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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전범기업 마크가 교표?…학교에 남은 일본 잔재
<앵커> 올해가 광복 77주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학교에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전범기업의 이름을 그대로 따 오거나, 학교의 상징에 욱일기 이미지를 쓴 곳도 있습니다. 임상범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문 주위로 학교명과 교표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습니다. 한자로 석 삼에 우물 정, 즉 ‘삼정’, 일본어로 읽으면 미쓰이.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악명 높았던 대표적인 일제 전범 기업 미쓰이의 회사명과 표식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학교측 : 교장 선생님도 고민을 하고 계신 부분이에요. 이게 그냥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학생들하고 토론도 해야 되고, 학부모 설문도 받아야 되고, 그 다음에 학교 운영위원회 심의도 받아야 되고.] 일제는 1937년 학교 상징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이른바 교표 개정령을 발표합니다. 창 씨 개명, 한글 사용 금지와 함께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한시준/독립기념관장 : 민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혈통이고 그 다음에 언어고 문화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한국 사람들을 일본 민족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광복 직후 바로 고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광복 한참 뒤에 개교했으면서도 일본식 교표를 채택한 학교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취재진이 점검해보니 욱일기와 일장기는 물론, 일본 기관이나 기업의 이미지에서 따온 일본식 교표가 전국에 부지기수입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초,중,고등학교가 한 1만 개쯤 되는데 전수 조사라든지 (지금껏) 어떤 개선 캠페인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각심을 갖고 다시
[경향신문] 또다시 ‘그때 그사람’…국교위 위원장에 ‘한국사 국정교과서’ 인사 거론
이배용 전 이대 총장 ‘유력’ 관측 박근혜 정부 교과서 국정화 주도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 위원장 후보로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사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이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교육부가 추진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한 역사학자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참여한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교육정책 수립 과정에 속속 등장하자 역사·교육단체는 반발 움직임을 보인다. 19일 교육계에 따르면 대통령이 지명하는 국교위 위원장으로 이 전 총장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총장은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다른 후보들과 함께 내가 거론되고 있다고는 들었다”며 “아직 확정됐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미 법정 출범시한을 넘긴 국교위에 위원장을 포함해 대통령이 지명하는 위원 5명을 계속 비워둘 수 없는 상황이어서 위원장을 중심으로 국교위 본격 출범을 준비할 가능성은 크다. 이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 때 한국사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다. 또 2011년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장 시절부터 뉴라이트 진영이 요구한 역사교과서 검정 기준을 대거 수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교과서 국정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그를 특별고문으로 임명할 때도 논란이 일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교육정책을 좌우하는 요직에 한국사 국정교과서 사태 당시 주요 실무 책임자들이 복귀하면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근 ‘만 5세 입학’ 논란이 벌어진 직후 물러난 권성연 전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은 2014년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장으로 재직하며 국정화 찬성 여론을 조성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
[경기신문] 학계·시민·사회단체 “尹 역사 인식 부재”…이명박근혜 정부 시절 건국절 논란 또 재연
반공·대일 관계 개선”…광복절 축사 의미 해석 놓고 의견 분분 윤석열 대통령 “전체주의 국가 위한 독립운동 아님…일본, 힘을 합칠 ‘이웃’” 황희형 광복회 “좌익 사상 독립운동가들 배제…당사자와 후손들에게 상처 준 것” 이주현 평화나비 “선결 조건 언급도 없이 ‘친일’…국민·피해 당사자들 동의 못 해”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근현대사 인식 부족…극우적 과거사 왜곡 형태 반복 우려” ‘과거사’ 한 번, ‘자유’ 33번. 윤석열 대통령은 제77주년 광복절인 지난 15일 “우리의 독립운동은 끊임없는 자유 추구의 과정으로서 현재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며 ‘자유’를 33차례 언급하며 강조했다. ‘과거사’는 단 한 번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독립운동은 민주공화국, 자유와 인권·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며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한·일 관계에 대해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이라며 “양국 간 경제·안보·사회·문화 등 폭넓은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 및 학계에서는 윤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민족 탄압에 대한 역사 인식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제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경기신문은 이번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윤 대통령의 역사 인식 문제를 제기한 시민·사회단체 및 학계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 황희형 광복회 “좌익 사상 독립운동가들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8편,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과 신불출’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8편] (2022년 6월 21일 방송)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과 신불출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2:45 처녀 총각 딱히 대중음악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은 가수로 신불출은 많은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나 작사가로 활약. 원래 연극계에서 활약하던 두 사람이 식민지시기 대중가요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했다는 것은 당시 ‘대중가요계’의 형성이 아직은 충분치 않았음을 보여 주는 점 00:29:40 장한가 일본 유학 당시 뮤지컬배우를 꿈꾸었던 강홍식은 아사쿠사오페라에도 참여를 했고 가창력과 연기력을 나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간토대지진으로 아사쿠사오페라가 몰락을 하면서 그 역시 귀국, 연극과 영화 중심으로 활약 00:41:02 조선타령 평양 부잣집 아들인 강홍식과 달리 신불출은 유명세와 인기에도 불구하고 개인 이력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편. 그의 작품 중에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이따금 보이는 편. 00:53:36 노들강변 두 사람이 가장 활발하게 노래하고 작사했던 1930년대 중반은 신민요의 전성기이기도. 때문에 두 사람의 작품 가운데에는 신민요로서 주목되는 곡들이 있는 편.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역시 신불출이 작사한 ‘노들강변’ 01:02:33 대머리 대중가요라 할 수는 없지만 신불출은 극 음반을 매우 많이 쓰거나 녹음. 신불출이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것도 1933년에 발표한 ‘대머리’ 덕이라 할 수 있음 01:29:51 청춘타령 두 사람은 분단 이후 한동안 이름을 언급하기 어려운 금기 대상. 신불출은
[MBC강원영동] 친일 행적 감춰진 시장·군수
어제 친일파 출신 강원도지사와 6.25 전쟁 때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주범이었던 강릉시장이 강원도와 강릉시의 무관심 속에 과거 잘못된 행태가 감춰지고 있는 실태를 보도해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이 비단 강원도지사와 강릉시장만의 일일까요? 김인성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1940년 5월 4일자 조선일보. 당시 속초면장 박상희의 축사가 실렸습니다. 조선 병합 이후 30주년을 맞아 천황의 은혜로 발전을 이루게 돼, 반도의 민중으로서 감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사설이 당시 속초면장 박상희의 이름으로 실렸습니다. 박상희가 친일행정가이자 황국신민정책의 대변자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인데 속초의 관문 설악해맞이공원엔 이 박상희 초대 속초읍장을 기리는 비 2개가 서 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큰 추모비에 이 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수많은 속초시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비의 건립일은 30년 전인 1992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습니다. 고성군청 부근에는 특별히 큰 공적이 있었던 역대 군수들을 기리는 비석 18기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08년부터 한일 강제 병합이 있었던 1911년까지 당시 간성군수를 지낸 이면익의 비도 있습니다. 고성문화원의 연구 결과 ‘군수 이공면익 영세불망비’라고 적혀 있고 건립 연대는 1909년 3월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면익이 1859년생으로 1909년 사립 수성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공을 세웠지만 1928년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은 친일파로 소개돼 있습니다. 고성군은 다음 달부터 2,200만 원을 들여 이 18기의 비석을 보존 처리하고 안내판도 제작할 예정입니다. 군수로서의 공적과 친일파로서의 과오를 함께 지역주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KBS] 교장실서 발견한 110년 전 사진…훈시하는 ‘초대 총독’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 5월 25일에 찍힌 사진입니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에게 일장기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이고, 저 학생들은 누구일까요? ■ 초대 총독의 조선인 학생 ‘훈시 행사’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학생들에게 직접 훈시를 했습니다. 앞서는 일본인 학생들을 불러 모았고, 이날은 조선인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장소는 총독 관저였습니다. 총독의 위세를 어린 조선인 학생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사진 분석 결과, 경성 관내 보통학교 학생 3,0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토요일 데라우치 총독은 반드시 오는 25일(토요일)에 조선 학생 2,800명을 불러 만나고 다과와 국기(일장기)를 나누어 줄 것이라고 하더라 -매일신보 1912.05.24. 이 행사는 당시 신문기사로만 관련 기록이 남아있었는데, 최근 사진 자료가 발견됐습니다. 발견된 곳은 당시 행사에 참여했던 서울 광희초등학교의 교장실입니다. 발견된 사진은 총 14장입니다. 행사 과정이 동선별로 나와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일장기를 받아든 학생들이, 총독 관저 뒤쪽 ‘녹천정’이라는 건물 앞을 지나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사진 속 소나무에 붙어 있는 표지판에는 “작년 총독 부인이 양잠(누에를 치는 일)을 했던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어, 당시 시대상을 짐작게 합니다. 다음 사진은 녹천정을 지나온 학생들이, 안쪽에 있는 식물원 옆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총독 관저의 공간 배치 현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총독 관저 뒤편으로 경성 시가도 보입니다. 다음 사진은 다리를 건너가기 전 순서를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7편, 해학을 담아 노래하다 만요가수 ‘김정구와 박향림’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7편] (2022년 6월 14일 방송) 해학을 담아 노래하다 만요가수 ‘김정구와 박향림’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7:20 왕서방 연서 둘 다 원산과 인연이 깊고(김정구는 출생, 박향림은 유학), 다른 음반회사에서 데뷔했지만 오케레코드에서 전성기를 누린 해방 이전을 대표하는 가수. 00:28:47 오빠는 풍각쟁이 두 사람의 작품 영역이 그렇게 제한적이었던 것은 아니나 오늘날 만요 가수로 흔히 거론되는 것도 공통점. 대중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만요가 있었기에 두 사람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는 것도 사실 00:46:18 눈물 젖은 두만강 박향림이 스물다섯에 요절한 반면 김정구는 나름 천수를 누렸다(1916~1998). 오래 살다 보면 영욕이 교차하기 마련인데 김정구는 대표적인 원로가수로 좋은 이미지를 유지. 그 덕에 1980년에는 문화훈장 보관장(3등급)을 대중음악계에서 처음으로 수상 00:56:16 희망의 블루스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노래를 많이 발표했던 박향림. 블루스, 샹송, 재즈 등에 관심이 많아 ‘조선의 다미아’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01:05:15 수박행상 대중음악 명가의 일원으로 식민지시기를 빛낸 가수 김정구는 관련 작품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제외. 하지만 자료라는 것은 있는 것이 없어지지는 않아도 묻혀 있던 것이 새롭게 드러나는 경우가 다반사. 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사전을 다시 편찬한다면, 김정구와 박향림 역시 당연히 포함 01:15:53 봄 사건 두 사람 모두 만요에 재능이 뛰어났던 만큼, 김정구-박향림 듀엣으로 작품이 기획되었을 수도 있지만 김정구-박향림 듀엣은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음. 실제
[한겨레] “박정희 도당이라고 했지, 박○○이라 말하지 않았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6) 불길 같은 엘리야 예언자 유신 당시 반독재 운동하던 윤반웅 목사 ‘긴급조치 위반’ 법정서 권력 편 검찰 조롱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주님만이 하느님이시며 바로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버렸다.” (1열왕18, 37-38)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2열왕 2, 1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집회서 48,1) 사람은 평등하고 저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거기에 위아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와 사고의 한계로 어울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고 우열이 생깁니다. 이를 극복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의 겸허함을 고백하며 이웃과의 평등성을 되새기는 것이 지혜로운, 성숙한 인간의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써 기록되었기에 순서와 우열이 있습니다. 이때의 순서와 우열은 차등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자극받아 더 노력하라는 하느님의 교육 방법과 구원 경륜입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두 분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불의한 권력자에 맞섰고 백성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였습니다. 왕궁에서 성장한 모세는 출생 직후부터 죽을 위험에 처했지만 후일 동족 히브리 백성의 해방자가 됩니다. 모세는 구약의 가장
[오마이뉴스] 친일반민족행위자 현충원 안장, 법의 허점 노렸다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59] 국립묘지법 조건 하나라도 충족하면 안장, 개정 필요 지난 2019년 2월 말,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민중당 대전시당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최소 28명이 안장되어 있다는 내용이 담긴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를 발간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추가적으로 안장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2009)에 수록된 1005명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된 4390명을 일컫는다. 3년 반이 지난 지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현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2020년 7월 10일 사망한 백선엽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29명으로 늘어났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자들은 만주국군 상위·간도특설대 출신의 김석범(장군1-071), 일본군 중좌 출신의 백홍석(장군1-176), 만주국군 상위 출신의 송석하(장군1-093), 만주국군 상위·간도특설대 출신의 신현준(장군1-273), 만주국군과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의 백선엽(장군2-555)이 있다. 여기에 만주 간도특설대 준위 출신의 김대식, 일본군 헌병 오장 김창룡, 일본군 대위 출신의 유재흥, 이형근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모두 29명이다. 행적 숨기고 현충원에 묻히다 이중 상당수는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를숨기기 위해 공훈록과 묘비 내역에 1945년 해방 이전의 행적을 기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 행적을 공훈록과 비석에 기재한 이들도 있었다. 김동하(1941년 만주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김석범(1937년 만주 군관학교 졸업), 김일환(1937년 중국만주 군경리학교 졸업), 박동균(1943년 하얼빈 육군군의학교 제7기 졸업), 석주암(1936년 만주간도사관학교 졸업, 1939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송석하(1937년 만주국 군관 양성기관 봉천군관학교 제5기 졸업), 신현준(1937년 만주 봉천
[오마이뉴스] 소녀상 건너편 친일파 기념비… “역사바로 세우기 절실”
예산군청 앞 정낙용·정주영 부자 영세불망비·청덕선정비 버젓이… 친일청산 나서야 충남 예산군도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친일잔재 청산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헌’ 윤봉길 의사 고장에서 국민복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군복을 입은 사진을 걸어놨던 역대 읍면장은 퇴출시켰지만, 친일논란을 빚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윤 의사 표준영정은 10여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더욱이 친일정보는 제공하지 않은 채 조선총독부에 부역한 고관대작들을 칭송하는 비석들을 상징적인 공간인 군청 앞에 버젓이 세워놓은 것으로 드러나 ‘역사바로세우기’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충남도는 지난 3월 ‘충남도 친일잔재 기초조사 연구용역’을 마무리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해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45년 8월 해방 전후까지 ▲친일반민족행위 명단, 친일인명사전 등재 친일인물 ▲친일재산(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국가귀속결정 토지) ▲친일인물 관련 기념물·건축물(기념비(탑), 송덕비, 노래비 등) 등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자료에 따르면 친일인물은 출생자 115명과 출신자(본적자 포함) 88명 등 모두 203명이다. 이들 가운데 10여명의 도내 국가귀속결정 친일재산은 262필지 78만9612㎡(23만9276평)에 달한다. 공시지가로도 41억6411만5000원 규모다. 옛 신문기사와 시군향토지 등을 통해 추출한 친일인물 관련 기념물·건축물은 65건이다. 잔존은 56건, 9건은 멸(망)실됐다. 예산지역은 어떨까? 친일인물은 12명이 이름을 올렸다. 구체적으로(가나다순, 괄호안 창씨명, 친일직업) ▲김원선(군수) ▲김유제(경학원 사성) ▲방인근(方山春海, 소설가·시인) ▲이만준(牧山萬濬, 판사) ▲이영택(松本仲司, 군수) ▲이원창(駒城秀康, 군수) ▲이윤영(月城榮一, 군수) ▲이종덕(江本鍾悳, 중추원 참의) ▲임숙재(豊川淑宰,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정낙용(남작) ▲정두화(남작) ▲정주영(남작)이다. 국가귀속결정 친일재산은 ▲이종덕-1필지 7584㎡(공주·아산시) ▲정두화-10필지 1만5093㎡(공주시, 대술·신양면) ▲정주영-7필지 5만6906㎡(서천군, 신양면) 3명의 전답·임야·도로 등 18필지 7만9583㎡(2만4116평)에 이른다. 작위,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