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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동학농민혁명 대상’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2024년 4월 24일 417

전북 정읍시는 제14회 동학농민혁명 대상 수상자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전 위원장은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장을 역임했고,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로 30여년간 재직한 국내 역사학계의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2005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활동을 통해 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공헌했고,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이뤄내 혁명의 세계사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시상식은 5월 11일 제57회 동학농민혁명기념제 기념식에서 진행되며, 상패와 시상금 2000만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학수 정읍시장은 “이 전 위원장은 세계사적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을 높인 공적을 인정받았다”며 “정읍시는 혁명 정신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해 헌신하는 인재를 지속해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2024-04-23> 한겨레 ☞기사원문: ‘동학농민혁명 대상’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관련기사 ☞연합뉴스: 제14회 동학농민혁명 대상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라일보: 정읍 동학농민혁명 대상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선정 ☞전북중앙: 동학농민혁명대상 수상자에 이만열

[한겨레] “1919년 대한민국 건립” 외친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라니 [왜냐면]

2024년 4월 24일 210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① 이준식 | 전 독립기념관 관장 이승만 하면 많은 사람이 독재자를 떠올린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쌓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최근에는 윤석열 정부가 여기에 가세했다. 급기야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종로구 열린송현광장에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다. 더 이상 어떤 평가가 필요한가? 설사 작은 공이 있더라도 그 이상으로 과가 크다. 이승만에게 공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일부에서 강변하는 ‘건국의 아버지’가 결코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1948년 5·10 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5월31일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대한독립민주정부의 재건설”을 역설했다. 대한독립민주정부는 다른 말로 하면 민국 곧 대한민국이다. 다시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1919년)에서 기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을 만들 때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지만 1919년에 이미 출범한 대한민국을 계승해 나라 이름으로 계속 쓰자는 결론이 났다. 그 결과 제헌헌법 전문에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구절이 들어갔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미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 제헌헌법에 따른 정부의 출범은 대한민국의 재건이라는 뜻이었다. 1948년

[연합뉴스] 영화 ‘파묘’로 재조명된 이름 김상덕…”젊은세대 관심 다행”

2024년 4월 23일 386

[기사원문] <2024-04-23> 연합뉴스☞ 영화 ‘파묘’로 재조명된 이름 김상덕…”젊은세대 관심 다행” 반민특위 위원장 지낸 독립운동가…’파묘’ 최민식 극중 이름 아들 김정륙 옹 “父 68주기…경찰 사과가 명예회복 첫걸음”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중략>········· 독립운동가 김상덕(1892∼1956) 선생의 아들 김정륙(89)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고문은 최근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한 영화 ‘파묘’의 흥행 소감을 이같이 전했다. 영화 ‘파묘’는 극중 곳곳에 숨어 있는 ‘항일 코드’, 특히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한 풍수사의 배역 이름도 독립운동가로서 1948년 창설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1935년 중국 난징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갓난아이였던 막내 여동생은 끝내 숨을 거뒀고 네 살이던 김 고문도 누나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막내가 굶어 죽고 나니 충격을 크게 받으셨죠. 평소에는 자식들이 까부는 걸 보고 기분 좋아하시던 분이 고아원 가는 길에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고 계셨죠. 보름에 한 번 고아원을 찾아올 때마다 아들을 꼭 끌어안아 주시던 자상한 아버지셨어요.” 해방 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덕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처벌하기 위해 반민특위 설치에 앞장섰고 위원장까지 맡았다. ·········<중략>········· 결국 며칠 뒤인 6월 6일 반민특위는 경찰 습격으로 무력화됐고, 이후 김상덕은 1950년 7월께 북한 정치보위부 직원 2명에 의해

[역발상 시즌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3부 “1950년대말~1960년대초”

2024년 4월 23일 423

☞ 쇼츠(Shorts): 작곡가 박시춘의 영화 ☞ (04.23)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3부 “1950년대말~1960년대초” 오늘의 이야기 : 영화 주제가로 본 대중가요의 역사_1950년대말~1960년대초 초대손님 : 이영미(대중문화연구자) 이준희(옛가요 전문 연구자) <나 하나의 사랑> 영화: 1958년 4월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나 혼자만이>. 한형모 연출, 김진규·조미령·장동휘·이대엽 등 출연. 원작은 1957년 4월부터 12월까지 잡지 <희망>에 연재된 박계주의 ‘영화소설’. 제목의 유래는 1955년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의 사랑> 가사 첫 대목. 때문에 영화 제목도 ‘일명 나 하나의 사랑’ 주제가: 1958년 권혜경 노래. 손석우 작사·작곡. 원곡은 1955년에 발표된 송민도의 노래 대중가요가 소설로, 소설이 영화로, 영화가 또 다른 버전의 주제가로 연결된 ‘꼬꼬작’. 나름 ‘뮤지컬’을 지향했다고 하는데, 필름이 사라져 볼 수 없는 작품 <꿈은 사라지고> 영화: 1959년 2월 명보극장에서 개봉. 노필 연출, 최무룡·문정숙·엄앵란·김승호 등 출연. 원작은 1958년 9월 말부터 3주 동안 KBS 라디오에서 방송된 김석야 작 저녁 연속극 주제가: 1959년 최무룡 노래. 김석야 작사, 손석우 작곡. 원곡은 주제가로 방송된 안다성의 노래 방송에서 먼저 사용된 주제가와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주제가 <나는 가야지>가 동반 히트. <이별의 종착역> 영화: 1960년 6월 명보극장에서 개봉. 박영환 연출, 최무룡·조미령·이민·김희갑 등 출연 주제가: 1960년 손시향 노래. 손석우 작사·작곡 195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면서 영화 주제가에서도 많은 활약을 한 손석우의 대표작. <유정 천리> 영화:

민족사랑 2024년 4월호

2024년 4월 22일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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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전도유망했던 조선귀족, 왜 세상의 조롱 받았나

2024년 4월 22일 115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민희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도운 고위층 친일파들은 1910년 가을부터 대박을 터트렸다. 국권이 넘어간 해인 그해 10월, 이들은 왕족급인 공족(公族)이나 조선귀족에 편입돼 일본 작위를 받았다. 뒤이어 연이율 5%의 이자가 지급되는 은사금도 받았다. 1911년, 이들에게 최고 83만 원에서 최하 2만 5000원까지의 국채증서가 주어졌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역사문제연구> 제21호에 실린 이기훈의 논문을 근거로 “가장 많은 금액을 받은 이재면은 83만 원을 받았는데, 환산 기준으로 하면 166억 원에서 830억 원 정도로 환산”된다고 설명한다. 한국 강점 당시에 일본은 2명의 공족과 76명의 조선귀족을 선정했다. 이들은 일종의 선전용으로 활용됐다. 일본의 한국 지배로 인한 혜택이 한국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인상을 조성하는 데 이용됐다. 하지만 이들의 부귀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강점 당시만 해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는 조선귀족일본관광단에 합류해 무료 여행을 즐기며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이들은 3·1운동 뒤인 1920년대에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받게 됐다. 한마디로, 알거지들이 이들 중에서 대거 속출했다. 1928년 3월 3일 자 <조선일보> 기사 ‘몰락의 심연을 질주하는 조선귀족’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요사이 조선귀족들의 재산이야말로 봄눈 녹듯이 하나식 둘식 소리 업시 사라저버리는 모양인데, 요지음 자작 됴민희 씨도 파산선고로 인하야 이월 이십 구일부터 그 례우까지 뎡지되었는데” 파산선고로 귀족 예우가 정지된 자작 조민희는 이완용의 손위 처남이다. 그가 파산선고를 받은 직접적 원인은 1925년 4월 6일 자 <동아일보> ‘횡설수설’의 “이완용의 처남,

[오마이뉴스] 항일독립에 생애 건 홍범도 장군, 친일행위자와 동거… 꼭 그래야 했을까

2024년 4월 22일 579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진정한 독립운동가 예우를 생각해보다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지난 2021년 8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됐습니다. 8월 16일부터 안장식이 있던 18일까지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는 국민분향소가 설치됐고, 안장 당일에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석해 안장식을 성대하게 진행했습니다. 홍범도 장군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홍범도 장군 묘를 찾는 이들이 무척 많아졌습니다. 잔디가 상할까 묘지 앞에 플라스틱판을 깔아 놓기까지 한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장군의 묘를 찾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는 분들이 많아지고 장군의 삶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서 다행이지만, 홍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것이 불편하고 안타까운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홍범도 장군의 삶이나 독립운동 업적을 폄훼하는 건 아닙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의 불편한 동거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비롯해 수십 년간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웠던 항일독립운동가입니다. 신출귀몰 의병투쟁에 나선 홍 장군의 귀순을 종용하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부해 가혹한 고문을 당했던 부인 단양 이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함께 의병 활동에 나섰던 장남 홍양순(1892~1908)은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 중에 16세의 어린 나이로 전사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있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 현실을 홍범도 장군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신현준, 김석범과 일본군 중좌를 지낸 백홍석, 만주국군 상위를 지낸 송석하 이렇게 5명이 국가기구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어도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영상] 4·19혁명 64주년 l 이승만 독재정권의 총탄에 희생된 여중생들

2024년 4월 19일 4284

우리가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누리고 있는 기본권은 4월혁명 희생자들이 목숨 바쳐 싸워 얻은 것입니다. 1960년 4월 19일, 덕성여중생 구순자, 최신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말고 기억해 주세요.

[오마이뉴스] 미주 거주 독립운동가 후손들 “이승만 우상화 작업 당장 중단하라”

2024년 4월 19일 270

안창호 후손 필립 안 커디씨 등 12명… “독립운동 영웅으로 기념하는 것은 역사 왜곡” 도산 안창호 후손 필립 안 커디,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 후손 박유종,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심훈 후손 심영주 등 미주 지역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 12명은 제64주년 4.19혁명을 맞아 ‘이승만 기념사업 반대하는 미주 지역 독립운동가 후손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 후손들은 지난해 12월 ‘주미 한국대사관 앞 이승만 동상 건립 반대 서명운동’에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초 서울 종로구 송현공원에 이승만기념관 건립 소식이 전해지자 급히 ‘이승만 기념사업 반대 미주 지역 독립운동가 후손 모임’을 만들고 조직적으로 목소리는 내기로 했다. 후손 모임은 19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최근 이승만을 기념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은 이승만의 과오를 감추고 잘못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이승만이 ‘독립운동 영웅’이라는 신화는 역사적 진실을 존중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기만적인 조작의 결과물”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후손들은 “진실이 아닌 것은 역사가 아니다(History is not history unless it is the truth)”라는 링컨의 경구를 인용하며 이승만기념관 등 이승만 우상화 작업을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이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인 우리들은 선열들의 독립운동사를 증언하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역사 연구자들은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끝없이 정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공동체는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후세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최근 이승만을 기념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은 이승만의 과오를

[오마이뉴스] ‘이승만·독재’ 언급 없는 4.19혁명일 기념사

2024년 4월 19일 563

65주년 기념식, 한덕수 국무총리 등 발언 살펴보니… ‘핵심 비껴가’ 비판 4.19혁명 64주년을 맞아 발표된 정부와 부산시 등의 기념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독재에 대한 표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혁명으로 끌어 내렸던 이를 다시 세우려는 분위기 속에 4.19의 정확한 의미가 희석되는 분위기다. 19일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는 “자유·민주·정의를 향해 뜨겁게 타올랐던 민주 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모였다”며 모두 982자로 된 기념사를 발표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이룩한 자유민주주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도 당시 혁명이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한 총리는 “부정과 불의에 맞서 목숨 바치신 학생과 시민의 숭고한 희생”이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 부산에서 열린 행사의 기념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부산 중구 중앙공원 4.19혁명 희생자 위령탑 앞 광장에서 기념사에 나선 박형준 부산시장은 “자유·민주·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몸을 내던진 4.19 민주영령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헌법 전문에 수록된 4.19 정신과 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하지만 576자나 되는 글자 속에 독재 언급은 전무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되살리겠다는 저항의 횃불을 높게 든 도시로 부산을 치켜세우면서도, 기념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박 시장 또한 피를 흘리며 누구에게 맞서 싸운 혁명이었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이나 역사단체 관계자들은 핵심을 비껴간 기념사라고 꼬집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인 차성환 민주누리회 대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빼버리면 4.19가 왜 일어났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를 희석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