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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석열 정부, 피해자들 무시하고 일본에 선물하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강제징용 문제 마무리하고 바람직한 한일관계 정립하려면 피해자와 한국민들은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나오라고 외치고 있지만, 한일 양국 정부는 정반대로 미쓰비시를 뒤로 빼돌리며 숨기고 있다. 지난 5일 제4차 강제징용 민관협의회에서 윤곽이 잡힌 방안 역시 미쓰비시를 숨기려는 노력과 별반 다를 것 없다.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 측의 불참 선언으로 이미 정당성을 상실한 외교부 산하 강제징용 민관협의회는 제4차 회의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 모인 의견을 기초로 윤석열 정부가 입장을 정리할 가능성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민관협의회 의견은 전범기업 이외의 한일 기업들이 출연하는 재원을 토대로 별도의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지급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등을 대신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대위변제 방식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고 언론들은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대위변제 방식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 정부가 지급 주체가 되는 방식은 수면 밑으로 내려갔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 정부가 간접적으로나마 금전 지급에 관련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6일 자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실린 ‘한국, 징용공 문제로 재단 활용 방안, 정부 대위변제는 보류’라는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박근혜 정부 때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전면에 부상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렇게 되면, 간접적으로나마 정부가 대신 책임지는 모양새가 조성될 여지가 있다. <니혼게이자이> 기사는 “한국 정부는 전 징용공 소송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 5일까지 열린 관민협의회의 논의를 근거로 해결책을 정리해 일본에 제시한다는 태세”라고 한
[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36편 – 긴날이 맞도록(이덕남_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36편 : 긴날이 맞도록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간호특별기획 1편 : 박자혜 여사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5편 : 해방의 노래_장영달(여운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 34편 : 여명의 노래_조정화(조문기 외동딸) ☞ 33편 : 김구 나의 소원_김용만(김구 증손자) ☞ 32편 : 이육사의 꽃_이옥비(이육사 딸) ☞ 31편 : 그리운 강남_김시중(백하 김대락 후손) ☞ 30편 : 소년남자가_최재황(권준 후손) ☞ 29편 : 한국행진곡_한종수(한형석 후손) ☞ 28편 : 해방행진곡_손명원(손정도, 손원일 후손) ☞ 27편 : 거국행_박만규(흥사단 이사장) ☞ 26편 : 애국가_김흥태(오희옥 지사 아들) ☞ 신흥무관학교 제8편 :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 ☞ 신흥무관학교 제7편 : 자랑스런 신흥인 ☞ 신흥무관학교 제6편 : 독립전쟁의 주역, 독립군의 총 ☞ 신흥무관학교 제5편 : 서간도 국치일의 풍경 ☞ 신흥무관학교 제4편 : 신흥무관학교 24시 ☞ 신흥무관학교 제3편 : 서간도는 어떤 곳일까 ☞ 신흥무관학교 제2편 : 망명로드 ☞ 신흥무관학교 제1편 : 신민회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한겨레] ‘일 강제동원’ 민관협의회 결론 앞두고 “현금화 막기 급급” 비판
전범기업 국내 자산 매각 가로막기에만 골몰 피해자 협의·통보 없이 대법원 의견서 제출도 일본 태도 안 바뀐다?…“대일 지렛대 포기한 셈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 마련을 위해 지난 7월 발족했던 민관협의회가 네차례 회의 끝에 활동을 마쳤다. 피해자 쪽 의견 수렴 모양새를 갖추긴 했으나,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이란 외교적 성과에 급급해 ‘피해자 중심주의’란 대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6일 정례브리핑에서 “강제징용(동원) 해결 방안에 대해 정부는 특정 시한을 정한 바가 없다”며 “민관협의회에서 검토된 내용을 바탕으로 책임감과 긴장감을 갖고 조속히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날 민관협의회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 활동을 종료했지만, “한·일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는 해법 마련을 위한 추가적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취지다. 정부는 그간 민관협의회 활동은 물론, 불참한 피해자 쪽과도 개별적으로 접촉해 충분히 의견을 ‘경청’했다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및 지원단체 쪽에선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이란 외교적 성과에만 급급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대법원의 배상 판결 이행을 위한 일본 가해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현금화)을 막는 것을 협의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현금화는 한-일 관계 파탄을 뜻한다”는 일본 쪽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2차 협의회에 지원단체 몫으로 참석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는 “대법원 판결의 대전제는 일제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이라며 “일본
[기호일보]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독립투사 애국정신 되새기고, 민족의 수치 ‘매국’ 파헤치다 부끄러웠던 일을 기억할 때 손가락이 굽는 듯한 느낌을 수치심이라 한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77년째 되는 해다. 해마다 오는 광복의 달, 광복 몇 주년이 벌써 한 세기간 이어진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 시기를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당시 수치스러웠던 ‘친일’에 대해서는 마치 읽기 싫은 그 시절의 편지처럼 쌓아 뒀다. 경기도박물관은 지난 4월 27일부터 기획전시실에서 이 편지를 꺼내 전시 중이다.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특별전에서는 우리가 교과서로 봤던 항일의 흔적이 담긴 유물뿐 아니라 수치심이 들 만큼 황당한 친일 흔적까지 보여 준다. 기호일보는 경기도박물관과 함께 지상전시를 준비했다. # 박본수 경기도박물관 책임학예사가 전하는 전시 전시는 구한말~일제강점기에 경기도에서 펼쳐진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의 장소와 인물을 기리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얻은 친일파와 일제 잔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역사의 엄중함과 국가·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자 기획했다. 근대 이후 한국은 수십 년간 식민지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났지만 치열한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그 역사는 결코 초라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잊지 못할 아픔이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다. 100년 전 깊은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측했을까? 100년 전 우리는,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 전시를 보기 전에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전시에는 최근 수년간
[프레시안] 윤석열, 광복이 반공? 반민특위 없애던 친일파와 닮은 논리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한국의 ‘반민특위’와 중국의 ‘한지엔(漢奸) 재판’ 같은 경험, 다른 기억- 8.15의 기억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제국 일본의 패망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한국인들에게 이 날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날이다.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은 바로 이날부터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8월 15일 늦은 오후에 안재홍은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인 수많은 민중들 앞에서 해방 민족이 나아갈 앞날을 제시하는 열띤 연설을 강행했다. 이때 중학생이었던 송건호는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 없이 까맣게 타버린 걸인 같은 모습의 안재홍의 얼굴은, 일제의 총검 치하에서 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끝내 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족지도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기억했다. 민세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3년간 미군정 하에서 생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승전국들과 패전국의 실태는 명확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패전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5년 뒤 민족적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남과 북은 광복된 지 77년이 되도록 대결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패전국 일본 역시 6년 반 동안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치를 받았다. 중국은 국공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륙의 주도권은 공산당이 장악했고, 국민정부는 타이완으로 이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동북아의 판도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반민특위법을 만드는 자와 반대하는 자 민군정이 종식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식 정부가 수립됐다. 반민법은 1948년 9월 7일 가결되어 우여곡절
[한겨레] 간토대지진 99주기 추모식 “조선인 학살 진상 규명이 우리의 책무”
한국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 참석 우익단체 방해 집회 올해도 열려 고이케 도지사 6년째 추도문 거부 1일 오전 11시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 일본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 실행위원회’가 99주기 추도식을 열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간토대지진 당시 집단학살을 당한 조선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일본 시민들과 한국 시민단체, 재일동포 등 30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추도식을 준비한 미야카와 야스히코 실행위원장은 “일본 정부는 9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토대지진의 진상을 조사하거나 살해된 유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 등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쿄도도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야카와 위원장은 “비참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알려나가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책무다. 100년이 되는 내년, 그 이후에도 추도식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시민단체는 1974년부터 추도식을 이어오고 있다. 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1일 오전 발생한 규모 7.9의 대규모 재해다.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읽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자경단이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을 학살했다. 경찰과 군 일부도 가담했으며 조선인 학살 피해자는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추진위) 관계자들도 추도식에 참석했다. 손미희 추진위 공동대표는 “일본 정부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진실을 감추어 온 지난 99년의 역사를 내년 100년까지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일본의 국가 책임을 묻기 위해
[오마이뉴스] 3.1 운동 학생 대표, 일본 위해 이런 일까지 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대우 3·1운동 당일, 서울 탑골공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100년 뒤의 우리는 이를 온전히 실감하기 힘들다. 현장을 지켰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연세대) 학생인 정석해는 ‘조선 독립 만세’, ‘왜놈 물러가라’는 구호가 “지축을 진동”시켰다고 회고했다. 주관적 느낌이 들어갔겠지만, 탑골공원 주변의 서울 시내에서 울려 퍼진 함성과 열기가 어떠했을지 느낄 수 있다. 정석해가 1969년 3월 <신동아>에 기고한 ‘남대문 역두의 독립만세’는 그 같은 지축의 진동으로 발생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낸 <국내 3·1운동 1-중부·북부>에 인용된 이 기고문에 따르면, 1919년판 촛불혁명이 폭발한 광화문에서는 일제 순사가 모자를 벗어 던지고 제복을 찢어 던지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까지 있었다. 제복을 벗어서 던지지 않고, 찢어서 던졌다. 손으로 찢기 힘들었을 제복을 군중이 보는 데서 찢었다. 그날 광화문의 에너지가 순사에게 그런 괴력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국내 3·1운동 1-중부·북부>에 인용된 국어학자 이희승의 1969년 기고문 ‘내가 겪은 3·1운동’에 의하면, 광화문에서 모자를 벗어 던진 일제 관헌은 그 순사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인력거를 타고 현장을 지나가던 일본인 경기지사도 모자를 내던지며 만세를 불렀다. 경기지사는 옷을 찢지는 않았다. 대신, 더한 것이 찢겨나갔다. 인용문에 따르면 그는 “혼비백산”했다. 옷이 아닌 영혼이 찢겨나간 셈이다. 지축의 진동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항일 운동가에서 친일파로 그날의 시위 현장에는 머지 않아 친일파로 변신할 경성공업전문학교
[인천일보] “인천시, 민족해방운동 연구 주도…독립운동가 홍진 재조명해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문제 포럼’ 13도대표자대회·한성임시정부 역사적 의의 토론…기념관 등 제안 인천시가 한성임시정부와 13도 대표자회의 등 민족해방운동 연구를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또 13도 대표자회의를 주도한 만오 홍진 등을 인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지난 30일 중구에 위치한 한중문화관에서 13도 대표자회의와 한성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2022년 인천지역 역사문제 포럼’을 개최했다.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이 발제하고 이현주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위원, 이상의 인천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발제를 맡은 양윤모 연구원은 “인천은 한성임시정부의 시작점이 됐다”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집회가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919년 4월2일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고, 국민대회를 거친 뒤 ‘한성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며 “일제의 삼엄한 감시 체계 속에서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은 독립운동 사상 기념비적인 성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대회는 3·1운동 기간 동안 국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유일한 사전 협의지만 홍진을 비롯한 지사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계획하고 실행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며 “한성정부 등 민족해방운동 연구를 통해 새로운 내용 발굴하는 작업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희환 학술연구교수는 “13도 대표자들의 대회를 추진한 만오 홍진(1877~1946)의 표지석을 설치하는 등 업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홍진과 이규갑은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 노령정부의 통합에 앞장섰다”며 “변호사였던 홍진 선생은 망명 후에도 지금의 국회의장인
[오마이뉴스] 친일가수 ‘남인수 가요제’ 부활에 사회단체 “개탄”
진주연예협회, 예선전 펼침막 내걸어… ‘강씨 대종회’ 후원 명칭 사용 논란도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십수 년 전 폐지된 남인수 가요제를 부활하자는 움직임이 있어 논란이다. 진주예총 소속 진주연예협회(지부장 진창환)는 ‘대한민국 가요 100년사 황제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제1회 남인수 가요제(예선)를 열기로 했다. 최근 거리 곳곳에는 ‘부활’이라는 단어와 함께 펼침막이 내걸렸다. 진창환 지부장은 31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남인수 가요제가 그동안 남인수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열리지 못했다. 예술인들은 ‘친일’로 분류할 이유가 없는데 여론몰이로 인해 폐지되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진 지부장은 ‘부활’이라는 단어를 펼침막에 쓴 이유에 대해 “남인수는 진주를 빛내고 가요사에 명성이 있는 인물이다. 묻어 놓아서는 될 일이 아니라 판단해 가요제를 부활하고자 한다”며 “젊은 세대들한테 남인수 선생을 심어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친일파 ‘남인수’ 가요제 부활 개탄” 해당 소식이 전해지자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회장 강호광)를 비롯한 단체는 8월 31일 ‘친일파 남인수 가요제 부활을 개탄한다’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최근 진주 시내에 남인수 가요제가 부활한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나붙었다”며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성토했다. 남인수 가요제는 1996년 시작되어 10여 년간 이어지다가 남인수의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2008년 폐지되었다. 당시에는 진주시가 재정 지원을 통해 가요제를 개최했다. 단체들은 “남인수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가수다. 그러나 남인수는 유명세만큼이나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파다”라며 “남인수의 친일행위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본격화했다. 그는 노래를 통해 후방에서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후원하고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오마이뉴스] 대한민국 이끈 검찰총장들, 지금도 검찰이 감추는 과거
[검찰실록③] 부친 민병기와 ‘친일인명사전’ 오른 민복기, 그리고 박승준·이태희·정창운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검찰공화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검찰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역사의 질곡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과거의 기록, 그리고 ‘서초동’에는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그 이야기들로 오늘의 검찰을 들여다본다.[편집자말] 민복기, 박승준, 이태희, 정창운.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 초반까지 각각 대한민국 5대, 7대, 8대, 10대 검찰총장을 지낸 이들의 명단이다. 그런데 이들에겐 불편한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4인 모두 ‘일제강점기 부일 협력 등 친일반민족행위에 참여한 이력’을 이유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민복기(1913~2007) :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돼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각종 재판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된 이초생 재판에, 같은 달 28일에는 비밀결사 상록회를 조직한 남궁태·이찬우·문세현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고, 여러 차례 승진을 거친 뒤 45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박승준(1896~1967) : 1928년 11월 쇼와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을 선고받은 박제영의 재판과 공갑룡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같은 해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조병철, 유용희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1936년 4월 훈6등서보장을 받았다. 해방 후인 46년 9월 진주지청 검사장에 임명됐다. 48년 11월 대구지검 검사장에, 49년 11월 대검 차장검사에, 52년 4월 광주고검 검사장에, 5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