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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국 경제발전은 식민지배 덕?” 일본 전문가가 꼬집은 진실은
[인터뷰-2]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소장 남기정 교수 가깝고도 먼나라로 불리는 일본. 최근엔 중국이 앞서고 있는듯 하나 일본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나라 1순위를 다퉈왔습니다. 하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어느 한쪽이 이사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양국이 잘 지내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과거사 문제 등에 있어 간극을 못 좁히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오는 12일 한국 외교부는 피해자와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강제징용 문제 해법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열고 일본측에 제시할 구체적 방안을 확정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에서도 어떤 방안으로 결론이 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과연 양국이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무엇이 논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한번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 남기정 교수를 만나 궁금점들을 해소해 보았습니다. 다음은 일문 일답 발췌. Q. 한국과 일본, 서로에게 필요하거나 중요한 존재인가? A: 양국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라는데 대한 의구심이 있는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과거 냉전기에는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 위계적인 분업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서로에게 매우 불가결한 존재로 인식됐습니다. 탈냉전기에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이익과 가치를 공유해왔고요. 그런데 마침 2011년 전후 일본과 중국간 GDP가 역전 되는 시기부터 동아시아에서 매우 유동적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가 역사문제도 얽히면서 장기적이면서 저강도의 복합 갈등시대에 접어들었죠. 지정학과 역사라는 분야에서 이익과 가치가 엇갈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한국인의 삶에
[시사포커스] 일제가 마지막까지 감시한 789명의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민족문제연구소,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분석 수년간 자료 발굴 정리 끝에 봄에 발간 일제강점기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독립운동가들의 감시에는 ‘밀정’이 뒤에 숨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조선인은 철저히 감시당했다. 대표적인 것이 ‘감시카드’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 사상범 등을 감시할 목적으로 사진을 찍고, 주요 정보를 기록했다. 감시카드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내규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요시찰제도’를 시행했다. 요시찰제도란, ‘배일사상을 품고 식민지배에 저항하거나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조선인’을 주기적으로 감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일제는 요시찰 인물들의 정보를 기록한 명부를 만들어 활용했다. 일본의 국립공문서관에는 일제가 해방 직전까지 감시한 조선인 789명에 대한 사찰보고서, 즉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가 남아 있다. 이 보고서는 1945년 3월, 함경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에서 작성해 일본 경시청과 조선총독부 및 관계 기관에 제출한 것이다.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의 기록을 예로 보자. – 생년월일 : 1913.3.28 – 주소 : 광주형무소 – 인상특징 : 키 5척 3촌, 보통 체격. 머리카락은 5푼 길이로 짧게 깎음. 얼굴은 둥글고 희며 이마가 넓다. 눈썹이 짙다. 수염은 조금 있다. 목소리가 형형하다. 오른쪽 눈 아래에서 윗입술까지 약 2촌 길이의 상흔이 있다. – 시찰요점 : 무정부주의자. 1935년 상하이 조선인회 부회장 이용로 살해범인 엄순봉(이명 엄형순)의 공범. 치안유지법 및 살인죄, 징역 13년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일제로부터 감시를 당했나?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 기록된 ‘시찰요점’ 부분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감시당했는지 알 수 있다. 크게
[한겨레] 시대 향해 울부짖는 붓글씨 “기록은 기억하려는 투쟁”
[한겨레S] 인터뷰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간 함세웅 신부 역사·기도·붓글씨 엮은 책 출간 예쁜 붓글씨 배우고자 했다가 “신부님, 목숨 걸고 쓰세요” 혼쭐 “제게 기록은 악과 싸우는 투쟁” 함세웅 신부의 수식어는 ‘투쟁하는 신부’다. 그는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만들고, 박종철 물고문 사망 사건을 폭로하는 등 1970~1980년대 독재와 불의에 맞서며 시대와 함께했다. 2012년 주임신부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거리에서, 언론을 통해서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함 신부는 2021년 10월부터 2022년 9월까지 52차례 <한겨레> 온라인판에 연재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라의눈 출판)를 얼마 전에 책으로 엮어 냈다. 480쪽짜리 두툼한 책엔 해방부터 5·16 군사반란, 부마항쟁, 박근혜 탄핵 등 격동의 현대사가 담겨 있다. 책에는 시대의 아픔과 함께한 그가 역사의 현장에서 깨닫고 찾은 의미들을 신학적으로 풀어 놓았다. 52편의 글 서두엔 성서 구절을 인용하고, 다음엔 역사적 사건을 풀고, 기도문으로 마무리하며 각 주제어를 붓글씨로 썼다. 함 신부는 “은퇴 뒤 강론지를 엮고 싶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또 다른 형태로 내 삶을 종합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편안하고 좋았어요. ‘아멘’이 많이 들어가지만, 책은 서점의 역사 코너에 놓였어요. 하지만 사실 저는 투사가 아니고 기도하는 사제입니다” 하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2일 함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는 기념사업회 사무실은 그가 나고 자란 생가에 자리를 잡았다.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신부님 생가에 차렸습니다? “2007년
[연합뉴스] 피해자측 징용토론회 참석키로…”정부 잘못 지적이 낫다 판단”
피해자 지원단체·법률대리인 등 12일 공개토론회 참석 (서울·광주=연합뉴스) 오수진 차지욱 기자 =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와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이 오는 12일 정부 주도로 열리는 강제징용 공개토론회에 참석한다고 6일 밝혔다. 이들은 전날 공개토론회 참석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토론회에는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국언 대표,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 임재성 변호사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피해자 측은 외교부로부터 토론회 참석 요청을 받은 뒤 참석 여부를 고심해 왔다. 참석해 의견을 제시해도 정부가 마련 중인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법안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에서다. 정부 해법은 행정안전부 산하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주체가 돼 한국 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금 대신 변제하는 방식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측은 재단이 변제 주체가 되더라도 일본 피고기업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해야 하며 기업이나 일본 정부의 사과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국언 대표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참석 결정 이유에 대해 “국민, 언론이 모두 지켜본 가운데 정부의 현재 기조, 이 문제에 대한 인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적극적으로 허점이나 잘못을 지적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윤석열 정부는 (해법안을) 정해두고 있고 마지막 통과의례로 가는 것 같은데 토론회가 요식 행위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라고도 지적했다. 외교부와 한일의원연맹이 공동주최하는 공개토론회는 12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토론회에서는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이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한
[한겨레] 외교부, 12일 강제동원 해법 토론회…피해 배상안 제시될 듯
강제동원 해법 논의 마지막 수순 외교부가 오는 12일 일제강제동원 문제 해법을 논의하기 위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다. 정부가 사실상 강제동원 해법 마련 논의를 마무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날 토론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안이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4일 <한겨레>의 취재를 종합하면, 외교부와 한일의원연맹은 오는 12일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을 논의하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한다. 토론회에는 서민정 아시아태평양국장과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이 발제자로 나선다. 외교부는 이날 피해자 지원단체와 피해자 대리인 그리고 지난 7∼9월 정부 주도로 열렸던 민관협의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며 토론자로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공개토론회를 두고 정부가 마련한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국내 기업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해법으로 마련하고 이미 피해자 쪽에 설명을 마친 상태다. 외교부는 일본 쪽에도 이 같은 우리 쪽 계획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일 <산케이신문>은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이 지난달 26일 도쿄에서 열린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의 회담에서 이르면 이달 중 강제동원 배상 문제와 관련한 우리쪽 해결책을 발표하겠다는 의향을 일본쪽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피해자 단체 등에선 정부가 강제동원 해법에 대한 답을 정해놓고 요식 행위에 나선 것이 아니냐며, 토론회 참석 여부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피해자 쪽에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주체가 돼, 일본
[SBS] 양금덕 할머니 “나는 ‘양관순’…동냥 같은 돈 원치 않아”
강제동원 배상판결을 이끌어낸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 기업이 아닌 한국 기업이 대신 배상금을 내는 방안에 대해 동냥한 돈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강제동원 해법 모색을 위해 조만간 공개 토론회를 열겠다는 계획이지만 진통이 예상됩니다. 이어서 김아영 기자입니다. 오늘(3일) 자택에서 만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상장 하나를 꺼내 보입니다. 한 달 전, 외교부의 제동으로 국민 훈장을 받지 못하게 된 뒤 한 시민단체로부터 받은 상입니다. [양금덕/강제 징용 피해자 : ((양금덕이 아니라) 양관순이라고 되어 있네요? 양관순?)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내가 야무지다고, 성이 양 씨야. 그래서 내가 양관순으로 불리는 거야.] 양금덕 할머니는 2018년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배상 확정판결을 이끌어냈지만, 지금까지 이행된 건 없습니다. 할머니의 입장은 간단했습니다. 잘못한 쪽에서 배상해야 한다는 겁니다. [양금덕/강제 징용 피해자 : 잘못한 놈들이 줘야지 왜 우리 한국에서 줘. 직접 그 사람들이 주면 받아도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동냥한 것 같이 해갖고 나는 그런 돈은 싫어요.] 행안부 산하 피해자 지원재단에 60억 원을 출연한 포스코 측은 최근 추가로 40억 원을 더 낼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지원재단을 통해 한국기업 돈으로 갚는 안이 유력하다고 피해자 측은 보고 있습니다. 외교부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은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해법 모색을 위한 토론회는 설 전쯤 열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양금덕/강제 징용 피해자
[연합뉴스] 해외 거주 원폭 피해자 수당 지급 끌어낸 곽귀훈씨 별세
(서울·도쿄=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박상현 특파원 =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본 뒤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에게도 일본 정부가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끌어낸 피폭자 곽귀훈(郭貴勳)씨가 지난달 31일 오후 11시58분께 경기도 광주의 위더스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2일 전했다. 향년 98세. 교도통신도 이날 일본 시민단체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 이치바 준코(市場淳子) 회장을 인용해 고인의 별세 사실을 전했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9월 전주사범학교 5학년 때 히로시마 서부에 있던 부대로 징집됐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6일에는 원폭 투하 지점에서 약 2㎞ 떨어진 공병대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상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해 9월 귀국한 뒤 1950년대 일간지에 피폭 수기를 연재해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제기했다.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은 끝났다”는 대답만 들었다. 1975년 아사히신문사의 ‘피폭한국인’ 책 발간에 참여했다. 고인은 전주성심여고, 금산상고 지리 교사와 서울 명성여고 교감, 동대부고 교장으로 일한 뒤 1989년 정년퇴임을 계기로 본격적인 권리 찾기에 들어갔다. 1998년 입원 치료차 일본에 갔다가 7월 귀국 후 수당 지급이 중단되자 같은해 10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원호 수당을 일본 밖에 거주한다고 해서 못 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오사카지법에 소송을 냈다. 2001년 6월 1심과 2002년 12월5일 오사카 고법 2심에서도
[오마이뉴스] 대일 외교 굴욕… 윤석열 정부 어디까지 갈 건가
[김종성의 히,스토리] 산케이 보도에 담긴 참담함… 한국군 장병 굴욕으로 이어질 수도 일제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의 종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산케이신문>에서 나왔다. 이 신문의 1월 1일자 기사인 ‘단독: 징용공 소송 문제, 한국이 1월 중에라도 해결책 제시, 일본 측에 전달(<独自>徴用工訴訟問題、韓国が1月中にも解決策提示、日本側に伝達)’이 그런 내용을 전했다. 이 기사는 지난 12월 26일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외무성 아시아대양국장의 협의를 소개하면서 “빠르면 1월 중에 한국 정부가 해결책을 공표할 의향을 보인 것이 31일 알려졌다”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서씨는 원고단이나 지식인들이 참가하는 공청회에서 의견을 청취한 뒤 신속하게 결론을 내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라고 한 다음, 한국 외교부가 제시한 방안을 이렇게 요약했다. “해결책은 전 징용공 지원 활동을 하는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패소한 일본 기업의 배상금에 상당하는 기부금을 한국 기업 등으로부터 모금해 원고에게 지불하는 안이 유력하다.” 이 방안은 지난 12월 26일에 피해자 법률대리인단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및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성명서와도 일치한다. 성명서는 “지난주 외교부 측으로부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력한 안을 청취”했다며 “한국 정부 유력안은 (1)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국 기업들의 기부를 받아 재원을 마련하여 (2) 일본 기업을 상대로 승소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변제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월중 전범기업 대신해 한국 재단이 피해자에게 금전 지급” 피해자 측이 외교부로부터 들은 내용과 <산케이신문>이 보도한 내용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을 대신해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징용 문제를 마무리하겠다는
[오마이뉴스] 거칠 것 없는 영훈국제중 설립자의 면모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영훈 사또는 그 지역 왕이나 다름없었다. ‘원님 재판’이란 말도 있듯이, 행정뿐 아니라 사법 권한도 갖고 있었다. 경찰권도 있었고 징세권도 있었다. 군수, 세무서장, 법원 지원장, 경찰서장, 검찰 지청장 등을 사또 한 사람이 겸했던 셈이다. 지역 기관장 회의를 따로 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군수 권한이 약해진 결정적 계기는 일본 침략이다. 1894년에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침입한 일본이 개혁이란 미명하에 전개한 것이 갑오경장(갑오개혁)이다. 이때부터 군수 권한이 약해졌다는 점이 1995년 <국사관논총> 제64집에 수록된 홍순권 동아대 교수의 논문 ‘일제 시기의 지방통치와 조선인 관리에 관한 일고찰’에 이렇게 설명돼 있다. “군의 기능과 군수의 권한은 갑오개혁 이후 점차 약화되었다. 갑오개혁 때 서리·향족층의 정리가 있은 다음, 군수로부터 경찰권과 재판권이 분리되었다. (중략) 지방통치제도 자체가 식민지적 성격을 가진 제도로 급격히 변화한 것은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06년에 이르러서 징세권마저 회수되어 군수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고 군 중심의 지방통치 개념은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청일전쟁 시기부터 조선 내정에 간섭해 지방의 독자 권한을 약화시킨 것은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쉽게 장악하는 밑바탕이 됐다. 일본의 점진적 침략 앞에서 중앙의 고종 임금만 약해진 게 아니라 지방 군수들도 함께 약해졌다. 그렇게 변모된 일제강점기 군수들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수행하는 충실한 하부기관으로 거듭났다. 1910년대 무단통치, 1920년대 문화통치,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를 일선에서 진두지휘한 것은 그들이다.
[한국강사신문] “해방에서 촛불까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추천한 유일한 책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간
[한국강사신문 안상현 기자] 역사는 사실이라기보다 바라보는 방법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함세웅 신부라는 프리즘을 통해 펼쳐지는, 해방에서 촛불까지 대한민국 격동의 역사이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운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오마주이며,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기는 작업이다. 해방의 기쁨과 자주국가에 대한 기대를 담은 ‘조선건국위원회’부터 민중의 힘을 확인시킨 ‘4.19 불사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유신헌법 철폐’를 거쳐 ‘6월항쟁’과 ‘국가보안법 폐지’에 이르기까지 52개의 이야기를 함세웅 신부의 자전적 체험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의 역사를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라의눈, 2022.12.24)』에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장을 여는 순간, 그날의 결단과 함성으로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역사는 안개나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자리하다가, 누군가가 바라보는 순간 그 모양을 갖추는 그런 존재이다. 누가 어떤 틀로 바라보느냐가 그만큼 중요하다. 이 책은 평생 사제의 길과 투사의 길을 나란히 걸어 온 함세웅 신부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의 씨실과 날실을 직조한다. 1942년생인 그는 어린 시절 해방을 맞았고 초등학생 시절 6.25를, 신학생 시절 4.19 혁명을, 로마 유학시절 5.16 군사반란을 경험했다. 사제가 되어서 엄혹한 유신체제와 군사정권을 겪으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발족시켰다. 담을 넘어 성당에 들어가고, 중앙정보부에 수없이 끌려가고, 2년이 넘는 감옥생활을 한 것은 덤이다. 그러니 함세웅 신부에게 역사는 체험의 역사요, 현장의 역사이다. 이 책은 우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