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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한겨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민관협의체 다음달 4일 출범

2022년 6월 30일 419

외교부 차관 주재, 학자·전문가 참여…7월4일 첫 회의 피해자 지원단체 출석 요청…관련 정보 사전 제공 안해 대위변제가 해법?…대화 거부 일본 쪽 태도 변화가 관건 피해자 지원단체 “대법원 판결 정신 훼손 말아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한 민관 협의체가 다음달 4일 출범한다.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한 선제 행보인데, 일본 쪽의 상응조처가 나올 것인 지가 관건이다. 29일 외교 소식통의 말을 종합하면, 외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차관이 주재하고 학계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다음달 4일 첫 회의를 열기로 했다. 애초 외교부 쪽은 이달 안에 협력기구 출범을 추진했지만, 참여자 인선 작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시기가 늦춰진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단기간에 집중적인 토론을 거쳐 해법을 마련하기로 하고, 협의체 내부 논의 과정에서 피해자 및 지원단체와도 적극 소통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외교부 쪽은 협의체 출범 첫 회의에 피해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의 출석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협의체의 성격과 활동 방향, 참여자 등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당사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협의체 출범 이전부터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의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고 추후 일본 쪽에 청구하는 이른바 ‘대위변제’가 유력한 해법으로 떠오른 것도 피해자 쪽의 거부감을 부르고 있다. 한-일 양국 기업 또는 기업과 시민사회의

[오마이뉴스] 단군 팔아넘기고 충남 제1의 재벌이 된 사람

2022년 7월 4일 565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갑순 충남 공주에 김갑순(1872~1960)이라는 갑부가 있었다. 어느 정도 갑부였는지는, 죽은 뒤에 상속세가 납부되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사망 2년 뒤에 발행된 1962년 10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 ‘황무지의 수확, 유산 4억 원’에 따르면, 사망 당시 자손들에게 부과된 상속세는 2400만 원이었다. 상속인들은 이만한 돈을 만들 길이 없어 현물 납부를 선택했다. 이때 상속인들이 납부하게 된 현물 내역을 살펴보면, 1960년 당시의 2400만 원이 어느 정도 거액이었는지를 추산할 수 있다. 위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상속세로서 현금 대신 제공할 현물만도 대지 7천 평, 밭 2천 7백 평, 논 1천 3백 평, 임야 1백 82만 6천 평과, 서울·대전 지방에 있는 주택 7백 21동이라고 한다.” 김갑순의 변신 김갑순은 청년 시절만 해도 형편이 어려웠다. 위 기사는 “어렸을 때 가세가 곤란하여 그의 모친은 공주장터에서 해장국 장사를 했었다 한다”고 전한다. 돈이 없어 나이 20이 넘도록 결혼을 못했으며, 큰돈을 벌고 싶은 욕망에 노름판에도 기웃거렸다고 한다. 그랬던 사람이 대전과 서울 등지에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는 갑부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가 대한제국 때 군수급을 지내며 부정 축재한 것들이 재산 축적의 밑바탕이 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 있다. 지금의 충남도청인 공주감영에서 사환으로 근무할 때 묘령의 여성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출발점이 됐다. 공주감영이 도박 범죄자 체포 작전을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1_커피세계사 가베 한국사_커피와 아주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년 7월 14일 610

☞ (06.28) ‘역발상’ 시즌 1: 커피세계사 가베 한국사_커피와 아주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우리 시각에서 새롭게 쓴 커피의 역사 출연:이길상(커피 세계사 가베한국사의 저자) 저자_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10년 전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 준비를 시작하며 커피 역사 공부에 빠져들었다. 최근 한국커피협회 학술지 《한국커피문화연구》의 편집위원을 맡았고, 이 학술지에 〈우리나라 커피 역사의 기원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주요 이야기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 -링컨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배경에는 커피가 있다 -조선과 링컨을 연결짓게 한 놀라운 커피이야기 우리나라는 2018년 기준 커피 수입량이 세계 6위였다. 성인 1인당 연간 약 353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나 세계 1인당 커피 소비량 132잔의 3배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히 ‘커피공화국’ ‘커피 대국’이라 할 만하다. 교육학자에서 커피 인문학자로 변신 중이라 자처하는 지은이가 쓴 이 책은 여느 커피사 책과 다르다. 기원, 제법 등 커피 자체뿐 아니라 커피문화를 짚어낸 점이 그렇고, 무엇보다 최초 음용자에서 커피농장까지 한국의 커피사를 한눈에 정리했다 ※지난 방송 ☞ (06.21) ‘역발상’ 시즌 1: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과 신불출_식민지시대 사람들 12편 ☞ (06.14) ‘역발상’ 시즌 1: 해학을 담아 노래하다 만요가수 김정구와 박향림_식민지시대 사람들 11편 ☞ (06.07) ‘역발상’ 시즌 1: 조선재즈의 왕은 누구? 김해송과 손목인_식민지시대 사람들 10편 ☞ (06.02) ‘역발상’ 시즌 1: 월간특집 <25共感> 역발상이 추천하는 방구석 영화 2탄 “걸캅스” ☞

민족사랑 2022년 06월호

2022년 6월 24일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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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제동원 배상 민관협력기구 출범 채비…피해자단체 미포함

2022년 6월 21일 823

시민사회 “일본 상응조처 없는 양보는 안돼” 정부가 한-일 관계 교착의 원인이 된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해 민관 협력기구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일본 쪽의 상응조처 없는 일방적 양보로 흘러선 안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외교 소식통의 말을 종합하면, 외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학계 등이 참여하는 참여하는 민관 협력기구를 구성해 조만간 운영하기로 했다. 협력기구는 이달 안에 구성되며, 단기간에 집중적인 토론을 거쳐 해법을 마련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협력기구 내부 논의 과정에서 피해자 단체와도 적극 소통한다는 방침이지만, 협력기구에 직접 참여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외교부 당국자는 최근 서울과 광주에서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리인단 등과 접촉했지만, 협력기구 구성과 관련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 찾기에 나선 것은 일본 쪽이 한-일 관계 개선의 전제로 이 문제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피해자 배상 판결 뒤 일본 정부는 “징용공(강제동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 한국 대법원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관련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를 위한 매각명령 관련 대법원 판결이 임박한 것도 정부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로 꼽힌다. 피해자 지원단체 등 시민사회에선 “어떤 형태로든 대응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지만 “일본의 태도 변화와 상응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

[B tv 서울뉴스] “독립·민주·통일 정신”…의암 손병희 순국 100주기 특별전

2022년 6월 21일 671

[기사내용] 박종화 앵커) 의암 손병희 선생을 아십니까. 민족대표 33인과 3.1운동을 주도했고 민족의 독립과 한반도 전체의 민주공화국을 꿈꾸며 헌신한 인물입니다. 올해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순국 100주기를 맞아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서주헌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봉황각.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 당시 천도교의 교조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지은 수련 시설입니다. 건립 목적은 단순히 종교 생활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며 이 건물을 짓고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할 천도교 지도자들을 키웠습니다. 3년간 7차례에 걸쳐 교육을 받은 인원은 총 483명. 이들은 1919년 전국에서 3.1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그 가운데는 민족대표 33인 중 15명도 있었습니다. [박충남ㅣ천도교 의창수도원장 (지난해 3월)] “우리나라의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 아니라 33인을 총 영도했던 영도자가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이시다.” 민족의 지도자이자 사상가였고 혁명가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 그가 순국한지 올해로 100주기를 맞습니다. 강북구에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에서는 선생의 가치를 돌아보고 다시 되새기기 위한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암 손병희 선생이 남긴 가치는 3가지로 압축됩니다. 자주 국가의 기틀을 다진 독립과 그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 그리고 하나가 돼야 할 한반도의 통일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선생의 유품과 희귀 사진들을 통해 그 내용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장원석ㅣ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 “독립을 되찾은 나라가 둘로 나눠질 거라고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보도자료] 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

2022년 6월 21일 1592

[보도자료] [다운로드] 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 임진왜란 때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를 기려 이름을 붙인 일제시기 다리 ‘코바야카와교’의 교명주(橋名柱 : 다리 이름을 새긴 돌기둥)가 용산 한강로 대로변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코바야카와는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무장으로 임란 때 벽제관에서 명군(明軍)을 대파하는 등 명성을 얻었으나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배했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혀졌던 이 돌기둥은 전쟁기념관 북문의 길 건너편 지금은 폐쇄된 캠프 킴(Camp Kim) 구역의 동남쪽 모서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코바야카와교’는 일제강점기 용산 주둔 일본군 병영지 외곽에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인 오카다 코(岡田貢)가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남긴 자료에 의하면 이번에 발견된 돌기둥이 1926년 11월에 기존의 다리를 석교(石橋)로 개조하면서 조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이 다리 외에도 지금의 전쟁기념관 구역 북쪽을 따라 흐르는 소하천에도 ‘코바야카와(小早川)’라는 이름을 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관련 기록과 함께 이를 입증하는 사진자료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전2권)을 펴낸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출간 기념 용산 답사’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이 돌기둥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는 이태원 쪽에서 발원하여 미군기지 안쪽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한강로와 만나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옛 둔지미와 이태원리 일대를 강제점유한 일본군은 용산병영지 곳곳에 일본의 언어 관행을 좇아 융경산(隆景山, 류케이잔)이라거나 사방견산(四方見山, 시호미야마), 선견산(船見山, 후나미야마), 월견대(月見台, 츠키미다이), 용대(勇台, 유다이), 하강(霞ケ岡, 카스미가오카),

[한겨레] 6월 명동성당에 1만명 청년이 몰려들었다

2022년 7월 4일 472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8) 6월 민주항쟁 호헌철폐 외치다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수도자들 5박6일간 시민 지키며 정권과 대화 결국 대통령직선제 개헌 6·29선언 이끌어내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마태오 7,7-8)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가 18,4-5) 초지일관이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신념을 지켜야 하며 끝까지 항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오10,22)라는 말씀과 상통합니다. 성경은 개인의 완성과 구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선익과 해방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삶이 그 예범이며, 불의한 정권과 독재자들에 맞서 싸운 열사들과 익명의 청년·학생·시민이 바로 선구적 실천자입니다. 1987년은 불의한 국가 권력의 탄압 속에 매일같이 이어진 구속 사태로 인하여 모두가 숨죽인 채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임계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포악한 군사정권, 무자비한 고문 정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가 권력은 물론 군사집단과 공공행정도 정의에 기초하지 않으면 결국 강도 집단에 불과하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 IV, 4』 말씀을 되새깁니다. 불변의 진리는 빛이 닿으면 어둠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속성은 거짓이고, 거짓을 퇴치하는 것은 오직

[서울신문] 파비안 살비올리 UN 특별 보고관, 강제동원 피해 유족도 만났다

2022년 6월 20일 655

피해자 측 “일본 기업 배상 책임 이행해야” 내년 9월 유엔 보고서에 포함될까..“국제적 연대” 파비안 살비올리 유엔 인권이사회 진실·정의·배상·재발 방지 특별 보고관이 지난 10일 서울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 일본 기업의 피해자 배상 재판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했다. 이번 만남에 따라 내년 9월로 예정된 유엔 인권이사회의 보고서에서 강제동원 문제가 다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유엔 특별보고관이 공식 방문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20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살비올리 보고관은 방한 일정 두번째 날인 지난 10일 서울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와 박남순씨를 만났다. 이 대표의 부친은 1944년 징용돼 중국에서 전사했다. 당시 생후 13개월이었던 그는 부친의 생사를 모른 채 기다리다 1992년에야 사망기록을 확인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2001년엔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 합사 철폐소송을 제소했다. 박씨의 부친 역시 1942년 일본 해군에 동원돼 남양군도 브라운 섬에서 사망했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한국 대법원이 지난 2018년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신일본제철의 배상 책임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이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규탄했다. 또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어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이행을 둘러싸고 일본 정부와 해결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의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비올리 보고관은 대법원 판결의 내용에

[오마이뉴스] 교육자 맞나요? 상명대 설립자의 부끄러운 과거

2022년 6월 29일 1735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배상명 친일파들 중에는 해방 뒤에 일본인과의 연고를 활용해 적산(귀속재산, 일본인 재산)을 차지한 사람들이 많았다. 언뜻 보면 이들과 같은 부류인 듯하지만, 결이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적산을 확보한 친일파가 있다. 재단법인 상명학원을 설립하고 상명여자사범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배상명이 그 주인공이다. 배상명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6년 5월 17일 출생했다. 국권 침탈 4년 전인 이때, 평양 서남쪽의 대동강 주변인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인 1923년 경성(서울) 동덕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부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24년 4월, 경성 삼선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교사로 일하다가 유학을 떠난 그는 중일전쟁 2개월 전인 1937년 5월 도쿄고등기예학교 사범학교를 졸업한다. 이때부터 교육 행정가의 면모를 띠게 된다. 그해 11월 상명여자사범대학교의 모체가 될 상명고등기예학원을 설립하고 학원장에 취임했다. 1940년에는 이 학교를 상명실천여학교로 변경하고 교장을 맡았다. 1940년에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교육행정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가 세운 학교도 아직 초보 단계일 때였다. 그래서 학교 운영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을 이 시기에 그는 다른 데로도 눈을 돌린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응원하는 일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친일파 교육자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 따르면, 배상명이 친일행위로 두각을 보인 것은 교장 직함을 갖게 된 1940년부터였다. 이때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글을 써서 전쟁 협력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가담했다. 이 해 12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쓴 글의 제목은 ‘저금은 국가 위한 것, 채권