사적 문제임을

대통령의 8·15경축사에 대한 긴급 논평

2004년 8월 15일 1361

    1. 노무현대통령의 8·15경축사는 대통령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확고한 입장과 원칙을 밝힌 것으로 이를 높이 평가하고 환영한다. 역대 정권 중 가장 전진적이고 명확한 역사 인식을 밝힌 이번 경축사를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명실상부한 과거사 청산을 통한 민족사 정립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과거사청산 관련특위는 국가 기구 또는 범국민기구가 그 주체가 되어야 하며, 국회소속기구로 떠넘기는 것은 올바른 방안이 아니다. 과거사청산은 민족사적 과제임에도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가 이를 정쟁거리로 격하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사청산 관련 특위가 국회소속이 되면 정치논리에 휘둘려 본래의 취지가 퇴색될 위험이 있다. 국회는 제도나 법령의 정비를 통해 이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한나라당은 60년이 되도록 방치된 ‘과거사 청산을 통한 민족사 정립’이라는 숙원을 특정인·특정언론·특정세력을 의식한 정략적 이해로 접근하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과거사 청산은 특정 세력에 대한 견제와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해명과 진정한 반성의 기반 위에서 용서와 화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족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건전한 가치관에 입각해 민족사의 미래를 개척하자는 이 과업에 동참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 2004년 8월 15일민족문제연구소   대통령 815 경축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해외 동포 여러분, 쉰아홉 돌 광복절을 온 국민과 함께 경축합니다. 아울러 오늘을 있게 하신 애국선열들의 높은 뜻을 기립니다. 불의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일제에 맞서 싸운 선열들의

나는 항일투쟁에 목숨 바친 윤세주(尹世胄)이다.

2011년 2월 15일 347

※ 아래의 기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100년 편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링크를 클릭하시면 원본으로 이동합니다.  http://www.korea100.org/tc/50  

[부일시론] 야노 히데키,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

2011년 2월 11일 664

[부산일보 칼럼] 야노 히데키,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 … 한수산 세종대 국문과 교수·소설가     ▲ 한수산 세종대 국문과 교수 지난 연말, 조촐하지만 뜻깊은 시상식이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이나 화환이 넘치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시상식장은 내내 진지했고 화기애애했다. ‘제4회 임종국상’ 시상식이었다.수상자들의 모습도 소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술부문 수상자는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문준영 씨였다. 일본이 이미 청산한 ‘식민지 법’을 한국은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통렬한 자성을 담아 묵묵히 일제 식민지 사법제도에 관한 연구를 이어온 문 교수의 결실을 참석자들은 박수로 축하했다. 다만 사회부문 수상자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의 모습이 조금은 이채로웠다. 올바른 한·일 과거사 정립 위해 온몸 던져‘임종국상’이란 민족문제연구소와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친일청산에 앞장섰던 임종국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 한 상이다. 친일청산에 공로가 깊은 분들에게 주는 상을 일본인이 받고 있다니. 그는 공식직함이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사무국장이었다.그러나 그가 몸 바쳐 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자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 아니었다. 15년이 넘게 그는 한·일 과거사의 올곧은 정립을 위해 온몸을 던져온 일본인이었다. 여러 과거사 문제를 위한 모금운동이나 변론 지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의 피해와 참상을 알리고 그 반성의 길을 열기 위한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본 우익으로부터 ‘반일 인물’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짧은 머리에 단정한 몸매를 한 수상식장의 그는 투사로서의 이미지와는 먼 한 사람의 예의 바른 일본인이었다.지난여름이었다. 간

뮤지컬 청년 장준하 리허설을 보고

2004년 8월 14일 1154

뮤지컬 청년 장준하 연습현장을 다녀와서 박한용 표정에 결의, 절도는 있어야 되고 8월 7일 토요일 낮 뮤지컬 “아! 장준하” 연습실을 찾아 나섰다. 이날은 24절기의 하나인 입추. 가을이 길목에 들어서는 날이다. 그런데 웬걸, 리허설장 입구인 세종문화회관 광장의 분수마저 온천수로 느껴지는 염천이었다. “어제는 단원 한 명이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최악이죠. 다른 단원들도 목이 쉬고.” 연습실로 가면서 장준하기념사업회 이준영 사무국장이 단원들의 열정을 이렇게 전한다. 공연을 준비하는 세종문화회관 5층 서울시무용단 연습실은 냉방이 되어 있지만, 수십 일 이상 강훈련을 하다보니 일어난 사태이다. 더위보다는 열정이 더 뜨거웠다는 얘기이다. 연습실 문을 열자 단원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총검술을 하는 단원들, 춤동작을 맞추는 이들, 혼자 왔다 갔다 하면서 노래를 하는 이. 저마다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1. 표정에 결의1. 절도 있어야 되고2. 힘(Energy) 끊어 치기3. Three 박자 명확하게·예민하게“ 조연출의 메모장을 슬쩍 훔쳐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장준하, 불꽃의 민족주의자를 생각하며 아! 장준하(작·연출:조한신)”는 청년 장준하(역 조승룡)가 평생의 반려 김희숙(역 임유진)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마침내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경 임시정부 광복군이 되어 분단 조국에 돌아오는 과정을 극화한 뮤지컬이다. 기자는 해방 후 장준하의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승만·박정희 독재권력과 분단현실을 거부하고 자주와 민주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 목숨마저 조국의 제단에 바친 불꽃의 민족주의자 장준하. 그러나 ‘운명의 적’ 박정희와의 대결은 너무나 험난했다. 일본군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뒷거래

2004년 8월 13일 1328

  * 다음은 8월13일 김용호 회원이 서프라이즈에 올린 글입니다.일본제국주의의 전쟁막바지였던 1945년, 중국대륙 동북부를 점거하여 구 만주를 지배한 일본 관동군은 8월6일 선전포고 후 밀고 들어오던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각지의 전선에서 연합군의 맹렬한 공습을 받아 괴멸되고 있었고, 퇴역군인들이나 무차별 동원된 초년병들이 다수였던 60여만 명의 관동군은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은 소련군의 포로로 전락하였다. 이중 약 1만에서 1만5천명 정도는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블라고베시첸스크 강변 언덕을 올라가서 보니, 우리를 싣고 갈 지옥행 포로수송 화물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화차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많이 타고 보니, 눕기는 고사하고 다리조차 펼 수 없었다. 마치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했다. 화차의 출입문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또 달린다. 이 화차 안에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지 못하고 공포와 수심에 찬 포로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사흘 만에 포로수송 열차는 개선을 구가한 듯이 시골 역에 들어섰다. 여기가 죽음과 싸운 생지옥 세레칸이다.”  – 이규철님의 증언    이런 식으로 시베리아 각지에 끌려간 이들은 평균 영하 4,50도 혹한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강제노동, 그리고 고독과 싸우며 오로지 집으로 돌아갈 날만은 기다렸다. 이들의 굶주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바이칼호(湖) 부근에 수용되어 있던 어느 일본인 포로는 “혁대를 풀어서 구워서 먹기도 했고”, “작업하러 가는 도중에

[보도자료]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창립

2011년 1월 26일 420

※ 창립대회자료집 내려받기   <보도자료> 항일무장투쟁의 요람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출범   2011년 6월 10일은 항일무장투쟁의 금자탑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지 100돌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설립과 운영에 참여한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사회 원로, 학계 중진들이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으고, 1월 27일 프레스센터에서 창립대회를 연다. 신흥무관학교는 나라를 잃은 경술국치 다음 해인 1911년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신흥강습소란 이름으로 개교한 뒤, 교세 확장을 거듭하여 1920년까지 2천명이 넘는 독립군 간부를 배출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무장투쟁 기지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20년대 만주의 독립군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주축이 되었으며, 청산리?봉오동대첩의 주역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신흥 출신 독립운동세력은 의열단, 광복군 등 항일무장투쟁은 물론 교육, 사회 등 각 부문에서 치열하게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활약상을 보여 주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전기호 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한용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 등 6명이 공동대표를 맡을 예정이다. 고문으로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후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이종걸 의원을 비롯해 김영일 광복회장, 김진현 신간회기념사업회장, 오명 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김동신 전 국방장관,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정계와 학계 인사는 물론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직접 관여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과 일송 김동삼 선생의 후손들도 두루 참여하고

친일진상법 개정안 통과를 위한 대국민 홍보 신문 제작

2004년 8월 12일 841

대국민홍보신문 배포에 동참해주실 개인이나 단체는 vacationjin@mym.net이나 전화 02-969-0226으로 신청하여주십시오.        

총독부 관계자 증언 녹취록 全篇 첫 공개

2004년 8월 12일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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