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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까지… 어느 친일파의 자서전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영철 일본이 굳이 권하지 않았는데 친일파가 된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정도가 특히 심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이 좋아, 부모님 몰래 바다를 건너기까지 했던 박영철(1879~1939)이 바로 그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16일 발행된 <조선일보> 광고란에 2원 50전짜리 책 한 권이 광고돼 있다. “50년의 회고”와 “다산 박영철씨 저”라는 문구와 함께 소개된 친일파의 자서전이다. 이 책을 토대로 그의 행적을 정리한 <친일파 99인> 제2권 박영철 편은 그가 전북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미곡상이었으며 사회적 지위는 평민 수준이었다고 설명한다. 태어난 날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3년 뒤인 1879년 2월 2일이다. 이 집안이 일어난 계기는 강화도조약에 따른 대일 시장개방이다. 1993년에 박찬승 목포대 교수가 집필한 <친일파 99인> 박영철 편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미곡상은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에 따른 호경기에 힘입어 계속 번창하여 한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토지를 사모아 지주 계급으로 일어설 수 있었으며 1920년대에 가서는 만석꾼으로 불릴 정도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농업경제시대의 ‘지주’는 지금으로 치면 ‘사장’과 ‘건물주’를 합한 개념이다. 대일 미곡 수출이 박영철 집안의 경제적 지위를 획기적으로 변모시켜 놓았던 것이다. 2011년 12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행한 <문화재>에 미술사학자 김상엽의 논문 ‘<고 박영철씨 기증 서화류 전관(展觀) 목록>을 통해 본 다산 박영철(1879~1939)의 수장 활동’이 게재돼 있다. 이 논문은 “박영철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화담 서경덕의 문인인 사암 박순의 후손으로 본래는 양반이었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그의 부친
[오마이뉴스] “나는 광주를 안고 살어,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랑게”
한평생 민중미술의 길을 걸어온 이상호 화가 서울 청파동에 있는 ‘식민지 역사박물관’에서 지난 8월 4일부터 6월항쟁 35주년 기념초대전 <이상호, 역사를 해부하다>가 열리고 있다. 전시실에는 이상호 화가가 40여 년 그려온 53점의 대표작이 걸려 있다. 그중에서 으뜸은 민족반역자 99인을 그린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하 일제)이다. 전시 첫날 만난 그는 한평생 민중화가로 살아온 연유와 80년대의 걸개그림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을 들려주었다. 이상호는 2021년에 열린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을 ‘일제’로 정했다. 분단과 군사독재로 겪은 고통이 나라를 빼앗긴 데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2020년 1월부터 꼬박 1년을 매달려 가로 4m17 세로 2m45의 작품을 완성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꽉 채울 수 있는 크기다. 그는 비엔날레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을 박물관에 영구기증할 작정이었다. 비엔날레에 ‘일제’가 걸릴 때는 곡절이 많았다. 박정희기념재단에서 비엔날레 주최 측과 후원사에 공문을 보내 전시하지 말라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상호는 인물을 선정하는 데만 두 달의 시간을 쏟았다. ‘친일인명사전’을 토대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와 여러 차례 회의 끝에 박정희, 백선엽, 최남선, 안익태, 김활란 등 99명을 선정했다. 실제 작업은 화폭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전지 크기의 전통 한지 120장을 합판 위에 대고 풀칠로 세 겹을 포개어 붙였다. 바탕에는 황토색 전통 안료를 입혔다. 그는 인물 하나하나를 어떻게 표현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사진자료에 충실해 담담하게 그려낼 것인가? 민족의 원한을 주저없이 쏟아낼 것인가? 민중미술 특유의 힘찬
[뉴시스] 시민단체, ‘미쓰비시 자산매각’ 강제집행 촉구…”법대로 해야”
시민단체, 미쓰비시 국내자산 매각 결정 촉구 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미이행 대법원, 미쓰비시 재항고 사건 심리 진행 중 [서울=뉴시스]신재현 기자, 박광온 수습기자 =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금 지급을 미루던 미쓰비시중공업(미쓰비시)의 국내자산 매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법원에 촉구했다. 겨레하나, 민족문제연구소 등 610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발족한 ‘역사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 위한 공동행동(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25일 오후 2시께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주장했다.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는 “원래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한 뒤 사죄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것이 정상적, 문명적 절차인데 지금은 강제동원 판결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이 바뀐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의미있는 전원 합의체 결정이 나왔는데 4년 동안 집행 절차가 지연된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실정법 최고 주체인 대법원이 법대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대법원 판결로부터 4년이란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 왜 시간이 더 필요하냐”며 “강제집행 말고는 방법이 없고 고령의 할머니들에게 시간이 없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기자회견문을 통해서는 외교부가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로 인해 재판부의 판결이 늦춰진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외교부는 지난달 26일 각 재판부에 일본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민관협의회를 통해 해법을 찾는 중이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반발을 부른 바 있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적 협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외교적 협의가 이 사건 판단에 직접적인 판단요소가 될 수
민족사랑 202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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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친일파가 이용한 안중근의 죽음, 겨레 향한 도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7) 안중근 평화연구원 박정희가 만든 안 의사 기념 ‘숭모회’ 초대이사장·2대 이사장 모두 친일파 안 의사는 남북 모두에 존경받아 남북 평화와 공존의 매개체 될수도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오 5,9)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오 27,46)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히브 12,4)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사신 분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셨고 민족자강을 위해 물산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학교와 기업을 설립하여 자신의 주장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한중일 삼국 중심의 ‘동양평화론’도 주창하셨습니다. 아쉽게도 미완성 원고로 남아 있지만, 무력의 사용과 전쟁을 불가피한 수단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일제의 취조 문서와 재판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안중근 정신을 우리 시대에 맞춰 실천하는 것이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분들도 의사의 행적을 따르고자 했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안 의사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안 의사와 함께했던 우덕순 선생은 해방 후 환국하셔서 1946년에 의열사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우덕순 선생이 사망하면서 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현재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일이라고 하면 대부분 ‘안중근 의사 숭모회’와 숭모회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덕순 선생이
[세계타임즈] 일제강점기 학교 희귀 기록물 최초 공개
1912년 총독관저와 관저 일대 행사 사진 14점 발굴, 일반에 공개 [서울 세계타임즈=이장성 기자]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 소속 서울특별시중부교육지원청(교육장 임규형)은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조선인 관공립보통학교 생도 접견 행사’ 사진을 『중부교육디지털박물관』을 통해 공개한다고 밝혔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초대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912년 5월 25일 서울 시내 조선인 보통학교 학생 약 2,800명을 남산 총독관저에 초대하고 관저 일대에서 원유회(園遊會) 행사를 열었는데, 바로 이날 촬영된 사진 기록물 14점이다. 이 행사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애뉴얼 리포트(Annual Report), 1911~1912』(민족문제연구소 소장)에 수록된 사진 하나가 유일하며, 존재 자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행사의 사진이 묶음으로 발견됨으로써 일제강점기 근대교육사 정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고,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은 2019년 서울광희초등학교로부터 이관받아 중부교육지원청 기록관에서 보관 중이던 393점의 사진 중 일부로,‘중부 학교역사기록 관리체계 구축’사업 추진 과정에서 해당 자료의 내용과 가치를 확인하였다. 사진 자료에는 총독관저로 입장하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장기를 나누어주는 모습, 학생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는 데라우치 총독 이하 총독부 관리 일행의 모습, 야마가타 정무총감, 이완용의 처인 양주조씨, 총독관저, 녹천정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또한 총독관저 정문으로 입장하여 관저 후면의 녹천정(錄泉亭)과 호도원(好道園)을 거치고 다시 보륭교(寶隆橋)를 지나 경무총감부 광장으로 넘어가는 행로가 두루 포착되어 있다. 이번 사진 발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총독관저는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임에도 상대적으로
[오마이뉴스] 일제의 고급 밀정, 반성 대신 “내 돈 돌려달라”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병일 화신백화점 사장인 친일파 박흥식은 반민특위 체포 1호다. 1949년 1월 8일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붙들렸다. 그가 내세운 변명 논리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자금 횡령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비행기회사를 설립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재판장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재판 다음날 발행된 1946년 3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 ‘박흥식 공판’에 따르면, 일제 당국의 계속되는 권유를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했노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박흥식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다.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다는 것이 친일파들의 일반적인 변명이다. 일본의 고급 밀정 하지만 친일파 박병일의 삶은 그런 변명이 구차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친일을 했고, 친일 때문에 손해 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박병일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6권과 일본 경찰 기록에는 박용환이란 이름으로 소개돼 있다. <친일인명사전>과 일본 재판 기록인 <박병일 소송사건철>에는 박병일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가 태어난 것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2년 뒤인 1878년 7월 1일 경기도 광주에서였다. 그는 비교적 일찍 서양문물을 접했다. 14세 때인 1892년에 한양에서 기독교청년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한양 종로에 그의 사업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잡화상과 금융업을 경영했다. 그의 사업 무대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졌다. 사업 실패에 따른 결과였다.
[취재요청] 전범기업 미쓰비시에 대한 대법원의 신속한 강제집행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8.25)
[보도자료] [바로가기]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취재요청 수신: 각 언론사 정치, 사회부 날짜: 2022년 8월 24일(수) 문의: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010-8402-1718 / 겨레하나 정은주 010-9458-9439 전범기업 미쓰비시에 대한 대법원의 신속한 강제집행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 일시 및 장소 : 2022년 8월 25일(목) 오후 2시, 대법원 후문(서초역 6번 출구) 1. 평화와 화해의 인사를 드립니다. 2.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018년 대법원 판결과 관련한 일제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자산의 강제 매각(특허권 2건) 재항고 사건에 대해, 19일까지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시한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3. 지난 7월 26일 외교부가 이 사건 담당 재판부에 ‘의견서’ 형식을 빌어 판결을 사실상 보류 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4. 2018년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는 4년이 다 되도록 법원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양자 대화 요구마저 거부해 왔습니다. 그 사이 원고 5명 중 3명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부의 의견서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90대 고령의 피해자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권리확보의 수단이라고 할 강제집행마저 가로막은 또 다른 국가폭력입니다. 동시에, 일본기업 자신이 현금화될 경우 다시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일본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한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 굴욕외교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5. 이에 국민적 요구를 담아 대법원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신속한 판결을 내릴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