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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희귀자료 경연·제실도서 빠져
조선왕실 희귀자료 경연·제실도서 빠져(매일경제, 10.11.09)
김민수 대책위, 두번째 천막농성 돌입
여기 작은 천막이 있다. 이 천막은 얼음장같은 본부에 맞서 꿋꿋하게 483일을 버텨왔다. 천막은 묻고 있었다. 과연 대학의 본분은 무엇이며, 서울대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제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두 번째 천막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는 더 늦기 전에 서울대가 자정능력으로 갖고 이성적 학문공동체가 되어 주길 염원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대학의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하는 대학본부와 정운찬 총장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얼마나 더 시간을 끌 것인가? 2000년 1월 18일, 김민수 교수는 서울행정법원 “재임용거부처분취소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재임용 제도가 대학에서 작동한 지 26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동안 재임용 관련 소송은 사법부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면서 수수방관하던 사법부가 미증유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 본부와 이기준 총장은 “항소하지 말고 즉각 원직복직시키라”는 빗발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고법에 항소하여 이 사건을 기나긴 질곡에 빠뜨렸다. 이로써 그 해 8월,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교수 재임용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내용심리를 하지도 않은 채 각하시켰던 것이다. 관련기사 서울대 김민수 교수 파기환송심 28일 열려(오마이뉴스, 05.01.27) 이후 긴 침묵을 지키던 이 사건은 2004년 4월22일에 있었던 대법원 판결로 극적인 변곡점을 지난다. 대법원이 ‘교수 재임용 심사는 대학 재량권이므로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기존판례를 변경해 ’교수재임용도 심사대상이 된다‘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시킨 것이다. 왜 대법원이 기존판례를 변경하면서까지 김 교수의 손을 들어줬는지 서울대 당국은
군사독재의 얼굴, 광화문 현판 바꾼다
△ 8월 철거될 박 전 대통령의 광화문 친필 현판.(사진 위) 오른쪽은 새로 내걸릴 정조의 글을 집자한 현판 글씨를 합성한 사진이다. 문화재청, 박정희 전대통령 글씨 교체 추진…정조 글씨에서 집자키로 [5판]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경복궁 정문인 서울 세종로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문루에 내건 친필 한글 현판이 37년 만에 조선 정조 글씨 현판으로 바뀐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23일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의 하나로 8월15일 광복절 때 정조 글씨를 따서 모은 새 광화문 현판을 바꿔 걸기로 확정하고 준비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현재 현판은 왕실 정궁인 경복궁의 공간 성격과 맞지 않고, 19세기 중건 때 만든 원래 한자 현판과 달리 글씨 방향도 거꾸로 되어 교체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며, “문화재위원회에 곧 보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새 현판의 광화문 글씨는 정조 임금이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에 내린 어필 하사비문 글씨의 탁본(서울대 규장각 소장)에서 따온 것이다. 정갈하고 엄정한 해서체로 정조 특유의 맑은 필법이 돋보인다. 애초 김응현씨 등 원로 서예가들에게 현판 글씨를 청탁했으나 건강상 어렵다는 뜻을 전해와 세종·숙종·정조 등 임금의 글씨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집자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고 한다. 문화재청 궁릉활용과 관계자는 “정조 글씨를 택한 것은 그가 역대 임금 가운데 대표적 명필로 꼽히는데다, 집자가 쉬운 비석글씨가 많이 남은 점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새 현판 도안을 이달 중 전통판각장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 ‘인도’ 합의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 ‘인도’ 합의(ytn, 10.11.08)
日, 조선왕실의궤 등 1천205책 반환키로…연내엔 어려울듯
日, 조선왕실의궤 등 1천205책 반환키로…연내엔 어려울듯(민중의소리, 10.11.08)
연구소 제주지부 창립
지난 1월 10일(월) 연구소 창립이래 처음으로 제주지역 회원들이 공식 모임을 가졌다. 전체 41명의 회원 중 강영범, 강영선, 강태식, 고찬화, 김상미, 김성근, 안철성, 양상호, 이석훈 소애숙 부부, 이영권, 이영근, 진영민 회원 등 13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연구소 사무국 보고에 이어 제주지부 출범의 필요성에 모두 공감하고 임시 지부장으로 강태식 회원, 임시 총무에는 강영선, 김상미 회원을 각각 정하였고 더 많은 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만간 다시 모임을 갖고 인터넷 카페 개설도 개설하기로 했다. 강태식 지부장은 제주 4·3의 희생자 유족이기도 하며, 강영선 총무와 대학 선후배 사이로 학창시절 4·3항쟁 진상규명을 위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기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김상미 총무는 박맑음 운영위 부위원장의 부인으로 최근 대구에서 제주로 이사해 지부 활동에 전념할 예정이다. 한편 이 날 모임에서는 한편 이 날 모임에서는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분들이 모여 이색적이기도 했다. 향토사 연구자, 교사, 교수, 꽃 전문점, 양돈업, 차(茶) 전문점, 전업 주부, 회사원, 청소년 지도사 등. 특히 이영근 회원은 일제가 전쟁 막바지에 한국인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켜 만든 최대규모의 지하 미로형 군사용 방어 진지를 발굴 복원해 만든 제주 평화박물관(http://www.gamaorum.co.kr) 관장으로 4·3과 함께 또 다른 일제 수난사의 한 단면을 교육하고 있다. 현재 평화박물관 로비에는 연구소에서 제작한 32점의 친일파 관련 판넬이 전시 중이다. [사진은 뒷줄 왼쪽부터 시계
일본 전범세력-한국 친일세력의 ”합작품”
오마이뉴스(news) 최근 한국 외교부가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한일간 과거사 청산에 대한 문제가 본격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제법 전문가인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과 교수가 관련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역사를 바로세운다는 차원에서 개인피해자 추가배상은 물론이고 추가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한일협정의 전면개정을 일본정부에 제기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편집자 주 ▲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1965년 한일협정 외교문서가 40년만에 공개됐다. 보통 외교문서는 30년이 지나면 공개되는 것이 관례인데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공개시점이 태평양전쟁과 일제식민지 피해자가 거의 생존하지 않은 상황이라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공개도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서울행정법원에 정보청구공개소송을 한 시민단체가 1심에서 승소하자 2심 소송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외교부가 한일협정 외교문서를 전격적으로 17일 공개한 것이다.그러나 공개의 파장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모두 간단치 않다. 한일 양정부는 서로 불똥이 더 많이 튈까 신경전이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내용조차도 요구의 핵심대상인 개인청구권의 근거가 모두 빠졌다. 다시 말해 공개된 외교문서의 내용은 매우 부실하고 부도덕하고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주선으로 개최된 한일회담은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을 필두로 8번의 회담과 14년의 긴협상 끝에 타결되었다. 5차까지는 역사인식과 국제법적 논리에 따라 진행되었지만 6차에서 8차까지는 정치적 흥정으로 타결되었다.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미국측의 지지와
되찾은 조선왕실의궤 국보될까?
되찾은 조선왕실의궤 국보될까?(뉴시스, 10.11.09)
[종합]한일 문화재 반환 합의…1205책 한국으로
[종합]한일 문화재 반환 합의…1205책 한국으로(뉴시스, 10.11.08)
일제 수탈기관이 ”근대 금융 효시”라니…
윤성효(cjnews) 기자 ▲ 최근 마산시가 세운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터’ 표지석.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최근 경남 마산시가 역사 흔적 찾기 차원에서 표지석을 세우면서 일제강점기 수탈기관이었던 ‘일본 제일은행’에 대해 ‘근대 금융의 효시’라 표현해 말썽을 빚고 있다.마산시는 최근 월남동 옛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터’에 표지석을 세웠다. 경남대 박물관에 의뢰해 세운 표지석에는 “이 곳은 1907년 마산에서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있던 자리이다”라 적혀 있다.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단체가 반발하고 있다. 열린사회희망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강제수탈기관을 ‘근대 금융의 효시’로 미화했다며 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희망연대 이환태 사무국장은 “‘마산의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는 말은 마치 ‘마산 아구찜의 원조’라는 말처럼 매우 긍정적의 의미만을 담고 있고, 일제를 미화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고 말했다.이환태 사무국장은 “전국 몇몇 자치단체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금융기관에 대해 빗돌 등에서 설명해 놓은 자료를 모아보았더니 대부분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내지 ‘조선 농민의 수탈기관’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 등으로 표현하고 있었다”면서 “마산처럼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 표현한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희망연대는 자료에 근거해 “일본 제일은행은 일제의 조선 침략에 첨병역할을 담당한 곳으로, 1905년(을사늑약)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화폐개혁이 단행되었고, 신-구 화폐의 교환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많은 금융자산을 수탈 당해 심각한 금융공황에 시달려야만 했다”고 설명했다.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인 전갑생씨는 “일본 제일은행은 뒤에 ‘식산은행’으로 통합했는데, ‘은행’이라는 이름을 쓰기는 했지만 고리대금업자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