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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역발상 S3] 동아시아의 유행가 시대 1914~1945_6부

2024년 10월 21일 94

진행: MC노(노기환) 출연: 이준희, 신현준 PD: 김세호 그대 그립다(복혜숙. 1930년 음반): 원곡은 1929년 일본에서 발표된 후타무라 테이이치 노래 ‘君恋し'(삿사 코카(佐々紅華) 작곡). 이후 유행가 혹은 가요곡으로 불리며 여러 차례 다시 녹음되기도 한 일본 유행가의 고전이지만, 당시에는 재즈송으로 불림. ‘2부 구성’이라는 점이 당시 통상적인 유행가와 다른데, 말하자면 코러스(후렴/싸비)가 명확하다는 것. 가수라기보다는 배우였던 복혜숙에게는 이런 곡이 낯설었는지, 음정·박자를 자주 놓침. 조선 최초로 레코드에 ‘재즈송’이 표기되었다는 기록의 가치가 있음. 일본 초판에는 곡종 자리에 ‘폭스트로트’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920년대 일본 재즈를 2박자 폭스트로트 리듬, 즉 사교댄스 리듬이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줌 跳舞時代(춘춘, 1933년 음반): 곡종은 ‘유행가’로 표기되어 있지만, ‘문명화된 여자’인 화자가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니면서 “남녀 쌍쌍이 추는 트로트(道樂道)”에 빠져 있다는 가사가 나옴. 작사자 천진위(陳君玉)는 중국 대륙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대만에서 신문학운동에 참여. 작곡자는 대만 유행가 고전을 많이 작곡한 덩위셴(鄧雨賢). 앞서 들었던 ‘望春風’도 그의 작품. 하지만 도쿄에서 녹음이 진행될 때 편곡을 담당한 이는 니키 타키오(仁木他喜雄). 2003년에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는데, 춘춘의 후배인 가수 아이아이(愛愛)의 구술과 대만 가수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취입 여행을 가는 재연 장면이 나옴 ダイナ(디크 미네(ディック・ミネ). 1934년 음반): 1925년 미국에서 발표된 Dinah(해리 아크스트(Harry Akst) 작곡)의 번안곡. 1934년 나카노 타다하루(中野忠晴)의 음반이 처음 나왔고, 이어 같은 해 연말에 디크 미네의 ‘재즈송’ 음반이 발표되어 크게 히트. 디크 미네는

[보도자료]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

2024년 10월 15일 186

[보도자료] [다운로드]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 특별전 근현대사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을 맞아 오는 10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특별전시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서울시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와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의 후원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한다. 개막식은 16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던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순간이자,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사건의 전개 과정을 대동여지도, 대한여지도, 일본 점령지 실측지도, 조선내란지도 등 19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에서 제작된 다양한 지도를 통해 시각적으로 조명한다. 이와 함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의 최초 판본인 1880년 인제 경진판과 현존하는 『용담유사』 판본 중 가장 오래된 1893년 계사판,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포고문, 임명장, 농민군 편지를 비롯해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전시된다. 또한 청일전쟁 화보집, 사진, 일본 군인들이 사용하던 화투패와 같은 희귀 유물도 함께 소개된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다시금 요동치는 상황에서, 1894년의 혁명과 전쟁이 남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사진 별도 첨부 포스터

[오마이뉴스] 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2024년 10월 14일 229

[김종성의 히,스토리] 이승만을 위한 변명에 돈을 쏟아붓다 뉴라이트든 올드라이트든 이승만을 옹호하는 세력은 ‘공과 과를 함께 살피자’고 한다. 이럴 때마다 그들이 이승만의 ‘과’를 방어하기 위해 내놓는 논리들이 있다. 민족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등의 논리를 내세운다. 한국전쟁 전후에 민간인 학살을 많이 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피학살자들이 공산 빨갱이와 연관됐다’는 등으로 받아친다.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을 훼방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런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없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한편, 독립운동을 방해해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대응 논리가 부각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1919년이 아닌 1948년에 두는 건국절 논리를 통해 임시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간접적 접근법이 현재까지는 두드러진다. 이승만 옹호 세력이 가장 크게 곤란을 느끼는 부분은 아무래도 1960년 4·19혁명이다. 이승만을 옹호하려면 이승만을 몰아낸 4·19의 가치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이것만큼은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 시절의 1980년 헌법을 제외한 1963년 이후의 역대 헌법 전문에 4·19가 명기됐다. 이 점 때문에도 4·19를 섣불리 비판하기 힘들지만, 꼭 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20세기의 올드라이트와 달리 21세기의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세워 3·1운동을 간접적으로 부정한다. 헌법 전문에 명기된 3·1운동에 대해서도 생채기를 내고 있으니, 이들이 오로지 헌법 전문이 무서워 4·19를 부정하지 못한다고 보기는 힘들 듯 같다. 이승만의 선거부정과 실정이 너무도 명백한 데다가 어린 아이들까지 시위에

[오마이뉴스] 빨치산 문제의 허위를 알려주는 친일파

2024년 10월 14일 233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백일 빨치산은 산간지대에서 활동한 좌익 무장집단이란 이미지로 한국 사회에 각인돼 있다. 국토의 70%가 산이라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산악 지역이 무장세력의 장기적인 근거지가 되지 못한다. ‘빨치산’은 혁명적 신념을 가진 전사의 이미지도 연상시키지만, 한국에서는 부정적 이미지와 훨씬 많이 결합돼 있다. 2011년에 <역사비평> 제94호에 수록된 김진환 건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빨치산, 역사의 격랑에 선 사람’은 우리 사회에 유포된 빨치산 이미지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인간적인 빨치산’은 반공정권과 토벌 군경이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 시민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싶어했던 빨치산의 전형이다. 토벌작전이 계속되고 있던 1954년 지리산에서 토벌 당국의 적극적 후원으로 촬영된 <피아골>은 빨치산을 살인과 강간을 서슴지 않는 잔혹한 인간상으로 그려냈고, 이후 영화 <남부군>이 나오기 전까지 빨치산 관련 영화들은 <피아골>에서 묘사된 빨치산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부정적 이미지로 점철된 빨치산의 반대편에는 이승만 정권의 토벌 군경이 있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 수호자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이런 그림은 흔히 한국 사회의 극단적 좌우 대립을 설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빨치산 문제의 본질이 다른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진압군 사령관이 있다. 서울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묘소 위쪽인 장군1묘역에 누워 있는 김백일이 그런 증언을 역설적으로 하고 있다. 진압군 사령관 김백일의 역설 이곳 묘비 하단의 석판은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북간도 옌지현(연길현)에서 출생한 김백일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다. 석판은 “만주

[성명] 제1671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

2024년 10월 23일 183

제1671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 일 시 : 2024년 10월 23일(수) 낮 12시 ● 장 소 :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 ● 주 최 :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 주 관 : 민족문제연구소 ● 순서 – 사회 : 박이랑(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 여는 노래 <바위처럼> : 민족문제연구소 & 정의기억연대 활동가 ○ 주관단체 인사말 :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 주간보고 : 이나영(정의기억연대 이사장) ○ 연대발언 1. 헬렌 스캔런(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 교수) 2. 다 코스타 아라우조(HAK Association) 3. 송서영 장성욱 정우성 정유진 정해담 정해온 허지혁(전남 광양 옥룡북초등학교) 4. 야지마 츠카사(슈마리나이 강제노동 박물관 관장) ○ 성명서 낭독 : 김현지, 전민창(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바위처럼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 바위처럼 살자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 굳세게도 서 있으니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 바위처럼 살자구나. 제1671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 1992년 1월 8일, 이곳 평화로에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외친 ‘낮은 목소리’는 32년이라는 세월을 쉬지 않고 세상을 향해 평화와 인권의 메아리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평화와 인권이 살아 숨 쉬어야 할 이 소중한 공간이 혐오와

[새책소개] 『식민지 비망록』 (전3권)

2024년 10월 2일 525

바로가기 >>>☞ [도서구매]  〈주요내용〉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식민지 비망록』 (전3권) 일제가 패망하여 이 땅에서 물러간 지 벌써 8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있다. 제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해방의 감격이 쉽게 잊힐 리야 없겠지만, 그만한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그 시절을 몸소 체험한 세대의 인구구성비율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바꿔 말하면 일제강점기의 일을 기억하는 방법이 그야말로 오롯이 간접체험이나 사료발굴에만 의존해야 하는 비율이 그만큼 더 높아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탓인지 일제강점기의 일이라고 하면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마치 남의 집 얘기인 듯 여기는 이들도 더러 있고, 일제침탈사와 관련한 잘못된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짚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생기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그것이 일제잔재에 속하는 줄도 모르고 그러한 용어나 제도를 버젓이 사용하기도 하고, 설령 그것이 일제가 남겨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서둘러 이를 바로잡지 않는 상황이 무심코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이번에 『식민지 비망록』(전3권)이라는 이름으로 펴내는 이 책들은 부제(副題)에 밝혀놓았듯이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각권 24꼭지씩 도합 72꼭지(1,053쪽 분량)에 달하는 각각의 글은 컴컴한 망각의 문 안에 갇혀 있는 아스라한 기억 한 조각을 되살려 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에는 참으로 고단했던 식민지의 일상, 혹독했던 전시체제기와 침략전쟁의 광풍, 그리고 이 땅에서 무수하게 벌어졌던 별스러운 일제침탈사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실상을

[한겨레] 죽음보다도 무서운 망각…우리 주변의 ‘일제’ 잔재 [책&생각]

2024년 10월 11일 466

식민지 비망록 1~3: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이순우 지음 l 민족문제연구소 l 각 권 1만8000원 이 땅에서 ‘일제’(일본제국주의)는 과거이면서도 현재다. 각종 일본 문화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젊은이들에게 식민지 시절은 아주 옛날이다. 실제 일제 통치가 종식되고 강산이 여덟 번이나 변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현 정부의 ‘덮어놓고 친교’ 정책에 분개하는 이들도 많다. 일제강점기와 그들이 패퇴한 날에 대한 평가, 심지어 당시 조선 사람들의 국적을 두고서까지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시의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20여년간 한반도에 산재한 근대 역사의 흔적들을 탐구해온 저자의 문제의식이자 질문이다. 군인에게 하는 덕담인 ‘무운장구’(武運長久·무인으로서 운이 길고 오래가다)와 연무대(논산훈련소)·계룡대(육·해·공군본부)처럼 군부대에 붙는 ‘○○대(臺)’라는 용어가 일제 침략전쟁과 맞닿아 있단다. 공간은 또 어떤가.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달렸다는 현장(훈련원터)에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이뤄졌으며, 동대문운동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은 훈련도감 분원(하도감) 자리에 일본 황태자 아키히토의 결혼식을 기념해 지은 것이란다. 택시 합승과 우량아 선발대회, 금 모으기 운동도 일제 전시 동원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고, 금 생산을 늘리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암석에 구멍을 내고 발파하는 전문인력 양성소를 세워 인왕산 산세를 크게 훼손시켰다. 소개된 일제 잔재나 침탈사의 흔적을 보노라면, 국민학생(초등학생) 시절 ‘죽음보다도 굶주림보다도 늙음보다도 무서운 것이 망각’이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오마이뉴스] ‘반국가세력’ 운운한 전향 친일파

2024년 10월 8일 362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한경 일제강점기 말기는 ‘선전의 과잉 시대’였다. 일제가 부쩍 말을 많이 한 때다. 일본과 한국이 왜 하나인지, 내(內)와 선(鮮)이 왜 일체인지, 한국인이 일왕(천황)에게 왜 충성해야 하는지 등등을 귀가 따갑도록 선전한 시기다. 우리에게 충성하라는 잔소리가 심해졌으니 이것도 체제 위기의 증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에 일제의 대변자가 되어 언론 기고, 방송, 강연, 좌담 등의 기회에 나팔수 역할을 한 핵심 세력이 전향한 운동권 출신들이다. 민족주의운동이나 항일운동을 했던 이들이 친일 우파로 전향해 그런 활동을 했다. 1990년을 전후한 세계적 탈냉전으로 냉전체제의 권위가 약해지자, 기존의 반공 이론가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퇴조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와 비슷하게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원조 친일파 혹은 1세대 친일파들이 한층 강해진 대중의 분노 앞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는 경향이 이어졌다. 이처럼 영향력이 약해지는 데다가 이들이 나이를 더 먹었기 때문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이 있었던 1930년대에 일제는 새롭게 수혈한 친일파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조 친일파와 달리 2세대 친일파들은 메시지가 너무 많고 현란했다. 한국과 일본은 왜 하나인지, 한일은 왜 협력해야 하는지 등등을 화려한 언어로 선전했다. 1930년대 중후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2세대 친일파들이 너도나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징용·위안부·징병 호응을 독려하는 일들이 1940년 전후에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을 이뤄낸 1세대 친일파들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대중 앞에 가급적 나서지 않았다.

[경향신문] 대만 문화부는 장제스 동상을 없애는데···한국에선 뉴라이트에 의해 부활

2024년 10월 7일 250

전직 대통령 동상 전수조사 해보니 (하) “장제스 동상은 권위주의의 상징, 목표는 개인숭배의 근절.” 대만 문화부는 최근 장제스 전 총통 동상 철거를 추진하는 이유에 대한 경향신문의 서면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그의 이름을 딴 거대한 기념관과 그 앞에서 엄숙하게 행해지는 의장대 교대식, 대만 전역에 설치된 수많은 동상이 막강한 그의 위세를 상징했지만 이제는 구시대의 잔재로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국의 전직 대통령 동상 57개 중 84%가 2009년 이후 지어졌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동상 3개가 지어졌고 9개의 동상 건립이 더 추진 중이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이 대부분이다. 주변국과의 비교, 조형적 특징, 역사적 배경을 종합하면 동상 건립은 특정인의 우상화와 권위주의 확산을 의도한다. 일각에서는 동상 건립 열풍을 윤석열 정부에서 뉴라이트의 부활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관련 법이나 조례가 미비한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마저 부재한 동상 건립은 이데올로기 대결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대만 문화부 “장제스 동상은 지도자 숭배 지속 목적이었다” 대만 문화부에 따르면 장제스 동상 철거 등의 조치는 급작스럽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2016년 민주진보당(민진당)으로 대만의 정권이 교체 이후 실시되고 있는 권위주의 독재 청산, 진실 복원 계획의 일환이다. 대만 문화부는 경향신문에 보낸 답변서에서 “2018년 5월 변혁정의촉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진상규명, 권위주의 상징물 처분 등을 수행하고 있다”며 “문화부는 현 단계에서 목표를 개인숭배·권위주의 숭배 근절로 삼고 중정기념당 개조를 추진한다. 2024년 7월15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