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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더팩트]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들 <상>] 빼앗긴 삶, 가둬진 넋

2023년 5월 2일 1504

전사통지·합사동의 없이 한인 2만1천여명 야스쿠니 신사에 ‘제국 병사’라며 전쟁 끌고가놓고…전후보상엔 “너흰 한국인” [더팩트ㅣ조채원 기자] 경기도 강화군의 이사현(李思炫)은 아내와 돌이 갓 지난 딸을 둔 가장이었다. 스물 셋이 되던 1944년 2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징용 영장을 받았다. 식량 수탈과 강제징용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던 때였다. 그가 가지 않으면 집성촌에 함께 사는 가족들까지 괴롭힘을 당할 게 뻔했다. 병참부대 군속으로 편입된 그는 1945년 5월 중국 광시성 전장에서 총상을 입었다. 그 해 6월, 광시성 한 병원에서 파상풍으로 죽음을 맞았다. 중국 베이징에서도 약 2300km 떨어진 이역만리 타국에서다. 사망 후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유족들은 이 씨의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신사 합사 역시 유족 동의 없이 진행됐다. 유족들은 1992년이 돼서야 이 씨의 사망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1971년 한국 정부에 보낸 기록물 ‘피징용 사망자명부’를 통해서였다. 이 씨가 강화를 떠나 사망하기까지 행적을 좇던 유족은 1996년 일본 정부가 1993년 10월 한국 정부에 제공한 유수명부(일본 후생성이 1945년 일제 강점기 일본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행방불명된 16만148명의 조선 군인·군속 등의 신상을 담은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된다. 명부 속 이 씨의 창씨 이름, ‘이원사연'(李原思連) 옆에 적힌 합사제(合祀濟). 이 씨의 딸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협의회) 공동대표가 아버지의 야스쿠니 합사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다. 전쟁에 끌려가 죽음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전쟁을 일으킨 자들과 함께 신으로 모셔진다니,

[프레시안] “쓸모없는 바위섬 폭파하자”던 김종필도 지켜낸 독도인데…

2023년 5월 2일 473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7] 누구를 위한 ‘역사전쟁’인가 (下②) 독도에 대해 쓰려니 축구선수 박종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 전에서 한국이 일본을 2 대 0으로 이긴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 적힌 피켓을 들고 축구장을 돌았다. 그 때문에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동메달 시상식에도 오르지 못했다. “올림픽 시설이나 경기장 등에서 정치적 선전 활동을 금지하는 올림픽 헌장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6개월 뒤 동메달을 전해받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도는 우리 땅’인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일본에선 크게 반발했다. 축구에 져서 분한데 박종우 선수가 화를 돋우었다고 여겼다. 여기서 한 가지 새삼스런 사실이 드러났다. 독도는 한일 간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눈에는 독도가 국제분쟁지역의 하나로 비친다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이 1905년이니 경술국치(한일병합) 5년 전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첫 번째로 빼앗긴 영토가 독도다. 1945년 패전 뒤 잠시 숨죽이던 일본은 곧’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 우기기 시작했다. 그런 억지는 21세기 넘어와서도 이어진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못 박고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겠지만,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으로나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 우길 수 없다. 억지로 채워진 일방 논리일 뿐이다. 문제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그렇다고 ‘독도는 일본땅’이라 자신들의

[한겨레21] 과거사 사죄 요구가 ‘무릎 꿇리는’ 일인가

2023년 4월 29일 390

독일은 2000년 ‘기억·화해·미래 재단’ 기금 조성, 2006년까지 약 6조원 배상 또 ‘말’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에서 앞서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말이 거센 논란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때로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하고, 이를 해명하려 대통령실을 비롯한 여권이 내놓은 말이 문제를 더욱 키우는 건 이 정부 소통의 특성으로 굳어진 듯싶다. ‘어리석음’은 누구의 것인가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는데 100년 전에(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셸 예희 리 <워싱턴포스트> 서울·도쿄 지국장이 2023년 4월25일 오전 소셜미디어에 “번역상의 오류에 대한 의문과 관련해, (인터뷰) 녹음 파일을 교차 확인했다”며 올린 내용이다. 전날 보도된 윤 대통령 인터뷰 내용에 대해 국민의힘 쪽에서 나온 ‘번역상의 오류’란 주장에 대한 반박성이다. “안보협력이 긴요한 상황에서 (일본이) 무릎 꿇지 않으면 두 나라 관계 개선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나라를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는 점을 말을 한 것이다.” 같은 날 미국 현지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내놓은 해명도 논란을 키웠다.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8일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 일부(“50년도

[오마이뉴스] 독립선언서 집필자가 일본에 붙은 역적 되다니

2023년 5월 1일 49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남선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야”로 시작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육당 최남선이 만 18세 때인 1908년 11월 <소년> 창간호에 권두시로 실은 작품이다. 이 시를 쓴 최남선은 11년 뒤인 1919년에는 3·1 독립선언서 집필도 맡았다. 29세 때인 이 당시의 활약은 일제 재판 기록에도 묘사돼 있다. 1972년에 원호처(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에 담긴 재판 기록은 “각 서면의 기초는 최남선이 이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발표될 독립선언서·의견서·청원서 등의 집필을 그가 맡았다는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은 “1920년대 들어와 최남선은 <심춘순례><백두산 근참기> 등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했으며, 아울러 단군 연구에 많은 성과를 낳았다”고 한 뒤 “그러나 그는 1928년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한다.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재편성하는 조선사편수회였다. 거기에 들어간 것은 역사상 최악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역사 왜곡에 가담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친일 인생으로 평가됐다. 1890년 4월 26일 한성부에서 출생한 최남선은 12세 때인 1902년 경성학당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대일본해외교육회가 1896년 설립한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와 일본의 학연은 계속 이어졌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남선 편은 이렇게 서술한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같은 해 11월 도쿄부립 다이이치중학교에 입학했으나

[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40편 – 황기환_대한인(장철우 목사)

2023년 4월 28일 329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40편 : 대한인_황기환(장철우 목사) ☞ 39편 : 대한소년기개_부석현(부두전 손자) ☞ 38편 : 대한제국 애국가_신지영(신팔균 손자) ☞ 간호특별기획 7편 : 독립운동가 정종명_박경목 서대문형문소역사관장 ☞ 간호특별기획 6편 : 독립운동가_김순애 ☞ 간호특별기획 5편 : 파독간호사 정옥련 ☞ 간호특별기획 4편 : 파독간호사 김병연 ☞ 간호특별기획 3편 : 이정숙 지사(연구자 강영심) ☞ 간호특별기획 2편 : 임수명 지사_신지영(신팔균, 임수명 손자) ☞ 간호특별기획 1편 : 박자혜 여사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7편 : 효창 아리랑_김영심(김상옥 손녀) ☞ 36편 : 긴날이 맞도록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5편 : 해방의 노래_장영달(여운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 34편 : 여명의 노래_조정화(조문기 외동딸) ☞ 33편 : 김구 나의 소원_김용만(김구 증손자) ☞ 32편 : 이육사의 꽃_이옥비(이육사 딸) ☞ 31편 : 그리운 강남_김시중(백하 김대락 후손) ☞ 30편 : 소년남자가_최재황(권준 후손) ☞ 29편 : 한국행진곡_한종수(한형석 후손) ☞ 28편 : 해방행진곡_손명원(손정도, 손원일 후손) ☞ 27편 : 거국행_박만규(흥사단 이사장) ☞ 26편 : 애국가_김흥태(오희옥 지사 아들) ☞ 신흥무관학교 제8편 :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역사망언 3종세트… ‘대통령 속성 과외’는 실패했다

2023년 4월 26일 358

[주장] 삼일절 기념사, 강제동원 피해자 3자 변제, 이번엔 ‘일본 무릎’… 퇴행과 거짓을 어찌할까 윤석열 대통령이 기어이 ‘역사 망언 3종 세트’를 선보였다. 삼일절 기념사에서 그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반인도적 팽창에 대한 비판은 생략한 채 식민주의 역사학의 단골 논리인 정체성론(停滯性論, 조선은 근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3월 6일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 입장’을 발표하면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전범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월권을 자행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일찍이 역대 한국 대통령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급 역사 망언을 자행했다. 지난 2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망언의 전체 문장은 이렇다. “유럽은 지난 100년 동안 여러 번의 전쟁을 경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인 국가들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저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그들(일본)이 100년 전 우리의 역사 때문에 (용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설득력 면에서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습니다.” 미래를 위한 협력… 독일은 어떻게 했나 이 발언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한겨레] 사도광산 근무 일본인 “강제동원은 사실”…한·일 시민이 밝혔다

2023년 4월 25일 1154

강제동원 공동조사보고서 발간 “가동 나쁜 자(일을 못하는 이)에게 탄압 정책을 취하고 근로과에 데려와 때리는데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는 폭력이었다.” 옛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던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의 노무 담당자 스기모토 소지는 1974년 이 광산의 역사를 조사하던 혼마 도라오(1926~2006)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스기모토는 1940년 1월 충청남도 논산에서 조선인 100명(실제 광산 도착은 98명)을 ‘집단 모집’ 방식으로 강제동원한 인물이었다. 편지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놓고 현재 한-일 간에 치열한 줄다리기가 진행 중인 사도광산으로 조선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원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적혀 있다. “그들 입장(조선인 노동자)에서 본다면 강제노동을 당하고 1년 모집이 수년으로 연기돼, 반 정도 자포자기인 상태가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한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온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24일 사도광산의 강제노동 실태를 규명한 한·일 시민 공동조사보고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을 내놨다.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경찰이 만든 18개의 공문서, 스기모토 등 노무계 직원의 증언, 2004년 설립된 한국 정부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접수된 피해신고(148명이 피해자로 인정) 내용 등을 종합 검토해 사도광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1519명의 강제노동 실태를 종합적으로 규명해냈다. 한·일 시민들은 이 가운데 700여명의 명부를 완성했고, 18명의 사망 실태를 확인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광산에 말 그대로 ‘강제동원’됐다. 스기모토는 모집에 앞서 희망지역·고용기간·직종 등을 적어 조선총독부에 제출했고 희망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할당받기 위해 총독부·도청·군청 관계자에게 “외교전술”(접대를 의미하는 말)을 사용했다. 조선총독부의

[MBC 뉴스] 윤 대통령 방미길 오르자 학계·시민사회 “굴욕 외교 규탄” 비판

2023년 4월 25일 625

앵커 앞서 전해드린 것처럼 오늘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길에 올랐는데요. 학계와 시민사회 곳곳에서 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성균관 대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 250여 명이 시국 선언에 나섰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늘 오전, 서울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 ‘굴욕외교를 규탄한다’는 현수막을 든 교수와 졸업생, 재학생들이 모였습니다. “대미 굴욕 외교 전면 수정하라!” <수정하라! 수정하라! 수정하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길에 오른 날, 정부의 외교 행보를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임경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무기 제공 의사를 공언했어요. 대만의 ‘현상 변경’ 운운했어요. 안보 외교정책의 난맥상이 무능과 굴욕을 넘어서 이제 전쟁의 위기를 불러들이는 상태에‥” 안보 위기를 자초하면서도,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은 왜 모른 척 하냐고 따졌습니다. [김진균/비정규직교수노조 성대분회장] “대통령실 도청 사실은 대한민국 주권에 대한 유린 행위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실에서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서 지나치고 있습니다. 미국과의 굴욕 외교도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산적한 외교적 의혹에 입장도 안 밝힌 윤 대통령이 미국 방문길에 나섰다며, 유감을 나타냈습니다. [안충석/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 신부] “불법적 도청에 대한 미국의 사과와 우크라이나 지원과 관련된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미 정상회담 추진은 안 된다는‥” 용산 대통령실 앞에 모인 진보 성향의 정당들 역시 “도청은 미국의 내정 간섭이자 주권침해”라며 “누구를 위한 한미 동맹이냐”고 비판했습니다. MBC뉴스, 김정우입니다. 영상취재: 윤병순,

[오마이뉴스] 남한과 북한에 각각 자수한 어느 유명 시인

2023년 4월 25일 358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동환 전두환 손자인 전우원씨처럼 조상의 잘못을 사과하는 데 적극성을 보인 인물이 있다. 친일파인 김동환의 아들인 김영식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1994년에 펴낸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에서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전직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 문인의 민낯>은 “부친의 일대기를 펴낸 바 있는 파인의 셋째아들이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 학술 심포지엄에서 부친의 친일 죄과를 민족 앞에 사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라며 “친일 인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참회한 예도 드물지만, 후손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김동환 본인도 그런 자발성을 보인 일이 있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 작업이 한창일 때 발행된 1949년 3월 1일 자 <경향신문> 기사 ‘김동환 자수’는 “김동환(삼천리사 주간)은 작(昨) 28일 오후 2시 반민특위에 자진 출두하여 과거의 친일 행위에 대한 적당한 벌을 민족 앞에 받아야 할 것이라고 자수”하여 왔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3일 자 <동아일보> 2면 좌단에 따르면, 그 직전까지 반민특위는 영장 발부 일주일이 지나도록 김동환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재가 불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도주했다는 소문이 떠돌던 차에 자진 출석하는 그를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자수 직후에 그는 <삼천리> 3월호 발간을 준비하느라 바빴다며 “3월호 편집이 끝나면 출두할 각오로 있었던 것으로 3천만 민족 앞에 적당한 벌을 받아야

민족사랑 2023년 04월호

2023년 4월 21일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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