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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강원영동] 친일 행적 감춰진 시장·군수
어제 친일파 출신 강원도지사와 6.25 전쟁 때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주범이었던 강릉시장이 강원도와 강릉시의 무관심 속에 과거 잘못된 행태가 감춰지고 있는 실태를 보도해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이 비단 강원도지사와 강릉시장만의 일일까요? 김인성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1940년 5월 4일자 조선일보. 당시 속초면장 박상희의 축사가 실렸습니다. 조선 병합 이후 30주년을 맞아 천황의 은혜로 발전을 이루게 돼, 반도의 민중으로서 감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사설이 당시 속초면장 박상희의 이름으로 실렸습니다. 박상희가 친일행정가이자 황국신민정책의 대변자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인데 속초의 관문 설악해맞이공원엔 이 박상희 초대 속초읍장을 기리는 비 2개가 서 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큰 추모비에 이 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수많은 속초시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비의 건립일은 30년 전인 1992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습니다. 고성군청 부근에는 특별히 큰 공적이 있었던 역대 군수들을 기리는 비석 18기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08년부터 한일 강제 병합이 있었던 1911년까지 당시 간성군수를 지낸 이면익의 비도 있습니다. 고성문화원의 연구 결과 ‘군수 이공면익 영세불망비’라고 적혀 있고 건립 연대는 1909년 3월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면익이 1859년생으로 1909년 사립 수성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공을 세웠지만 1928년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은 친일파로 소개돼 있습니다. 고성군은 다음 달부터 2,200만 원을 들여 이 18기의 비석을 보존 처리하고 안내판도 제작할 예정입니다. 군수로서의 공적과 친일파로서의 과오를 함께 지역주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KBS] 교장실서 발견한 110년 전 사진…훈시하는 ‘초대 총독’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 5월 25일에 찍힌 사진입니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에게 일장기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이고, 저 학생들은 누구일까요? ■ 초대 총독의 조선인 학생 ‘훈시 행사’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학생들에게 직접 훈시를 했습니다. 앞서는 일본인 학생들을 불러 모았고, 이날은 조선인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장소는 총독 관저였습니다. 총독의 위세를 어린 조선인 학생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사진 분석 결과, 경성 관내 보통학교 학생 3,0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토요일 데라우치 총독은 반드시 오는 25일(토요일)에 조선 학생 2,800명을 불러 만나고 다과와 국기(일장기)를 나누어 줄 것이라고 하더라 -매일신보 1912.05.24. 이 행사는 당시 신문기사로만 관련 기록이 남아있었는데, 최근 사진 자료가 발견됐습니다. 발견된 곳은 당시 행사에 참여했던 서울 광희초등학교의 교장실입니다. 발견된 사진은 총 14장입니다. 행사 과정이 동선별로 나와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일장기를 받아든 학생들이, 총독 관저 뒤쪽 ‘녹천정’이라는 건물 앞을 지나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사진 속 소나무에 붙어 있는 표지판에는 “작년 총독 부인이 양잠(누에를 치는 일)을 했던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어, 당시 시대상을 짐작게 합니다. 다음 사진은 녹천정을 지나온 학생들이, 안쪽에 있는 식물원 옆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총독 관저의 공간 배치 현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총독 관저 뒤편으로 경성 시가도 보입니다. 다음 사진은 다리를 건너가기 전 순서를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7편, 해학을 담아 노래하다 만요가수 ‘김정구와 박향림’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7편] (2022년 6월 14일 방송) 해학을 담아 노래하다 만요가수 ‘김정구와 박향림’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7:20 왕서방 연서 둘 다 원산과 인연이 깊고(김정구는 출생, 박향림은 유학), 다른 음반회사에서 데뷔했지만 오케레코드에서 전성기를 누린 해방 이전을 대표하는 가수. 00:28:47 오빠는 풍각쟁이 두 사람의 작품 영역이 그렇게 제한적이었던 것은 아니나 오늘날 만요 가수로 흔히 거론되는 것도 공통점. 대중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만요가 있었기에 두 사람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는 것도 사실 00:46:18 눈물 젖은 두만강 박향림이 스물다섯에 요절한 반면 김정구는 나름 천수를 누렸다(1916~1998). 오래 살다 보면 영욕이 교차하기 마련인데 김정구는 대표적인 원로가수로 좋은 이미지를 유지. 그 덕에 1980년에는 문화훈장 보관장(3등급)을 대중음악계에서 처음으로 수상 00:56:16 희망의 블루스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노래를 많이 발표했던 박향림. 블루스, 샹송, 재즈 등에 관심이 많아 ‘조선의 다미아’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01:05:15 수박행상 대중음악 명가의 일원으로 식민지시기를 빛낸 가수 김정구는 관련 작품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제외. 하지만 자료라는 것은 있는 것이 없어지지는 않아도 묻혀 있던 것이 새롭게 드러나는 경우가 다반사. 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사전을 다시 편찬한다면, 김정구와 박향림 역시 당연히 포함 01:15:53 봄 사건 두 사람 모두 만요에 재능이 뛰어났던 만큼, 김정구-박향림 듀엣으로 작품이 기획되었을 수도 있지만 김정구-박향림 듀엣은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음. 실제
[한겨레] “박정희 도당이라고 했지, 박○○이라 말하지 않았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6) 불길 같은 엘리야 예언자 유신 당시 반독재 운동하던 윤반웅 목사 ‘긴급조치 위반’ 법정서 권력 편 검찰 조롱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주님만이 하느님이시며 바로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버렸다.” (1열왕18, 37-38)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2열왕 2, 1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집회서 48,1) 사람은 평등하고 저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거기에 위아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와 사고의 한계로 어울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고 우열이 생깁니다. 이를 극복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의 겸허함을 고백하며 이웃과의 평등성을 되새기는 것이 지혜로운, 성숙한 인간의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써 기록되었기에 순서와 우열이 있습니다. 이때의 순서와 우열은 차등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자극받아 더 노력하라는 하느님의 교육 방법과 구원 경륜입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두 분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불의한 권력자에 맞섰고 백성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였습니다. 왕궁에서 성장한 모세는 출생 직후부터 죽을 위험에 처했지만 후일 동족 히브리 백성의 해방자가 됩니다. 모세는 구약의 가장
[오마이뉴스] 친일반민족행위자 현충원 안장, 법의 허점 노렸다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59] 국립묘지법 조건 하나라도 충족하면 안장, 개정 필요 지난 2019년 2월 말,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민중당 대전시당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최소 28명이 안장되어 있다는 내용이 담긴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를 발간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추가적으로 안장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2009)에 수록된 1005명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된 4390명을 일컫는다. 3년 반이 지난 지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현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2020년 7월 10일 사망한 백선엽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29명으로 늘어났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자들은 만주국군 상위·간도특설대 출신의 김석범(장군1-071), 일본군 중좌 출신의 백홍석(장군1-176), 만주국군 상위 출신의 송석하(장군1-093), 만주국군 상위·간도특설대 출신의 신현준(장군1-273), 만주국군과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의 백선엽(장군2-555)이 있다. 여기에 만주 간도특설대 준위 출신의 김대식, 일본군 헌병 오장 김창룡, 일본군 대위 출신의 유재흥, 이형근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29명이다. 행적 숨기고 현충원에 묻히다 이중 상당수는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를숨기기 위해 공훈록과 묘비 내역에 1945년 해방 이전의 행적을 기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 행적을 공훈록과 비석에 기재한 이들도 있었다. 김동하(1941년 만주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김석범(1937년 만주 군관학교 졸업), 김일환(1937년 중국만주 군경리학교 졸업), 박동균(1943년 하얼빈 육군군의학교 제7기 졸업), 석주암(1936년 만주간도사관학교 졸업, 1939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송석하(1937년 만주국 군관 양성기관 봉천군관학교 제5기 졸업), 신현준(1937년 만주 봉천
[오마이뉴스] 소녀상 건너편 친일파 기념비… “역사바로 세우기 절실”
예산군청 앞 정낙용·정주영 부자 영세불망비·청덕선정비 버젓이… 친일청산 나서야 충남 예산군도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친일잔재 청산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헌’ 윤봉길 의사 고장에서 국민복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군복을 입은 사진을 걸어놨던 역대 읍면장은 퇴출시켰지만, 친일논란을 빚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윤 의사 표준영정은 10여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더욱이 친일정보는 제공하지 않은 채 조선총독부에 부역한 고관대작들을 칭송하는 비석들을 상징적인 공간인 군청 앞에 버젓이 세워놓은 것으로 드러나 ‘역사바로세우기’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충남도는 지난 3월 ‘충남도 친일잔재 기초조사 연구용역’을 마무리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해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45년 8월 해방 전후까지 ▲친일반민족행위 명단, 친일인명사전 등재 친일인물 ▲친일재산(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국가귀속결정 토지) ▲친일인물 관련 기념물·건축물(기념비(탑), 송덕비, 노래비 등) 등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자료에 따르면 친일인물은 출생자 115명과 출신자(본적자 포함) 88명 등 모두 203명이다. 이들 가운데 10여명의 도내 국가귀속결정 친일재산은 262필지 78만9612㎡(23만9276평)에 달한다. 공시지가로도 41억6411만5000원 규모다. 옛 신문기사와 시군향토지 등을 통해 추출한 친일인물 관련 기념물·건축물은 65건이다. 잔존은 56건, 9건은 멸(망)실됐다. 예산지역은 어떨까? 친일인물은 12명이 이름을 올렸다. 구체적으로(가나다순, 괄호안 창씨명, 친일직업) ▲김원선(군수) ▲김유제(경학원 사성) ▲방인근(方山春海, 소설가·시인) ▲이만준(牧山萬濬, 판사) ▲이영택(松本仲司, 군수) ▲이원창(駒城秀康, 군수) ▲이윤영(月城榮一, 군수) ▲이종덕(江本鍾悳, 중추원 참의) ▲임숙재(豊川淑宰,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정낙용(남작) ▲정두화(남작) ▲정주영(남작)이다. 국가귀속결정 친일재산은 ▲이종덕-1필지 7584㎡(공주·아산시) ▲정두화-10필지 1만5093㎡(공주시, 대술·신양면) ▲정주영-7필지 5만6906㎡(서천군, 신양면) 3명의 전답·임야·도로 등 18필지 7만9583㎡(2만4116평)에 이른다. 작위,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5000원,
[KBS] 친일 동상, 철거는 커녕 ‘알림 표지’도 어려워
[앵커] 대표적인 친일 잔재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는 ‘친일 인사’ 동상입니다. 친일에 관한 정보는 쏙 빼고 ‘미화’의 취지만 부각돼 있어서 철거하려는 시도도 꽤 있었는데 뜻을 이룬 사례는 드뭅니다. 대안으로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알림 표지, 이른바 ‘단죄문’을 옆에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그것도 쉽진 않습니다. 정해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공원에 자리 잡은 난파 홍영후의 동상입니다. 친숙한 노래의 작곡가, 홍난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일제 침략을 미화하는 곡도 여럿 만들었는데 그런 행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김백훈/수원시 권선구 : “유명 인물 기념하는 동상 이런 거 아닐까?”] [주미경/수원시 권선구 : “친일파? 아 그래요? 친일파라는 거 처음 들은 것 같아요.”] 지난해 그 옆으로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동상은 못 없애더라도 적어도 ‘정확한 정보’는 알리자는 취지였습니다. [조성순/수원시 권선구 : “친일파라고 생각하면, 거의 다 속속들이 우리 국민들이 알았으면…”] 친일 동상 등 잔재가 남은 장소는 경기도에만 161곳. 그 중 10곳에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것도 어렵게 세운 겁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로 알려진 해평 윤 씨 가옥. 윤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와 당숙 윤치호 등 친일 인사 4명이 살았던 곳입니다. 시설은 보존하더라도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문을 세우자고 도의회가 권고까지 했지만, 지역 여론의 반대에 막혀 있습니다. [아산시 관계자/음성변조 : “친일과 관련된 내용들을 적게 해버리면 마을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이
[오마이뉴스] 일본 국회의원이 된 한국 조폭… 친일로 살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춘금 조직폭력배 출신 친일파가 있었다. 깡패를 거쳐 기업인이 되고 친일파로 활약하더니 나중에는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변신했다. 이 비상한 이력의 주인공은 박춘금이다. 서울시청과 광화문광장 중간쯤에 서울시의회 청사가 있다. 이 건물 옆에 비석이 하나 놓여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라고 적힌 비석이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경성 부민관 폭탄 의거지’로 검색된다. 부민관 폭파 의거 부민관(府民館)은 일제강점기 경성부가 1935년에 건립한 종합 공연시설이다. 훗날 미군정 건물, 국립극장, 국회의사당을 거쳐 1970년대에 시민회관으로 바뀌었다가 세종문화회관 건립 뒤 그 별관이 됐다. 바로 그 부민관에서 발생한 폭탄 의거를 기념하는 비석에 박춘금이 등장한다.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사건”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훗날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의 뜻을 계승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뛰어들 독립투사 조문기(1927~2008)가 부민관에서 박춘금을 처단하려 했던 것이다. 1973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 4면 좌상단 기사는 “해방되기 20여 일 전인 1945년 7월 24일 지금 국회의사당인 경성부민관에서는 일-중-만-조선(-몽골)의 오족협화를 표방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있었다”라며 “이 대회는 몇 달 전에 일본에서 죽은 친일파의 거물 박춘금이 이끄는 대의당(大義黨)이 주최한 친일파들의 발악 경연장이었다”며 부민관 폭파 사건의 배경을 설명한다. “몇 달 전에 일본에서 죽은”이란 표현은 1945년 당시가 아니라 1973년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1973년 3월 31일에 박춘금이 죽은 일을 가리킨다. 위 기사는 조문기 등이 부민관에 진입해 폭탄을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6편, 조선재즈의 왕은 누구? ‘김해송과 손목인’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6편] (2022년 6월 7일 방송) 조선재즈의 왕은 누구? ‘김해송과 손목인’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1:51 싱싱싱 조선 재즈의 일인자는 누구인가? 같은 음반회사 소속으로 음반과 무대에서 치열할 경쟁을 펼쳤던 김해송과 손목인. 00:24:31 청춘 계급 작곡가로, 연주가로, 밴드마스터로 다채로운 활약을 선보인 두 사람이었지만 가수 활동의 흔적은 김해송이 손목인보다 훨씬 더 많은 편임 00:33:12 항구의 붉은 소매 ‘목포의 눈물’, ‘해조곡’ 등으로 가수 이난영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작곡가 손목인.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한 것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있기는 한 듯 00:42:38 고향 반듯하고 잘 짜인 느낌을 주는 곡이 많은 손목인과 달리 김해송 곡들에는 독특한 착상과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개인적인 성향 차이일 수도 있고, 제도권 음악교육 경험 유무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음 00:50:30 선죽교 1940년대 악극 전성기가 펼쳐지면서 탁월한 기획력으로 최고의 무대를 선보인 김해송. 손목인 역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이 시기 김해송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그야말로 넘버원 01:14:05 가스바의 여인 전쟁 발발과 함께 납북된 김해송은 금기의 인물. 반면 손목인은 195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 가다가 1957년에 추방 형태로 귀국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 지난 에피소드 다시보기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5편: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4편: 대중가요 작사의 쌍두마차 ‘박영호’와 ‘조명암’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3편: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최고의 가수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5편,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5편] (2022년 5월 31일 방송)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23:59 고도의 정한 1930년대 신민요 가수로 ‘여왕’ 소리를 함께 들었던 왕수복과 이화자. 왕수복은 공전의 히트곡 ‘고도의 정한’으로 최초의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로 선정. 바로 그때 이화자는 김용환의 테스트를 받으며 가수로서 가능성을 확인 00:41:16 노랫가락 평양 권번에서 음악을 익힌 왕수복은 과감하게 대중가요 가수가 된 것은 물론,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결합시키는 방안에 대한 생각도 많았음. 반면 1936년에 데뷔한 이화자는 남자와 돈, 나아가 아편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 00:53:44 아리랑 성악 공부를 하고 돌아온 왕수복은 사실상 가수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음. 1940년에 아내와 사별한 작가 이효석의 연인이 되는데 이후 이효석이 1942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경제학자 김광진과 결혼. 반면 이화자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분방하게 생활. 남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자를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연애를 실천 01:03:42 화류춘몽 최고의 신민요 가수로 갈채를 받기는 했지만, 그런 인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허허로움이 있었는지, 1940년대 들어 이화자는 심각한 아편 중독자가 됨 01:15:20 꼴망태 목동 해방 후 남한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고, 북한에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 왕수복의 독특한 창법은 민족적이면서도 봉건적이지 않은 노래로 평가를 받았던 듯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공훈배우가 되기도 01:27:11 어머님전상백 계절에 맞지도 않는 낡은 여우 목도리를 언제나 두르고 다니며 삶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