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지원병 형님들이…” 한국 어린이들을 이용한 친일파

2024년 5월 7일 8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원수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가 어린이들에게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그 아이들이 이제는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돼 있으니, 한국인 전체에게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동요 ‘고향의 봄’ 하나로도 파급력은 충분히 설명된다.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거듭거듭 표창했다. 1970년에는 서울교육대학과 노래동산회가 제8회 ‘고마우신 선생님’상을, 1973년에는 한국문인협회가 제10회 한국문학상을 수여했다. 1974년에는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가 제6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자로, 1978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제23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자로, 1980년에는 문예진흥원이 흙의문학상·반공문학상·아동문학상을 통합한 대한민국문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67세 된 이원수가 예술원상을 받은 1978년은 박정희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체제의 말기였다. 국민들의 저항을 헌법과 일반 공권력으로 막아내기 힘들어 긴급조치라는 탈헌법적 수단으로 겨우겨우 막아내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문화공보부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예술원이 동시집 <종달새> <빨간열매>와 동화집 <파란구슬> <호수 속의 오두막집> 등을 저술한 이원수에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여했다. 그에게 상을 준 이유가 그해 9월 20일 자 <매일경제>에 설명됐다. “26년부터 오늘까지 아동문학에 헌신하며 동시집 <종달새>를 비롯, 수많은 동시·동화집을 펴내 아동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아동문학을 발전시킨 공로가 인정됐다.” 아동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키는 그의 문학 활동은 서른네 살 이전에도 왕성했다. 1945년 이전에 주로 했던 일은 ‘식민지 아동 순화’였다. 국권침탈 이듬해인 1911년 11월 17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이원수는 서당을 거쳐 마산공립보통학교(훗날의 성호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해 1928년 졸업했다. 문단에 데뷔한 것은 마산공립상업학교(훗날의 마산상고·마산용마고)에 재학할

[경인방송] [의정언박싱] 일제의 잔재 청산, 어디까지 왔나?

2024년 5월 3일 241

[기사원문] <2024-05-02> 경인방송☞ [의정언박싱] 일제의 잔재 청산, 어디까지 왔나? – 이경혜 도의원 “260명의 친일 인물, 161개의 친일 기념비 등 경기도 일제 잔재 확인” – “경기 지역 학교의 일제 잔재도 391개에 달해” – “친일 잔재 청산 단기 사업으로 마무리하면 안돼” ■ 방송 : 경인방송 라디오 <박성용의 시선공감> FM90.7 (24년 5월 1일 18:00~20:00) ■ 진행 : 박성용 ■ 인터뷰 : 이경혜(더불어민주당·고양4) 경기도의원 & 장혜서 취재mc ● 박성용: 경기도 내 핫이슈를 활짝 열어놓고 시민들의 의견, 의회의 해법 들어보는 시간 의정언박싱입니다. 매주 수요일 경기도의회 의원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오늘 함께해야 할 분은 이경혜 경기도 의원입니다. 오늘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경혜 의원님? ○ 이경혜: 네 안녕하세요. ·········<중략>········· ● 박성용: 알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언급도 해 주셨는데, 대표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 이경혜: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식민지 지배를 강화했어요. 이로 해서 한국 사회에는 많은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데요. 다음은 대표적으로 일제 잔재를 몇 가지 좀 말씀을 드려볼게요. 언어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 교육이 강요되면서 일본어 잔재가 남아 있죠. 예를 들면 오뎅, 다데기, 곤색 등 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인 거죠. 또 건축물에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축물 중에 일부는 일본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보도자료] 민주유공자법 왜곡보도 일삼는 조선일보 규탄 기자회견

2024년 5월 2일 439

[보도자료] [다운로드] 민주유공자법 왜곡보도 일삼는 조선일보 규탄 기자회견 일시 : 2024년 5월 2일(목) 오전 11시 장소 : 조선일보사 앞 주최 :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민주유공자법제정추진단, 박종철기념사업회, 이한열기념사업회, 전태일재단 1. 귀 언론사에 열사 정신의 정수인 사랑을 전합니다. 2.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과 민주유공자법제정추진단(이하 추진단)에서는 2021년 6월 21일부터 현재까지 1037일째 국회 앞에서 ‘민주유공자법 제정 촉구 1인 시위’를 벌여왔으며, 천막농성은 936일째 벌이고 있습니다. 3. 그 결과 지난 4월 23일 국회 정무위에서는 민주유공자법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하였습니다. 4.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는 어느 언론매체보다 민주유공자법 제정에 반대하는 보도를 일삼아 왔으며, 심지어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반대하는 기사를 내보면서면 민주유공자들의 유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기사를 스스럼없이 보도하였습니다. 5. 이에 우리는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를 규탄함과 동시에 유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점에 대해 법적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개최합니다. . 6. 주최단체외에 여러 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한 이 기자회견을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 여러분들의 적극적 보도와 당일 취재를 요청합니다. 첨부 1. 기자회견 식순 첨부 2. 기자회견문 첨부 1. 기자회견 순서 사회 (한현우 민주유공자법제정추진단 상황실장) -. 민중의례 -. 발언 1 :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 발언 2 : 장현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의장 -. 발언 3 : 이덕우 전태일재단 이사장 -. 주요 시민사회단체 대표 발언 -. 기자회견문 낭송 첨부 2. 기자회견문 민주유공자법 왜곡보도 일삼는 조선일보를 규탄한다 조선일보는 지난 4월 24일

[한겨레] 송현공원에 이승만기념관 대신 ‘4월혁명 역사관’ 세우자 [왜냐면]

2024년 5월 2일 219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⑤ 한상권 | 덕성여대 명예교수 윤석열 정부의 ‘역사 쿠데타’ 시도에 힘입어 이승만 우상화 작업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승만기념관 건립 모금에 윤석열 대통령이 동참한 가운데, 오세훈 서울시장도 서울 종로구 송현공원에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세훈 시장은 시정 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의에 “네”라며, “가능성이 제일 크게 논의되는 데가 송현공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독재자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면 안 되겠지만, 특히 송현공원은 안 된다. 이곳은 4월혁명의 ‘장소성’을 간직한 역사 공간이기 때문이다. 송현공원은 이승만 정부가 민주시민을 향해 발포한 중앙청(지금의 광화문)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공터다. 1960년 4월19일 중앙청 앞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 21명과 부상자 172명이 발생하였다. 사망자 가운데 구순자(당시 16)와 최신자(16)는 덕성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들의 모교인 덕성여중이 바로 송현공원과 인접해 있다. 이처럼 학살 현장의 지근거리에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것은 광주 금남로에 전두환 기념관을 짓겠다는 발상과 진배없다. 서울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구순자·최신자 학생의 묘비에는 “1960년 4월19일 중앙청 앞 시위 중 총상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의 피격 시간을 오후 5시50분께로 언론은 보도하였다. 두 여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날 오후 5시 이후의 발포는 경찰의 발포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시위대의 파상 공격에 수세에 몰렸던 경찰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오후 5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부터였다. 경찰은 그때까지의 수동적인

[역발상 시즌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4부_”1960년대 (1)”

2024년 5월 2일 154

☞ (04.30)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4부_”1960년대 (1)” 오늘의 이야기 :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4부_”1960년대 (1)” 초대손님 : 이영미(대중문화연구자) 이준희(옛가요 전문 연구자) <빨간 마후라> 영화: 1964년 3월 명보극장에서 개봉. 신상옥 연출, 신영균·최은희·최무룡·남궁원·윤인자 등 출연. 원작은 1963년 10월부터 6주 동안 MBC 라디오에서 방송된 한운사 작 연속극 주제가: 1964년 자니브라더즈 노래.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연속극 주제가는 같은 한운사·황문평 작품이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곡 <아빠의 청춘> 영화: 1966년 7월 아세아극장·파고다극장에서 개봉. 정승문 연출, 김승호·남정임·태현실·이대엽 등 출연. 원작은 1964년 7월부터 한 달 동안 MBC 라디오에서 방송된 박홍근 작 연속극 주제가: 1966년 오기택 노래. 반야월 작사, 손목인 작곡 <모녀 기타> 영화: 1964년 5월 을지극장에서 개봉. 강찬우 연출, 이민자·태현실·신영균·김희갑·황해·남일해 등 출연 주제가: 1964년 최숙자 노래. 조진구 작사, 손목인 작곡. 현재 확인되는 마지막 SP음반 1940~60년대 20년 동안 전개된 대중음악의 변화상을 곡절 많은 가족 스토리와 엮어 낸 작품. 주제가 음반은 최숙자가 녹음했지만, 영화에서는 백설희가 노래. 주인공인 어머니(이민자)의 노래는 이남순, 딸(태현실)의 노래는 백설희가 전담 <맨발의 청춘> 영화: 1964년 2월 아카데미극장 개봉. 김기덕 연출, 신성일·엄앵란·트위스트김 등 출연 주제가: 1964년 최희준 노래.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1960년대 한국 영화, 대중가요의 반짝이는 순간을 표상하는 작품. 그래서 신성일 자서전의 제목도 <청춘은 맨발이다> <총각김치> 영화: 1964년 8월

[한겨레] 유네스코 기록유산 4·19, 세계 시민혁명의 교과서 되다 [왜냐면]

2024년 5월 2일 146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④ 오유석 | 성공회대 연구교수(사회학)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지난해 5월19일 ‘4·19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 등재했다.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넘어, 4·19혁명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는 의미다. 이 기록은 1960년 2·28 대구 학생시위부터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 그 원인, 전개, 그리고 혁명 이후 사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등 혁명의 전후 과정과 관련한 것들이다. 4월혁명에 참여한 다양한 주체들이 생산한 문헌, 녹음·영상, 구술, 사진, 수기 및 편지, 일기, 박물, 신문, 정부 공문서, 유인물·선언문·성명서 등을 포함한다. 현장 사진기록과 수기들은 지금도 우리가 왜 민주주의를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우쳐준다. 1960년 4월19일 그날,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독재의 하수인이 된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학생과 시민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고등학생, 대학생, 시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 피로 세운 용기의 기록이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4·19혁명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15년, 냉전이 빚은 한국전쟁 종료 이후 7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나 성공한 혁명으로, 세계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됐다. 한국이라는 분단된 최빈국에서 비롯한 이 혁명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국 ‘더 타임스’에 실렸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기대하는 것과

[오마이뉴스] 이것이 ‘친일 재테크’… 그 재산 다 어디서 났을까

2024년 4월 29일 369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진태 일제는 고위층 친일파의 통장 잔고에도 신경을 썼다. 이는 일본의 의리가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친일파들의 협력이 없으면 한국을 지배하기 힘들 정도로 민중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우호세력을 지켜주고자 주요 친일파들의 재정 상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894년에 일본은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 군대는 조선 정부군과 청나라군에 이어 동학군까지 제압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우위만으로는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다. 의병 투쟁 등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견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면전 방식으로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던 일본은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에 경찰권을 빼앗는 방법으로 대한제국을 약화시켰다. 1894년의 군대 출병으로 우위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친일파들의 협력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을 받자니, 그들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임야 착취에 친일파 참여시킨 일제 일제는 주요 친일파들이 재테크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만들었다. 이들을 위해 특강도 열어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20일에 훗날 한국외환은행(하나은행)이 들어설 조선귀족회관에서도 그런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바다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달 23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2면 중간은 그를 혼다 박사로 부른다. 일본 박사인 혼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이완용 백작 등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기사는 “이완용 백(伯), 박제순 자(子), 조중응 자,

[한겨레21] ‘시민의 송현공원’에서 이승만·이건희·주차장은 빼라

2024년 4월 29일 181

[기사원문] <2024-04-26> 한겨레21☞ ‘시민의 송현공원’에서 이승만·이건희·주차장은 빼라 시민단체 연대체 ‘서울워치’, 졸속 결정된 개발 계획 공론화 요구 전문가들, 균형발전·환경·교통·조경 관점에서 재검토 필요 2024년 4월19일 오전 민족문제연구소 등 16개 독립운동·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과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김영배, 오기형 의원, 곽상언 당선자 등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우리 국민은 제22대 총선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실정과 역사 퇴행을 준엄하게 심판했다. 이제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이승만기념관은 물론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그 어떤 우상화와 미화 작업에서도 당장 손을 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김황식)이 추진 중인 ‘이승만기념관’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이하 송현공원) 안 건립을 지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설익은 발언  같은 날 불교계에서도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회장 최승태)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송현공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은 불교계를 범죄의 소굴로 몰고 ‘정화 유시’를 발표하여 불교계를 분열과 갈등의 나락으로 몰아간 장본인이다. 그런데 송현광장(송현공원)은 4·19혁명 당시 경무대(청와대)로 가는 길목이며, 조계종과 태고종 (사찰) 등 불교계와 이웃하고 있다. 이런 공간에 이승만기념관을 짓는 것은 불교계를 모독하는 처사”라고 밝혔다.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는 미국에서도 나왔다. 안창호, 박은식, 심훈 등 11명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오늘날 이승만에 대해 많은 사료에 근거한 평가는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실패한 인물이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동안 축적된 여러 사료들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영상] 일본 국회의원을 만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승소 원고단

2024년 4월 29일 132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승소 원고단 조속한 판결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 국회의원을 만나다 -2023년 3월 26일 일본 도쿄 -참가자: 이고운(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정종건(미쓰비스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고 정창희), 박상운(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장완익(변호단), 김정희(변호단), 임재성(변호단), 이국언(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김정은(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김세호(민족문제연구소 PD),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승소 원고단 일본 피고기업 항의 방문

[한겨레] 이승만은 끝까지 책임을 전가하며 권력을 지키려 했다 [왜냐면]

2024년 4월 25일 866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③ 오수창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4・19혁명으로 국민의 뜻이 확인되자 이승만은 4월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으며 ‘책임을 지고’ 또는 ‘학생들 주장이 옳다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설명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연 그랬던가? 그 담화에서 이승만은 더 이상 국민의 뜻을 확인할 여지가 없는데도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마지막 문장은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였다. 사임의 조건을 걸고 개헌 의지를 밝힌 담화를 물러나겠다는 성명으로 읽을 수는 없다. 그날 오후 국회에서 이승만의 담화가 무슨 뜻인지 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허정 외무부 장관이 문구상의 표현일 뿐 사실상 하야라고 전했지만, 그것이 이승만의 진의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결국 국회는 만장일치로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을 결의했다. 오전의 담화를 사임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다음날 이승만은 국회에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한다는 사임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직 사임이 국회의 결의로 인한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이승만의 4월26일 담화가 ‘하야 성명’이라고 불리게 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담화에 앞서 이승만을 면담한 시민・학생 대표, 그리고 계엄사령부까지 그의 ‘하야’를 발표하여 사임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4월19일 항쟁은 물론 25일 대학 교수단 시위 후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 지위를 지키려 했던 사실은 국민의 항거가 시작된 후 추이를 살펴보면 그 본모습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